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밥을 살 테니 내려오라는 스님의 말씀에 그러겠노라고 한 약속을 친구와 나는 여러 번 어겼다. 바쁜 일상에 꼬박 이틀을 밥 먹으러 지방에 가서 소모할 수도 없었고, 또 굳이 밥을 먹으러 지리산 기슭까지 가야 하나 하는 다분히 실용적인 생각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러다 보니 스님께서 서울에 올라올 때만 만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 되풀이됐다. 내려오라는 말씀에 대답만 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우리 때문에 마침내 스님의 말씀에는 서운함이 비치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는 아차 싶어서 300㎞를 달려갔다.

스님은 절의 총무로 계신데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하루에 써도 되는 돈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산중에서 스님이 돈 쓸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까지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으나, 여하튼 계속되는 사양에도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스님과 우리는 속가의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러니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서울에서 절까지는 네 시간이 걸렸다. 그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 눈의 낯선 스님을 만났다. 스님의 짧은 소개로는 예일대학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공부하다가 우연히 숭산 스님의 강연을 인상 깊게 들었다고 했다. 그는 하버드가 있는 케임브리지 선원을 방문해 참선 같은 기초적인 수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갈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하버드를 휴학하고 한국을 찾았고 몇 해 전에 부처님께 귀의했다. 법명이 현각이었다.

스님은 사하촌 식당에 예약까지 했다. 복분자까지 나온 성찬이었다. 스님 말씀이 “먹는 거에 괘념치 말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였다. 경허 스님이 동학사에서 말했다는 “부처가 얼어 죽게 생겼는데 불경이 무슨 소용이람.”이 생각났다. 하긴 잘 먹어야 수행도 공부도 잘하는 법이다. 늘 그렇게 말하는 스님이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는지는 확인한 적이 없었으나, 이것은 우리끼리의 짓궂은 농담이었다, 책을 읽는 것만 공부인 것은 아니니 ‘스님은 어떤 책을 읽으세요’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하튼 늘 유쾌한 스님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매우 유익했다.

그 자리에서는 현각 스님의 출가에 화제가 맞춰졌다. 스님이 현각 스님을 소개하면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현각 스님은 출가한 지 여러 해 지났으니 한국에서 숱하게 설명을 했을 법하다. 그러리라 짐작한 친구와 나는 굳이 출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현각 스님은 스님의 말을 받아 스스로 이야기를 꺼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고, 부모는 교수와 변호사라고 했던 것 같다.

나와 친구도 철학을 전공했지만 예일 학부에 하버드 대학원에 재학 중인, 장래에 학자가 될 법한 인물의 출가 이야기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세계 100위권에도 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나름 선망의 대상인 대학에서 공부한 친구와 나는 속가에서도 얼마든지 불교를 공부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모든 출가가 마찬가지일 텐데, 현각 스님의 출가도 웬만한 결심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백부가 불경을 출판할 만큼 독실한 불교도 집안이었다. 친구의 조모는 중광 스님의 후원자였다. 중광 스님이 서울 율곡로 감로암에 계실 때는 조모 앞에서 몇 시간이고 그림을 그리고는 그림값을 넉넉하게 받았다. 나의 모친은 전국의 절을 찾아다니면서 대들보는 기본이고 하다못해 기와에라도 내 이름을 적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어느 해에 다른 친구가 결혼을 약속한 처자의 집이 영주 부석사 앞이라서 그곳에 가는 길에 부석사에 자주 들러 불교에 매료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 친구에게 “절에 왜 가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무언가 심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 친구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절에는 밥 먹으러 가는 거야.”라며 허무한 설명을 할 만큼 우리는 속가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불교와 친해질 수 있다고 건방지게 생각했다. 게다가 친구와 나는 그해 여름 백양사에서 열린 무차선회를 기획한 핵심이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절로 올라와 우리 넷은 계속 문답을 이어갔다. 이제는 현각 스님이 주로 묻고 나와 친구가 대답했다. 현각 스님은 공, 인식, 깨달음, 설일체유부, 연기 같은 주제에 대해 다양한 물음을 쏟아냈고, 나와 친구는 조금 대답하다가 다시 현각 스님에게 물었다. 아무리 속가에서 절에는 밥 먹으러 가는 거라고 실없는 소리를 하지만 워낙 절밥을 많이 먹었고 대학 1학년 때부터 불교 동아리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했으니 우리의 배움도 녹록지는 않았다. 아니 불가에 들어선 기간이 일천한 현각 스님보다 그때는 우리가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우리가 현각 스님의 물음에 일방적으로 대답하는 형국이 되었다. 문답은 자정을 훨씬 넘겨서야 끝났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정말로 시건방지게 농담을 했다. “현각은 언제 스님이 될까?” 물론 그 말에는 기대감이 숨어 있었다.

다음날 새벽 현각 스님은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사에서 방영한, 현각 스님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만행(卍行)〉을 보았다. 현각 스님을 그 뒤로 직접 뵌 적은 없었다. 그리고 십 년이 흘렀다. 어느 날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현각 스님이 법문을 하는 것이었다. 채널을 고정한 채 그 법문을 끝까지 들었다. 며칠 뒤 친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현각이 스님이 되었어.”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십 년이나 공부하셨는데. 우리는 십 년 동안 그냥 놀았고.” 십 년 전, 현각 스님의 진중하고 진지했던 구도의 눈빛이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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