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교학 종주권’ 회복을 꾀하다

척박했던 인도의 불교학 연구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불교학은 ‘세상과 나의 연계’를 근원적으로 해명하고 소통시키는 기제로 인정받고 있다. 유신론적 신관 또는 수행체계로 간주되었던 불교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 역사성이 확인된다. 서구 학계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던 붓다가 실존했던 인물임이 고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불교는 전 아시아적 문화이자 철학 사조로서 동양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발군의 석학들을 배출했다. 이들 학자군에 고빈드 찬드라 빤데(Govind Chandra Pande, 1923~2011)를 포함시킨다면 다소 의아한 시선이 있을 수도 있다. 불교학자라기보다는 역사학자로 더 알려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인도학은 인도인보다는 주로 서구인의 주도하에 전개되었고, 인도인 가운데서도 상류 지식층을 형성하는 브라만 또는 힌두 근본주의자들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했다. 따라서 그들의 전유물인 베다(Veda) 전통과 산스끄리뜨 문학이 인도 고유문화의 핵심으로 강조되었고, 이를 아리안의 유입에서 얻어진 산물이라고 보는 식민지 시대 서구 학자들의 주장과 이해를 같이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관이 오래도록 인도인과 세계인을 지배했던 베다 정통주의 사관이다. 실제로 정통(āstika) 비정통(nāstika)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로 인도 종교에 접근하는 방식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연구대상에 대한 편향된 선입관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정작 자신 안에 내재한 아리안 중심 인종주의와 베다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 등은 국제무대에서 인도학계 입지에 마이너스로 작용되어 왔다.

반면, 역사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래된 스리랑카는 왕권의 후원을 받아 사실상 인도불교의 정통성을 승계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인도 출신 붓다고사(Buddhaghosa)의 삼장과 그 주석서의 정립 이래, 테라와다(Theravāda)의 보수적 전통을 이끌었던 스리랑카는 근대 이후 영국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영어와 서구식 교육으로 단련된 불교학자군을 배출했다.

자야틸레케(Jayatilleke),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말랄라세케라(Malalasekera), 위제세케라(Wijesekera), 칼루파하나(Ka-lupahana) 등과 같은 유명 학자들이 모두 스리랑카 출신인 데 반해, 인도 출신의 학자는 덧(Dutt), 무르띠(Murti), 자이니(Jaini) 등을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이들 스리랑카 출신 학자들의 특징은 서구 학자들에 비해 고대 인도의 언어와 종교문화에 친숙하고 해박하다는 데 있다.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월적 특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인도와는 대조적으로, 불교를 조기에 받아들이고 국가적으로 장려했던 스리랑카는 인도와의 지리적 문화적 근접성을 십분 발휘하여, 세계화의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위제세케라(Oliver Hector De Alwis Wijesekera)의 인도인의 삶과 사고에 대한 근원적 이해에서 비롯된 초기불교 해석, 올리벨(Patrick Olivelle)의 명쾌하고 간결한 《마누법전》과 우빠니샤드 번역 등은 인도학자를 뛰어넘는 인도문화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스리랑카에 비해 인도의 불교 연구가 척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가 전자에게는 정통, 후자에게는 비정통으로 간주되었다는 데 있다. 스리랑카는 불교 전래 이후, 항상 불교도의 눈으로 불교를 읽었다. 반면, 인도인에게 불교는 오랫동안 브라흐마니즘(Brahmanism)에 반하는 비정통으로 간주되었다. 인도의 종교와 문화는 베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신념이 인도학계의 중심에 굳건히 서 있었고, 불교는 아류이고 방계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19세기에 시작된 서구의 불교 연구는 초기불교사와 관련해 문헌학적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그 역사성을 검증하고 재구성하는 데 집중되었고, 이로써 근대불교학이 시작되었다. 아시아에서 근대불교학의 중심지가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가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빤데는 인도가 불교의 종주국임을 확인시켜준 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빤데는 그의 저서 《불교의 기원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Origins of Buddhism)》(1957)에서 인도문화에서 철학적 · 사상적 근저를 이루는 토대는 베다에 근거를 둔 브라흐마니즘이라기보다, 멀리는 아리안(Aryan) 유입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아란냐까(Āraṇyaka) · 우빠니샤드(Upaniṣad) 시대의 인간 내면에 대한 주관적 탐구라는 철학적 조류를 이끈 슈라마니즘(Shra-manism) 곧, 자아성찰과 명상에 주로 가치를 둔 자유사상 운동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한 이 분야의 연구는 서구에서는 바샴(A.L. Basham)이 《아지비카의 역사와 교리-사라진 인도 종교(The History and Doctrines of the Ājīvikas: a Vanished Indian Religion)》(1951)를 발표하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빤데는 우빠니샤드 철학의 비(非)베다적 기원설로 인도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브라흐마니즘과 슈라마니즘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는 시도는 그가 재직했던 라자스탄대학에서 수학했던 네덜란드 출신 브롱코스트(Johannes Bronkhost)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경력과 저서

빤데는 영어, 힌디어, 산스끄리뜨어 등으로 60권 이상의 저서와 100편 이상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브라만 출신인 그는 역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생애 말년인 2008년에 《리그베다(Rigveda)》를 번역하기도 했지만, 여느 학자들처럼 인도 문명을 베다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의 산스끄리뜨어 실력은 십 대에 이미 웃따르쁘라데쉬(Uttar Pradesh) 주의 시험에서 최고임을 인정받았고, 알라하바드대학의 학부와 대학원을 최고의 성적으로 수료했다. 1947년 알라하바드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57년까지 고대사, 문화 및 고고학 관련 학과에서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그 후 이 대학교 인문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라자스탄대학의 부총장 또한 역임했으며, 인도 고급연구원(Indian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알라하바드 박물관 협회(Allahabad Museum Society), 고등 티베트학 중앙연구소(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 등의 회장 등을 거쳤다. 그는 2010년에 인도 정부에서 수여한 빠드마 슈리(Padma Shri)상을 수상하는 등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그는 다야 끄리슈냐(Daya Krishna)와 함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인도 철학계의 양대 거인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의 힌디어 저서 《샹까라짜리야의 삶과 사상(Sankaracharya: Vi-char aur Sandesh)》은 베단타철학의 대가 샹까라짜리야의 사상을 역사가의 기준에서 철학적으로 해명한 명저로서, 1994년에 영어로도 출판되었다. 《아포하싯디(Apohasiddhi)》 《니야야빈두(Nyāyabindu)》는 불교 논리학 고전을 힌디어로 번역한 작품이다. 특히 《불교의 기원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origins of Bu-ddhism)》는 1961년에 간행된 독일 동방 학회지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ändischen Gesellschaft에서 지난 20년 동안 이 분야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은 빤데의 박사논문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57년 초판 발행된 것이다. 그의 힌디 저서 《불교 전개의 역사(Bauddha Dharma ke Vikas Ka Itihas)》(1963)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에 의해 이 방면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1978년에 출간된 《슈라마나 전통-그 역사와 인도문화에 대한 기여(Śramaṇa Tradition: its History and Contribution to Indian Culture)》는 두 권으로 구성된 그의 역작 《인도문화의 토대(Foundations of Indian Culture)》(1984) 제1권의 한 장인 슈라마나적 부정(Śramaṇic negation)에서 재론되고 있다. 1권은 ‘고대 인도의 정신적 비전과 상징적 형태(Spiritual Vision and Symbolic Forms in Ancient India)’, 2권은 ‘고대 인도사회사의 차원들(Dimensions of Ancient Indian Social History)’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렇듯 그는 산스끄리뜨 문학을 비롯해 역사, 철학, 불교학에 이르는 광대한 연구 영역을 커버하고 있으며, 특히 베다에 대한 열정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대부분의 인도학 관련 학자들이 베다 중심의 사관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경우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저작 가운데는 베다, 미맘사, 베단타 등 브라흐마니즘 전통에 속하는 작품이 다수 포진해 있다. 샹까라짜리야에 대한 전기에서는 사료에 근거한 역사적 인물 분석뿐만 아니라 철학까지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더불어 그는 자이나교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라자스탄대학교 쁘라끄릿 바라띠 산스탄 자이나 연구센터(Prakrit Bharati Sansthan Center for Jain Studies) 재직 시절에 출간된 《자이나교 정치사상(Jain Political Thought)》(1984)이 그것으로, 슈라마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의 연장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인도학 연구자에게 그는 슈라마니즘을 재평가하여 인도 종교사의 주축으로 자리매김을 한 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그는 그 어느 편에 기울지 않은 채 인도 문화를 균형 있게 조망한 몇 안 되는 학자인 셈이다. 

인도 학계에서 그의 비중은 인도 정부 후원의 대규모 프로젝트인 ‘인도 과학, 철학, 문화의 역사(Project of History of Indian Science, Philosophy and Culture)’에서 제1부에 해당하는 《인도 문명의 여명과 전개(The Dawn and Development of Indian Civilization)》(1999)의 1권∼5권 가운데 다음 첫 4분야의 편집자를 담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1. 인도 문명의 여명기 

2. 인도의 삶, 사상 및 문화(기원전 600년부터 AD 300년경)

3.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상호교류

4. 문명의 황금 체인: 인도, 이란, 셈족, 그리스

이 간행물들은 2010년 제목이 약간 변경되어 재출판되었다. 총 30권의 책과 20권의 주제별 논문집 출간을 목표로 수행된 이 프로젝트는 인도문명사 연구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기존에 출간된 동류의 다른 책들과 달리 연대기와 하드 데이터를 면밀히 검증하여 식민역사의 유산이었던 민족주의와 서구 중심의 편견을 극복하려 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빤데의 역할은 세계 불교학계에서의 그의 역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인도의 문학, 논리학, 철학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타 문화권 학자들의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학습량으로 커버하기에 현실적인 문화적 장벽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불교학계가 높은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베다에 편중된 시각 때문이었다.

초기불교 연구에서 빤데의 역할과 입지

필자는 인도 유학 중에 다야 끄리슈나를 소모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빤데와 더불어 인도 독립 후, 후배 학자들로부터 최고의 인도 철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 두 거인은 각기 2007년과 2011년에 타계했다. 그 당시 끄리슈나 선생은 80대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왕성한 표정으로 동석한 학인 스님에게 왜 붓다는 여성의 출가 문제에 인색했냐는 질문을 던졌다. 대학자의 의외의 소박한 질문 또는 약간의 비아냥에 당황했던 스님의 반응이 떠오른다. 인도인들이 불교를 대하는 입장이 어떠한지 그대로 드러나는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인도에서 발생한 인도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철학자인 그에게까지 여전히 이질적인 문화로, 해명되어야 할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무대였던 인도의 생태, 언어, 관습, 사회 등 역사적 시대적 배경에 대한 체화된 지식이 요구된다.

주지하다시피 빤데는 산스끄리뜨어, 독일어, 빨리어, 벵골어 및 페르시아어, 그리고 힌디에 능통했다. 그는 산스끄리뜨로 시를 지을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며, 아르다마가다어로 쓰인 자이나 문헌과 빨리 니까야를 비교 연구했다. 다른 학자들이 빨리-영어 사전을 뒤적일 때, 그는 언어의 기능과 쓰임, 그리고 사전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용어의 역사에서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며 이러한 문제는 포괄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또한 빨리 니까야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시대별 · 종파별로 그 쓰임새가 구분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압빠마다(appamāda), 웃타나(uṭṭhāna), 빠락까마(parakkama), 닉까마(nikkama), 위리야(viriya), 아람바(ārambha), 뿌리사까라(purisakāra)는 기원전 6세기의 시대정신과 밀접히 연관된 용어들로 소개하며, 사람 또는 남자를 의미하는 뿌리사(purisa), 뿌리사뿍갈라(purisapuggala), 뿍갈라(puggala)의 시대적 쓰임의 변화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요컨대 뿌리사는 우빠니샤드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반면, 뿍갈라는 아비다르마(Abhidharma)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뿌리사뿍갈라는 과도기에 임시방편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무아(anattā)론이 점차 발달하면서 새로운 용어를 모색하여 소개하려 했던 것으로, ‘뿌리사’라는 용어가 연상시키는 오래된 의미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뿌리사는 산스끄리뜨로도 뿌루샤(puruṣa) 곧 사람을 의미한다. 베다에서 뿌루샤는 최초의 ‘우주적 인간’으로 나타나고, 우빠니샤드에서는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자아로서, 초월자와의 합일을 매개하는 기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용어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베다에서 비롯된 브라흐마나 전통과 아리안 유입 이전의 선주민의 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슈라마나 전통에 대한 이해와 언어용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연구방법론과 균형 잡인 관점은 《위대한 마가다-초기인도의 문화에 관한 연구(Greater Magadha: Studies in the Culture of Early India)》(2007)의 저자 브롱코스트와 같은 인도학, 초기불교학 관련 연구자들에게 가이드라인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불교의 기원에 관한 연구》의 9장 붓다시대의 종교적 조건에서 인더스 문명과 브라흐마니즘과 슈라마니즘 양대 사조에 대해 설명한다. 슈라마니즘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슈라마나 전통-그 역사와 인도문화에 대한 기여》와 《인도문화의 토대》 제1권 4장 슈라마나적 부정(Śramaṇic negation)에서도 다루고 있다. 초기불교에 관한 기존의 연구서 대부분은 불교 발생기 당시와 그 이전의 문화를 다뤘지만, 어디까지나 시작점을 앞으로 조금 잡아당기는 정도였을 뿐이지 보다 근원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해설이 부족했다. 빤데는 슈라마나의 금욕주의가 브라흐마나의 네 가지 아슈라마(āśrama)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틸만 페터(Tilmann Vetter)와도 공유되는 것이다. 최근 활동이 왕성한 알렉산더 윈(Alexander Wynne)도 빤데류의 연구방법을 따르는 학자의 계보를 잇는다고 평가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

 

최경아 / 동국대 강사.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과정 수료. 인도 뿌네대학교(University of Pune)에서 “Critical study of the nature of person and the problem of personal identity with special reference to Abhdharmakośabhāșya”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역임. 현재 중앙승가대, 강릉원주대 등에서 인도학 인도불교학 관련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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