특집 | 한국 불교학의 현재와 미래

-학문의 토대와 과정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의 배경

이 글은 우리나라에서 불교학 연구자가 되어가는 실제 과정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불교학을 어떻게 수행(遂行)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연구자들의 개별적인 관심사로서, 혹은 조직 차원에서 기획한 주제로 그동안 종종 논문이 발표됐다. 본지 《불교평론》에도 20여 년 전의 창간호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여러 편의 관련 글이 실렸고, 이번에는 특집으로 기획이 된 주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직 · 간접으로 다루어진 어떤 발표보다도, 필자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도 종합적인 논의는 1976년에 동국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개최되었던 ‘불교와 현대세계’라는 제하의 국제학술대회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국내외 50여 명의 불교학자가 대거 참여한 발제들은 다음과 같다.1)

 

특별강연: 佛敎와 民主主義

第1分科 現代 國際社會의 理念的 混沌 속에서의 佛敎의 位置

① 東南아시아의 政治的 思想的 混沌 속에서의 佛敎의 位置 ② 共産主義의 挑戰에 直面한 佛敎 ③ 慈悲와 暴力 ④ 西方世界에서의 佛敎붐, 그 現實과 意味 ⑤ 宗敎間의 對立과 佛敎의 寬容

第2分科 現代人을 爲한 生活理想으로서의 佛敎

① 平和와 協調의 原理로서의 佛敎 ② 現代의 經濟生活에 對한 佛敎의 倫理的 見解 ③ 現代에 있어서의 官龍主義的 社會風潮와 佛敎 ④ 現代人의 精神的 危機와 禪 ⑤ 佛敎의 敎育理想

第3分科 佛敎는 現代時代에 어떻게 適應할 것인가

① 現代生活에 있어서의 大乘菩薩의 理想 ② 産業文明社會의 僧伽의 役割 ③ 寺院에 있어서의 勞動과 生産性에 關한 問題 ④ 現代生活에 있어서의 出家者의 戒律에 關한 問題 ⑤ 布敎의 現代化에 關한 問題

 

그 대회에서 강조된 주제들을 4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굳이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마침 그때 필자는 법학도에서 불교학도로 전과(轉科)하여 첫 학기를 마쳤는데, 계속해서 불교학도로 살고 싶은 개인적 결단에 한층 더 고무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불교 공부를 잘해 나가면, 우리나라 안팎의 긴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적절 · 타당한 답을 제시할 수가 있고, 앞장서 실행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나 홀로 판단이었지만 불교 공부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은근히 자부했고, 세상사의 다양한 쟁점들에 관련해서 불교적인 해석과 실질적인 대응방안을 제시할 것 같은 불교학자들이 고차원에서 유능한 집단으로 여겨졌다.

솔직히 말하면, 1976년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 각각의 불교적 정합(整合) 정도나 학문적 심도(深度)는 학부생인 필자에게는 아직 관심 밖의 문제였다. 포스터에 예고된 목차만으로도 불교학 자체에 대한 경의(敬意)와 기대감이 늘어났다. 불교를 그저 고루한 전통문화쯤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의 ‘천박한 근대화’ 분위기에 저항하는 동맹군으로서, ‘나도 불교학계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탄탄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해당 학술대회는 불교학자들 중 소수가 사전기획에 참여하면서 발표 주제들을 선정 · 안배하였을 것이고, 발표에 참가한 불교학자의 입장에서는 개교기념 학술대회 진행상 맡겨진 일회성 과제를 수행한 것이었을 수 있다.

사실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불교학은 모쪼록 불교가 현실사회에서 유능하고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심재룡은 한국 불교학의 발전단계를 설명하는 글 가운데서, “1976년 국제학술대회는 한국의 학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전의 학술대회와는 달리 15개의 불교학 영역을 포괄하여 세 분야로 나눠서 진행했다. 기존 한국 불교학의 역사적이고 종파적 해석이 중심이던 접근방식을 넘어서, 세계화 및 여러 학문분과를 아우르는 방식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불교학으로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거의 반세기 전부터 이미 한국 불교학이 수행해야 할 다양한 분야와 연구과제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던 셈인데, 소위 1980년대 이후로 다학제적(多學際的) · 다문화적 접근방식이라는 새로운 불교학이 과연 그 기대와 평판에 부응하는 성과를 실제로 이루어왔는가. 한국불교학의 성과에 대한 정밀분석은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므로 차치하더라도, 지금껏 한국 불교학은 충분히 바른 궤도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계속해서 발표되어 왔을 터이다.

그중에 필자 역시 불교학의 노정(路程)에 이견(異見)을 가지고 비판적인 글을 발표한 바 있었고, 아직도 한국 불교학이 부실하다고 판단한다. 감히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다음 장에서 설명하려는데, 학문의 토대인 연구 여건이 분절(分節)되고 취약하다는 현실 문제와 기본적 학업의 이수과정에서 교과목들의 분과(分科) 문제가 그것이다.

불교를 학문하는 토대의 분절성

우선, 누가 어떻게 해서 불교학 연구자가 되어가는지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불교학 전공을 택하는지, 어떤 여건에서 계속 불교 연구를 하게 되는지, 제삼자로서는 그런 사정들을 정확히 파악할 방법은 없다. 더 새삼스러운 질문이지만, 애초에 불교학자 · 불교 연구자라고 칭명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불교 학술회에 가입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대개 ‘석사학위 이상인 자’를 규정에 두는데, 석사이며 불교 학술회 회원이면 불교학자인가. 혹은 대학에서 불교 관련 교과를 가르치는 교원이나, 불교 관련 박사학위 소지자나, 박사학위는 불교 관련이 아니지만 불교 관계로 연구발표를 하면 불교학자인가. 구체적으로 이래저래 따져보면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는 것이 불교학자 · 불교 연구자라는 용어 개념이다.

불교를 학문하려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조건이나 자질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조적 여건도 한국불교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비록 20년 묵은 자료이나 김종명의 연구를 인용하자면, “기독교계 대학의 숫자에 비해서 불교계 대학의 숫자는 5~6% 정도에 불과하고, 자연히 불교학 전공 교수의 숫자도 훨씬 적다. 전국의 250여 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데, 그 내용은 서양철학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그나마 동양철학 중에서도 유학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불교철학은 극히 적다. 일반대학에 불교 과목이 개설된 곳은 더더욱 희귀하고, 불교학 관련으로 박사를 배출한 학교는 불교종립대학을 망라하여 총 16개교에 불과하다. 혹자는 1980년대 이후의 한국 불교학이 다학문적 접근을 하는 것으로 진단하였지만, 100여 명에 불과한 불교학자들이 새롭게 여러 학제간의 연구를 완수하기에는 버거운 형편이다.”고 평가했다.

한국 불교학이 전환적으로 성장하도록 기대를 모았던 1980년대 이래 지금까지 한국 불교학의 외연(外緣)은 크게 성숙되지 않았다. 수치상으로야 불교종립대학 · 학위 소지자 · 학회 등이 조금 늘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일찍이 허남진은 서양철학이 압도하는 한국 철학계 안에서 동양철학의 위상과 역량을 분석하며, “세계는 이미 동양철학만 공부해서는 철학한다고 말할 수 없게 변해버렸고, 동양철학을 하는 자신들끼리만 통하고 문외한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동양철학은 우리 시대의 철학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비슷한 관점에서 필자는, 아무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하더라도, 연구 관계자들끼리만 알고 문외한을 이해시킬 수 없는 불교학은 진정한 불교학이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한국 불교학이 불교계 · 불교학계에서 연명(延命)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더 널리 이해되고 소통될 수 있을 때, 한국 불교학의 외연이 성장하는 것이다.

이제 현실적인 입장으로 불교를 학문하는 데 필요한 사회구조적 토대를 자세히 점검해보자. 우선, 불교종립대학이 아닌 일반대학의 경우에 여차여차해서 불교학을 접하고 더욱 발심하여 박사학위를 마친 예비학자의 환경조건에서 그의 토대가 불교학을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어쩌면 일반대학 소속학과 안에서도 소수자가 되어 독학생처럼 공부할 가능성이 있는 불교학 전공자는 연구주제의 확장이나 학문적 소통 등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아래 질문은 필자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학문하는 데서 전제되어야 할 중요한 조건들이며 토대라고 생각한다. 여러 각도의 질문에서 그 대답이 모호하거나 부정적일 경우, 해당 응답자가 자신의 전공인 불교학을 원만하게 잘 수행해갈 가능성은 그만큼 낮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학위과정에서 그의 학업을 지도한 교수는 불교학 전공자였는가? 해당 대학에서 학위를 얻기까지 총 몇 개의 불교 과목을 이수했는가? 불교로써 소통하기에 자신감은 어떠한가?

둘째로, 소속한 대학 외부의 어떤 기관에서라도 불교를 추가로 학습한 경험이 있었는가? 그런 학업이 연구 토대로서 탄탄해져야 불교를 심층적으로 학문해갈 추진력이 생기지 않겠는가.

셋째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고 나면, 계속적인 연구의 필요성은 물론이고 교수-학습의 교육적 상호작용에도 기대가 생길 텐데, 자신이 전공한 불교학을 강의할 가능성은 얼마나 있는가? 해당 대학에서 자신의 지도교수가 퇴임하기 전에 불교 강좌를 개설할 가능성도 있는가?

넷째로, 일반대학에서 드물게 배출된 불교 관련 박사로서 자신의 불교연구를 심화시켜갈 복안(腹案)은 무엇인가? 학회 등 불교연구 집단 안에서 학문적 상호작용에의 참여도는 어떠한가? 연구자로서 자신에게 사회적 · 학술적 지지체계가 얼마나 갖춰져 있다고 생각하는가?

불교를 학문하는 일이 마치 불교를 신행하는 것처럼, 무조건 가능해질(가능해야 할) 것으로 기대하는 불교학자도 있을까? 무조건의 학문은 불가능하다. 또한, 자신의 공부를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연구성과를 발표하거나 제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연구체계 안에서 학문적 교류나 상호점검의 과정도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온전하지가 않다. 당대 연구자들의 연구성과가 대학과 같은 전문교육체계에 끊임없이 환입[feedback]됨으로써 해당 분야에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 수 있을 때만 그 학문이 정체하지 않고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특히 소수자인 불교학 분야에서는 이 같은 지식 순환체계의 여러 측면에서 정체(停滯) · 중단(中斷) · 미완(未完)의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점을 불교학자로서의 연구 맥락이 ‘분절’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누구도 홀로 상아탑에 안주할 수 없으며 누구나 사회적 힘의 네트워크 즉 연기(緣起)의 그물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특히 불교학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학술적 · 사회적으로 상호연(相互緣)하는 관계에 대한 통찰과 효과적인 소통의 역량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불교를 학문하는 과정의 분과성

앞 장은 일반대학에서 흔히 소수자인 불교 전공자가 직면할 환경적 곤란을 추정하였고, 이 장에서는 주로 불교종립대학에서 불교를 전공하는 내부과정의 문제점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 글의 시작에서도 말했듯이, 1970년대에 필자는 불교학의 출발선에서 순진한 기대와 의욕이 충만하였고, 불교학자가 되고자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업의 과정을 밟기 시작하였다. 불교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하여 타 대학교에 가서 사회복지학을 추가로 전공하였다. 그렇게 해서 불교와 사회복지 관련으로 박사학위를 얻었지만, 당시 불교학계에서 그 위상이 모호하던 ‘불교사회복지학’이라는 분야의 연구 타당성을 스스로 보증(?)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갔다. 캔자스(Kansas)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내며, 복지[well-being]와 종교 · 문화전통이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지를 재확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2종의 석사와 1종의 박사학위와 1종의 박사과정을 더 수료하는 과정에서도 노력하는 만큼의 학문적 자신감이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까지 주로 학습해왔던 대학의 불교학 체계에는 교학과 사학이 각살림을 차리고 있었을 뿐, 예컨대 불교사회복지와 같은 ‘응용’ 주제라는 것들이 계속 연구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런 방면에서 연구할 거리들을 더불어 공부할 자리가 없었고, 누구든지 학문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연구자들끼리의 교류나 ‘교수-학습’의 상호작용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간혹 논문을 어느 학술지에 기고(寄稿)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날 뿐, 관심을 가져서 읽고 학문적으로 서로 비평 · 탁마(琢磨)하는 연구 도반(道伴)들이 없었으므로, 지식의 축적은커녕 아예 쓸모도 없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상황이야말로 앞 장에서 필자가 규정한 바와 같은 연구 맥락의 분절이고 전공체계의 파행적 분과 문제로서 학문적 자존감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한국 불교학의 체계는 왜 무엇 때문에 그 모양으로 각각 독살이의 틀을 갖고 있는가. 서두에 소개했듯이 이미 1970년대에도 불교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교육 등을 아우르는(아울러야 한다는) 불교학의 새로운 기치(旗幟)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기치를 들었던 학자들이 구성하고 이끌던 불교 학문체계는 여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한국 불교학이 일본식 근대 불교학의 영향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여러 학자가 지적해온 바이다. 특히 김용태는, 제국주의 일본의 근대 불교학은 “서구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을 받아들여 불교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서구의 불교학과 마찬가지로 불교 전통의 맥락을 벗어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정체성이 추구되었고, 불교 세계를 타자화하여 학문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고, 현지의 역사적 맥락과 살아 있는 내재적 전통은 간과되었다.”7)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근대 불교학은 불교가 원전 텍스트에만 있는 것처럼 문헌 자료의 고증과 객관적 해석에 치중하여 현실의 시공간적 특수성이 탈락되는 학문체계를 한국불교에 남겼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국 불교학의 특징이 ‘종학에 치우친 불(교)학’이라거나 ‘학문적 사대성이 있고 사회 쟁점 분석에 관심이 없다’고 비판되기도 했다.

그와 같은 불교학의 체질 개선을 위한 충정으로 필자도 교과목에 대한 비평과 제안을 《불교평론》 제5호와 제37호에 절실하게 토로한 적도 있다. 그 글들은 사실상 별로 새로운 주장이 아니었고, 1976년 국제학술대회 이후로 여러 학자가 수시로 지적하고 강조해오던 다학제 · 소통 · 적응의 불교학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불교교의의 이해와 전달에 관련하여, 우리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반영하는 교과들을 개설하라. 급변하는 세상의 지식 수요와 학습자 욕구를 무시한 채, 교수자 본위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학습자에게 강요하지 말고 소비자주의 불교학에 적합한 교과를 만들어라. 이론의 불교학이나 과거 경험들을 채집한 보존용 불교학이 아니라, 불교 현장을 연계하여 지금 살아서 움직이는 불교연구가 되게 하라.

지금 한국 불교학의 한 분야로 통하는 ‘응용불교학’이란 1990년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 공식 도입한 용어이다. 그 이전에는 한국불교 · 인도불교 · 중국불교 등 지역 중심으로 전공을 나누거나 불교사학 · 불교교학으로 나누던 것이었는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제의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모두 응용불교학의 범주에 싸잡아 넣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응용불교(applied buddhism)’라는 개념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치 자연과학계에서 순수이론 분과가 있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응용(applied) · 실험하는(experimental) 분과가 있는 것처럼, 순수불교가 있고 그것을 응용하는 불교학이 따로 있는 듯이 경계선을 긋고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학의 연구대상의 특성을 구분하여 굳이 나누자면, 기존의 고전적인 불교교학과 불교사학은 경전 독해와 사료(史料) 고증을 포괄하는 문헌해석학이 되겠고, 응용불교학은 현실의 불교원리를 해석하는 세간해석학이 될 것이다. 시간적 · 공간적 조건에 수반되는 정치 · 경제 · 사회 등의 세간에 관한 해석학은 불교를 선택적으로 적용하거나 실험하는 의미에서와 같은 응용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세간에서 연기(緣起)하는 불교 원리를 직접 통찰 · 해석 · 조응(照應)하는 법을 탐구하기 때문에, 문헌해석이 아닌 세간해석이야말로 불교학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불교종립대학의 교과와 전공과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오늘의 한국불교학을 점검하는 데 학부과정의 교과목이 왜, 어떻게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당연히, 결정적으로 상관이 있는 문제이다. 불교학부 전공생(혹은 타 전공생)이 청강하는 불교 교과목들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그들 중 누군가는 불교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관심을 확대해 갈 가능성이 생긴다. 어찌 되었든지 불교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장차 불교를 연구해보려는 누군가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 중 아무도 불교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면 불교학 전공생은 줄어들 것이고, 전공생이 줄어들면, 불교의 연구와 교육이 상호보완적으로 순환되는 불교학 체계 자체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불교학 교과-불교 학부생-불교학자[교수자] 사이의 연쇄적 상호작용은 실제이다. 동국대학교에는 ‘불교대학 발전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다(지금도 있을 것 같다). 2005년경(?) 불교대학 지원자가 줄고 있다는 현실적인 걱정과 함께, 동문들을 대상으로 불교대학 발전을 위한 설문조사도 했다고 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응용불교학의 필요성이 재확인되었다 하고, 결과적으로 2007년 불교대학에 사회복지 전공을 신설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불교대학 동문이고 사회복지 전공자이고 불교 연구자인 필자로서는 매우 서글프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지금 여기에 옮겨 적는데도 새삼 울분이 생기는 그때 그 결정은, 불교대학에서 기존의 전공(불교학 · 인도철학 · 선학)을 한 가지 이수하는 조건으로만 사회복지 전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필자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졸업과 동시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얻게 되는 사회복지학을 미끼로 불교 학부생을 붙잡으려 한 것이었고 그렇게 불교학을 팔아먹는 행위였다.

더 고약한 일은, 그렇게 해서 생긴 불교대학 사회복지 전공이 2013년에 사회복지학과로 독립되었고 2014년에 불교사회복지학과로 개칭했다가, 다시 사회복지학과가 되어서 현재는 사회과학부 소속으로 나가버린 상태다. 현재 사회복지학과 홈페이지(https://welfare.dongguk.edu)에 들어가 보면, ‘2007년 개설’만 적혀 있고 불교대학에서 설립된 배경이나 학과 명칭의 변경 이력 등은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 불교종립대학에서 불교를 인연으로 생겨난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1980년대 말 동국대학교 경주분교 불교대학에 사회복지학과가 신설되고 나서도 겪었던 일이다.

차제에 불교종립대학에서 교육과정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모든 관계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마치 기회주의자들처럼 어떤 미끼를 두고 불교학을 거래하지 말고 그 대신에 학생들 누구라도 불교 과목을 듣고 싶어지도록, 더 나아가서 불교학을 전공하고 싶어지도록 성심과 지혜를 모아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굳이 모교의 불교학에 숨은 이야기를 이런 지면에까지 옮기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불교는 본래 불교가 가진 무궁한 저력으로 당당히 경쟁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불교학 교수자/연구자들이 말이나 글을 매개로 하는 불교 전달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역량을 충분히 가져야만 한다. 세상이 변화하고 교육생태계가 변화하고, 그 가운데 청년 학부생들이 변화한다는 것은 불교적으로도 이미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에, 불교는 그 세간의 인연법에 맞춰서 해석되고 전달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어느 신학대에서 종교 관련 과목 중 불교를 가르치던 신재식이 자신의 ‘종교 전달하기’에 대해서 성찰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인즉, 그의 불교수업을 듣던 학부생 25명에게 삼법인(三法印) · 팔정도(八正道) 등의 한자어를 설명하는데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대학원생 60명 중에서는 단 5명만이 한자가 편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 속에서 교수는 변함없이 자신만의 언어와 사고의 습관대로, 2000년이 지난 기독교 경전을 아이젠 세대(iGen, 스마트폰 세대)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그의 글을 읽으니 필자가 수업하던 교실의 불교학 전공생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고, 요즘 불교 과목을 듣는 학생들의 사정은 어떠한지가 궁금해졌다. 불교학 전공의 학부생이든 대학원생이든, 그들이 고전적인 한자어 교과목과 텍스트들을 대할 때, 과연 타 전공생들보다 수월한 편인가. 불교학 교수자들은 아이젠 세대 수강생들의 이러한 뒷사정을 적극적으로 헤아려서 반영해주고 있는가.

일찍이 안옥선은 불교학의 실용성을 설명하면서, 본래 불교가 가진 실용성 때문에 더더욱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불교가 말해지고 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오늘 여기에서의 보편언어로, 특히 불교인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불교적 해석 · 평가 · 해법 등을 제시할 때는 더 많은 치밀함과 신중함이 요청된다. 일반인의 사고방식 · 삶의 양식 · 가치관 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청되며, 이를 반영하는 그들의 언어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한 탈(脫)불교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이해도와 설득력을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록 대학의 불교학 전공생이라고 해도 이미 불교인으로 단정하면 안 되고, 불교학을 전공하므로 누구보다 쉽게 불교를 이해할 것으로 속단해도 안 될 것임을 재확인한다.

김원명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불교학은 “입말, 어머니의 말로 학문할 수 있어야 한다. 중생의 삶이 배어 있는 입말에 바탕한 학문이 되어야 중생의 고통스러운 현실 삶의 문제로부터 자유를 찾아주는 학문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혹자는 그간 불교학계에서 발표된 글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 많다고도 비판하였다.

필자의 학부 시절에도, 자신의 전공과목을 본인도 소화하지 못한 듯한 어느 교수님의 강의를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학기 내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현재 불교 학부생들이 각자 불교 과목을 수강하는 경험이 어떠한가, 그중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할 학생은 얼마나 되는가. 필경 한국 불교학의 변수가 될 것이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종립대학 불교 전공 교과의 검토

20년 전에 검토했던 동국대 불교대학 교과를 이번에 다시 살펴보니, 학부에서부터 아예 교학불교와 응용불교라는 영역을 구분하여 그 아래 ‘트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후속 · 포교활동 · 종무행정 · 명상심리 · 요가지도’로 나누고, 학생들이 전공계통을 따라 수강하도록 안내한다. “이러한 교학과 응용이 각각 별개의 독립적인 분야로서 연구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의존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연구되어 이론과 실천 그리고 교학과 응용을 겸비하는 종합적인 학문을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목표가 실제 과정에서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을 것인가. 필자 소견으로는, 교과목들이 잡화상처럼 개설되어 있을 뿐, 교학과 응용이 상호보완적일 것이라는 단서를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다. 대학원 교과목의 종류가 매우 화려해졌으나, 여전히 ‘~ 연구’ ‘~특강’이라는 형식의 포장 속에 내용 동일성을 감추고 있기도 하다.

〈동국대 불교대학 교과목〉

공통과목  [불교학부] 불교학입문, 인도의 철학과 문화, 선의 이해, 불교 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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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불교학과 석 · 박사 교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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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http://www.dongguk.edu

필자가 결코 일본 불교학을 불교학의 전형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나, 과거 동국대와 자매결연이 있었던 일본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 2020년도 교과들을 찾아보았다. 불교학과에 불교학 · 종학 · 국제교양의 세 코스를 개설하였는데, 불교학 코스의 교과목은 아래 표와 같다. 기초공통 교양과목으로 영어 · 문장표현 등을 제외하고, 불교 관련은 총 40종 과목이며 세미나와 미술문화교양 · 어학의 비중이 매우 높다. 특기할 점은, 불교학과 안에 ‘국제교양 코스’를 개설하여 1년 차는 불교 기초지식을 영어로 소통할 능력을 익히고, 2년 차는 국제적인 시각으로 일본문화와 불교를 분석한 자기 생각을 영어로 발표할 수 있고, 3년 차는 학습한 일본문화와 불교에 관해서 영어로 발표할 수 있고, 4년 차는 일본문화와 불교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게 한다는 교과과정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4년 내내 여러 가지 영어수업을 이수하고, 불교 현장학습 · 프로젝트 수업을 3~4년 이수하게 되어 있다.

 

〈다이쇼대학 불교학과 교과목〉

[기초부문] 기초세미나(Ⅰ~Ⅳ) · 기초불교학(초기불교 · 대승불교 · 동아시아불교 · 일본불교) [어학계] 불교한문(Ⅰ·Ⅱ) · 범어(Ⅰ~Ⅳ) · 티벳어(Ⅰ·Ⅱ) · 팔리어(Ⅰ·Ⅱ) [미술문화교양] 불교문화개론 · 불교미술입문(A·B) · 불교미술연구(A·B·C) · 불교표현연구(A·B) · 사경연구(A·B) · 불화연구(A·B) · 불상연구(A·B) · 불교와 의례 [各宗系] 時宗교리체계(A·B) · 時宗교단사연구(A·B) · 禪學개론 · 일련교학개론 · 선택집(Ⅰ·Ⅱ) [현대사회계] 불교사회복지론 · 종교법인법 · 불교의 인권론 · 교육과 종교 · 현대사회와 불교 (A~D) · 현대불교문화연구 [사상계] 중국불교연구 · 일본불교연구 · 티벳불교연구 · 인도사상연구 · 중국불교문헌강독 · 일본불교문헌강독 · 인도문헌강독 · 인도불교특강 · 중국불교특강 · 일본불교특강 · 불교서지학 [응용부문] 불교학 전문 세미나(Ⅰ~Ⅳ)

 

앞서 소개한 동국대 불교학부에 개설된 과목은 총 60종인데 그중 예술 분야가 전혀 없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고(예전에는 불교음악 · 범패가 있었음), 영어 등 외국어의 비중도 매우 낮은 편이다. 동국대 불교학부는 재학생들이 지구촌 시대에 맞춰 잘 살아갈 방도를 충분히 안내 · 교육한다고 말하기가 곤란하지 않은가. 최소한 위의 두 대학 중에서 어느 쪽 불교학이 더 풍부한 교과과정이고 더 역량 있는 전공과정이 될 수 있겠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답할 수 있을 듯하다.

불교학 과정의 분절과 분과를 넘어

우리가 수시로 한국 불교학 자체를 점검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던가. 아마도 불교라는 깃발 아래서 지금까지보다 더 굵은 목소리로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관여(engagement)가 때로는 글이 되고, 때로는 말이 되고, 교육이 되고, 사회운동이 될 수 있다. 그 모든 역할이 불교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들, 그 판단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할 사람들이 불교학자가 아니겠는가. 역할 기대와 존중 때문에 오히려 자꾸만 불교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시시비비 논박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신진 불교학자들에게 무한한 기대를 가지고, 기존의 연구 조직체나 불교 인연의 사회단체들 그리고 불교종립대학을 향해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불교종립대학이 아닌 일반대학에서 나 홀로 불교학을 전공하기 시작한 연구자들에게 학문 공동체라는 입장에서 좀 더 각별한 지원을 하면 좋겠다. 예컨대, 불교진흥원의 지원사업으로, 신진 불교학자들이 전공하는 내용을 어딘가에서 일정 기간 강의할 수 있도록 장(場)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수많은 사찰의 불교교양대학도 그 장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단, 정규의 학교 수업과 달리, 불자 대중을 위한 강의 기술은 해당 신진학자가 스스로 갖춰야 할 능력이다.

둘째, 현재 불교학계에는 학회가 몇 개 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주요사업은 정기 · 부정기 학술대회와 학회지 발간 그리고 수시 워크숍 등이다. 돌아보자면, 학술대회에서 학술적 토론을 충분히 할 수가 없으니 발표자 중심으로 일방 진행되고, 학회지 게재를 위한 사전 요식행위처럼 미완의 글들도 많이 발표되고 있다. 회원들이 좀 더 학술적인 참여를 할 방법을 겸해서, 별도로 지속적인 연찬 모임을 만들어 특히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을 일반대학 불교 연구자들의 연구와 학습[R&S]의 중심터를 마련해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셋째, 불교종립대학의 경우에는 일반대학들보다 많은 불교 과목이 개설되어야 하므로, 새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진 연구자 중 탁월한 성적순으로 그의 전공 내용을 일정하게 강의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해서 그 즉시로 연구자의 자질이 있다고 말하기는 때가 이르고, 교육자의 자질이 있는지도 두고 봐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라도 그것을 스스로 시험해볼 수 있도록 미리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넷째, 한국 불교학 전공의 내부과정에서 오래된 문제로 파편화된 전공 구분을 지적했다. 언제, 왜 그랬다는 것인지는 이미 여러 편의 연구가 밝히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불합리한 틀을 깨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일상적인 한자어조차도 생소하게 느끼는 시대가 되었는데, 천태 · 화엄 · 유식 · 반야 등등의 전문특수용어[jargon]를 우리의 일상어로 고쳐야 할 필요성이 시급해지지 않았는가. 이 글의 앞에 소개한 선행연구들에서 공통된 내용으로 말하자면, 불교학 영역을 전공자들 끼리끼리만 통하는 게토(ghetto)로 만들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의 보편적인 언어로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학의 연구방법론으로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불교를 불교답게 적용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불교종립대학의 교과목들이 어떤 경위로 현재처럼 편성되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제안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은 교과들을 뒤죽박죽 개설하지 말고 학생들이 듣고 싶은 강좌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도록 하는 실험이다. 말인즉 ‘자율전공 설계’가 있다지만, 대개는 다 차려진 밥상에서 밥그릇 배치를 달리하는 정도인 것 같다. 학생들이 원점에서 직접 수강할 교과를 설계하고 프로젝트처럼 전공학을 달성한다는 것은 불교대학이니까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적어도 불교교육과정 안에서나마, 청년 싯다르타가 그랬듯이 스스로 자유롭게 창의(創意)하고 그만큼 책임을 지게 하면 되는 것이다. 교과목이 학생 중심으로 설계되는 것을 가장 꺼려 하는 구성원이 있다면, 바로 그는 자신의 강좌를 지키지 못할까 봐서 불안할 만큼 실력이 없는 교수자일 것이다.

 

맺음말

불교를 학문하는 것이 거룩한 과업이라고, 개인적으로 평생 믿어왔다. 그래서 이 작은 글을 쓰는 동안에도 필자는 나름대로 ‘학자 · 연구자 · 교수자’라는 용어를 구별하려고 노력하였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주저 없이 ‘불교학자’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간혹, 교수직에 있어도 연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더군다나 학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는 게 사실이다. 깊은 연구를 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선생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불교학 분야에 있는 모든 도반에게 평소에도 동지애와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한국사회 다수가 천박한 근대화에 편승하고 몰두할 때, 오히려 불교학을 선택한 지혜로운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더욱이 일반대학에서 ‘나 홀로’ 불교학을 열어가는 신진 연구자들에게는 더 말할 수 없이 고맙다.

필자를 포함한 모두가, 불교를 학문하는 것이 거룩한 과업임을 알고 택했으므로 좀 더 확실하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헌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난 반세기 동안 크게 달라지지 못한 점들을 이번에 《불교평론》의 기획 아래서 다시 짚어보았다. 어떻게든지 분발해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이 글을 맺는다. ■

 

이혜숙 hesook56@hanmail.net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금강대 초빙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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