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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변(窯變) / 김기철
사색과 성찰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김기철 수필가 · 도예가

도자기를 시작하고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야 요변의 참뜻이라 할까, 그 뿌리를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요변(窯變)을 요변(妖變)으로 알고 요사스러운 여자들이 변덕이 팥죽 끓듯 해서 수시로 표변하며 요랬다조랬다 저 좋은 대로 여우 둔갑하듯 평지풍파를 일으켜 분란을 일삼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도자기를 하다 보니 요변이란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자기를 빚는 과정은 수비(水飛)에서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수비를 해서 만들어진 소지토(素地土)를 꼬막을 밀어 형태를 만들어 깎아 말린 다음에, 물에 적신 스펀지로 말끔히 닦아낸 후 초벌구이를 하게 된다. 초벌구이는 유약을 바르기 위해 반쯤 익힌 상태를 말한다. 그런 다음 유약을 입혀 재벌구이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가마에서 재벌구이를 하는 작업이 가장 힘들고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과정이다. 요변은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재벌은 전통적으로 용가마에서 조선 소나무를 때서 마무리되는데 요즘은 가스, 기름, 전기가마가 있어 주로 이런 현대식 기계 가마를 이용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그 까닭은 비용이 적게 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 훨씬 쉽고 실패가 적은 까닭이다.

그러나 정작 도자기는 전통방식으로 해야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첨단과학 문명으로 치닫는 현대인들의 기계화된 정신과 생활방식을 그나마 치유하는 방법은 원시로 돌아가 인간성 회복을 최종 목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는 전통가마에서 조선 소나무를 때서 구웠을 때 그 빛깔이나 질감이 깊고 맑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자기 자체의 품질이 다르다. 그 실례로 물을 담았을 때 환원수로 바뀌는 역할을 하게 되고 찻잔에 따른 차 맛이 신비할 만큼 좋다. 그리고 그 도자기는 살 속까지 빛을 빨아들였다 내뿜기 때문에 빛깔이 화사하고 깊게 느껴지는 것이다.

도자기를 완성하는 최후 단계로 재벌구이라는 소성(燒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지만, 이 과정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다음에 불의 심판을 받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인력이 미칠 수 없는 여러 가지 여건이 제대로 조화를 이룰 때 성공적인 결과가 나온다. 그 여러 가지 여건이란 온도, 습도, 바람 방향 등 일기에 따른 것과 가마 속에 놓인 작품들의 크기나 기타 불이 빠져나가는 통로 문제가 따른다. 

도자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반 정도밖에 안 된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는 불이 완성해주기 때문에 같은 칸에 놓인 작품들이 보석처럼 황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볼썽사납게 흉한 꼴을 하고 웅크리고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불의 위력은 여기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재벌구이를 할 때는 목욕재계하고 무릎 꿇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 통례로 돼 있다. 어찌 보면 무당 푸닥거리하듯 삶은 돼지머리와 과일, 포, 막걸리 대접을 봉통 아궁이 이마 위에 차려놓고 말이다. 그것은 천지신명이 되었건 부처님, 예수님, 조상님들 하다못해 가마 귀신한테까지 돼지 아가리에 지폐를 끼워놓고 잘 나오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처음에 봉통 아궁이에 소나무 통목을 반씩 빠갠 것을 열 시간쯤 때는데, 이것은 길게 뻗어 나간 용가마가 서서히 열이 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운동선수가 격한 운동 전에 워밍업하듯 점차적으로 가마를 달구는 소성 방법이다. 그다음도 도자기가 쟁여 있는 가마칸불은 껍질을 벗긴 장작개비를 쉴 새 없이 던져 넣어야 한다. 

소성에는 산화번조(酸化燔造)와 환원번조(還元燔造)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백자를 구울 때는 환원번조로 때야지 산화로 때면 그 빛깔이 누렇게 변색이 되어 실패한다. 말하자면 가능한 한 산소공급을 억제하고 때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자면 장작이 다 타기 전에 계속 장작을 던져 넣어 도자기에 불길이 끊기지 않게 해야 하므로 눈을 똑바로 뜨고 몇 사람이 지켜 서서 감시를 해야 한다.

이렇게 칸마다 대체로 세 시간 내지 네 시간씩 때고 나면 도자기는 1,350℃의 고열에서 다 구웠다고 판단이 된다. 이때 가마칸 안을 들여다보면 불의 빛깔이 흰 눈처럼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하게 옥색 빛이 아른거린다. 이때 가마 안은 피안의 세계로 눈부시게 황홀하다. 그 안에 앉혀 있는 작품들마다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윤기로 살아 숨 쉬는 생물체처럼, 아니 극한의 부처님들 모습으로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참선 삼매에 든 거룩한 정경을 만나 볼 수 있다. 극한의 불지옥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득도와 하화중생을 이루고자 고행의 과정을 겪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요변은 이 재벌구이 불구덩이 속에서 돌연변이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우리 머리로는, 아니 과학적인 이치로는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밀가루보다 더 고운 소지(素地) 흙으로 빚은 작품이 고열에는 물 같은 상태로 녹아 자칫 물러 주저앉기 십상이다. 

설령 완벽하게 균형 잡힌 달항아리를 구웠을 때도 그 균형이 살짝 기울어지고 보면 오히려 그 모양이 자연스러운 명품이 된다. 빛깔 또한 불의 장난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나왔을 때 역시 그 희귀성이나 색의 오묘함으로 하나밖에 없는 명품이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도자기는 인간이 만든 영구불변한 존재로 문화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가 가마에서 체험한 요변의 대표적인 것은 꽃 모양의 작품을 빚었는데 완벽하게 백자로 잘 구웠음에도 불구하고 바늘 끝 같은 점이 그야말로 절묘하게 꽃잎 둘레로 연하게 또는 짙게 찍힌 경우였다. 대체 무슨 조화로 그 높은 고열에 털끝 같은 끄름이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우리가 흔히 요변(妖變) 떤다고 못마땅해하는 뜻과는 정반대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작품으로 탄생하였으니 요변도 요변 나름이다. 이렇게 진귀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요변이라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또 다른 요변이 일어나 세상에 둘도 없는 희귀한 명품이 나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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