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해 동국대학교 강사

1. 인간의 인식과정의 특성과 불교연구

인간의 인식 거의 대부분은 비교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선 우리가 획득한 거의 모든 인식의 결과들, 즉 많다 적다·크다 작다·좋다 나쁘다·왔다 갔다·빠르다 느리다, 또는 만큼·처럼·보다 등의 인식들이 모두 비교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가장 자주 하던 공부가 비교를 통한 반대말과 비슷한 말 찾기였던 기억이 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새로운 인식은 기왕의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즉 현재 이루어지는 모든 인식은 과거의 인식에 토대를 두고 그것과 비교되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금 5분 전부터 지금까지 해온 사고의 내용을 점검해 보라.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비적 인식, 비교적 인식은 보색효과에 따라서 더욱 명징(明澄)한 인식을 가능케 해준다.

흰색은 검은 색과 견주어 보면 흰색만 놓고 볼 때보다 훨씬 더 희게 보인다. 도시생활만 해본 사람보다는 농촌생활도 해본 사람이 도시생활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교의 이해를 위해서 불교만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보다는 타종교를 보색으로 삼아 불교를 보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불교의 입장에서 타종교는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거울이다. 자신이 자신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타인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면 좀더 자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게 타종교는 자신을 견주어 볼 수 있는 아주 고마운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종교를 아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한국불교학은 아주 유용한 연구방법 한 가지를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불교연구는 아직까지 타종교와의 비교를 통한 연구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통한 불교연구는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을 만큼 절박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2. 한국불교학의 타종교 연구

한국불교학이 타종교 연구에 기울이는 관심의 정도는 너무나 미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좀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실은 이보다 더 심각한 표현이 필요하다.

 

필자는 한국불교학이 타종교 연구에 기울이는 관심의 정도가 이토록 미진한 이유가 늘 궁금하다. 얼핏 생각하자면, 한국불교학의 연구역량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 하나만 연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게다가 타종교까지 동시에 연구한다는 것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한국불교학의 연구 역사를 감안할 때 아직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불교연구에 관한 일본이나 유럽의 근대적 학문방법의 역사를 놓고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나 심지어 국가도 없이 세계에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티베트 불교의 비교종교학적 연구 수준을 참작해 보면 그런 판단은 호사스러운 생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다른 나라 불교학의 타종교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불교연구 수준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불교학계에서 비교종교학적 비전을 가져 보지 못해 왔던 이유를 한국불교학도들의 연구역량의 부족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불교의 가장 유력한 상대종교는 기독교다. 한국에서 기독교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불교연구나 불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인 편이다.

기독교 신학자로서 불교연구나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들이 이제 열 손가락을 넘을 정도이다. 더구나 신학대학에서 불교로 석사논문을 쓴 사람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반면에 불교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석사든 박사든 불교대학이나 승가대학에서 기독교나 기독교와의 비교로 학위논문을 썼다는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한국불교학도들의 연구역량의 부족이 그 이유가 아니라면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외면해온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첫번째 이유는 호교적 보수주의에 입각한 일방적 자신감 탓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한국에서의 불교학의 목적은 대부분 호교를 위한 목적으로 신앙심에 입각하여 진행되었다. 신앙심에 입각한 일방적 자신감은 종교연구가 ‘불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의 진리는 모든 종교를 포괄하거나 혹은 여타의 종교들과는 비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교 하나만으로 완벽하다는 뜻이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불교만 완벽하게 알면 여타의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알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불교나 제대로 하라’고 한다.

이와 달리 어떤 이들은 한국불교학이 타종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턱없는 자신감 상실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 하나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무슨 타종교까지 신경을 쓸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다. 조선조 504년 동안 숨통을 옥죄여 겨우 목숨만을 부지해 왔던 불교가 이제 막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제 몸 추스르기도 급급한데 어디 남의 종교에까지 눈을 돌릴 여력이 있느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교학을 하는 이들이 타종교와의 비교연구에 무관심한 이유는 아마도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 가장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비교종교학을 해야만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지나친 자신감이나 턱없는 자신감 상실로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외면할 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3. 한국사회의 종교적 정황

한국에서 비교종교학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의 종교적 정황 때문이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이 있는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개신교인들은 자신들만이 기독교라고 하지만 종교학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서 기독교라고 부른다――이다.

조사의 주체나 방법에 따라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한국 사람 4명 중에서 한 사람은 불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기독자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게다가 불교와 기독교의 신자는 한국사회의 종교인구 중 9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종교간의 문제는 거의 불교와 기독교 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타종교라는 지나치게 폭넓은 범주 대신에 기독교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한국의 종교적 상황이 갖는 뚜렷한 특징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가정 등 모든 단위공동체들이 전부 다종교 사회라는 점이다. 심지어 이제는 다종교 부부마저 드물지 않다.

현재의 대통령 부부가 좋은 예이다. 그들은 일요일 종교생활을 따로 한다. 이런 정황은 앞으로 더욱 심화되리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불자에게 있어 기독자는 이제 이웃일 뿐만 아니라 직장동료요, 학교의 급우요, 친지요, 가족이요 심지어 부부다.

 

그러므로 타종교를 모른다는 것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는 지식이나 기호가 아니라, 삶의 양식 전체를 규정하는 가치관이자 인생관이며 세계관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타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이들을 이해한다는 의미가 된다. 모든 학문은 궁극적으로 인간학이며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명제는 불교학에 대해서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특히 한국의 불교학은 타종교 연구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만일 한국의 종교적 정황에서 불교가 기독교 이해를 외면한다면 이는 불교가 직장의 동료, 학교의 급우, 일가친지, 심지어 가족의 이해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불교학의 기독교 이해는 불교 본연의 필수적 의무라고 할 수밖에 없다.

4. 경쟁상대 혹은 친구

그렇다면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어떤 관계인가?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둘은 분명 경쟁상대이다. 70년대 이후 기독교가 내건 최대의 캐치프레이즈는 ‘신자 배로 불리기 운동’이었다.

후발 진입한 외래종교로서 이 운동의 첫째 대상은 예비종교인인 유소년이나 청소년층이었지만, 기성세대를 향해서는 비신자보다 이미 종교심이 배어 있는 타종교의 기성신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신자 배가(倍加) 운동은 기성종교인인 불자들을 겨냥한 개종운동이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에 있어 불교는 당연한 경쟁상대였다. 한편 기성의 자기 신자들을 공격적 선교를 앞세운 기독교에 계속 빼앗겨 온 불교 역시 기독교를 경쟁상대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반면에 불교와 기독교는 경쟁상대가 아니라 동반자요 친구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산업사회에서 자기 종교인을 감소시키는 세력은 타종교가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과 합리적 가치관이라는 명분아래 오도되는 이성만능주의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까지 담보하는 물신(物神)주의와 쾌락적 세속주의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는 불교가 아니라 이성만능주의이며 물신주의고 세속주의다. 불교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불교나 기독교가 경쟁상대나 적으로 여기고 타파나 굴복을 도모해야 할 상대는 기독교나 불교가 아니라, 이성만능주의나 세속주의라고 하는 공적(公賊)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탈종교화나 세속화로 내몰리는 것은 경쟁종교 때문이 아니라 이들 공적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종교는 세속화에 함께 대응해야만 할 동반자요 친구라는 것이다. 하여튼 경쟁상대라고 해도 좋고 동반자라고 해도 좋다. 경쟁상대라면 이기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동반자라면 아끼고 돕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고서는 이길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불교가 기독교와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면 경쟁력 우위의 확보는 필수적이며, 경쟁력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경쟁상대의 파악 역시 필요 불가결의 요소이다. 반면에 불교와 기독교가 경쟁상대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을 필요로 하는 동반자라면 역시 상대를 알아야만 한다.

친하다고 여기거나 소중하다고 여기는 친구는 반드시 깊은 이해를 이루고 있는 사이다. 깊은 이해없이 결코 진정한 친구나 협력자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가 한국불교학이 기독교 연구를 회피할 수 없는 두번째 이유이다.

5. 절체절명의 과제

다종교 사회의 가장 큰 단점은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불교가 한국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 때문에 입은 물적, 심적 피해는 가볍지 않다.

방화, 파괴, 행패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종교심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팔만대장경 같은 세계시민의 문화유산을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을까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사실 이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은 이런 위험에 대한 대비가 너무 허술하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이다. 이 과제를 위해서는 어떠한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종교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예외없는 합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한 방법으로서 종교간의 대화를 비롯한 수많은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자들이 불교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서로 대조를 이룬다. 익히 아는 것처럼 일부는 불교에 아주 적대적이다. 그들은 심지어 불교를 향해 공공연한 파괴를 시도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불교에 놀랄 만큼 대단히 호의적이다. 예컨대 한국 개신교 신학의 거목이었던 변선환 목사는 불교에 심취한 결과 감리교 신학대학장, 교수, 목사, 심지어 평신자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그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두 부류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이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의 정도이다.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은 불교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고, 불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불교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불교를 향한 적대적 공격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치고 불교에 적대적인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불교에 적대적인 기독자들을 우호적으로 만드는 길은 불교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자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자들이 먼저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들에게 불교만을 주입하고 설득하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시도는 이해는커녕 오히려 반발만 조장한다. 타종교를 이해하는 정도와 타종교인에게 자기 신앙을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정비례한다.

우리가 기독교인과 대화를 나눌 때 그가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아주 쉽게 우리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전혀 모른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듣기 몹시 어려울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독백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여러 기독교 신학모임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고 그것의 주류는 불교 이해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모임을 주도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기독교를 이해하는 불자나 불교학도가 드물다는 고충을 토로한다.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불자의 기독자를 향한 불교설명은 역시 독백에 불과하다. 대화는 일방적 독백이 아니라 쌍방적 통교(通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필연적으로 노정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다종교 사회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이해는 필수적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측이 저지르는 불교 훼손을 궁극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길은 그들이 정확한 불교이해를 갖도록 도와주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틀림없이 불교학도들이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불교의 타종교 연구는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6. 종교 자체의 필연적 과제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인 동체(同體)자비의 이상은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현실적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한편 사랑이란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자신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타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반드시 타종교인을 위해 필연적인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타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성실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향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이나 자비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전제되며,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전제로 하며,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위해서는 상대를 아는 것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이해를 도모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반드시 타종교인에 대한 진지하고 정직한 이해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타종교인에 대한 진지하고 정직한 이해를 기피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불자나 기독자는 온전하고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타종교 연구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한국의 다종교 사회는 물론 동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종교간의 대화에도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이제 종교간의 대화에 결정적 대전제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한국불교는 이제 기독교 탐구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7. 세계적 추세의 비교종교학적 연구

급속도로 발달한 교통이나 정보전달의 수단은 지구 전체를 한 개의 마을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24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할 공간은 지구상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는 그대로를 실시간(real time)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이나 정보전달의 수단에 의해서 시공간 상의 거리가 상대화됨으로써 지구는 이제 하나의 마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과거의 폐쇄적 사회에서와는 달리 이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동시에 한 공간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종교학도에게 관심의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학도들은 눈앞의 같은 지점에 놓인 종교들을 동시에 바라보게 되었다. 눈앞에 동시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종교들 중에서 오로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하나의 종교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은 편협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종교학의 아버지 맑스 뮐러가 괴테로부터 인용한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이제 종교학도들에게 금언처럼 여겨지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이제 종교연구는 둘 이상을 서로 비교하여 연구하는 것이 새로운 추세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이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립대학인 서울대에 종교학과가 생긴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서강대학교에서도 신학과 대신 종교학과를 설치하여 이미 비교연구로서 박사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대구효성가톨릭대, 가톨릭성심대학교에 종교학과가 개설되었으며, 이화여자대학교는 종교교육학과, 심지어 원광대학교에는 동양종교학과가 있었다.

지금은 학과들이 통폐합되어 학부제로 운영되고 있는 대학들에서도 교과과정에는 큰 변화가 없다. 이들 학교에서는 자기종교의 전통 외에 타종교에 대한 교과과정을 균형 있게 배치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학과개설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총회신학대학, 한국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등 개신교 신학대학들에도 예외 없이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의 교과목들이 개설되어 있다.

물론 동국대학교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는 기독교 재단이 설립한 종립대학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교과과정을 거치면서 종교학적 소양을 갖춘 학생들이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다양한 비교종교학적 탐구를 진행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신학대학에서는 대승불교와 테라바다불교를 분리해서 가르치고 있는 정도이다. 이에 비해 한국불교학의 메카인 동국대학교에서는 본격적인 비교종교학적 교과과정을 기대할 수 있는 종교학과의 개설은 아직 그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불교학부의 ‘종교사’와 ‘비교종교학’ 과목에서 타종교에 대한 이해의 시도를 겨우 맛볼 수 있을 뿐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비교연구의 방법으로 시도되는 학위 논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기독교 신학대학들과 같은 성격을 갖는 중앙승가대학이나 지방의 불교전문 승가대학[강원]에서 기독교 관련 과목을 이수한다는 것은 가히 꿈도 꾸기 어려운 현실이다. 기독교의 신구약 성서는 세계는 물론 한국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건만, 불자나 불교학도들은 읽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나 승가대학의 교과과정에 있어서 이러한 비교종교학적 비전의 결여는 결국 기성학자들의 인식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한국에는 종교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들이 총망라된 한국종교학회가 있다. 이곳에 비교종교분과가 있지만 동국대학교 쪽의 불교학자들의 참여는 거의 없는 편이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 불교분과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 또한 기존 불교학회에서의 연구와 변별점을 찾기 어렵다. 종교학은 불교학과 다른 그 자신만의 분명하게 고유한 연구방법이 있으나 아직은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미흡하다. 그저 종교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전부 종교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부족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외국에서는 비교연구만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소들이 발족하여 연구성과를 쌓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미국에서는 불교적 정서가 바탕이 된 저널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Buddhist-Christian Studies)’가 이미 20호 출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의 ‘남산(南山)연구소’는 이미 비교연구의 단행본들을 여러 권 출판하였다. 이들 연구를 통해서 비교연구에 정통한 거장들이 배출되었고, 능력 있는 학자들이 비교종교학적 연구로 몰리고 있다.

 

학자들의 이러한 선도에 따라 스님, 신부, 목사, 수녀들이 한데 모여 토론과 출판은 물론 사회적 공동 목표들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번역단계이지만 대원정사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 시리즈의 10호 출판을 바라보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에 새롭게 개설된 ‘비교종교학’과 ‘종교사’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고 이런 관심이 이제 대학원의 석사과정에까지 이어지려고 하고 있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폴 틸리히는 새 시대를 전망하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으로 영적인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한국의 불교학계도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발맞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8. 종교연구에 대한 새로운 비전

비판적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 사조가 등장한 이후 종교에 대한 관심은 치명적이라 할 만큼 줄었다.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 낭만주의 덕분에 다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일었으나, 현대의 과학주의는 다시 종교적 세계관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종교에 대한 신학적 혹은 교학적 연구의 관심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과 달리 종교간의 비교연구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종교연구에 있어서 두 개 이상의 종교를 비교하여 연구하는 방법은 이제 거역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세계적 추세이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학도들의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은 더 이상 따로따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들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지구촌이라고 하는 한 장소에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제 불교사는 기독교사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세계종교사의 일부로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의 교과과정에서 비교종교학 관련 과목, 특히 기독교 이해를 위한 과목들의 개설과,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와 불교를 직접적으로 비교연구할 수 있는 종교학과의 신설이 필요하다.

나아가 대학이 수요자 중심의 경쟁력 있는 체제로의 구조조정을 강요받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과감하게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학과’와 같은 전위적 개념을 갖는 학과의 개설이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셋째, 비교종교학적 연구를 위해서는 과감하고 전향적인 개방적 태도가 필요하다. 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목적은 우선 자기 신앙의 수월성(秀越性)을 천명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비교종교학도 분명 이러한 목적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하나의 마을로서 다종교 사회가 된 지금의 종교연구는 이러한 호교적 목적 외에도 종교간의 상호이해와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 기여해야 한다.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서는 전향적인 개방적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불교학의 기독교 연구는 기독교로부터 몰려오는 불교 훼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음으로 불교학이 세계적 추세의 이러한 비교연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연구업적을 수용할 수 있는 도구언어의 습득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각 종교 전통마다의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텍스트 언어를 해독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제이다. 주요한 기독교 텍스트들은 라틴 어나 히브리 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영어나 독일어 혹은 불어와 같은 도구언어를 먼저 습득하는 것이 시급하다. 언어의 습득의 중요성은 신학이나 교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에 있어서 마찬가지겠으나 비교종교학적 연구에서는 더욱 결정적이다. 기성의 비교종교학적 연구성과들을 수용하고 종교연구의 세계적 추세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도구언어의 능숙한 습득 없이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한국의 불교학계도 이제 이러한 능력이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본다. 바로 이번 학기에 한 개신교 종립대학에서 기독교 신자가 아닌 불교전공자를 겸임교수로 채용했다. 세계적 현실이나 한국에서의 기독교 신학이 불교 연구에 관심을 갖는 수준을 감안한다면, 한국불교학은 연구능력은 물론 타종교를 바라보는 시각마저도 많이 뒤쳐져 있다. 그러나 지금 시작해도 늦지는 않다. <끝>

윤영해
동국대학교 선학과 및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종교학 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강사. 논문으로 <주자의 불교비판 연구><불교와 기독교의 자기부정의 의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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