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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공덕수행으로서 보시와 그 현대적 의미* / 장성우
[84호] 2020년 12월 01일 (화) 장성우 371008@naver.com

1. 지금 보시를 논하는 이유

보시(보시는 보통 재물보시, 법시, 무외시로 나누는데, 이글에서는 재물보시를 지칭한다.)는 초기불교 이래로 공덕을 쌓는 실천으로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불교는 보시 공덕의 의미와 보시 방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족하다. 또한 보시는 공덕을 쌓는 실천일 뿐 아니라 수행법이기도 한데, 초기불교 시대 이래로 보시는 중요한 수행법 중 하나이며 특히 재가자에게 중요한 수행법이었다. 이런 이유로 보시는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의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로서 인정되었다. 하지만 요즘 한국불교계에는 수행으로서 보시에 대한 인식도 많이 부족하다. 

한편 최근 한국 재가자들의 신행을 살펴보면, 개인적 수행과 기복 위주의 신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 재가자 신행 중에도 신심을 깊게 하고 지혜를 계발하기 위한 수행들과 보살행의 원력을 키우고자 하는 수행도 있지만, 사회적 실천으로서 신행은 찾기 힘들다.

보시는 초기불교 이래로 개인의 수행법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미가 큰 실천적 수행이었다. 이제 다시 보시의 의미를 되돌아보면서 한국불교계가 사회적 실천으로서 보시를 신행문화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보시가 한국에서 신행문화로 정착된다면 불교인들의 신행 활성화뿐 아니라 전법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보시 공덕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어떻게 보시하면 보시가 큰 공덕이 되고 수행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불교의 보시에 관련된 가르침은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경제적 불평등 문제 완화와 코로나19 및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 극복에도 일조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2. 보시의 공덕과 보시 수행

초기 경전 내용을 통해서 보면, 공덕을 쌓는 수행은 보시가 대표적이었으며 지계가 그다음이었다. 

1) 보시의 공덕

초기 경전에는 보시의 공덕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는데, 즉 보시는 수명 · 힘 · 행복 · 아름다움을 베푸는 행위이므로 보시하는 사람은 수명 · 힘 · 행복 ·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보시를 하면 긴 수명과 함께 명성을 누릴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고,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하며, 좋은 명성뿐 아니라 크샤트리아 · 바라문 · 장자 · 사문 등 어떤 모임이든지 당당히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보시를 하면 사후(死後)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내생에 상위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지만, 보시를 하지 않으면 내생에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다고 하였다.

보시하면 재화를 모으고 부유하게 된다는 내용도 있는데, 잡아함경에는 흉년이 든 시절에 탁발을 하는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그 마을의 촌장이 흉년이 들어서 재가자들도 살기가 힘든데 부처님과 비구들이 재가자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항의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촌장의 항의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랫동안 보시하고 고요히 마음을 닦으면 그 집이 큰 부자가 되어 돈과 재물이 풍족하고 식구와 하인과 종들이 많아진다고 설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중아함경에는 보시의 과보로 천상에 태어나거나, 사람으로 태어나면 재물이 많은 과보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디가 니까야에는 보시 · 계율의 과보로 내세에 부유하게 태어나거나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는 내용과 보시 · 계율 · 포살의 과보로 크게 번영하고 큰 위세를 지닐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상인이 현재 상업에 성공하여 큰 부를 축적하는 것은 전생에 보시를 한 때문이라고 한다. 즉 상인이 장사할 때에 상업에 실패하거나, 의도한 만큼 안 되거나, 의도한 만큼만 되거나, 의도한 것보다 잘되는 것은 전생에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보시를 약속하고 나서 보시를 하지 않거나, 약속한 만큼 보시를 하지 않거나, 약속한 만큼만 보시를 하거나,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이 보시를 한 과보라는 것이다. 즉 전생에 보시를 얼마나 하였는지에 따라서 현생에서 상업에 실패하거나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증일아함경에도 있는데, 널리 보시를 하면 다시 한량없는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한다. 

보시의 공덕은 맛지마 니까야에서 잘 정리되고 있는데, 보시는 행복의 원인이고 성취의 뿌리이고 부의 기반이고 위험에 처한 자에게 기댈 곳이 되고 금생과 내생에서 보시와 같은 그런 의지처가 없다고 강조되고 있다.

2) 수행으로서 보시

출가자의 수행에 대하여는 경전에 많은 내용이 있지만, 수행의 원리로 본다면 비구 250계(《사분율》 기준, 비구니는 348계)와 같은 계율을 지키고 밤낮으로 선정을 닦아 지혜를 증득하는 계 · 정 · 혜의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출가자의 수행에 비해 재가자의 수행은 그 내용이 다르다. 초기 경전에 있는 재가자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삼보에 대한 귀의와 오계 수지를 설하는 사불괴정(四不壞淨), 그리고 삼보 · 계율 · 보시 · 천상을 생각하는 육수념법(六隨念法), 나아가 믿음 · 계율 · 보시 · 다문(多聞) · 지혜를 닦는 다섯 가지 항목의 수행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출가자에게 주로 설해졌던 사성제 · 십이연기 · 사선정 등의 가르침이 때로는 재가자에게 설해졌음이 나타난다. 

그런데 출가자의 수행과 비교해보면, 재가자의 수행은 계율 항목이 간소하여 주로 오계를 수지하고, 밤낮으로 선정을 닦기가 힘들다는 것, 그리고 보시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육수념법과 다섯 가지 항목에서 모두 보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보시는 출가자에게도 설해지지만, 자주 설해지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재가자에게는 보시가 자주 설해지는데, 보시는 공덕이 되며, 또한 어떤 자세로 보시하여야 큰 공덕이 되는지도 설해지고 있다. 그리고 보시는 수행이 되기도 하는데, 진정한 보시를 실천하면 탐욕과 인색을 제거할 수 있고 사무량심을 수행할 수 있으며, 나아가 바라밀 수행으로서의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1) 보시의 자세

보시의 자세가 어떠냐에 따라서 보시의 공덕이 좌우되며, 또한 보시의 자세는 수행과도 관련이 있다.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좋아하면 아라한들이 연민하여 방문하고 법을 설하는데, 보시의 자세에 따라서 아라한들의 법을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증일아함경에는 보시하여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즐거움이 있어서 뜻이 견고해지며, 마침내 변회(變悔)하여 사성제의 이치를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보시를 하면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사성제를 알게 된다는 의미는, 보시할 때에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서 탐욕을 떠난 즐거움을 깨닫게 되어 사성제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자따까》에는 보시할 때에는 보시하는 물건보다는 그 신심과 공경심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설산(雪山)에 있던 어떤 수행자가 그 제자와 서로 신뢰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의 초대를 받아서 궁궐에 가서 왕이 주는 좋은 음식을 공양받았으나, 왕의 곁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답답증이 생기고 음식도 소화되지 않아서 병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시 설산으로 돌아와서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생활하였고, 제자와 더불어서 같이 지내면서 모든 병이 나았으며 건강도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보시하는 사람의 신심과 공경심이 보시하는 물건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자따까》에는 보시를 할 때, 보시할 때와 보시한 후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참다운 자선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보시 이외의 다른 목적이나 계산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보시하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보시받는 사람이 모두 청정하면 그 복덕이 가장 크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곧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고, 보시하는 물건도 정당하게 얻은 것이며, 보시받는 사람도 청정한 사람인 경우에 그 복덕이 가장 수승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후에 삼륜청정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보시하는 사람의 계행이 청정하거나 또는 보시받는 사람의 계행이 청정하여도 청정한 보시가 된다고 한다. 즉 계산이나 이익을 떠난 청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보시받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보시할 때에는 그 물건보다는 정성과 청정한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 이삭을 주워서 생활하더라도 항상 법을 실천하는 가난한 사람이 비록 가진 것이 적더라도 보시를 실천하면, 그 가치는 천의 보시물로 베푸는 보시자의 백 배, 천 배 보시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예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 경전에는 보시하는 물건의 양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은 찾기 힘들다. 다만 정성을 강조하면서, 형편에 따라서 청정한 마음으로 보시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가 되었든 나누려는 마음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성이 중요함과 관련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마음에 들도록 공경하고, 마음에 들도록 자리를 내놓고, 있는 것을 감추지 않고, 많이 있으면 많이 주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맛있는 것을 주고, 정성을 다하고 성의를 다하는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춘 가문을 방문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잡아함경에는 벽지불에게 한 끼 밥을 공양 올렸으나 깨끗한 신심이 아니었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지 아니하였고, 자신의 손으로 보시하지 아니하였고, 보시한 후에는 보시한 것을 후회하였기에, 보시의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 부자로 태어나기도 하였지만, 부자가 되었어도 옷과 음식과 침구와 집과 수레를 모두 추한 것을 쓰고 훌륭한 색 · 성 · 향 · 미 · 촉을 누리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증일아함경에는 보시할 때 정성을 들이지 않고 원을 세우지도 않고 또 믿는 마음이 없으면, 보시의 과보를 얻지 못하며, 설사 과보를 받더라도 즐겁게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시할 때에는 믿음을 가지고 정성껏 보시하고 또한 원을 세워서 정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시할 때에는 시기에 맞는 보시를 하고 남을 시키지 않으며, 항상 정결한 것을 보시하고 정결하지 않은 것을 보시하지 않으며, 좋은 것을 보시해 더럽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시할 때에는 그 시기를 감안하여 적절한 보시를 하여야 하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보시하는 정성이 있어야 하며, 가진 것 중에서 좋은 것을 보시하여 안 좋은 것, 버려야 마땅한 것 등을 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마지못해서 보시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건네지 않고 충분히 배려하지 않고 내버리듯이 보시를 베푼다면, 죽은 후에 보시의 과보로 4대왕천들의 동료로 태어나더라도 텅 빈 궁전에 태어나 보시의 과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성을 다한 진정한 회향과 자선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진정한 회향과 자선을 행하면 현생에서의 행복은 물론 사후(死後)의 행복도 올바르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청정하고 정성스러운 보시를 행한다면 자연스럽게 신심이 증장될 뿐 아니라, 보시의 공덕으로 선지식들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어 수행이 깊어지고 바른길로 나아가는 원인을 심는 것이 된다. 

(2) 탐욕과 인색 제거

보시는 해탈과 열반을 향한 수행에서 처음 닦아야 하는 수행으로 설해진다. 즉 차제적인 가르침으로 설해지는 보시→계율→천상(天上)→감각적 욕망들의 위험과 타락과 오염됨→출리(出離)의 공덕→사성제의 순서에서 가장 처음에 보시가 설해진다. 즉 보시는 점차 높은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의 수행으로 설해진다.

잡아함경에는 보시를 완전히 갖추기 위해서는 인색한 마음을 버리고 해탈의 마음을 닦는 보시를 해야 하며, 집착과 욕망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상윳따 니까야에는 보시는 인색한 마음을 버리는 수행이므로 부유한 사람만이 아니라 빈궁한 사람도 적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보시를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는데, 관대한 마음은 수행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부유한 사람은 재물을 축적할수록 탐욕에 빠질 위험이 높으며, 보시는 집착과 욕망을 버리는 수행으로서 탐욕과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보시가 이와 같이 탐욕과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수행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오하분결, 즉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욕탐, 진애 중에서 욕탐의 극복에 관련된다. 

(3) 사무량심

보시는 사무량심의 수행에도 관련되어 있다. 사무량심은 자 · 비 · 희 · 사의 네 가지 마음을 무량하게 닦는 수행인데, 이에 대해서는 《청정도론》과 《해탈도론》 등에서 세속의 번뇌 대치에 효과적인 수행으로 묘사되고 있어서 재가자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수행이다. 또한 중아함경에는 사무량심을 닦으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천상 또는 범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나아가 불환과 또는 그 이상의 과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보시가 사무량심 중에 자무량심, 비무량심 수행과 관련된다는 내용은 증일아함경에 나타나는데,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이 외도들에게는 보시하지 않겠다고 하자, 부처님은 모든 중생은 먹어야 살므로 널리 보시할 것을 권하였다. 즉 보시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우러나는 실천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증일아함경에서는 보시하면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사성제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내용도 있는데, 보시는 사무량심 중에 희무량심의 수행과 관련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보시는 평등한 마음을 닦는 수행이어야 하는데, 승단에 보시하는 경우에 출가자 개인보다는 대중에게 보시하는 것이 그 공덕이 수승하다는 것이다. 즉 보시는 사무량심(四無量心) 중에 사무량심(捨無量心)의 수행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무량심(捨無量心)의 의미에 대해서는 《청정도론》에 “뭇 삶에 대하여 무관한 형태를 일으키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뭇 삶에 대하여 평등하게 보는 것을 기능으로 삼고, 적의와 애착이 가라앉은 것을 현상으로 삼는”다는 설명이 있다. 즉 개인으로서의 출가자에 대한 적의와 애착을 여의고 평등한 마음으로 전체 대중에게 보시하는 것은 사무량심(捨無量心) 수행과 관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보시는 자 · 비 · 희 · 사의 사무량심 수행과 관련이 있다.

한편 이러한 평등한 보시를 설하는 내용과 함께 보시받는 이에 따라 공덕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내용도 경전에서 발견된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축생에게 보시를 하면 백 배의 보답이 기대되고, 행실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를 하면 천 배, 행실이 바른 범부에게 보시를 하면 십만 배,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읜 이교도들에게 보시하면 천억 배,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는 보답이 기대되는데 예류자, 일래향, 일래자, 불환향, 불환자, 아라한향, 아라한, 벽지불, 여래 · 아라한 · 정등각자에게 보시를 하면 더욱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내용이 있다. 즉 수행의 경지가 높은 이에게 보시하면 그만큼 보시의 공덕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등 보시와 보시를 받는 대상에 따라 보시의 공덕이 다르다는 것은 모순으로 볼 수 있으나, 외도에게도 보시해야 한다는 것은 외도 수행자도 생명을 유지해야 하므로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승단에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수승하다는 것은 승단 전체의 질서와 평화가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비심을 가지고 개인보다는 대중 전체를 생각하면서 세속적 애증과 원친(怨親)을 떠나서 보시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수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시를 수행과 연계해 본다면, 보시의 대상에 따라서 보시의 과보가 다르다는 내용도 이해될 수 있다. 즉 가축이나 범부보다는 사향사과 · 벽지불 · 여래와 같은 성인에게 보시하는 공덕이 수승하다는 것은 수행과 그 과보를 존중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평등한 보시와 보시 공덕의 차이라는 두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양립 가능한 것이다.

(4) 보시와 보시바라밀

보시는 이와 같이 수행으로서 의미가 있는데, 대승불교 수행법인 육바라밀의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의 의미를 포함한 보시에 대한 설명이 초기 경전에도 나타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세속적인 과보와 기쁨을 바라고 보시하면 죽은 후에 사대왕천 신들의 동료로 태어나며, 그 업 · 신통 · 명성 · 권위가 다하면 다시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오지만, 다만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 보시를 하면, 죽은 뒤에 범신천 신들의 동료로 태어나며, 그 업 · 신통 · 명성 · 권위가 다해도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위해’ 보시한다는 것은 주석서에 의하면 ‘사마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마음의 장엄과 필수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는 마음에도 보시가 필요하며 보시는 마음을 장엄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시는 보시바라밀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으며, 《금강경》 등 대승 경전에서는 현세의 과보에 대한 기대를 떠나 실천하는 보시가 무주상보시로 등장하게 되었다.

보시가 보시바라밀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우바새계경》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과보를 바라지 않고 아까워하지 않는 보시가 보시바라밀이며, 자리와 이타를 위해 재물과 법을 베푸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며, 보리를 장엄하며, 부자가 되는 것은 보시의 바른 과보이며, 수명과 몸의 힘과 안락함과 변재를 얻는 것은 나머지 과보라고 하였다. 또한 하근기의 보시는 은혜를 갚기 위한 보시이며 중근기의 보시는 업을 위한 보시이며, 상근기의 보시는 법장(法藏)을 위한 보시라고 했다. 즉 은혜를 갚기 위한 보시보다는 선업을 쌓기 위한 보시가 더 수승하며, 선업을 쌓기 위한 보시보다는 법을 위한 보시, 즉 해탈과 열반을 향한 수행을 위한 보시가 가장 수승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바새계경》에도 보시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증장시키는 수행이라고 하여, 초기 경전에 나타난 보시가 가진 수행으로서 의미가 대승 경전에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화엄경》에는 보시와 지계는 바라밀 수행으로서 모든 보살 수행의 기본이며, 집터를 먼저 닦아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시를 환희행이라고 하면서, 자비심으로 보시를 하되 자타 모두의 깨달음에 그 공덕을 회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3. 보시는 왜 현대에 필요한가?

1) 한국불교계 신행문화의 혁신

최근 한국불교 재가자의 신행을 보면, 개인적인 수행과 기복에 치중하고 있어서 사회적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재가자의 신행이 사회성을 갖춘 수행으로 발전되어야 불교 발전에 기여할 수 있고, 개인 수행도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불교인들의 사회적 실천은 아직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한국 불교인들의 미약한 사회적 실천을 보여주는 예로, 소극적 기부문화를 들 수 있다. 사회에 대한 기부를 타 종교와 비교해보면, 2011년 기준으로 신도 1인당 연평균 기부금액은 천주교 37만 1,100원, 기독교 21만 3,400원, 불교 10만 6000원, 무교 6만 2,600원 순으로 불교도의 기부금액은 타 종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초기 경전에는 재가자에게 사회적 의미를 지닌 실천으로서 보시와 지계가 강조되고 있다. 즉 보시는 사회적 · 경제적 약자에 대한 지원과 배려, 그리고 진정한 수행자와 종교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며, 지계는 중생에 대한 이타심을 실천하는 수행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바새계경》에는 지계를 오대시(五大施)라고 하여 ‘다섯 가지 큰 보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지계를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초기 경전에는 보시와 지계로 생천(生天)한다는 시 · 계 · 천 삼론(三論)도 자주 설해지고 있는데,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반드시 죽은 이후에 간다는 의미로 한정 짓기보다는 보시와 지계의 실천으로 자비심이 넘치는 사회가 되면, 현실 사회가 천상세계와 같이 행복한 세계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 경전에서 보시와 지계를 강조하는 것은 보시와 지계를 통하여 현실 사회를 행복한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을 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에는 재가자가 원하는 재물, 명성, 긴 수명, 사후에 좋은 곳에 가는 네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믿음, 보시, 지계, 통찰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즉 재가자들이 금생과 내생에서 갖가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 보시, 지계, 통찰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현대 한국 재가자의 신행과 비교해보면, 한국 재가자의 신행은 믿음(염불 · 절 등)과 통찰지(간화선 등)에 치중된 편이다. 보시와 지계가 부족하지만, 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재가자들이 오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보시에 대하여는 그 의미와 방법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특히 초기 경전에는 보시는 경제 형편과 무관하게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수행으로 보고 있으며, 인색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실천하면 현세와 내세에서 행복하다고 하였다. 보시를 실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의미는 보시는 실천 여부를 선택하는 수행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의무적인 수행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초기 경전에는 수행 중에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현대의 염불과는 성격이 다른 면이 있지만, 초기 경전에서도 불법승 삼보에 대한 염(念)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祈禱)를 통하여 복을 구한다는 내용은 초기 경전에서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복을 얻고 공덕을 쌓기 위해서는 보시, 지계와 함께 믿음과 통찰지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보시와 지계는 자리와 이타를 동시에 추구하는 수행이므로 이렇게 이타적인 사회적 실천에 의하여 복을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인 작복(作福)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 경전에서는 기도를 통하여 복을 구하는 것보다는 주로 보시와 지계의 실천을 통한 합리적인 작복을 설하였으며, 이러한 합리적인 작복 문화야말로 한국불교가 지향할 만한 신행문화라고 여겨진다. 

2) 경제적 양극화 문제 극복

유엔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절대적 빈곤은 1990년 기준 인구의 47%에서 2015년에는 14%로 많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유럽 등 세계적으로 대부분 증가하는 추세이다. 작년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문제를 다루어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빈부격차가 이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빈부격차로 인한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 양극화의 원인이자 문화, 사회 등 복합적 양극화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출산율 저하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출산을 하고 싶어도 사교육비의 부담과 빈곤층이 될 가능성이 많은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출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양육 부담을 줄여주는 차원의 대책으로는 출산율 저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 

3) 기후위기와 코로나19로 인한 재난 극복

한편, 경제적 양극화와 관련이 있으면서 약간 성격이 다른 문제가 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 문제이다. 즉 산업혁명 이전 1만 년 동안 지구 온도는 약 1℃가 상승하였으나, 1880년에서 2012년의 133년간 0.85℃가 상승하였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21세기 말에는 지구 온도가 약 3.7℃ 오르고 해수면은 약 63㎝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네덜란드 연구팀에 따르면, 온난화의 데드라인은 2035년으로, 2020년 현재로부터 15년 이내에 강력한 지구 온난화 방지 대책이 실행되어야 지구 온난화 추세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에 따라서는 2020년대가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대이므로 온난화 추세를 완화하고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보기도 한다. 최근에 급격히 증가하는 이상기후와 산불, 그리고 온난화를 가속시킬 수 있는 메탄이 북극에서 대량으로 방출되는 현상을 본다면, 인류가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단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후위기 극복에 세계적 공조가 안 되고 있는데, 제삼세계는 1년에 1천만 명 이상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현실에서 환경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없으며, 중국 · 인도 등 개발도상국의 입장은 현재의 온난화는 지난 2백 년간 선진국의 산업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이제 겨우 산업화를 시작한 나라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므로 온난화 방지에 세계적 공조가 가능하려면 경제 선진국들이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선행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1992년의 ‘국제연합 환경개발회의’는 국가 간 · 계층 간 빈부격차 완화를 지속 가능한 발전의 선결 조건으로 삼았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강령인 ‘21세기 지구환경 보존 강령’은 국가 간 · 계층 간 빈부격차 완화 방안을 첫머리로 다루었는데, 그 내용은 범지구적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국가가 빈곤한 국가를 도와주어야 하며, 한 나라 안에서도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빈부격차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2017년 3월 자국 산업 보호를 이유로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한 바 있으며, 국제적인 공조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국가 간 · 국가 내의 경제적 불평등은 지구 온난화 문제가 심화하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한편 지구의 미래를 위한 근원적인 기후변화 대책을 요구하면서 2019년 3월 15일에 50여 개국의 10대 학생들이 국제적 동맹휴업을 결의하였던 사실은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과 국제성을 환기해주고 있다. 2020년 들어서 한국에서도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증가하여 국회에서 ‘기후위기 비상선언’이 채택되었으며, 불교계에서도 ‘불교기후행동’이 출범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기후위기와 함께 올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재난 극복에 불교계도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하여 참여하여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재난의 극복에는 경제적 나눔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나눔에는 보시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 사상적 토대로 활용될 수 있는데, 경전을 보면, 보시는 금생과 내생의 여러 가지 행복의 원인이 되며, 해탈과 열반을 향한 수행일 뿐 아니라 보시는 반드시 닦아야 하는 수행으로서 보시를 안 하는 인색함은 지옥으로 가는 번뇌에 해당한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보시를 통한 경제적 나눔은 불교인이 행복을 얻고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행동에 옮겨야 하는 실천으로서,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기후위기 및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

 

장성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의 경영사상 연구〉(박사학위 논문) 〈원측 유식의 불성론과 그 정체성〉 〈4차 산업혁명과 불교의 경제윤리〉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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