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들의 인연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입니다. 

백 년 평생을 약속한 사랑도 변하여 이별하고, 백 년 평생을 지극히 사랑했던 이들도 결국 죽음으로 이별합니다. 만남과 이별은 모든 존재가 매일, 매 순간 맞이하는 삶입니다. 

그중에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가장 큰 만남과 이별입니다. 이 만남과 이별은 가장 큰 기쁨이며 고통입니다. 또는 반대로 탄생이 고통이요, 죽음이 기쁨일 때도 있습니다. 

뛰어난 수행자들은 숱한 감정을 뿌리는 탄생과 죽음을 하나로 만듭니다. 그는 옷을 갈아입듯 육신을 바꾸고, 좌탈입망(坐脫立亡)하며 생사를 초월합니다. 여행을 다니듯 오고 갑니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에게 죽음은 큰 숙제입니다. 저는 평생 가장 큰 이별-죽음에 대해 계속 준비 중입니다. 

어느 봄날 문득, 저는 불교대학 강의 도중에 모두 모여 함께 공부하고 있는 대중들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죽으면 장례식장 오지 마시고, 여기 이렇게 즐겁게 공부하고 있으라’고 이야기했더니,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 꼭 가야만 한다는 대중을 달래며, 이것이 저를 가장 기쁘게 하는 조의(弔儀) 방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난달 87세로 죽음을 맞이한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유대인으로,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 된 사람입니다. 그녀는 진보의 아이콘이었으며, 평생을 여성과 소수자의 편에서 투쟁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이자 투사(鬪士)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 앞에서 감사함과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녀의 관 앞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며 특별한 추모를 올린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긴즈버그의 운동 트레이너였습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삶과 20년 동안 4차례의 암 투병, 노령에도 끝까지 연방대법관의 소임을 책임진 그녀에 대한 존경이었습니다. 인생 전체가 도전이었으니, 그녀에게는 이것이 꽃보다 더 좋은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라의 문화와 삶에 따라, 개개인의 삶의 방식과 마음에 따라 죽음에 대한 관념은 모두가 다릅니다.

미크로네시아라는 열대 지역 나라는 장례식을 축제로 만듭니다. 참석한 마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합니다. 아프리카의 가나도 수개월 동안 장례 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어느 비구 스님은 가장 존경했던 스승, 춘성(春城, 1891~1977) 스님의 다비식 때, 염불 대신 가요 〈나그네 설움〉을 노래하며 열반을 축하했던 옛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날을 추억하며 〈나그네 설움〉을 노래하는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기쁨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남겨진 이들에게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그리움과 기쁨으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춘성 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했던 많은 이들이 평생 가장 기억할 만한 놀라운 이별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를 듣는 수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생사를 초월한 수행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발원할 것입니다.

이것은 춘성 스님의 삶이 드러난 것입니다. 스님의 삶이 기발한 축제요, 중생들의 상식을 풍자하는 기쁨이었으며,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가능한 다비식이었습니다.
지난해, 한 보살님의 98세 노모의 49재 막재 회향 날이었습니다. 4대에 이르는 가족들 4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세 시간에 이르는 천도재를 마무리하고 나서, 저는 회향 법문 대신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가족들은 기뻐하며, 영단에 모셔진 어머니 영정사진 주변으로 앉았습니다. 마치 어머니 생일 잔칫상 앞인 것처럼 서로를 부르며, 아이들과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머니 영정사진 주변으로 연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 대신 화목한 자손들의 웃음소리가 법당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 맞이한 49재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여한 없이 잘 살았다는 어머니의 삶이 어여쁜 연꽃 40송이를 피웠습니다. 가족들은 이 사진 한 장으로 4대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아름다운 이별을 기억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살기를 염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별을 슬퍼합니다. 하지만, 슬픔뿐 아니라 기쁨도 함께 뿌려지는 이별이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동적입니다. 죽은 이가 모든 것을 성취해서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면, 이별은 가벼울 것입니다. 우리는 고인의 삶을 보고, 우리의 삶도 이렇게 충족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서로에게 고통이 되는 만남과 이별이 아니라, 가장 큰 기쁨이 되는 만남과 이별이길 바랍니다.
대법관이든 평범한 소수자이든, 스님이든 일반인이든 직업과 부귀영화, 권력 등과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행복한 삶, 즐거운 죽음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과 장례식은 어떠했으면 좋을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 그러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지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불법을 따르는 불교도라면 붓다의 열반을 깃발 삼아, 붓다의 삶을 기꺼이 즐겁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의 삶과 내일의 죽음이 모두 가장 완전한 행복, 니르바나에 이를 것입니다. 

okbuddha@hanmail.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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