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사람과 사람이 거리낌 없이 오가는 세상이 그립다. 코비드-19가 창궐하자 사람들은 이웃과 거리 두기를 하고 나라들은 서둘러 국경을 굳게 닫아걸었다. 세상은 이웃과는 거리가 먼 무관심과 적대의 물결 속에 잠겨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나와 너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담장을 견고하게 쌓을수록 나만의 삶은 윤택해지겠지만, 세상은 한 덩어리 유기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언짢아진다.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에 눈길이 머물렀다.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를 꺼내 펼쳤다. “환대 행위는 시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그것은 환대에 관한 담론은 펼치겠지만 해답에 대해서는 침묵하겠으니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선문답으로 들려왔다. 

‘환대’라 하면 우리는 손님이 집에 찾아왔을 때 반갑게 맞아들여 정성껏 대접하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서 손님이란 대상을 외국인, 이민자, 난민으로 확장해보면 그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집단이나 국가가 된다. 그들과 함께 언어, 문화, 종교 등도 환대의 영역에서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과 혐오, 배척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웃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유입되었을 때, 나는 정부가 국경 봉쇄에 늦장을 부린다고 투정했다. 이방인을 환대하면 오히려 내가 피해 입을 것 같아서 마음의 문을 걸어 닫는다.

데리다는 이방인을 무조건 환대하라고 한다. 국경을 넘어왔으니까, 우리말을 못하니까, 고향이 다르니까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항상 이방인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 남에게는 내가 바로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적대하는 것은 바로 나를 적대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사람만 아니라 동물도 환대하라고 한다. 더 나아가 식물, 천상의 피조물까지도 환대하자고 한다. 데리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은 것까지도 환대의 대상으로 삼는다. 

나는 데리다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다.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이미 데리다가 말했던 ‘너와 나는 하나’라는 화엄(華嚴) 세계를 설법하시지 않았는가? 부처님의 법이 나투어진 것이 현상계인데 어찌 나와 이방인의 본유가 다르겠는가. 우리는 서양의 대립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에 젖어서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생각하는 존재론적 사고를 갖고 있다. 하물며 동물과 식물이야, 인간은 그것들을 마음껏 지배해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만법(萬法)이 일여(一如)인 것을. 각각의 존재는 저마다 고유성을 드러내지만 그것들은 일체 총섭의 진여로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화엄경》의 문구가 마음에 내려앉는다.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에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유가 스며들어 나와 타인, 나와 자연물이 둘이 아니라[不二]는 화엄 사상에 닿아 있다. 

환대는 이론이 아닌 실천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순수한 환대나 선물에는 빚이나 교환의 개념이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 환대를 하면서 그것에 상응하는 무엇을 기대한다면 환대는 순수성이 훼손되고 본질을 잃게 된다. 무조건적 환대는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데리다에게 무조건적 환대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타자를 조건 없이 환대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냐?”고도 했다. 데리다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무조건적 환대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서인지 침묵했다.

눈을 불경으로 돌리면 환대의 사례들이 가득 담긴 보물창고를 발견할 수 있을 터.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 환대란 ‘보시(布施)’가 아닌가.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의 하나로서 남을 환대하고 베푸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는 보시를 행한 결과에 대해 마음을 두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마저도 없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진정한 보시라고 한다. 

〈달과 토끼〉라는 동화에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잘 드러나 있다. 

원숭이, 승냥이, 수달, 토끼가 사는 마을에 한 노인이 찾아왔다. 노인은 지치고 배고픈 모습이었다. 동물들은 제각각 노인을 도우려고 했다. 원숭이는 과일을 따왔고, 승냥이는 도마뱀을 가져왔고, 수달은 물고기를 잡아왔다. 토끼는 노인에게 줄 것이 없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인 후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불 속에 오래 있어도 토끼의 몸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노인 모습으로 변장한 하늘 왕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려는 토끼의 이타심에 감탄하여 불을 눈처럼 차갑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토끼의 보살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달 속에 토끼를 그려 넣었다.

이 우화는 부처님 전생 이야기들 중 하나로 원숭이, 승냥이, 수달은 부처님이 아끼는 세 제자이고, 토끼는 부처님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준 부처님의 모습은 순수한 환대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토끼가 그려진 둥근달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밝은 달빛을 받으며 진정한 환대를 곱새겨본다. 

mana5956@naver.com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