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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학자 <5> 헤르만 올덴베르크
붓다의 역사적 실재성 주목한 독일 학자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안성두 서울대 교수
   
 

올덴베르크는 1854년 10월 31일 함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1년 베를린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에 그는 괴팅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고전문헌학과 인도학을 공부했다. 1875년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아르발(Arva) 형제에 대한 연구로 고전문헌학에서 박사학위를 했고, 이어 1878년 《상키야나 그리흐야수트라(Śāṅkhyana Gṛhyasūtra)》의 편집과 번역을 산스끄리뜨 문헌학 교수자격논문으로 제출했다. 1889년 그는 인도철학의 옹호자이며 니체의 친구이기도 했던 파울 도이센(Paul Deussen, 1845~1919)이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킬(Kiel)대학의 인도학 교수로 부임했고, 1906년 그 대학의 학장직에 취임했다. 이어 1908년에 괴팅겐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1920년 3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인도학 교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912~13년 사이에 인도 여행을 했다. 1919년에는 네덜란드 왕립예술과학원(The Royal Netherlands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정회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인도학과 불교학 연구가 문헌학 중심으로 진행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학자로서, 특히 독일 대학 내에서 인도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자리 잡고 발전하는 커다란 기여를 했다. 따라서 여기서도 (A) 그의 인도학과 불교학 연구의 특색을 살펴보고, (B) 다음으로 독일 아카데미 내에서의 학문으로서의 인도학이 발전하는 데 그가 어떻게 기여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A) 고전 인도학 연구자로서 올덴베르크는 베다와 초기불교 연구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내었다. 불교 원전에 대한 지식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프랑스에서 외젠 뷔흐눕(E. Burnouf)에 의해 시작된 산스끄리뜨 사본에 의거한 불교 이해의 방식은 이어 영국에서 토마스 윌리엄스 리스 데이비드((T. W. Rhys Davids)와 독일에서 올덴베르크에 의해 성취되었다. 1878년에 가정에서의 의례규칙을 담은 베다 문헌인 《상키야나 그리흐야수트라(Śāṅkhyana Gṛhyasūtra)》의 편집과 번역을 마친 후에 그는 학문적 관심을 빨리(Pāli) 불교문헌에 돌렸다. 그는 당대의 다른 어떤 학자들보다 빨리 문헌자료를 진지하게 대했으며, 이를 학문적 방법론을 적용해 연구를 수행했다. 당시 유럽에서 인도불교에 대한 연구는 프랑스에서 뷔흐눕의 《법화경》 연구가 보여주었듯이 주로 대승 문헌에 입각해서 진행되어 왔지만, 그는 빨리 문헌의 역사적 중요성을 간파한 학자 중의 하나였다. 문헌학자로서 그는 빨리 불교문헌의 편집과 번역에 역점을 두었는데, 대표적 작업이 《디빠방사(Dīpavaṃsa, 섬의 연대기)》(1878)와 《비나야삐따까(Vinayapitaka, 율장)》(5권, 1879~1883)였다. 후에 이 편집본에 대한 번역은 리스 데이비드와 함께 동방성전(Sacred Books of the East) 시리즈의 13, 17, 20, 29-30, 32, 46권으로 1881~1897에 출판되었다.

특히 이들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출판된 Buddha, Sein Leb-en und Seine Lehre, Seine Gemeinde(1881)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나이 27세에 출판된 이 책으로 인해 그는 “아마도 당시까지 불교에 대해 쓰인 가장 유명한 책”(De Jong, Indo-Iranian Journal 12, 1970, p.224)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학문적 평가와 더불어 대중적인 관심도 얻었다. 《붓다: 그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 그의 교단》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율장과 《디빠방사(Dīpavaṃsa)》라는 매우 구체적인 빨리 문헌에 의거해 저작된 책으로서, 남방 상좌부에 전해지는 붓다의 법, 승가의 이념에 대해 유럽에 소개한 책이다. 비록 현재 불교학계에서 붓다의 생애에 대한 연구와 초기경전 등의 연구는 그의 시대에 비해 매우 진척되어 있지만, 아직까지도 이 책은 표준적인 저서로 간주된다. 

올덴베르크의 연구가 빨리 문헌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이미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그는 붓다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 확고하게 논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당시 유럽학계에서는 붓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주장이나 붓다의 신화적 기원을 주장하는 설명들이 다수 제시되었다. 전자의 주장은 곧 부정되었지만, 세나르(Émile Senart)가 주창한 후자의 설명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세나르는 붓다의 생애 중에 베다로 소급될 수 있는 신화적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 요소는 당시 인도인들이 붓다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관념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런 주장은 《니다나카타(Nidānakathā)》 《붓다왕사(Buddhavaṃsa)》와 같은 빨리 불전에 입각해서 붓다를 종교학적 관점에서 설명한 것으로서, 당시 많은 학자들도 세나르의 이런 설명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덴베르크는 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이하 《붓다(Buddha)》로 약칭)의 2판에서 빨리 전승의 신뢰성을 옹호하면서, 초기불전의 대부분은 BCE 380년 바이샬리의 결집 이전에 편찬된 것이며 그것들은 큰 변화 없이 실론에 전승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세나르가 다룬 문헌들이 상대적으로 후대의 편찬이기에 종교학적 관점에서 일반인이 가진 붓다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초기불전이 전하는 붓다의 역사성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비록 붓다의 생애 중에 베다로 소급될 수 있는 신화적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바이샬리 결집의 역사적 사실과 율장이 역사적 고층에 속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붓다에 대한 이런 다양한 논의는 기독교적 배경하에서 진행된 것이라 보인다. 예수처럼 붓다를 인간으로서 기술할 때의 거북함이 분명 그 배경에 있겠지만, 그러면서 올덴베르크는 초기 경장에서 붓다의 인격성은 중시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401쪽으로 구성된 방대한 그의 책에서 붓다에 대해 단지 7페이지만을 언급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붓다에 대한 교설이 단지 부록처럼 취급되는 것은 서구 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상한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교설로서의 법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상기시키면서 이를 정당화한다. 

세나르의 이론을 한쪽 면에 놓고 올덴베르크의 이론을 다른 편에 놓을 때, 그들의 학적 방법론상의 특징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세나르는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후대의 문헌들도 붓다의 생애를 구성하는 데 매우 연관된 체계하에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인도인들이 가졌던 붓다에 대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올덴베르크는 최고(最古)의 문헌 속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붓다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의 이론적 장점은 문헌학적 방법에 의거해서 전후의 문헌을 구별했다는 데 있다. 이를 판별하는 데 문학적 양식의 측면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그의 책 《붓다(Buddha)》에서 그는 문학양식상의 구별을 통해 《붓다왕사(Buddhavaṃsa, 붓다의 연대기)》가 후대의 문헌임을 증명했다. 나아가 《보요경(普曜經, Lalitavistara)》에 대한 연구에서도 그는 문헌에서 고층과 신층 사이의 구별에 입각해서 그 성립을 논했다. 양태론에 따른 연구를 통해 그는 일반적으로 명사형 표현을 선호하는 A-유형의 문헌들과 《마하바스투(Mahāvastu, 大事)》 《디비야바다나(Divyāvadāna, Divine Stories)》 《아바다나샤타까(Avadānaśataka, 百喩經)》 등 불교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나타나는 경장 스타일의 B-유형 사이를 구별했다. 그는 B-유형이 빨리 경장에 가까우며 A-유형보다 고충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뷔흐눕이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과제였던 빨리 문헌과 산스끄리뜨 문헌의 비교와 이를 통해 역사적 층위를 결정하고 양자에게 공통된 요소들을 밝히려는 작업을 수행했던 첫 번째 학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비슷한 작업이 빈디쉬(Ernst Windisch)에 의해 수행되었지만, 올덴베르크는 20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 사본을 연구 자료에 포함시켰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런 유형의 문헌학적 연구방법은 1930년대 이후 산스끄리뜨 문장을 빨리어나 한문, 티베트어와 비교하는 방법론으로서 독일의 불교학 연구에서 크게 성행했던 것이다. 

올덴베르크는 그의 책 《붓다(Buddha)》 중의 〈붓다 이전의 인도의 범신론과 회의주의〉란 항목에서 불교와 바라문 전통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그다’라고 생각하면서 아트만을 인식한다면 그는 무엇을 바라면서 누구의 신체를 갈구하겠는가?(BĀU 4.4.12)”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불교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여기서 우파니샤드와 불교에서의 욕망과 무지, 지혜를 통한 고통의 소멸이란 관념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또한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불교에서 악마를 나타내는 마라(Māra)가 죽음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불교도들이 우파니샤드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지만, 불교가 바라문 전통으로부터 주요한 교의를 채택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사유의 일반적인 방식도 수용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도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불교와 바라문 전통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뿌쌍(Poussin)은 윤회와 업의 교설이 바라문들에 의해 발명되었고, 사문 전통도 바라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불교의 열반 개념도 바라문의 열반 개념의 변용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바라문 전통에 대한 불교의 의존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양자 사이에 어떤 관계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한다. 이들 19~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유럽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여러 주장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불교사상이 고전 인도문화의 주요 관념들에 의거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함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초기불교 연구와 병행하여 그는 문헌학 연구방법론을 리그베다 연구에 대해서도 적용시켰다. 《리그베다의 찬가(Die Hymnen des Rigveda)》(1888), 《베다의 종교(Die Religion des Veda)》(1894), 《리그베다: 텍스트 비판적, 해설적 주석(Ŗgveda: Textkritische und exegetische Noten)》(1909~1912)에서 그는 리그베다 찬가의 문장형태론과 산스끄리뜨어 운율, 문헌사 연구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했다. 그의 이런 학문적 작업을 통해 베다 문헌과 초기불전에 대한 역사적이고 문헌학적 탐구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B) 올덴베르크의 이러한 학문적 업적 자체도 매우 탁월한 것이지만, 그가 남긴 지속적인 영향력은 문헌학적 방법론과 이를 통해 독일의 대학 제도 내에서 인도학을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확립시킨 점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인도학에 대해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1) 하나는 고전문헌학에 빗대어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고, (2) 다른 하나는 과학적이라는 요구에 방법론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전자가 대학 내에서 학문으로서 인도학에 대한 요구라면, 후자는 대학 내에서 인도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1) 먼저 대학 내에서 인도학의 학문적 위상의 확보이다. 독일의 본(Bonn) 대학에서 1818년 처음으로 인도학 교수 자리가 개설되었고, 여기에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이 임명되었다. 그는 동생인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과 함께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자였으며, 아울러 독일에서 인도학 연구의 선구자였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1808년 《인도인의 언어와 지혜》라는 기념비적 저작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산스끄리뜨어와 라틴어,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독일어를 비교하면서 많은 어휘와 문법상의 유사성을 제시함으로써 산스끄리뜨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슐레겔 형제와 훔볼트와 같은 독일 동양학 창시자들의 인도 언어에 대한 문법학적, 철학적, 종교적 관심에 힘입어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 인도학에 대한 호의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는 후에 독일 대학들에서 인도학이 학문 영역으로 인정받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같이 독일의 인도학은 출발점에서 낭만주의와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낭만주의는 기독교 도입 이전의 독일의 신화와 사고, 언어와 전설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고대 인도의 문화와 종교, 언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낭만주의가 하나의 배경을 형성했다면, 인도학의 성립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는 성서해석학이었다. 해석학은 텍스트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인도학에 하나의 이정표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런 두 가지 요소만으로 독일에서의 인도학의 발전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역사주의와 학문적 엄밀성이라는 19세기 독일의 학문적 이념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독일 대학에서의 인도학과의 성립과 발전 양태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독일에서 아카데미의 이념은 학문적 엄격성과 이에 따른 학문적 전문화로 이끌었고, 이는 기존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회의적 태도로 특징지어진다. 19세기에 진행된 이러한 학문성과 실증성, 역사성에 대한 강조는 인도학 연구자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인도 고전문헌에 대해 문헌학적, 역사적인 관심을 갖고 인도학의 이념을 발전시켰지만, 역설적으로 그 이념은 초기 낭만주의자가 지향했던 인류의 유산으로서 문화와 삶의 근원에 대한 폭넓은 철학적 관심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진 실증적이고 전문화된 학문으로서 인도학이었다. 특히 대학 내에서 적절한 위상을 확보하려는 시도 속에서 이런 이념의 실현에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 바로 문헌학적 연구였으며, 인도학 연구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고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던 학자가 올덴베르크였다. 

그는 인도학은 인도 고전문헌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인도학자의 과제는 이들 문헌에 대한 역사적이고 문헌학적 접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도학이 낭만주의 전통의 계승자로서 인류의 지적 유산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어떤 의미에서 19세기 초의 열정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여하튼 엄밀한 문헌학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그는 인도학의 새로운 학문적 이상의 대변자로 등장한다. 박사학위를 한 이후부터 1920년 사망 때까지 그는 인도학의 이론적 정립을 위해 몇몇 주요한 논문들과 강연을 출판했다: 《산스끄리뜨 연구에 관해》(1886), 《종교학과의 전체적 연관 속에서 고대 인도종교의 연구: 강연》(1906),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신의 은총과 인간의 힘》(1906), 인도 문헌학과 고전문헌학의 관련성에 대한 그의 가장 풍부한 사색을 담은 《인도 문헌학과 고전문헌학》(1906), 그리고 새로운 현대 인도학의 과제를 천명한 《인도학》(1907)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독일 대학의 새로운 학문적 이념을 인도학에 적용했으며, 이를 통해 문헌학적 연구방법론은 이후 독일 대학에서의 인도학 연구를 대변하는 학문적 이념으로 발전되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문헌학 연구에서도, 그는 역사적 방법론만으로 인도학의 학적 이념을 구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보면서, 인도학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학적 규정에 부합한 체계적인 연구가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편찬된 모니어 윌리엄스(Monier-Williams)와 로트 뵈틀링크(Roth-Böthlingk)의 두 산스끄리뜨 사전의 예를 들면서 그는 로트와 뵈틀링크와 같은 독일의 1세대 인도학 연구자들의 체계적이고 문헌학적 연구를 상찬하고 있다. “처음으로 여기서 영국의 학문은 인도학자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성취했지만, 저기서는 독일학자들의 머리에서 엄격한 문헌학적 방법을 갖고 폭과 깊이의 견지에서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계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Über Sanskritforschung, 1886, p.386). 

올덴베르크는 독일에서 인도 사상의 수용에 있어 두 단계를 구별했다. 첫 번째 단계는 낭만주의 운동에서처럼 독일 문학과 시, 철학이 독일에서 인도학의 터전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록 인도학의 시작이 1784년 캘커타에서 콜부룩(Henry Thomas Colebrooke) 등에 의해 창설된 아시아학회(Asiatic Society)였지만, 낭만주의에 의해 촉발된 고대의 모든 민족의 민속적 시에 대한 풍부한 관심과 모든 형태의 무형 원천의 탐구라는 이상은 인도학 연구를 위한 풍요로운 터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기 독일에서의 인도학 연구는 이후 인도에 대한 매우 환상적인 이미지를 낳았다고 비판하면서, 인도학 연구의 대안으로서 인도 문헌이나 언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 학자인 봅(Franz Bopp)을 높이 평가한다. 봅은 1816년 《그리스어와 라틴어, 페르시아어, 독일어와 비교한 산스끄리뜨어의 동사활용 체계》를 발표했는데, “산스끄리뜨의 문법 구조에 대한 봅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는 산스끄리뜨와 페르시아 언어 및 많은 유럽어의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적 토대를 낳았으며” 이런 점에서 인도의 문헌과 언어의 핵심을 파악했다는 평가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인도 연구는 보다 학문적인 방식에 의해 확고한 토대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인도 고전문헌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었다. 이를 주도했던 막스 뮐러(Max Müller), 루돌프 로트(Rudolf von Roth), 알프레히트 베버(Albrecht Weber)를 언급하면서, 올덴베르크는 그들이 인도 문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의식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간주한다. 특히 로트의 베다 연구를 예로 들면서 그는 거기에 인도인들의 이념사를 해독할 수 있는 하나의 모범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연구는 첫 번째 낭만주의 단계의 연구에 비해 인도연구에서 전문적 탐구를 보여준다. 낭만주의자들이 교육학적, 철학적 사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면, 이제 인도에 대한 전문 연구자들은 점차 인도 고전문헌을 그 자체 역사적이고 비판적 탐구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고전 문헌에 대한 체계성, 방법론적 엄격성, 비교학적 내지 문헌학적 방법론의 발전, 역사적 재구성이 이제 올덴베르크에 있어 인도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되었으며, 이는 이후 인도 연구자들에게도 요구된 사항이었다. 물론 이것은 인도학에만 요구된 것이 아니라 독일에서 고전학 연구 일반에 공통된 기준이었으며, 공통된 덕목이었다. 따라서 올덴베르크를 위시한 독일의 인도학자들은 체계적인 문헌학적 연구를 수행하면서 그들의 동료 고전학자들의 학문적 기준을 인도학 연구에 적용시켰으며, 이를 통해 인도학 연구를 독일의 대학 체계 내에 확립시키는 데 일조했다. 

올덴베르크는 인도학의 발전이 16세기 유럽 르네상스 시기에 수행된 고전문헌학의 정신과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두 개의 문헌학의 대상과 목적, 그리고 방법론을 구별한다. 두 개의 문헌학의 공통된 점은 “과거의 문명을 무덤에서 소환해서 그것들의 재현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며, 그것들 속에 작동하는 인과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입구가 언어와 문법, 사전이다.” 인도학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첫 번째 과제는 인도학 연구를 통해 인도 역사를 재구성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인도 역사를 포괄적이고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이 과제가 정치사나 경제사, 사회사의 측면에서 성취될 가능성은 낮지만, 그는 종교적 핵심이나 법, 조형예술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탐구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고전학이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듯이 인도학도 문헌과 건축물로부터 유래한 모든 영역의 정신적 활동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현재의 힌두에 대해서는 동료 영국인 학자들보다 지식이 미치지 못하지만, 고전 인도의 아리안들에 대해서는 그들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 있다.” 

올덴베르크로 하여금 이러한 자부심을 갖게 한 요소로 먼저 인도 문헌학이 가진 전문적 측면과 문헌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들 수 있다. 특히 문헌학 일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학문은 아직 젊고, 문헌학적 기법을 우리 자신의 영역에 충분히 적용시켜 배울 수 있기에는 아직도 확립되지 않았다. 그것에 충분히 익숙함에 의해 그 숙고는 능숙한 연구기법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학은 문헌학의 도구를 채택하고 발전시켰을 때 구체적 영역에서 많은 성취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헌학의 역할이 단순히 전승을 교정하는 주석전통에 머무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주석전통이 주지 못하는 대안적 설명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문헌학의 비판적인 잠재력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비록 전승이나 전통에 대한 생각은 학자마다 달랐지만, 그럼에도 올덴베르크는 문헌학에 의해 옹호되는 비판적 입장과 인도학에 의해 제기된 전통비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인도 주석에 따라 충실하기 번역하려고 하는 베다 연구자에게 고전문헌학과의 만남은 마치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과 같다. 베다 연구의 미래는 그러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함으로써 주석자의 지식이라는 공기를 제거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대학 내에서 문헌학을 통해 인도학을 확립시키려는 시도와 병행하여 학문으로서 인도학이 가져야만 하는 방법론의 확보가 문제가 되었다. 이는 문헌학이 19세기에 등장한 과학으로서 학문의 이념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이는 당시 독일학계가 직면했던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을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하나의 과학으로서 규정하려는 태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당시 독일학계는 자연과학과 같은 동일한 잣대로 인문현상과 사회현상을 규정할 수 없다는 역사주의적 인식에 따라 이런 분야를 다루는 연구를 정신과학 또는 문화과학(Kulturwissenschaft)이라고 구별했다. 이와 같이 역사주의에 의거했을 때 인도학은 보다 적절한 학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인도의 고전문헌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문헌 자체는 물론 그 문헌을 낳은 저자와 사회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문화의 비역사성이 종종 지적되기는 하지만, 인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19세기 이래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역사주의라고 할 때 인도학 연구자에게 문제 되는 것은 사상이나 문헌 자체의 역사가 아니라 학문성으로 체화된 역사주의이다. 여기에서 두 종류의 역사주의가 구별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는 Historism이며, 다른 하나는 Historicism이다. 전자의 관점은 독일에서 랑케(Leopold von Ranke)식 역사주의로 대표되는 것으로서 사건의 역사적 독특성을 강조했고 따라서 일반적인 서술학으로서 역사학의 성립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데 비해, 후자의 관점은 오거스틴 콩트(Augustine Comte)가 “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너의 역사를 알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역사의 발전 법칙을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올덴베르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역사주의를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인도학 연구자가 문헌에 접근하는 방식도 법칙의 추구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자연과학의 압도적 성격에 영향을 받아 정신과학에서도 실증주의적 방법론과 경험주의를 도입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콩트의 주장은 당시 유럽학계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영향을 받아 인도학 연구에서 문헌학이 이러한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기초해야 한다는 요구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도학자가 문헌연구에서 추구했던 역사적 방법은 모든 인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의 의미에서이지,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의 의미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올덴베르크는 동인도회사의 식민지 관료들이 개별 현상들과 사건들에 대해 경험적이고 실질적인 역사적 탐구를 더 잘 수행할 수 있지만, 그런 사건들의 법칙성을 발견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간주하면서, 여기에 독일학자들의 장점이 있다고 주장했다(Internationale Wochenwissenschat für Wissenschaft und Technik, pp.641-642; The Nay Science, p.387에서 인용). 따라서 인도학자는 법칙성의 발견을 통해 인도사를 설명할 수 있으며, 동시에 법칙성은 인도학으로 하여금 학문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독일에서 작업했던 인도학 연구자에게 그들 연구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예를 들어 《독일-인도 간의 정신적 관련성(Deutsch-indische Geistesbeziehungen)》 (Ludwig Alsdorf), 《독일 시인과 철학자들에 끼친 인도 사상의 영향(Impact of Indian Thought on German Poets and Philosophers)》(Wilfried Nölle) 등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독일 인도학자들은 스스로 일종의 활동가나 역사적 계몽주의자로서 사명을 가졌다고 여겼다. 이런 요청 때문에 독일학자의 연구는 영국이나 다른 유럽에서의 실용주의적 목적에 따라 수행되는 인도사 연구나 인도학 연구와는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학자들이 인도 종교에 대한 연구에 주된 관심을 쏟은 것도 아마도 종교현상이 이념사를 추적하기에 가장 잘 부합되는 분야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사실을 설명(erklären)하기보다는 이해(verstehen)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학문적 기여는 베다와 마하바라타 연구 및 빨리 불전에 대한 역사적, 문헌학적 연구에 있었다. 그리고 인도 종교사상의 초기 형태를 해명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그는 당시 독일학계의 주된 방법론이었던 역사학적 연구와 엄격한 문헌학적 방법론을 통해 당시 신생학문이었던 인도학을 독일 대학의 인문학 전통 속에 위치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다른 학문 분야로부터 통찰을 물려받아 이를 인도학 연구에 접목함으로써 독일 대학에서의 인도학 연구의 학문적 존재 이유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클라우스 야너트(Klaus Janert)가 두 권으로 편집한 Kleine Schriften: Hermann Oldenberg(Wiesbaden, 1967)에 포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

(이 글의 많은 내용은 Vishwa Adluri & Joydeep Bagchee, The Nay Science: A History of German Indology, 특히 5장에 의거해서 작성되었다.) 

 

안성두 / 서울대 철학과 교수(인도불교철학). 한국외대 졸업.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불교철학 전공,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유가사지론의 번뇌설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교수 역임. 인도 초기유식과 관련된 주제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현재는 인도와 티베트 불교에서 실재와 언어, 의식의 문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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