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좌담-종범스님,최병헌교수,정병조교수,이봉춘교수,홍사성주간

홍사성
:이제 곧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됩니다. 현재는 과거에 기반하고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지난 100년간 한국불교의 사상적 흐름 내지 성격이 어떠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서 시대를 주도하기 위한 새로운 불교의 진로와 방향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지난 100년 동안 한국불교가 어떤 행로를 걸어왔는지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병헌
:20세기 100년간의 한국불교의 사상적 흐름이나 정체성을 논의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방된 해인 45년을 기점으로 우리 한민족의 민족사적 과제가 달라진 만큼 불교의 역할, 성격 또한 그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100년간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 근대 내지는 현대불교에 대한 이해 방법, 접근 방법에 대한 합의가 일정 정도 이루어져야 하는데 근현대 불교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부진한 형편입니다.

개설적인 이해 체계는 고사하고 기초적인 자료정리마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본적인 이해 기반을 설정해 놓고 그것에 기초해서 성격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무에서 출발해야 할 형편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세기 한국불교의 흐름이나 정체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병조
:불교사 분야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은 일천하다는 점에서 최선생님의 문제제기는 타당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적으로 엄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불교 100년 동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한국불교가 어떤 변모를 거쳐왔는지 그 윤곽을 알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시기의 한국불교의 사상적 흐름 내지는 성격을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홍사성
:거칠게나마 현대 한국불교의 분절점을 구분하면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45년 이후 해방공간, 54년부터 62년까지의 불교정화운동, 70년대의 불교의 현대화, 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 90년대의 돈점(頓漸)논쟁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일제강점기부터 시대순으로 한국불교의 흐름을 짚어가면서 논의했으면 합니다.

정병조
:일제강점기의 경우 1911년 사찰령 반포를 전후로 나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찰령의 반포로 조선총독이 본산 주지 임면권을 갖게 되어 불교의 자주권이 현저하게 박탈되고 본격적으로 한국불교가 왜색화로 치닫게 됩니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해 보고 그 후 해방을 맞기까지 일제의 식민정책에 불교계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의 불교계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병헌
:1876년의 강화도조약에 의해 먼저 부산이 개항되고, 이어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됩니다. 그때 일본정부는 자국의 불교교단에 요구해서 승려들을 동원, 부산과 원산 등 개항장에 포교당을 세우게 합니다. 이때부터 약 1910년까지 일본의 승려들은 일본 당국과 호흡을 맞춰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불교를 장악하는 작업을 합니다.

1904년에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후 통감부는 한국에 나와 있는 일본 승려들이 한국 사찰을 관리할 수 있는 제도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때 일본 승려들은 식민지 관료에 준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정책을 수행한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일합방 이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은 기존의 불교정책을 수정합니다. 한일합방 이전까지는 일본불교를 앞세워 한국 침략의 정신적 기반을 조성하려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일본불교의 진출을 막고 한국불교를 직접 장악해서 식민 통치의 도구로 이용하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데라우치 자신이 일본불교를 막아 주고 한국불교를 선교 양종으로 발전시켜 주겠다고 표방하고 나옵니다. 이에 한국의 승려들은 자청해서 기꺼이 협조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사찰령이 반포되고 본말사 제도가 시행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한국불교는 조선총독부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갔으며, 정치적으로 유린당하게 됩니다.

종범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까지는 불교계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가 격변하는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제국주의나 일본의 정체를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눈앞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본을 우호적으로 보고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이봉춘
:도성출입금지 해제 문제만 보더라도 당시 불교계의 현실 인식 능력이 얼마나 조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 도성출입금지 해제는 불교계 입장에서는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현안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안이 일본 승려 사노(佐野)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속셈도 모른 채 감읍해서 감사장을 전달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최병헌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불교계에서 시대적인 조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세력에 대한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행위를 선의로 보았고 이것을 일본은 이용했습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불교계가 국제 정세, 시대조류에 대한 식견이 부족했다는 일단의 책임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조선왕조 지배층의 책임입니다.

조선은 500년 동안 일방적인 유교 우위 정책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주체적인 역할이나, 또는 유교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중심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침탈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불교계의 가장 시급한, 그리고 최대의 현안 문제는 양반 유학자들의 억압과 침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도성도 자유롭게 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인이 나서서 그것을 해결해 주었을 때 일본측에 선의를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조선왕조의 유교 편중의 사상정책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홍사성

:개항기부터 사찰령이 반포되기까지는 조선왕조의 불교 억압으로부터의 탈피라는 현실적인 과제에 과도하게 매몰되어 일본의 정체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제에 협력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됨으로써, 그것이 일제의 도움에 의해서였든 아니면 최근의 일부 주장처럼 일제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조정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든, 어쨌든 불교계로서는 조선조에 비하면 상당히 자유로운 환경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일 여부를 떠나서 그 이전과 다른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종범
:큰 흐름으로 본다면 산중불교에서 도시불교로, 개별적인 수행불교에서 사회참여불교로의 방향 전환, 즉 불교의 대중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단초가 이 시기부터라는 것이죠. 조선조 500년 동안 산중에서 긴 잠에 빠져 있던 불교계는 이 시기를 맞이하여 각 본산마다 포교당을 개설하여 교화에 나섭니다. 1927년에는 동화사에서 제1회 포교사대회를 개최하고 포교의식, 포교방법 등을 논의합니다.

1928년에 중앙교무원에서 개최된 대회에서는 사설 포교당에 대해 논의하는 등 동화사 대회보다 더 구체적으로 포교에 대한 의지를 확인합니다. 포교당 건립과 더불어 사회현실에도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불교가 사회현실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조 500년 동안 사회의 중심세력에서 배제된 채 산중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비하면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예를 들어 1925년 월정사 영월포교당에서 금성유치원을, 능인포교당에서 능인유치원을 설립 운영하는 등 당시의 수준으로 보면 상당히 현대적이고 사회참여적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뿐만 아니라 본산에서 초등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벌인 경우도 상당수 있습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제도적인 근대화입니다. 중앙종무기관과 본산을 건립하여 불교계가 행정적으로 한 단위로 움직인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제가 불교를 보다 쉽게 통제하고자 하는 행정 편의주의가 작용한 측면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병헌
:일제의 불교 정책에 대한 불교계의 대응방식은 대략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본산 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부류로서 이들은 총독의 신임을 바탕으로 사찰에서 특권을 누리며 일제에 협력한 부류입니다. 실질적으로 불교계를 주도한 부류입니다. 두번째 부류는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수좌(首座) 그룹입니다. 이들은 선(禪)수행에 주력함으로써 한국불교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세번째는 만해를 중심으로 한 청년불자들로 민족운동에 헌신합니다. 산중불교에서 도시불교로의 변화, 제도의 근대화 등은 유감스럽게도 일제에 협력했던 부류에 의해서 주도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일정한 긍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출발부터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병조

:당시는 불교계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종교단체들이 친일적이었습니다. 불교의 경우 항일운동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에 비해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 보니 친일적인 행태가 더 크게 보이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만해를 비롯한 청년불자들의 활동은 그들이 비록 수적으로는 적다고 하더라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1920년대 조선불교유신회라든가 조선불교청년회 등을 결성하여 불교계 통일운동을 전개해 사찰령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제한적이나마 불교 자주화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홍사성:산중불교에서 도시불교로의 전환이나 조선불교유신회 등 각종 단체의 결성, 중앙종무기관의 설립과 종헌·종법의 제정 등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물론 도성출입금지 해제 등으로 활동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표면적인 조건만이 아니라 변화를 추동한 보다 내적인 요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종헌·종법의 제정은 일종의 입교개종(立敎開宗)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릇 입교개종은 사상적, 이념적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봉춘

:당시 사회 일반의 주류적인 사조였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잘 알다시피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진화론은 1900년대 전반기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세력은 진화론으로 식민지배를 합리화했고 피지배 민족 또한 진화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애국계몽가들도 진화론을 받아들여 사회를 개조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불교 또한 이러한 진화론의 영향을 적지않게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만해는 <불교유신론>에서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추세에 있으며, 만약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치 않을 경우에는 죽음에서 살려내는 기술을 터득하여 마르틴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이를 지하에서 불러일으켜서 불교를 유신코자 해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조선불교총보> 제2호에 실린 김상천(金相天)의 <조선불교의 금일>이라는 글에는 “금일은 인류의 지식이 차차 발달할수록 사회의 질서가 점점 복잡하여 사업상 여하한 방면이든지 신진구퇴(新進舊退)하고 우승열패하는 경쟁열이 극도에 달하여 일체중생이 동으로 달리고 서쪽으로 뛰며 아침에 가고 저녁에 오는 등 손과 발이 황망하고……”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일제치하이기는 했으나 조선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활동공간이 넓어진 만큼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변화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병조
:기독교 등 타종교와의 경쟁도 불교로 하여금 산중에서 도시로 나오게 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서양의 막강한 물질적인 원조를 바탕으로 학교와 의료기관의 설립을 통해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대해 갔습니다. 기독교는 오랜 기간 침체일로에 있던 불교에 이미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예를 <조선불교총보> 제6호에 실린 권상로의 <근대불교의 삼세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권상로는 “강화도 적석사의 토지는 학교기본으로 몰입되니 이른바 약육강식인가. 의주군 남산사의 건물은 야소교당으로 점령하니 이른바 우승열패인가.” 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대각사를 세워 당시 도심포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용성 스님도 “타종교의 교회는 일요일에는 만당인데 우리 불교는 적막무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용성 스님이 역경에 힘을 기울이게 된 것도 3·1 운동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의 서적은 조선의 글로 번역되어 있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데 불교서적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옥에서 직접 목격하고 자극을 받은 것입니다.

해방공간, 그리고 정화(淨化)

홍사성
:개항기에서 해방 전 일제강점기까지의 불교계의 큰 흐름은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왜색화와 그 극복 노력이 점철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자주적인 교단 건설과 왜색불교의 척결이 불교계의 핵심과제로 등장합니다. 해방공간은 사회 전체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불교계가 이 시기를 어떻게 통과하면서 이 과제에 대면했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종범
:해방 직후 8월 19일 기존의 교단 집행부가 퇴진하고 8월 22일에는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업무를 인수합니다. 9월에는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고 박한영을 교정(敎正)으로 하는 총무원을 구성하게 됩니다. 새로 구성된 집행부는 불교의 혁신을 위한 과제로 교구제(敎區制)의 실시, 재산통합, 친일세력 숙청, 교도제(敎徒制)의 실시 등을 상정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교도제의 실시입니다. 교도제란 대처승은 광의의 불교도일 뿐 승려가 아니다, 그런 만큼 대처승은 포교 및 교단 행정의 실무에만 종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의 승려가 대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실시할 수 없었고, ‘준비위원회’를 두어 연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불교혁신세력은 이에 크게 반발합니다. 이 문제는 훗날 ‘정화운동’으로 그 갈등이 폭발하게 됩니다. 이봉춘:불교계는 해방을 맞아 어느 집단보다 발 빠르게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교도제, 재산통합 문제 등 민감한 사항이 신속하게 처리되지 못함으로써 불교혁신단체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게 됩니다. 당시 혁신단체는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도연맹, 조선불교혁신회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이 내세운 공통된 주장은 비구·대처의 분리, 사찰 토지 소유 반대, 교단 내의 미신적·봉건적 요소 철폐, 친일파의 숙청 등입니다. 교도제는 대처승이 대부분인 현실이라는 점에서, 사찰 토지 소유 반대는 당시의 사찰 재산이 토지 이외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혁신계는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47년 5월 조선불교총본원을 발족하고 제갈길을 가게 됩니다. 이후 혁신계는 김구 선생의 북행길에 동행해서 그곳에 잔류하는 부류가 나오기도 하고, 47년부터 미군정이 우익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저절로 소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혁신계의 주장 중에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혁신계의 여러 공통된 주장 가운데 석가불을 본존으로 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조선불교혁신회의 경우는 좀더 구체적으로 ‘석존의 근본불교로 돌아가야 한다, 석존 이외의 신앙 대상을 철폐하고 일체의 매불(賣佛)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미신적이고, 기복적이고, 다신교적인 신행형태를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지금이라도 엄밀한 검토와 평가가 있어야 할 부분입니다.

 홍사성
:1954년 이후 10여 년 동안 진행된 불교정화운동은 한국불교 100년 동안 있었던 숱한 사건들 가운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화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비구·대처 분규일 뿐이라는 의견이 있고, 내용적으로도 정화라기보다는 종단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정이야 어떠하든 불교정화운동이 20세기 100년의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면 이 시점에서 정화운동이 갖는 이념이랄까 의의를 검토해 봐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봉춘
:정화란 말 그대로 ‘오염된 것,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정화라는 일련의 사건에서 패배 또는 약화된 측은 ‘오염된 불교’라는 뜻이 되는데 아무리 논의의 편의상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렇게 보아도 좋은 것인지는 문제가 많습니다. 비구·대처 분규라고 하는 것이 사태의 실상을 제대로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정화라고 하고 논의를 시작한다면 정화란 불교 본래의 계율사상, 또는 일제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에 기반해서 일제 식민불교를 정리, 청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전 백용성 스님이 승려의 취처금지를 주장한 것이라든지 해방 후 혁신계의 교도제 주장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최병헌
:정화란 한마디로 말하면 일제 식민지 시대에 왜곡된 불교를 맑게 하는 것, 척결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화의 대상인 ‘왜곡된 불교’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것인지 방법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그런 인식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반성에, 자기비판에 철저한 역사의식에 기반했다면 성과가 있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정병조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에 나와 있는 대로 당시 왜색불교의 실체는 대처승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유시를 내린 배경도 심하게 말하면 에피소드에 불과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여 고란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 신자이니까 절이나 불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고란사에도 놀러간 것이겠죠. 절에 가보니 기저귀가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스님이 절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는 거예요. 그가 알기로는 스님들은 가족과 절연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인데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스님들이 다 장가간다고 하니까 그러면 저것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 한 것입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입니다. 어떤 이념적인 사상적 고민이 없었습니다.

종범
:정화는 역사적 산물입니다. 일제가 낳은 산물입니다. 교단에서 행정력이 너무 비대해져서 행정 만능주의가 만연하면서 권승(權僧)이 등장하고 수행은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비구 수행승이 소외되고 억압받게 되었습니다. 일제 식민불교의 모순과 수행승의 억압적 상황이 씨앗이 되어 1954년 정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많은 논란은 있지만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 왜색불교를 거론했고 추방하려 했다는 것은 정화운동의 성과 내지는 긍정적 측면입니다.

 정병조
:정화의 동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식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불교가 가장 거부하는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한 것입니다. 빈번한 각종 분규에 폭력 현상이 없어지지 않는 것도 정화의 원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무자격자들이 정화운동의 와중에 끼어들어 승려의 질적인 하락을 가져왔고, 정화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는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체 모순을 야기한 것은 커다란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범
:물론 정화운동의 한계라고 할까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왜색에 대한 정의가 너무 협소했습니다. ‘사찰 안에 가정 부양 승려가 기거한다’, 이것이 왜색불교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찰만 정화하면 왜색불교가 척파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불교정화는 못하고 사찰만 정화한 것이죠. 두번째는 불교의 왜색화, 식민화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정치권력이 개입했다는 것인데, 정치권력에 의해 기생적으로 파생된 왜색불교를 극복한다는 정화에 정치권력이 개입했다는 것은 심각한 자기 모순입니다. 세번째는 사찰 내 가정 부양 승려가 물러간 다음 새로운 불교 건설을 위한 불교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점입니다.

홍사성
:정화의 부정적인 면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대만 같은 경우는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대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겪었고, 일본의 정토진종이 들어와 승려들을 전부 대처화시켰습니다. 대만도 우리와 같은 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과제를 안게 되는데 그 정화 과정은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대만은 계단(戒壇)을 새로 세워서 대처한 승려는 여기서 다시 새로 계를 받게 했습니다. 처자가 있더라도 새로운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고 다시 비구의 신분을 획득합니다. 물론 처자와는 법률적으로도 깨끗이 정리합니다. 이혼을 통해 호적을 정리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지 않은 승려들은 절에서 처자를 데리고 나가게 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취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우리와는 달리 전혀 분규나 폭력 사태 없이 해결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오늘날 한국불교와 대만불교의 차이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범
:좀더 합리적인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을 관철하지 못한 것이 정화운동 과정의 아쉬움입니다. 예를 들면 비구 수행승을 중심으로 교단의 질서를 잡아나가고, 대처승의 가족들은 절 밖으로 나가고 대처승만 당대에 한해 승려의 신분으로 사찰에 남되 제자를 두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협상 과정에 제시되었는데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정화가 여러 가지 문제를 낳은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정화로 인해 대다수 사찰에서 가족 부양 승려가 전통사찰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평가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대통령의 유시가 발표되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 부양 승려가 사찰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일반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러한 공감대가 형성된 데는 전통사찰에서 일시적으로나마 가족 부양 승려들을 나가게 했던 정화의 공입니다.

최병헌
:대처냐 비구냐 하는 이분법보다는 불법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처를 허용하는 나라가 의외로 불교가 크게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정화를 통해서 비구종단이 구성되었으므로 비구의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발전이라면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구냐 대처냐가 문제가 아니라 ‘불법을 제대로 구현했는지, 중생을 구제하는 데 불교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등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놓고 정화를 평가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종범
:가족을 부양했더라도 티베트불교처럼 잘했더라면, 그리고 대중이 용납했더라면 정화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정을 갖다 보니 삼보정재가 사사로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연히 수행을 뒷받침한다거나 가람을 수호하는 데 소홀했습니다. 또 주지직 등 사찰의 행정을 담당한 가족 부양 승려들이 너무 전권을 행사했고 교단이 너무 세속화되었습니다. 정화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홍사성
:정화 이후 큰 흐름의 변화는 수행에 전념하던 선승들이 종단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현재 한국불교는 ‘선불교’라는 담론이 지배적인데 이러한 담론은 실은 정화를 기점으로 선승들이 종단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한 이후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근현대에 박한영, 진진응, 권상로, 김동화, 김포광 등 뛰어난 교학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가 반드시 선불교 일색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봉춘
:이의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입니다. 선을 표방하는 조계종이 절대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발언권이 먹혀서 그렇지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김동화 박사 같은 분도 이런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선만 가지고 다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실제로 대중들이 선에서 주장하는 것만으로 안심입명이 되겠느냐,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아무리 선을 주장해도 대중들은 선을 하기보다는 다라니를 외우고 염불하면서 안심입명을 하고 있지 않느냐, 선종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파가 함께 발전해야 진정한 불교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최병헌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1918) 하편에서 1백 명에 가까운 승려들의 명단을 제시하고 그들을 교종과 선종으로 분류해 놓고 있습니다. 또 교종 안에서도 장점이랄까 특징이 무엇인지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에 따르면 68명 정도가 교종으로 분류되어 있고 선종으로 분류된 사람은 16명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능화는 종합평가에서 대부분이 교종이고 선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언급하고는 실제로는 선종도 아니고 교종도 아닌 사람이 더 많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종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만공(滿空)을 비롯해서 대부분이 경허(鏡虛)의 제자들이거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입니다.

경허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데 ‘마설(魔說)’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능화가 기록 평가한 84명의 승려들은 기본적으로 주지를 포함해서 주로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는 승려들입니다. 불교계 전체를 종합해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교계를 주도하는 인물들은 거의 망라된 것으로 볼 수 있어서 당시 교단의 성격,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의미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범
:당시의 대표적인 교학자의 한 사람인 김포광은 <불교> 특집 100호에서 조선불교는 선종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외우든 무엇을 하든 선종의 이념을 갖고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이 염불이라고 해도 정토종의 염불이 아니라 선, 즉 염불선이며 주력을 해도 주력선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조선불교는 선종만 남고 다른 모든 것은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비약인 것 같습니다. 보조지눌부터 선이 중심이 된 선교균형을 이룬 이후 조선시대 서산에 와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정화 이후에는 선승들이 종단을 장악했습니다.

홍사성
:김동화, 김포광 등 당대의 불교 지성인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대부분은 대처 출신이었습니다. 정화로 인해 불교 지성들의 맥이 끊기고 만 것은 커다란 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정화로 인해 선승들이 조계종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선불교를 표방하는 조계종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짚는다면 자연스럽게 선불교의 공과(功過)를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병조
:누구든지 선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오해가 팽배해 있습니다. 한국선은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남종선(南宗禪) 일색입니다. 조동선(曹洞禪)도 좀 있고 해야 되는데 오로지 남종선입니다. 그러다 보니 두뇌 자체가 세뇌되어 있습니다. 이미 초기 선종사에 관한 다수의 연구성과가 나왔는데 그것을 들여다보면 혜능과 그 세력은 광주, 소주 쪽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신수는 서한과 계림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문을 읽으면 잘 읽히지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세뇌가 돼 있습니다. 중국 여행길에 산 《중국불교사》라는 책을 보니까 중국불교사의 대표적인 인물 260명을 선정한 것을 보았는데 그 중 선사는 3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중국불교사는 선종사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요컨대 한국불교는 지나치게 선종 위주로 불교를 보고 있습니다.

선종이 갖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실천적인 면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중생제도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중생에게 화두선이 얼마나 어필할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나 봅니다. 이런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불교의 청정성, 수도성, 고원한 선의 세계를 결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이율배반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수도승과 행정승의 역할분담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종범
:한국의 선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학(禪學) 부재를 지양해야 합니다. 선학을 육성하면서 선행(禪行)을 실수(實修)한다면 선의 오류나 맹점을 많이 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고려 시대에 성행했던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담선법회에서는 《능엄경》과 조사(祖師)들의 선어록을 강의하고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최병헌
:선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련해서 몇 가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불교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흐름이 있다는 점입니다. 교종도 있고 선종도 있을 뿐만 아니라 교종 안에도 수많은 종파가 있고 선종 안에도 5가7종 등 여러 종파가 있습니다. 임제종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화선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전체 불교사의 흐름을 조망해서 임제종은 수많은 종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상대화시키는 의식전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두번째는 선이 주류가 되는 시기는 사실 불교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시기라는 사실입니다. 불교가 사회, 정치, 문화 등의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감퇴하는 시기이며 불교가 문화발전을 주도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임제선(臨濟禪), 간화선(看話禪)을 절대시하여 그것이 불교의 결론이고 가장 완전한 불교라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교사를 종학(宗學)이 아니라 인문과학으로서 엄격하게 객관화해서 연구하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세번째는 교단에서의 교육의 문제입니다. 강원의 이력 과정을 보면 조선 후기에 성립된, 폭이 좁은 교육 과정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철저히 선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의 빈약한 내용으로 인도, 중국은 고사하고라도 신라, 고려, 조선을 통해 내려온 폭넓은 불교전통을 담아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교단 차원에서 교학에 대한 연구사업과 아울러 교과 과정 및 제도 자체를 포함한 전면적인 교육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선의 균형 발전은 물론이고 불교의 장래 또한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돈점 논쟁

홍사성
:시기적으로는 후기에 속하지만 선불교와 관련된 만큼 90년대 돈점논쟁을 먼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선불교의 전통을 강조하는 조계종에서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주제로 논쟁한 것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논쟁이 무리하게 진행된 면도 없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문제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에 전깃불을 키면 일순간에 어둠은 사라집니다. 즉 돈오인데 이것은 인식론의 얘기고, 어둠은 사라졌지만 방바닥에 먼지는 남아 있다는 문제의식이 점수입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발상입니다. 결국 잣대 자체가 서로 맞지 않는, 맥락이 다른 것을 무리하게 얽은 것 아닌가 하는 거죠.

정병조
:돈점 논쟁이 사회적으로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대단합니다. 일반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로 인해 불교와 선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교학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성철 스님이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라 봅니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돈오와 점수의 문제를 정리한 것입니다. 다 정리해 놓은 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은 것입니다.

 종범
:성철 스님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면서 지눌 스님만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은 조금 유감이라고 봅니다. 돈오점수는 《능가경》에도 설해 있고 종밀(宗密), 징관(澄觀), 영명연수(永明延壽) 스님들도 주장한 바 있는데 유독 지눌 스님만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해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돈오돈수라는 말만 있었지 논리적으로,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돈오돈수 문제는 중국 초기선종사서를 통해서 접근하면 바로 설명이 되는데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쪽에서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장만 했습니다. 사실 돈오점수는 깨친 다음에도 업습(業習)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고 돈오돈수는 업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데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논쟁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최병헌
:돈점논쟁을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본 바 있는데 성철 스님의 지눌불교에 대한 비판은 타당성이 결여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자료를 읽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한 점이 없지 않으며, 더욱이 지눌불교의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을 지적하여 비판한 점은 설득력을 크게 약화시킨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국, 한국의 전불교사의 흐름 속에서 돈점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지눌의 주장만을 가지고 논란하여 객관성이 결여된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돈점논쟁은 일반인들에게 불교를 크게 인식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고 불교계에서 선수행을 문제삼아서 논쟁했다는 것 자체도 크게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논쟁이 진행되면서 가장 중요한 실천 수행의 문제는 빠지고 말꼬리 잡는 식의 공허한 논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돈점논쟁으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 저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지 않았는가 합니다.

70년대, 불교의 현대화,대중화

홍사성
:70년대의 불교계의 가장 큰 현상적인 특징은 도심의 아파트 빌딩 숲에 포교당이 들어서고 각종 불교교양대학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불교의 대중화, 현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곰곰이 따져볼 점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병조
:불교가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종교라는 점에서 포교당운동으로 인한 교리 이해의 대중화는 불교 교의에 어긋나는 사이비 신앙, 기복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를 지나치게 지식과 이론으로만 이해시키려 한 점은 없었나 하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수행과 신행이 없는 지식불교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 등을 통해 교리를 배울 뿐 절에 나가 법회에 참여하지 않는 재가 불자들이 많은 것도 그런 현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불교의 대중화, 현대화를 논하면서 반드시 짚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교의 대중화가 불교인의 내면적인 자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자극,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자극 때문에 불교가 이런 식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하게 표현한다면 대중화가 불교의 기독교화로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찬송가를 닮은 찬불가라든가, 법당에 피아노를 들여놓는 것, 좌식 대신에 의자를 놓고 앉는 것을 비롯한 법회 의례 등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70년대 이후 한국불교가 몸부림쳐 온 것이 불행하게도 기독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이봉춘
:불교의 기독교화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형식적인 면, 즉 법당에 피아노를 들여놓는다든지, 방석 대신에 의자를 사용한다든지 하는 점은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것이라고 본다면 타종교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라 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또 일요일의 정기 법회 같은 것도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법회의 정기화는 대단히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절대신(絶對神)화하고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불교의 오랜 신행 전통 속에 그러한 면모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독교와 대응하면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는 사상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80년대 민중불교운동

홍사성
:현대 한국불교사의 큰 흐름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80년대의 민중불교운동입니다. 개인의 해탈에 주로 관심을 가졌던 과거의 불교에 반해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중생의 현실고를 해결하려고 했던 민중불교는 1987년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열린 세계종교학자대회에서 민중신학과 동일한 분과에 배속시켜 비교, 토론할 정도로 세계 종교학계에서도 주목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의 불교학계에서는 민중불교에 대해 어떠한 공식적인 논의나 검토, 평가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민중불교의 이념이나 사상에 대해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 성격이나 공과 등은 짚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봉춘
:먼저 민중불교운동이 태동했던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서구에서 몇백 년 걸쳐서 이루어낸 근대화를 불과 몇십 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이른바 압축성장으로 경제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정치적인 자유는 철저하게 억압되었고, 경제적 불평등과 재벌의 독점체제 등 심각한 부작용이 야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종교계, 특히 기독교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선도한 반면 불교계는 여전히 친정권적인 행태를 탈피하지 못했습니다. 민중불교운동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병조
:민중불교운동의 최대의 공헌은 불교의 대사회적인 역할을 일깨웠다는 점입니다. 우리 불교계가 친정권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월남 파병 때 조계사에서 무운장구를 비는 법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법정 스님이 ‘이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가 체탈도첩 직전까지 간 적도 있습니다.

이 정도로 친여적이었던 불교계에 그래도 민중불교가 권력집단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고 또 고마운 일이기도 합니다. 또 무엇보다 불교인들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현대는 마음만 깨치면 된다는 식으로 불교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사회의 구조적 조직적 악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시켰고, 또 역으로 민중불교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민중불교를 비판하면서 정치, 경제 등 모든 현실에 직접 나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을 고민하고 자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최병헌
:80년대의 시대적 과제는 민주화였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민주화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불교계에서는 민중불교운동이 여기에 처음으로 호응했습니다. 민중불교운동이 불교 내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는 정치권력에 영합하는 체질을 가졌던 불교계에 자각의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불교운동이든 어떤 이름의 불교운동이든 종교의 입장에서 하는 운동은 정치·사회·경제 등의 다른 분야에서 하는 운동과는 그 방법이나 성격이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민중불교운동이 갖는 철학적 기반이나 방법론은 엄격한 검토를 거쳐 비판적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병조
:민중불교의 철학적 기반이랄까 방법론은 사회주의 이론에서 차용한 측면이 다분합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인간악의 근원이 무명과 탐욕에 근거한 소유욕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불교는 경제적 소유관념에서 생겨난 계급차별과 소유관계를 극대화시키는 제도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부처님이 인도 사회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서 사회적으로 계급 차별이 없는 인간 평등, 인권 평등의 원리를 도출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여기서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검토할 수는 없지만 사회주의적 방법론을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봉춘
:불교교리가 시대에 따라 늘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민중불교가 사회과학적 방법을 원용해 교리 해석을 시도한 것은 그 자체로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종래의 불교가 개인의 해탈과 사회의 정토화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만 파악했고, 그 결과 의도적이었던 그렇지 않았던 간에 사회현실에 나 몰라라 하고 방관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에 반해 민중불교가 기존의 관념적인 교상판석이라는 해석틀을 비판하고 사회과학적 방법이라는 새로운 교리해석을 시도하여 불교가 관념상의 종교, 학문을 위한 논리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임을 재인식시킨 것은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리적 왜곡 내지는 오해가 없었는지는 엄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홍사성
:불교가 자본주의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본 것은 명백히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민중불교에서 교리적 근거로 내세우는 승가공동체의 모델은 어디까지나 출가승단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재가자를 대상으로 한 초기불전인 《우바새계경》이나 《선생경》을 보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가치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재산축적을 위해 금욕적인 정려(精勵)에 힘쓸 것을 권장하고, 더 나아가 수입을 4등분해서 그 중 4분의 1은 재생산에 투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적극적인 교리의 왜곡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리를 사회주의 이론의 틀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해석한 것은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병조
:민중불교운동이 타종교의 운동이나 여타의 시민운동보다 일천한데다 불교계의 친여적인 속성이 워낙 강했고, 더구나 운동의 주체세력이 젊은층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소 성급한 면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86년 10월 27일 봉은사에서 있었던 법난규탄대회 때 승가대 스님들이 승복을 휘날리며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것이라든가, 민중불교운동의 지도부가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었던 87년 5·3인천사태 등의 폭력성은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불의한 조직적인 폭력에 대한 대항적인 성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운동은 어디까지나 종교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성직자가 하는 운동은 여타의 운동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간디가 지금까지도 세계인에게 존경받는 것도 비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교교리의 핵심은 자비입니다. 물론 자비라는 미명 아래 권력층의 불의에 눈을 감았던 적이 있었고, 대승불교의 절복(折伏)의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절복은 섭수(攝收)에 대한 반면표현(反面表現)이지 미움이나 증오, 폭력은 아닙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종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것은 민중불교운동이 종교운동의 측면보다도 정치운동의 측면이 강했다는 점입니다. 불교운동을 사회변혁을 위한 전체 운동의 부분 운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운동에 종속되어 과도하게 정치, 사회 현안에 몰두하게 되었고 방법론에 있어서도 불교 특유의 종교적 면모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87년 6·29 선언, 대통령 선거 등으로 사회, 정치환경이 달라지자 민중불교운동이 이름만 남고 실체가 없어져 버린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병조
:민중불교가 기성의 입장에서 보면 일부 수용하기 힘든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일부의 과격성도 그렇고 교리 해석의 급진성 등은 쉽게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지금 사회 일반에서는 민중이라는 용어에 대해 그리 거부감이 많지는 않지만 종교의 입장에서는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민중이라는 말은 당파성을 강하게 띠는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을 뜻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이러한 사람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중생은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다같이 ‘미혹한 생명’이며 구제의 대상입니다.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최후의 피난처라고 할 때 계급적 당파성을 강하게 띠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홍사성
:민중불교운동이 기성불교의 나태와 안일을 비판하고, 민주화에 일정한 공헌을 했으며, 기존의 교리 해석틀이 아닌 사회과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교리 해석을 시도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운동 과정에서 여러 한계를 노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천한 역사와 악조건을 감안한다면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일방적으로 폄하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불교운동은 일과성 운동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념을 정립하고 불교적인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는 선행 과제가 있습니다.

 최병헌
:저는 앞으로 불교계에서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공헌은 무슨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운동보다는 오히려 교단 자체의 청정성의 확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님들 개개인이, 그리고 재가불자 개개인이 투철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속세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교단은 부처님이 구현하고자 했던 가장 이상적인 승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의 승가는 구성원의 완전한 평등관계를 기반으로 민주적인 운영을 통해 절대적인 화합을 이루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집단의 모델입니다. 승가가 이를 제대로 구현할 때만이 불교는 세속사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것입니다. 스님들이 산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도 산중에서 이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보일 때,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마디만 해도 어떤 세력의 어떤 운동보다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가질 것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불교계의 실상은 이와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교단이 화합하기보다는 분열, 항쟁하는 등 세속사회를 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속을 오염시킨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습니다. 일반 사회에서 대중들의 신뢰를 잃고 있는데 무슨 사회적인 역할을 하고 공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같은 불교계의 모습을 가지고는 사회참여해서 기여할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홍사성
:지금까지 지난 1백 년 동안의 흐름을 시기별로 훑어보았습니다. 사회진화론, 사회주의 사상 등의 영향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에서는 ‘지배적 경향’이라 할 만큼 큰 비중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지난 1백년간 지향점이나 정체성이 없이 맹목적으로 그냥 흘러왔을 뿐인가. 적어도 1천6백 년의 온축을 가진 한국불교가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검토해볼 점은 ‘회통불교(會通佛敎)’에 관한 논의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원효의 화쟁(和諍),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의천의 교관병수(敎觀竝修), 그리고 서산의 선교일치(禪敎一致) 등을 증거로 내세우며 한국불교의 사상적 전통을 회통불교로 규정해 왔습니다. 지난 1백 년 동안에도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경향 외에도 선과 교, 정토와 진언 등의 신행이 ‘회통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회통불교적 성격이 지난 1백 년 사이에도 관통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버스웰 같은 학자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회통불교를 육당 최남선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그렇게 제창한 것일 뿐 실제로는 별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통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원효 등이 한국사상사의 정신적 지주로 중요시된 것은 일제시대에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나 인식이 비로소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종범
:그런 견해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회통불교라는 말을 누가 처음 사용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존재했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불교에는 회통불교, 원융불교의 면모가 두드러집니다.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고(圓), 어떤 목적을 위해 원만하고 장애 없이 하는(融) 것이 원융불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멀리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세불인 석가와 미래불인 미륵,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신앙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마애불을 조성할 때는 삼존불(三尊佛)이 많이 조성되었고, 미륵불을 조성하면서도 아미타불에 대한 발원도 합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김인문을 위해서 생전에는 관음도량을 설치했다가 사후에는 미타도량으로 바꿉니다. 한국불교의 회통성, 원융성이 조선시대 불교탄압에 의해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흔히 얘기되는데 실은 이렇듯 삼국시대부터 면면히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이 단순한 혼합성을 띠는 것, 잡박한 것이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중생 제도라는 불교의 본원을 원만히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체(體)와 용(用)이 절묘하게 결합한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병헌
:회통불교를 한국불교의 성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회통불교든 또는 종합불교든 간에 이러한 개념이 불교학계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정립되어 왔는지 그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통불교라는 것은 1930년 육당 최남선이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라는 논문에서 주장한 것이 최초입니다.

당시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 불교대회에서 발표된 것인데, 육당은 참석하지 않고 번역하여 대독하도록 했습니다. 이 논문은 당시 서구 학자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육당은 인도는 서론적 불교, 중국은 각론적 불교이고 한국은 결론적 종합불교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원효, 원측, 승랑 등을 주요한 사상가로 내세워 그렇게 주장한 것인데 여기에는 일본을 의식하고 대항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당시 일본학계는 인도는 서론불교, 중국은 각론불교, 일본은 결론불교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모방이고 연장에 불과하다고 하여 독자적인 역사적 위치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육당은 이러한 일본측의 논리를 뒤집어서 그 자리에 한국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해방 이후 육당의 논리를 계승하여 조명기, 박종홍, 이기영 선생이 원효를 내세우고, 이종익 선생이 지눌까지 포함시켜 한국불교는 회통불교라는 지배적인 담론이 정착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육당에게는 일본학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와 생존 자체를 위한 고민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는 회통불교라는 개념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문제시하지 않은 채 교조적인 지배 담론이 되어서 무비판적으로 지켜지는 형국으로 오히려 공허한 감마저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회통불교라는 결론이 나오든 그렇지 않든 간에 먼저 그 의미를 냉정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한국불교에 회통적 성격이 있다 하더라도 인도불교나 중국불교에는 그러한 성격이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인도에서는 용수 같은 인물이 기왕의 모든 불교 교학을 집대성, 종합했다고 하는데 이를 회통불교라고 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종밀 같은 학자는 선과 교를 융합한 방대한 성과물을 내놓았습니다. 일본의 경우 종파불교이기 때문에 한 종파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쉽게들 말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들도 종합하고 회통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가 회통불교라는 것을 좀더 설득력 있게 주장하려면 한국만 무조건 그렇다고 하지 말고, 인도, 중국, 일본 등과 엄밀하게 비교해서 다른 나라의 것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특색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종범
:우리 나라 불교가 다른 나라 불교와 가장 다르고 특이하게 회통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다라니, 염불, 발원문 등 의례까지도 회통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신라 선문의 불상 안치만 보더라도 중국과는 명확히 다릅니다. 중국에서는 선종 사찰에서는 법당만 건립하고 불당을 세우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나라는 선이 전래된 초기부터 화엄종식으로 불상, 탑을 모두 모십니다. 실상사도 쌍탑을 세웠고, 보림사도 쌍탑을 세웠고 불상을 모셨습니다. 봉암사도 거대한 불상을 모셨습니다. 이는 당나라 때나 송나라 때의 선문과는 분명히 다른 면입니다.

최병헌
:만약 그러한 면을 회통불교 또는 회통불교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장점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원효가 위대한 것은 경전에 대한 이해, 교리 해석 등에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눌불교의 위대한 점은 당시의 불교계에 선교의 갈등이 있었고 지눌이 그것을 통합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갈등이 없는데 단순히 정리한 것이라면 그러한 회통성은 아무런 역사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회통 전에 실제로 분열과 갈등, 대립이 전제되고 그 실상이 밝혀져야 회통성이 의미가 있고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홍사성
:한국불교의 회통적 성격을 인정하든, 또 불교 자체가 그런 측면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회통불교의 이면, 즉 부정적인 영향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특히 신행의 측면에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한 ‘혼합주의’라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정병조
:회통불교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경우 선종이라고 하는데 스님도 그렇고 일반 신도들도 모두 참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선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전을 공부하기도 하고 염불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과연 무엇을 우선으로 하고 중심으로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스님마다 다 다르게 얘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을 해서 마음을 깨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최고다, 선을 하는 데는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심지어 기본적인 교리공부마저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이러한 측면은 회통불교가 가질 수도 있는 부정적인 요소, 즉 혼합주의라는 지적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봉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회통불교를 무반성적으로 수용하는 데서 오는 오류 가운데 단적이고도 구체적인 한 예를 장례의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장례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마감하는 중요한 의례인데 불교식과 유교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어느 사찰에서 직접 목격한 것인데 삼오재, 발인재를 하는데 모두 유교식으로 하고 불교는 옆에서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염이나 하관은 모두 유교식으로 하고, 불교는 염불만 하고 옵니다. 이것은 불유(佛儒)혼합도 아니고…… 이러한 현상은 회통을 오해하는 데서 야기되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더라도 차별화해야 합니다. 백재는 어떻게 지내고 기제사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최병헌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거짓을 엄격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회통불교의 진정한 뜻을 곡해해서 적당히 절충하거나 혼합하는 오류에 빠지면 진실과 거짓이 분명해지지 않습니다. 적당히 절충해 놓고 현실 문제를 호도하는 논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양극단의 중간점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극복해서 참다운 진리를 세우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적당히 중간을 잡아서 혼합시켜 놓고 마는 것으로 안주하려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결국 기본적인 불교의 모순은 불교계 내에 온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홍사성
:지금까지 구한말 개항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불교사의 주요 흐름을 시기별로 일별해 보았습니다. 구한말,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사회진화론과 사회주의의 영향이 발견되고, 해방공간의 혁신운동이나 민중불교에서도 사회주의 영향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 내지는 비주류입니다. 1백 년을 관통한 한국 현대불교의 사상적 주류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던 회통불교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회통불교가 우리의 전통인 것은 사실이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혼합주의적 성격은 문제로 지적되었습니다. 회통불교라는 이름으로 정사(正邪)를 구분하지 않고 시비(是非)를 결택(決擇)하지 않는다면 한국불교의 장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점복이나 기도가 불교의 본질적인 사상에 계합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없이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왔으니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회통불교 또는 원융불교라는 이름으로 용납된다면 불교가 나아가야 할 진리의 지향점이 상실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불교학계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없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회통불교의 혼합주의적 측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한국불교가 21세기로 가지고 넘어가는 최대의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고광영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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