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유명한 도연명과 서경덕은 무현금을 즐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도 유명하다. 한 선비가 물에 잠긴 둥근달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며 줄이 없는 거문고를 켜고 있다. 줄이 있는 거문고는 아무리 잘 탄다 하여도 귀를 만족시킬 뿐, 지극한 경지의 마음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도연명과 서경덕과 이경윤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손이 아닌, 마음으로 타고 마음으로 희열을 맛보는 것이리라. 

별들이 우주에서 반딧불이 놀이하고
도연명은 강 속에 둥근달을 켜고 있고
불자는 법 없는 법을 켠다 줄이 없는 거문고

— 조정제 〈무현금〉

이 시조는 중장에서 도연명이 “강 속에 둥근달을 켜고 있다”고 표현하여 줄이 없는 거문고를 켜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에서 불자는 “법 없는 법을 켠다.”고 하여 무현금에 비유하고 있다. 줄이 없는 거문고는 법 없는 법(無法法)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줄이 법이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불자는 시적 자아(詩的 自我)로 볼 수도 있다.

《대산종사법어》 〈소요편〉 27장에, “원공(圓公)은 말과 글이 끊어진 자리라, 법이라 할 수도 없고 또한 법 아님도 없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어서 한자 편에는 “원공 언어도단 무법무불법(圓公 言語道斷 無法無不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무법무불법은 ‘법 없는 법’이라 집약할 수도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는 녹야원에서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한 법도 설한 바 없다.”고 했다. 이는 본래 법은 설할 것도 없는 그 자리이나, 또한 49년간 설한 그 법에 묶이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위 법박(法縛)이나 법집(法執)에 묶이지 말라는 경구다. 

《반야심경》의 끝부분에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제사바하”라는 진언(眞言) 또는 주문이 나온다. 이는 원래 번역하지 않는 것이나 여러 번역이 시도되고 있다. 요컨대, “가세, 가세, 피안으로 가세, 불토에서 즐기세”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불자가 반야선을 타고 피안으로 건너가려면 마지막에는 그 배를 놓아야 피안에 내릴 수 있다. 이는 무법법이라 형상화할 수 있는 경지이다. 

법은 본래 무법법, 무법에 법했기 때문에 법이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참다운 법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편의상 ‘법’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법박에 걸리면 자승자박하는 것과 같아 오히려 자유를 잃고 구속될 수 있다. 무법법은 법에 들고남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무애의 경지이다. 불도는 무애를 지향하고 생사 자유를 추구한다. 초월이니 자유니 하는 말도 필요하지 않는 무위이화의 경지가 본고향이다.

무법법은 무설설(無說說) 무문문(無聞聞)과 조합을 이룬다. 《관음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하시고

南巡童子無聞聞 
남순동자는 들은 바 없이 듣는다.

백의관음과 시자 남순 동자는 이심전심으로 설법하고 듣는, 스승과 수제자 간이다. 참으로 말로 설할 수 없는 실상의 자리는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도, 유정도, 이심전심으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율사 일타(日陀, 1928~1999) 스님이 1999년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하며 남긴 열반송에서도 거문고[古琴]가 등장한다.

一天白日露眞心  하늘에 밝은 해가 진심을 드러내니  
萬里淸風彈古琴  만리에 맑은 바람 오랜 거문고를 타는구나 
生死涅槃曾是夢  생사 열반이 일찍부터 꿈이러니
山高海闊不相侵  산은 높고 바다 넓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구나.

— 〈바람이 거문고를 탄다〉 

일타 스님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조차 마다하고 만리에 부는 맑은 바람이 오래된 거문고를 탄다고 한다. 여기서 고금은 자신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강에 잠긴 달을 보는 국한된 시각도 벗어나서 우주의 대자연을 상대로 하는 생사 자유의 호연대기를 즐기고 있다. 

산새 소리 들린다 솨, 숲 소리 울린다
우, 지구 도는 소리 오, 달님 기도 소리
한 소리, 소리 없는 한 소리 거미줄에 춤추네

— 조정제 <인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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