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환상이다. 관객을 화면 속으로 이끌어 세상에 없는 것을 보여주고 마음을 사로잡는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꿈같은 이야기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영화는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강렬한 시각으로 정신을 붙잡고 소리의 충격으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잘 짜인 시나리오의 얼개는 화면 속 광경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간다. 

불교는 세상을 환상(Maya, 幻)이라 설명했다. 힌두교는 이 환상의 비밀을 아는 이는 진리를 꿰뚫을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조신의 꿈’ 이야기나 인도 신화 중 ‘비슈누의 마야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삶의 비밀을 비유한다. 눈을 뜨면 현실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마야이다. 극장의 불이 켜질 때까지 스크린 속 환상은 현실이다. 영화는 짧게나마 환상을 실감할 수 있는 도구이다. 

영화를 일러 한때 예술 혹은 종합예술이라 불렀다. 이제껏 발전해온 예술의 거의 모든 요소가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영화를 예술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예술영화의 장르가 있기는 하나 미미하다. 영화는 오히려 잘나가는 산업의 한 영역이 된 지 오래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드는 부가가치는 크고 높아, 한 편의 영화로 황금 탑을 쌓는 시대가 됐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들기 위해 쏟는 비용 또한 상상 이상이다. 예술을 위해 천금을 쏟아붓는 순진한 시대는 이미 지났다. 

제작의 입장에서 어떤 영화를 만들까 결정짓는 것은 돈이다. 영화 제작자들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애쓴다. 희곡을 쓸 때 작가가 묻는 첫 질문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데,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몰릴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극장에 걸리는 대형 영화들은 그렇다. 

티베트를 다룬 영화는 몇 편이나 있을까. 영화 관련 데이터베이스 중 가장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아이엠디비(imdb.com)를 검색하면 티베트 키워드로 251개, 티베트인 키워드로 42개의 영화가 검색된다. 이 숫자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심히 참조할 만한 기준은 된다.
영화들을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중국과 관련한 영화 55편, 불교 관련 영화 48편, 달라이 라마 관련 43편, 히말라야 관련 27편, 승려 관련 26편, 티베트인 관련 26편, 인도 관련 24편, 불교 신도 관련 23편, 불교 사찰 관련 19편, 종교 관련 18편, 전통 관련 13편, 티베트 불교수행 관련 12편, 정치 관련 12편, 인권 관련 13편, 망명 관련 11편, 망명자 관련 9편, 정치적 탄압 관련 7편, 기도 관련 10편, 환생 관련 10편, 공산주의 관련 9편, 명상 관련 9편, 여행 관련 9편, 티베트 수도 라싸 관련 7편 등이 검색된다. 

영화 형태를 살펴보면 극영화 44편, 다큐멘터리가 111편이 검색되나 극영화는 좀 더 엄격히 따지면 편수가 반 이하로 줄어든다. 아이엠디비에 수록된 타이틀은 대개 영화관에서 상영되었거나 DVD 등으로 제작 시판된 경우가 주가 되므로, 다큐멘터리의 경우 검색된 숫자보다 최하 100배 이상의 작품이 제작됐을 것이다. 그밖에 단편영화 25편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는 미국 할리우드이다. 일찍부터 영화를 산업으로 대하고 그에 맞춰 모든 시스템을 갖추었다. 할리우드는 기획, 제작, 배급 등 영화 전반에 걸쳐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할리우드의 영화 공장은 어떤 이야기가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하며 가장 잘 팔릴까를 철저히 자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실행한다. 만들어진 영화는 전 세계에 팔리고, 방송과 기타 미디어를 통해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긁어 들인다. 그러므로 영화를 만드는 최우선의 기준은 수익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의 추세를 보면 이 시대 대중들의 취향과 관심의 방향을 살필 수 있다. 

스크린을 통해 티베트가 대중들에게 다가선 것은 할리우드 영화 〈쿤둔(Kundun)〉(1997)과 〈티베트에서의 7년〉(1997)을 통해서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 합작으로 만들어진 〈리틀 부다〉(1993)도 넓은 의미에서 티베트 불교문화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그 이야기의 무대는 티베트 인근 히말라야의 왕국 부탄이다. 

〈쿤둔〉과 〈티베트에서의 7년〉은 모두 달라이 라마와 관련된 영화이다. 〈쿤둔〉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작품이고, 〈티베트에서의 7년〉은 프랑스 출신 장자크 아노 감독의 작품이다. 〈쿤둔〉은 ‘지극히 고귀한 이[聖下]’란 뜻이며 티베트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칭하는 호칭이다. 두 영화 다 달라이 라마의 전기를 다룬 영화이고, 〈티베트에서의 7년〉은 그중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 상업영화로 다루기에 쉽지 않은 불교 수행자의 이야기가 비슷한 시기에 두 편이나 만들어진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다. 이 또한 상업적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달라이 라마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서구사회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또 무엇 때문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지에 대해 깊은 이해가 부족했다. 달라이 라마의 표현대로 “히말라야에서 온 한 명의 비구승”이 폭력적 억압 속에서도 평화를 호소하는 노력은 낯설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 독특한 인물에 대한 관심과 신비함은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좋은 소재가 됐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국내 출판계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수상이 결정된 직후 기획과 제작에 착수하여 마침내 1997년에 세상에 선을 보였다. 

거장들의 참여와 막대한 제작비의 투입으로 기대가 컸던 두 작품은 바라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두 영화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체로 티베트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의 한계 때문이라는 지적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인리히 하러의 자서전을 기반으로 삼은 〈티베트에서의 7년〉은 서양의 탐험가가 은둔과 신비의 왕국을 이끄는 어린 지도자를 만나 그를 가르치고 우정을 나눈다는 이야기다. 하인리히 하러의 과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나치 친위대의 일원이었고, 특히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극렬조직 ‘선조의 유산(Ahnenerbe)’ 조직원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히말라야 탐험도 그 활동의 일환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있었다. 

1939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등정에 나섰던 하인리히 하러는 예상치 못한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영국군의 포로가 됐다. 5번의 탈출 시도 끝에 포로수용소를 벗어난 그는 21개월 동안 2,000킬로미터를 걸어 티베트 수도 라싸에 도착하게 된다. 1946년부터 1951년까지 7년 동안 어린 달라이 라마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지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가 〈티베트에서의 7년〉이다. 아름다운 우정과 비밀스러운 티베트의 사정을 담고 있지만, 이야기의 바탕에는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한 하인리히 하러가 미신과 위기에 빠진 어린 지도자를 돕는다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얼개가 깔려 있다. 비록 그가 경험한 내용의 일부 단편들이 사실일지라도 오만한 시선을 감출 수 없다. 나치가 주장한 인종 우월론의 그림자도 얼핏 비쳐 보인다. 

이런 불편한 시각은 〈쿤둔〉에서도 그대로 담겨 있다. 국가 멸망의 위기 앞에서 티베트의 지도자들은 신 내린 무당의 점괘로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 하긴 유물론과 공산주의, 그리고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침략자들 앞에서 ‘옴마니반메훔’만 외운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상업영화 속에서 티베트 승려들을 신비한 마법과 능력을 가진 인물로 그린 영화도 있다. 오우삼이 제작하고 주윤발이 출연한 〈방탄승(Bulletproof Monk)〉(2003)이다. 만화가 원작인 이 영화는 티베트를 다루는 세계관이 무협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무협지에서 티베트는 중원에서 벗어난 새외무림(塞外武林)의 세력으로 비밀리에 밀종 무술을 닦은 라마승들이 포탈라궁을 지키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중원에 대적하는 무림 사파의 끝판왕들이다. 

티베트 고승들에 의해 은밀히 전해진 두루마리에는 영생과 막강한 힘을 보장하는 비밀이 담겨 있다. 주윤발이 연기한 무명승은 그 두루마리를 후세에 전해줄 임무를 맡고 있다. 뉴욕을 배경으로 악한 세력으로부터 비밀스러운 능력을 지키고 빼앗으려는 각축전이 벌어진다. 티베트는 신비의 땅이고, 티베트 승려들은 초능력자들이다. 

티베트와 티베트불교를 바라보는 이와 같은 관점은 비단 영화뿐 아니라 학계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지난 세기 초에 저술된 티베트불교 관련 책만 봐도 ‘라마교는 티베트 토속 종교인 뵌교와 불교가 결합된 종교’라고 기술돼 있다. 탄트라 불교는 ‘전승된 가르침’이라는 본래의 뜻보다 ‘뼈와 살이 타는’ 성정의 비밀로 오해되기 일쑤이다. 라마는 산스끄리뜨 구루와 동일한 의미이며, 라마교란 곧 ‘스승들에 의해 전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정상적인 뜻은 차치하고 새외무림의 일파로 보려는 곡해의 시선은 지금도 존재한다. 

티베트를 바라보는 몇 가지 정형들 중에는 설산 위 척박한 땅이라느니, 티베트불교 즉 라마교는 신비한 종교라는 식이다. 영화야 오락의 관점에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여줄 수 있다고 하나, 라마교며 좌도밀교 따위의 굴레를 티베트와 티베트불교에 씌우고, 의심 없이 믿는 것은 무지의 결과이다. 한국을 그린 영화에서 우리 주식이 개고기이며 뱀술을 즐겨 마시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과 같다. 하긴 최근에도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할리우드 또는 서구사회가 가진 오리엔탈리즘의 한계일 것이다. 

티베트인 또는 티베트 문화권의 인물들이 만든 영화는 서구인의 시각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영화 〈리틀 부다〉(1993)를 만들 때 불교 교리를 살펴봐 줄 감수자가 필요했다. 부탄 출신의 승려 종사르 린포체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한한 흥미와 가능성을 발견한다. 결국 그는 베르톨루치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와 연출을 배웠다. 

종사르 린포체가 만든 영화 〈컵〉(1999)은 오리엔탈리즘의 덫을 피해갔다. 월드컵 축구 결승전을 앞두고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재미있고 아름답다. 젊은 수행자와 그들을 지켜보는 나이든 승려들의 세대 차이, 세간과 출세간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 떠나온 고향 티베트를 그리워하며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갈 짐을 싸는 늙은 수도원장, 이야기 속에 간간이 튀어나오는 불교의 가르침들이 영화 속에 잔잔히 배어 있다. 이 영화는 부탄의 수도원에서 촬영했고, 출연자 모두 실제 승려들이다. 

〈컵〉은 대중적인 면에서 성공했고, 티베트불교의 현실을 담는 데도 나무랄 데 없는 성취를 이루었다. 서구의 시선과 티베트에 대한 오해를 온전히 벗어난 최초의 상업영화라고 볼 수 있다. 종사르 린포체는 이후에도 영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다만 승복을 벗고 키엔체 노르부라는 이름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발히 활동하면서 대중적인 작품보다 예술영화에 치중하는 점은 아쉽다. 그의 작품 〈나그네와 마술사〉(2003) 〈바라〉(2013) 등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평론가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가 만드는 영화들은 점점 어려운 예술영화로 치닫고 있다. 그의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티베트 문화권의 민속과 예술, 전설과 상징을 완성도 있게 다룬 작품들이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정부는 외부세계에 티베트의 종교와 문화를 전하기 위해 오래도록 애쓰고 있다. 티베트 문화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독창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티베트불교는 나란다 전통을 고스란히 잇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며 후기 대승불교의 신행과 논리성을 강조한다. 또한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티베트인들의 고난을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내용이다. 

중국 내에서 〈쿤둔〉 〈티베트에서의 7년〉 등의 영화가 상영금지를 당하는 것은 당연하며, 심지어 달라이 라마의 제자를 자임하며 티베트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리처드 기어의 영화조차 보이코트하고 있다. 티베트의 독립성을 드러내거나 반중 정서를 자극할 만한 내용의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압박을 가한다. 비단 티베트뿐 아니라 위구르 등 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영화들은 모두 봉쇄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체제 선전의 일환으로 티베트를 다룬 중국 영화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대표적으로 〈캉딩정가(康定情歌)〉(2010)가 있다. 이 영화는 이미 수차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단골 소재이다. 동티베트 캉딩 지방의 대표적인 사랑 노래를 바탕으로 삼아 한족과 티베트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때는 1950년, 티베트를 해방하기 위해 나선 인민해방군 토목기사와 쇠사슬에 묶인 채 노예로 학대받던 티베트 여인 다와의 사랑을 담고 있다. 겉보기에는 사랑 이야기지만 오랜 티베트 봉건의 모순을 중국 인민군이 해방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티베트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이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가 거듭 제작되고 있다. 영화는 정치투쟁의 훌륭한 무기이며 세뇌의 도구인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예시돌마-티베트 사랑의 노래(益西卓玛)〉(2000)는 정치적 배경을 떠나 티베트 여인의 삶을 돌아보는 영화이다. 동명의 소설을 시에페이(谢飞)가 연출한 작품이다. 베이징 영화학교 출신인 그는 주로 중국 변방 지역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중국 현대사를 다루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 영화를 주목할 만한 것은 한 여인이 평생을 살면서 겪은 사랑과 이별을 통해서 티베트 현대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티베트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고 있었다. 문화 예술계에도 살짝 자유로운 바람이 불었고 주제와 소재의 제약이 덜 했던 때이다. 중국 신세대 감독들이 빚은 신선한 영상은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예시돌마〉는 1960 · 70년대 티베트인들의 삶을 잔잔하게 만날 수 있는 수작이다. 

반짝 봄을 경험했던 중국 영화계는 다시는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천안문 사태 이후 문화, 예술, 사상, 종교의 분야에서 검열은 심해졌다. 영화 속에서 티베트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모험이 따른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나 체제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이 나타나는 법이고 예술을 빌려 현실의 제약을 부수려는 노력은 인간사회의 전진을 이끌어내는 법이다. 

중국 차세대 감독 중 문제작들을 발표해온 장양(張楊)은 티베트인의 신심을 다룬 〈영혼의 순례길(Kang Rinpoche)〉(2015)을 만들었다. 백정으로 수없이 거둔 생명들에게 속죄를 위해, 죽기 전 영혼의 정화를 위해,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성지 라싸와 수미산으로 순례를 떠나는 티베트의 한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길에서 아이를 낳고, 성장하고, 삶을 마친다. 

장양은 그동안 중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주로 다뤄온 독특한 감독이다. 〈영혼의 순례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일으켰다. 정작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됐으나, 해외 영화제에서 연이은 호평을 받자 결국 중국 내 상영이 허락됐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철저하게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의 문법과는 많이 다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생명의 행복을 위해, 진리를 향해 몸을 낮추고 길을 걷는 티베트 사람들의 모습은 유물론 교육을 받고 자본주의 최전선에 선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낯선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진지한 모습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 관객을 끌어모았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적 믿음은 미신이다. 종교는 사상이며 정치적 문제이다. 그러니 생활과 문화 전반에 종교적 가치를 제일로 삼는 티베트인들의 태도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쨌든 경쟁과 물질과 자본의 소용돌이에 지친 중국 현대인들에게 〈영혼의 순례길〉은 상당한 충격과 위안을 주었다. 

중국의 영화시장은 거대하다. 자본주의자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돈벌이의 매력이 있는 땅이다. 디즈니를 비롯해서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중국 당국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입맛대로 영화 내용을 고치는 이유도 그 거대한 시장 때문이다. 중국의 눈치를 보는 이런 태도들 때문에 미국에서 종종 신랄한 비판이 나오곤 한다. 

애니메이션 〈심프슨 가족〉에서 천안문 사태를 빗댄 장면을 방영하여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된 적도 있다. 무자비한 막말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조롱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의 최근작에서 중국에 대한 디즈니와 미국 영화제작자, 정부 관리들의 태도에 대해 “자유에 대한 신념을 굽혀야 중국의 따뜻한 젖꼭지를 빠는 법이지”라고 비난한 바 있다. 〈사우스 파크〉는 즉각 중국에서 금지됐다. 이런 판국이니 중국의 티베트 탄압을 거론하거나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는 배우를 쓰거나, 티베트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도 생겼다. 

중국 영화계에도 티베트 내부의 역량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정치적 분란을 피해 티베트 전래의 가치와 종교적 가르침 등을 예술적인 영상에 담아내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주자는 페마 최덴(Pema Tseden, 萬瑪才旦) 감독이다. 문화혁명기에 티베트 암도, 즉 칭하이성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노스웨스트대학에서 티베트어 문학을 전공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와 공무원을 거친 후 베이징 영화학교 최초의 티베트인 학생이 됐다. 페마 최덴은 2002년 첫 작품인 〈침묵의 마니석〉으로 국제영화제와 중국 내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화려한 신고식을 올렸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티베트 배우를 써서 티베트말로 티베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필름 속에 티베트의 하늘을 닮은 짙은 색감으로 윤회와 업과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활동도 중국 정부의 검열과 정치적 재단의 칼날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타를로(塔洛)〉(2016)를 선보인 후 공안에 연행돼 이틀 동안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페마 최덴 감독의 최근작인 〈진파(Jinpa), 양 한 마리를 죽였다(撞死了一只羊)〉(2018)는 〈화양연화〉 〈동사서독〉 〈중경삼림〉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홍콩 출신의 왕가위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가 갖는 영화적 가치와 무게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 고원의 외딴길을 따라 트럭을 운전하는 진파는 우연히 양 한 마리를 치어 죽였는데, 내내 불길한 느낌을 받는다. 홀로 길을 걷는 젊은이를 트럭에 태웠으나,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칼을 지니고 길을 떠난 사람이다. 우연한 두 사건은 줄곧 진파를 괴롭히고 결국 진파는 젊은이의 피의 복수를 막기 위해 나서게 된다. 평범한 이야기 속에 인생에 얽힌 알지 못할 업의 사슬과 운명의 짐을 끌고 다녀야 하는 고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티베트 고유의 인생을 보는 통찰이 우화 형식으로 영화에 실려 있다. 

페마 최덴에 이르러 티베트 영화의 오랜 서사가 완결에 이른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으로 스스로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때 문화는 한결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티베트를 영화에 담으며 겪은 오리엔탈리즘과 사상 선동의 늪을 지나 비로소 온전한 티베트 주제의 영화가 탄생한 셈이다.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지금도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극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과 인력으로 제작이 가능하며 예전에 비해 작업 과정의 어려움도 덜하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필름 시대에서 비디오 시대를 거쳐 이제는 손바닥 디지털 시대로 진전된 성과를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 

티베트를 다룬 초창기의 다큐멘터리들은 주로 자연과 문화, 종교 등을 기록한 자연사 분야의 작품들이다. 개혁개방 이후에도 중국은 티베트에 다가서려는 외부세계의 접근을 철저한 외면과 압박으로 일관했다. 반면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와 달라이 라마는 언론과 영화제작자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서방세계에서 만든 티베트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과 점령에 대한 비판적 시각, 티베트 승단이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노력, 달라이 라마의 생애와 가르침 등을 주로 다룬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 전략과 전술은 크게 패배했다. 

오늘의 티베트를 담은 작품 중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6부작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2007)는 완성도가 높다. 길과 교역을 통해 티베트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을 잘 담아냈다. 1부는 〈마지막 마방〉. 천년이 넘도록 교역의 핵심을 이루던 마방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 달라졌다. 말이 다니던 길은 폭파하여 차로를 만들고 마방에 의지해 살던 티베트 사람들도 이제는 삶의 방식을 달리해야 할 시간이 왔다. 티베트 시골 마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특히 2부 〈순례의 길〉은 장양 감독의 〈영혼의 순례길〉의 원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이야기의 얼개와 진행이 닮아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티베트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생의 삶은 긴 순례길이고 다음 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 쓰촨에서 라싸에 이르는 긴 길을 따라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을 통해 험난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깊이 사색하게 한다. 나머지 편들도 역시 티베트의 속살을 잘 담았다. 방송된 내용은 극장판으로 재편집돼 〈천상의 길 차마고도〉로 선보였다. 이 작품은 한국 공영방송의 실력을 보여준 수작이다. 

그 밖에도 티베트의 전통의학, 자연경관, 유목민들의 삶은 다큐멘터리의 주요한 주제가 됐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쉽게 갈 수 없는 자연조건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훌륭한 이유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만큼 호기심과 수요는 늘 존재하는 법이다. 

중국의 서남공정으로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침공한 이후 수많은 티베트인이 박해를 피해 임시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길을 떠났다. 학교에 가기 위해, 티베트에서는 금지된 불교 교학 공부를 하기 위해, 또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히말라야 설산을 넘는다. 

네 살짜리 망명객부터 그들을 이끄는 일흔 살 된 길잡이까지 저마다 소설책 한 질은 되고 남을 사연을 안고 있다. 필름에 담을 무궁한 이야기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를 넘는 아이들〉(2000)을 제작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감독 마리아 블루멘크론처럼 티베트를 알게 되고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삶의 길이 완전히 바뀐 이들도 있다. 티베트 난민이 겪는 가슴 아픈 사연들과 그들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애쓰는 모습은 다큐멘터리의 단골 소재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선라이즈 선셋〉(2008)은 달라이 라마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 출신의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성자로서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생로병사를 지나쳐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 불교의 가르침을 수긍하면서도 이 모순과 차별, 그리고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그것이 어떤 힘을 가질까도 의심한다. 달라이 라마뿐 아니라 카르마빠 등 불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다람살라에는 하루에도 여러 팀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도착한다. 주요 방송사부터 동유럽 어느 곳의 학생들까지. 그들이 다람살라를 찾아오는 것은 고난을 딛고 운명을 개척해나가려는 인간들의 드라마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티베트 관련 영상물은 한 단계 진화한 듯 보인다. 과거에는 외부에서 티베트를 다루는 것이 주류였다면, 이제는 티베트 공동체 내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로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촬영과 편집은 스마트폰으로, 배포는 유튜브와 비메오를 통해 전 세계를 상대로 작품을 선보인다. 

극영화부터 다큐멘터리까지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내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추세를 보면 앞으로 티베트를 주제로 어떤 영화들이 나올지 관심을 갖게 된다. 허황한 마법과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를 가진 주체로서 티베트인들이 그려낼 이야기는 흥미롭다. 〈쿤둔〉을 넘어 키엔체 노르부의 〈컵〉이 나왔고, 〈캉딩정가〉를 딛고 페마 최덴의 〈진파〉가 나왔듯이 세상은 느리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문화 정책은 소수민족의 주체성을 한족 중심의 역사로 끌어들이는 쪽으로 진행하고 있다. 티베트와 위구르의 교육과 인종 정책이 그렇고, 내몽골의 학교에서 몽골문자를 금지한 일도 그렇다. 

중국의 거대한 영화시장이 있는 한 외부세계에서 티베트 주제의 상업영화를 만드는 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때 역량 있는 티베트 출신 작가와 감독들이 꾸준히 나와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티베트의 어린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 작품들이 하나둘 쌓이는 것도 반갑다. 차세대 더 좋은 티베트 영화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김천
자유기고가.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망명의 티베트불교〉 〈틱낫한의 귀향〉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행복한 사람들》 《시대를 이끈 창종자들》 《인생 탈춤》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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