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조교수

나에게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친구지만 내 마음 속에 콕 박힌 얼음처럼 아프고 아린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사람에 따라 초등학교 동창이 더 귀한 경우도 있고 대학교 동창이 더 귀한 경우도 있는데 나는 고동학교 동창인 이 친구가 동창 중에 젤 귀한 친굽니다. 사실 나도 친구가 없기는 이 친구와 동병상련입니다.

이 친구는 지금 직업이 없습니다. 돈 버는 곳도 없습니다. 결혼도 안 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면 갈 곳이 없습니다. 나온 곳이 없으니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저에게는 짧은 이 시간이 그 친구에게는 길기만 할 텐데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있으니 나와 똑같이 하루가 짧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겁니다. 궁금한 대로 목소리 듣고 싶은 대로 매번 전화를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혹시 또 돈을 부쳐 달라고 할까 겁이 나기도 합니다. 벌써 그렇게 몇 번씩이나 송금을 해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큰돈을 부치는 것도 아니니 늘 돈에 목이 마를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떻게 하다 보니 자주 전화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이 친굴 만났는데 글쎄 이마가 훌러덩 벗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불과 한두 달 전에 만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때라 이렇게 금방 머리가 벗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심하게 표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훌러덩이라고 하면 이마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고속도로가 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마에 있던 머리가 상당히 사라져버려 휑해 보인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있는 머리도 숱이 꽤나 빠져나가서 듬벙등벙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너 그러다 장가도 못 가겠다. 그래서 내가 그 옆집 처녀 중신 들어왔을 때 두말없이 합치라고 하쟎았더냐. 혼자선 안 풀리는 인생도 둘이 살다 보면 척척 풀리는 수가 있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더냐. 사실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 참으면 안 해도 될 말도 일단 꺼내놓으면 줄을 이어서 상대방이 지겹도록 떠드는 악습이 있습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이 친구가 무슨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련만 내가 못 견뎌 안달이 나는 겁니다.

또 한 번은 그 친구가 손가락 끝이 붓는 병이 걸렸습니다. 붓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색깔도 약간 변해가는 것이었습니다. 일 년에 명절에 한두 번, 그밖에 사사로이 한두 번 정도 만나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 알 수도 없습니다. 여간 붓고 변색이 된 게 아니라서 겁이 덜컥 나서 병원에 가봤느냐, 뭐라고 하더냐 묻는데 안 가봤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으시냐고 했더니 자기가 봐서는 큰 문제 아닌 거 같아서 그냥 두고 보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끌고 병원에 가고 싶은데 명절 중이라 마땅히 갈 데는 없고 으레 그렇듯이 헤어질 때 알량한 돈 몇 푼 쥐어주고 제발 병원에 가라면서 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나는 마음이 한결같지도 못하고 깊은 사랑도 없습니다. 내 공부, 내 일을 꾸려나가는 일에나 없는 부지런 떨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은 건 좀 가라앉았느냐 색깔은 제대로 돌아왔느냐 했더니 그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병원에는 가봤냐고 했더니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잠시 감감하더니 대뜸 돈을 좀 부쳐달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는 간도 결코 크지 않고 친구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도 못됩니다. 겨우 십만 원, 삼십만 원…… 할 뿐 내가 놀랄까봐 단위가 올라가는 액수는 스스로 부르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나는 그러마 하며 이번에는 진짜 병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자기가 아마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습니다. 술 줄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는 또 자존심이 강하기도 합니다. 늘 그냥 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갚겠다고 하고 어떻게 하면 돈이 생길 거라고 합니다. 아니, 나를 사랑해주는 마음에 자기가 돈을 벌면 난 아무 걱정도 할 게 없다고 합니다. 그때 난 머릿속에서 돈 걱정은 싹 비워버리고 공부만 하라고 합니다. 자기가 용돈도 주고 술도 사주고 어디 멋진 데 가서 여자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전화로는 그러게 말야, 꼭 그래라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귓등으로 흘려버릴 뿐입니다.

요새 며칠째 무척 더웠습니다. 왜 이 친구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화라도 해봐야 할 모양입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 이 친구와 꼭 같은 마음이 들어 있어서 나도 늘 가난하다는 것을. 나도 그 친구가 어머니 곁을 떠나서 멀리 헤매다 돌아온 것처럼 나도 집을 떠나서 벌써 얼마나 오래 방황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내가 이 친구와 단짝이 된 것은 우리들 속에 들어 있는 이 가난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이 친구가 이 글을 볼까 걱정이 됩니다. 그렇지만 고시공부 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그만두고 글씨라고는 쳐다보기만 해도 두통이 온다고 한 친구니까 안 그러겠지요. 또 보면 어떻습니까? 야, 니 생각이 너무 나서 넋두리 한 번 해 본 걸 갖고 뭘…… 하고 얼버무릴 작정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친구와 내가 머리가 아주 맑았던 옛날에 그 친구가 내게 갤러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탁구도, 당구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나에겐 아내가 없었습니다. 직업도 없었습니다. 그 친구와 내가 아무 것도 어긋날 게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참 까먹은 게 있습니다. 그 친구 손가락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그 친굴 너무 걱정하실까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그게 이상하게도 감쪽같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마도 그렇게 갑자기 원상복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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