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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의 여름 / 김산옥
사색과 성찰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김산옥 수필가

채홍 이영숙 수필가는 풀냄새를 ‘아버지 냄새 같다’고 했다. 

장마철 염불사 가는 길은 아버지 냄새로 가득하다. 그 향기에 취해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산길을 오른다. 

아주 오래전, 이 산길을 걸어 삼막사로 가기 위해 등반을 했다. 연분홍 산철쭉이 막 피어나던 늦은 봄이다. 이 길을 걸어올라 산등성이에 다다랐을 때, 산비탈 요소요소에 자리 잡은 산사의 전경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되었다. 그 길로 이름 올리고 도돌이표처럼 이 산사에 오르내리며 마음을 내려놓곤 한다.

안양 삼성산 끝자락에 아늑하게 터를 잡은 염불사는 가파른 벼랑 요소요소에 도량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계단을 올라가면 맨 위에 칠성각이 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것처럼 가파르다. 그 도량에서 바라보는 대자연은 그윽하게 아름답다. 그렇게 무심히 조금만 서 있어도 일상에 부대낀 마음의 때가 저절로 씻기는 느낌이다. 

엎어질 듯 경사진 계단을 조금 더 내려오면 늘 자물쇠가 잠겨 있는 영산전이 있고, 바로 옆에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미륵불이 수호신처럼 우뚝 서서 안양시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사태가 져 흘러내릴 것 같은 산 중턱에서, 몇백 년은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을 것만 같은 근엄함이 저절로 합장을 하게 한다. 이 자리에 서면 삼천 배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인다.

아슬아슬하게 계단을 더 내려오면 산신각이 그림처럼 세워져 있다. 두어 사람 무릎을 꿇고 앉으면 가득 차는 텐트처럼 작고 아늑한 도량이다. 이곳에서 남몰래 새겨둔 소망 하나 고백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돌아 내려가면 산신각만큼이나 작은 독성각이 있다. 독성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일컫는데, 이름만큼이나 외지고 쓸쓸하게 홀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다시 가파른 계단을 돌아 내려오면 나한전과 염불전(지장전)이 있고,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터 한가운데 우뚝하게 염불사 대웅전이 하늘을 이고 있다. 비질이 정갈하게 남아 있는 마당 끝에는 범종각과 삼층석탑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600살 먹었다는 보리수나무가 대웅전 앞마당에서 고즈넉이 장맛비를 맞고 있다. 어느 해 태풍으로 한쪽 가지가 부러져 반쪽만 푸르지만, 그 푸른 잎을 타고 초록 물이 줄기차게 흘러내린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성숙한 자태로 염불사가 얼마나 깊고 그윽한 도량인지 말해준다. 보리수나무를 마주 보고 선 삼층석탑도 비에 젖어 말이 없고, 우람한 범종도 오늘따라 그 침묵이 근엄하다.

녹음 짙은 산자락 곳곳에 자리 잡은 도량이 한 폭의 산수화다.

“이곳은 무엇을 바라고 빌러 오는 곳이 아니라 마음 닦는 곳, 마음의 때를 깨끗하게 씻으러 오는 도량이고, 속세에서 지은 죄를 참회하러 오는 곳”이라는 주지 스님의 법문은 분주하게 걸어온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늘 목이 말랐다. 부처님 앞에 오면 뭘 자꾸만 원했다. 삶에 목마른 그 무엇을 채워달라고 빌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바라고 빌며 산사를 찾았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깨달았다. 가난해도 마음의 빚이 없는 것, 가지려고 하는 것보다 남에게 보시하고 양보하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엉거주춤 들고 있는 것이 많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마저 곧 내려놓는 지혜의 가피를 주실 것이라 믿는다.

법당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기도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빈 법당에 홀로 앉았다. 사방이 온통 초록빛이다. 이토록 아늑하고 편한 안식처가 또 있을까. 오래된 마루가 결 곱게 질이 들어 장마철 끈적거림을 덜어낸다. 고요히 궂은비는 내리고, 초록빛 그윽한 산사의 풍경에 모든 시름을 잊는다. 자연이 주는 오묘한 섭리를 마음껏 안아본다. 

꼭 내 이름으로 문서화된 소유이어야만 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가끔 찾아와 허약한 영혼에 영양보충하고 갈 수 있는 마음의 휴양지. 내 삶에서 이 산사와 대자연을 온전히 덤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에 감사한다.

아버지 냄새와도 같은 곳. 

이곳은 내 영혼을 정화시키는 곳, 이곳이야말로 나에겐 산소통과도 같다. 살다 보면 어찌 죄짓지 않고 살 수 있겠냐며, 그럴 때마다 이곳에 와서 참회하고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돌아가라는 주지 스님의 법문은,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새기고 새겨야 할 진리인 것을.

s2k2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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