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사유와 토론으로 정리한 붓다의 삶

1994년 12월에 처음 인도 성지를 순례했다. 당시 조계종 비상기구인 개혁회의 소임을 마치고 출가 당시의 초발심을 회복하기 위해 석가모니 붓다의 발자취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내심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미리 사진으로 성지를 보았기 때문에 유적과 유물에 대한 호기심은 애초 없었다. 대신 살아 있는 붓다의 숨결을 가슴에 안고 싶었다. 2,700년 전의 붓다가 아닌 지금의 붓다, 신화가 아닌 삶의 붓다를 만나고 싶었다.

처음 다섯 비구에게 중도와 사성제를 설한 사르나트, 6년 수행터인 보드가야, 많은 대중에게 법을 설했던 라지기르, 열반지 쿠시나가라까지 두루 순례했다. 나는 그곳에서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상상했다. 붓다는 좌선하고, 탁발하고, 설법하고, 대화하고, 재가 대중들의 어려움을 경청하고 상담했다. 탁발하면서 이웃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사건을 충분히 인지했다. 붓다가 살던 곳에서 나는 이렇게 판단했다. 붓다는 24시간 사생활을 포함한 모든 일상이 대중들에게 드러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붓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바라봐야 한다고 단언했다. “붓다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지금 상상해보자. 붓다 당시의 출가자, 재가자, 이교도, 왕과 귀족,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붓다의 음성을 들었다. 붓다의 걷는 모습과 표정을 보았다. 신분차별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를 대하는 붓다의 태도를 보았다. 당대 사회에 대해 붓다가 선언한 메시지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해답을 주는 붓다를 보았다. 그리고 재가자들은 붓다의 제자인 출가수행자들의 삶도 보았다. 붓다의 삶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고 들은 그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왜 붓다와 승가에 믿음과 존경을 품고 귀의했을까? 결코 신비화 전략을 행사하지 않은 붓다, ‘신격’의 붓다가 아닌 ‘인격’의 붓다에게 왜 위안과 감동을 받았을까?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지금 바로 이해 · 실현 · 증명된다.” 

싯다르타는 청년 시절 ‘지금의 자리’에서 통찰했다. 뭇 생명은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인간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그리고 세상과 자신을 향해 질문했다. 삶은 어떤 연유로 괴롭고 불안한가? 이어 질문했다. 고통과 불안이 영원히 소멸된 행복과 안락의 세계는 없는가? 있다면 그 길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던진 정직하고 용기 있는 질문에 마침내 그는 답을 찾았다. 붓다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열반, 해탈, 깨달음이라 말한다. 치열한 질문을 통해 깨달음은 완성되었고, 깨달음은 뭇 생명의 삶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삶은, 수행은, 깨달음은 늘 ‘지금 여기’를 떠날 수 없다. 그 먼 옛적 인도에서 싯다르타가 던진 성찰과 질문이 대한민국 지리산 실상사에서 이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붓다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온 도법 스님✽이 자신과 세상과 불교계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출가 50년이 넘는 동안, 도법 스님의 수행 여정은 전통 강당과 선원, 교구본사 소임자, 승가 결사체인 선우도량, 생명평화운동, 화쟁위원회를 거쳐 지금은 마을 절 실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 이르렀다. 이 길에서 줄기차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여래의 진실한 뜻!
붓다, 그는 누구인가? 
붓다, 그는 어떻게 살았는가?
붓다, 그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묻지 않는 자에게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즉 깨달음은, 삶의 행복과 안락은 정확하게 질문할 때만이 길이 열린다. 도법 스님이 그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 한 권의 책으로 질문과 해답을 정리했다. 《붓다, 중도로 살다》는 우리 시대 불교계를 향한 자문자답이자 즉문즉답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세뇌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매우 간명하고 명쾌하게 독해될 수 있다. 여기서 세뇌란 무엇인가? 저자는 대략 이런 뜻으로 지적한다. 삶의 자유와 깨달음은 지금 여기가 아닌, 멀고 먼 아득한 세월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런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깨달음은 깊은 선정과 삼매만을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한다. 

이런 생각과 신념으로 전염된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게 만들고, 불교는 삶의 현장을 떠난 그 어떤 곳의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불교관을 가지고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붓다의 진심을 물었고, 그 답을 붓다의 80년 삶의 모습에서 찾았다고 한다. 청년 싯다르타의 고뇌와 해탈을 향한 질문, 출가 이후 수행의 과정, 붓다가 된 이후 세상을 향한 메시지와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 그러니까 붓다의 깨달음이 일상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통찰한 것이다. 한마디로 깨달음을 일상의 삶으로 완성하고 구현한 분이 붓다라고 파악했다. 그러므로 붓다의 깨달음은 붓다의 삶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통찰할 때 드러난다고 파악한 것이다. 앎(깨달음)과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므로 삶의 모습을 바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을 말한다. 붓다는 중도(中道)의 길에서 팔정도행(八正道行)으로 연기(緣起)의 진리, 본래붓다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붓다는 진리를 등불로 자신을 등불로 살았으며, 중도의 길에서 팔정도행으로 연기적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기계적 평균값을 말하는가? 기계적인 조합을 말하는가? 아니다. 중도란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고 한다. 연기와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이치에서 벗어나 사견과 편견, 편집적인 사고와 삶의 행태에서 떠난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중도적 삶은 절대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중도와 팔정도행은 먼 훗날 도달해야 할 신비하고 추상적인 목적지가 아니다. 지금 바로 실현해야 할 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현장을 떠나 신비한 경지로 인식되고 있는 깨달음, 열반, 해탈, 선정, 삼매 등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중도, 연기, 본래붓다의 진리가 대비원력과 전법교화의 삶이었음을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말하고 있다. 그래서 수행이란 어떤 특수하고 신비한 방법과 체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중도와 팔정도의 실현이 중도적 삶이고 본래붓다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이런 사유는 지금 여기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붓다로 살자’는 발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고 보니 사람이 오롯한 붓다임을 발견하자고 한다. 어둡고 낡은 믿음을 버리고 죄업이 쌓인 업보중생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깨어나자고 한다. 그래서 본래붓다의 삶은 늘 깨어 있는 삶,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발원한다. 중도와 연기와 팔정도의 진리로 자연과 뭇 생명을 고귀하게 맞이하자고 한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따뜻하게 마음 쓰자고 다짐한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본 인격의 붓다는 역사의 붓다로서 우리 앞에 늘 오시고 있는 지금 여기의 부처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붓다의 삶과 사상을 간명하고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붓다와 그의 가르침이 매우 쉽게 내 삶의 방향과 바탕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럼에도 숙제는 남는다. 붓다의 뜻이, 수행이, 깨달음이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당황스럽고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마중물로 화쟁적 논쟁이 필요하다. 녹슬지 않으려는 정신은 끝없이 질문한다. ■

 

법인
실상사 한주. 1977년 출가.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역임. 현재 실상사 작은학교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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