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물질의 특성을 통찰하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있었다. 이 수행자는 순간순간 생멸하는 몸과 마음을 보면서 정말로 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내가 없다’는 이 사실이 너무도 두려워 사람들에게 “나는 있지요? 내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우리 역시 일상에서 ‘나는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확인시키기 위해 마음속으로 ‘나는 있는 것이지요?’라고 계속 소리 지르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일 것이다. 사실 상처와 고통의 밑바닥에는 나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에 대한 공포, 즉 내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태어났기에 죽기 마련인 모든 존재는 아프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통이 있다’라는 성스러운 진리,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이다. 바로 이 고통에 대한 자각 때문에 수행은 시작된다. 어딘가 아프니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해결책을 찾게 된다. 아래의 글은 몸과 마음의 병에 대해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가는 수행 과정에 대한 작은 기록이다.

‘혜정 스님’이라고 불리는 이 몸과 마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며 힘을 주는 병이 있어 왔다. 이러한 습관적 긴장의 패턴은 숨에 마음 챙기는 수행 과정 중에도 여실히,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수행 중, 몸에 통증이 느껴지면 재빨리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긴장하며 힘을 주었고, 숨이 잘 안 보이거나 숨을 놓쳤을 때도 숨을 쉬는 행위 자체에 힘을 주거나 또 숨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이 습관적 긴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숙고해보니 여기에는 공포가 있다. 두려워서 긴장하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정말 해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 두렵다. 도대체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살펴보니 스스로에 대한 깊은 혐오가 있다. 돌아보면 살아온 삶이 크고 작은 잘못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숨겨 보려고 스스로에 대한 그럴싸한 이미지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무언가 대단한 성취에 대한 열망도 가져보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넌 안 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결국 넌 정말 해야 할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이용되게 될 거야.’ 그런데 이 소리의 주인을 찾아보니 주인이 없다.

대신 찾은 것은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만들고 또 만들었던 ‘나’라는 것과 그 만든 것을 유지하기 위한 피곤함과 그 만든 것이 없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사실 실패도 성공도 없다. 원인이 충분하니 결과가 있었고 원인이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 결과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무엇이 잘못될까 긴장할 일이 아니다. 이 긴장의 패턴을 조금 더 들여다보니 평소에도 불필요한 긴장이 몸과 마음에 늘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나’를 있게 만들려는 욕심, 가능하면 더 대단하고 분명하게 존재하게 만들려는 이 욕심 때문에 긴장하며 힘을 준다. 즉 긴장의 근본 원인은 ‘내가 있다’라는 잘못된 견해에서 나온 ‘나’에 대한 집착이다. 현대적인 언어로 풀자면 자의식이 문제다. 자의식이 강할수록 쉽게 긴장한다. 따라서 ‘내’가 사라지면 ‘긴장’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제 ‘긴장’이라는 이 병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을 내려보자.

먼저 숨에 더 부지런히 마음을 챙긴다. 숨에 마음을 두는 수행을 통해 집중력이 좋아지면 몸과 마음이 순간순간 생멸하며 거기에는 어떠한 ‘나’도 없음을 통찰하게 된다. 그러므로 숨에 계속 마음을 두어 집중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몸에 통증이 생기면 무너지기 마련인 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통증을 참고 숨기며 아무 문제가 없는 몸으로 착각하고 싶어 했던 ‘내’가 바로 이 통증을 더 꼬이게 만든 주범이다.

평상시에도 이 몸과 마음을 ‘나’로 집착할 때마다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것이 조건 따라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임을 다시 인식한다. 이렇게 견해를 조금씩 바르게 잡아가는 것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단지 물질과 정신으로 보려고 의도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한다.

그리고 자책이 아닌 참회를 한다. 이 몸과 마음이 조건 따라 잘못을 행한 것이지 자책할 만한 ‘내’가 없음을 이해하고 잘못의 원인을 숙고하며 참회하고 이 잘못으로 고통에 처했던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에게 자애와 연민을 보낸다.

만약 관계에서 어떤 갈등이 생기면 몸과 마음을 바라본다. 그 갈등에 ‘나’와 ‘너’에 대한 어떤 취착이 없는지 점검한다. 발견되면 버려진다. ‘나’로부터의 자유와 ‘너’로부터의 자유가 동시에 실천되는 순간이다. 취착하면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거나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취착이 사라지면 기대와 요구도 없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에게 매여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무언가 중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상대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고 둘 간의 관계 역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조건 따라 만난 관계일 뿐 특별할 것이 없다. 조건이 사라지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가슴 태웠던 이 관계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 잘못을 지적할 때 마치 이 실수로 인해 죽게 되기라도 할 듯 공포감이 엄습하는 원인에도 ‘내’가 있다. 물론 작은 실수나 잘못도 용납이 안 되는 긴장된 환경에서 살아온 영향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거기에는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래서 그 누가 하는, 그 어떠한 형태의 지적도 마음에 걸리지 않도록 그 순간 스스로의 마음을 바라보기로 한다.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이나 저항감도 사라진다. 그리고 인간의 명예욕과 권위적 형태에 대해 강하게 반감을 느끼는 것도 ‘나’를 크게 보이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깊이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예욕이나 권력욕에서 해방되는 길은 다른 존재, 저 몸과 마음에 대한 저항이나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을 나를 크게 보이게 하려는 욕구, 나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긴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모든 것은 조건 따라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일 뿐이다’라는 무아의 진리를 수행하는 것은 ‘나’의 과잉, 자의식의 과잉으로 발생하는 긴장과 스트레스성 질환 등의 현대적 정신병에 유용한 약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있는 것이지요?”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이 마음을 알아차리고 숨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숨과 함께 이완한다. ‘나’를 만드는 피곤함, 그 만들어진 ‘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피곤함, 그 만들어진 ‘내’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피곤함, 이 모든 고통이 끝나는 자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염불한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seoseonja@hotmail.com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