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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해소를 위한 불교윤리적 대안 / 박병기
특집 | 한국사회의 갈등, 그 극복을 위한 청문(聽聞)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꼬삼비 수행자들의 분열과 화합 사례를 중심으로

 

1. 시작하며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갈등(葛藤, conflict)은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양상과 느낌을 형상화한 갈등(葛藤)은 의견이나 힘의 충돌을 주로 의미하는 컨플릭트(conflict)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얽힘과 충돌이라는 정도의 어감의 차이는 발견할 수 있다. 전자가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현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두 가지 이상의 힘이나 견해가 존재하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는 곳에 갈등이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나름의 기(氣)를 지니고, 이 기는 힘으로 표출되어 타자에게 다가간다. 타자와 만나지 않으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연기성(緣起性)으로 인해 그 힘의 주고받음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문제는 그 힘들이 균형을 벗어나는 데서 생긴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경우 지배와 복종이라는 관계로 정리될 수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경우는 대치상황을 유발하면서 서로 얽히는 갈등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물리적 힘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함께, 인간에게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들 사이의 만남과 어긋남이라는 갈등이 추가된다. 많은 경우 이 갈등 또한 배후에는 힘의 충돌을 깔고 있지만,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단순한 의견 차이 또는 보다 깊은 차원의 세계관 차이만으로도 갈등은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갈등에 관한 많은 담론에 익숙해져 있다. 원효의 화쟁(和諍)이 전통적 기반의 담론이라면, 아펠(K-O Apel)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담론윤리는 현대 사회철학적 기반의 수입 담론이다.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방식이 수없이 많지만, 최소한 특정 사안에 대한 진리 주장을 독점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는 모든 정의가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시민사회에서 갈등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는 규범적 판단도 가능하다. 어떤 상황 속에서 한 가지 의견 또는 힘만이 존재한다면, 심지어 그것이 종교적인 차원이라고 해도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갈등이 이러한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수준을 넘어선 사회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다시 재연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남북갈등과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의 갈등, 청년취업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세대갈등 등이 대표적인 것들로 거론된다. 그것들이 실제 존재하는 갈등인지 아니면 말을 통해 만들어낸 허상의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사회과학적 분석 등이 전제될 필요가 있고, 이런 작업들은 이번 특집의 다른 꼭지들에서 주제 또는 영역별로 상세하게 다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 작은 글은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을 바라보고 그 해소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불교윤리의 관점’은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윤리적 관점을 지칭하는 광의의 것으로, 단순히 율장에 명시된 계율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해도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우선 붓다의 가르침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이미 붓다 생존 시에도 그런 의견 차이가 존재했고, 현재 상황은 붓다의 시대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기 때문에 해석과 적용 과정에서 더 많은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이런 난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특정 사회 또는 공동체의 갈등 양상에 관한 붓다 시대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 가르침과 해석, 적용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사례는 바로 빠알리 율장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꼬삼비 수행자들의 분열과 붓다의 해법’이다. 인도의 갠지스강과 야무나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꼬삼비’라는 이름의 이 도시는 붓다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시기에 좋은 장소’라고 말할 정도로 자연조건과 생활여건이 좋은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어떤 수행승이 죄를 지었는데, 그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은 반면, 다른 수행자 집단은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견해를 갖게 됨으로써 비롯되는 갈등은 결국 승가 분열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붓다는 그 각각의 집단을 찾아다니면서 해법을 제시하고 화합승가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아 “수행승들의 공동체가 분열되었다.”라고 스스로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승단의 분열과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화합’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꼬삼비 승단의 사례는 어떤 사안을 놓고 의견이 어떻게 갈릴 수 있고 어떤 방식의 화합 또는 해소가 가능한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이 사례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갈등해소의 방안들은 그 중심에 붓다의 가르침이 있다는 점에서 불교윤리적 대안이기도 하다.

2. 많이 배운 수행승과 같은 견해를 가진 수행승들

《율장대품》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율장의 마지막 장(10장) ‘꼬삼비의 다발’은 붓다가 꼬삼비 시의 고씨따 승원에 계실 때 어떤 수행승이 죄를 지었다는 언급으로 시작된다. 그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그가 처음에는 그것을 죄로 인지했다가 후에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서술로 이어진다. 그런데 다른 수행승들은 그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그 죄를 인정하라고 권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자 권리정지를 시킨다. 그러자 그 수행승은 ‘견해가 같고 서로 친한 수행승들’을 찾아가서 “나는 무죄입니다. …… 나는 원칙에 맞지 않고 허물이 있고 이치에 맞지 않는 갈마에 의해 권리정지를 당했습니다. 존자들께서는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서 저의 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그가 ‘많이 배웠고 전승에 밝고 가르침과 계율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논의 주제를 잘 아는 현명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고 더 나아가 부끄러움과 후회를 알고 배움을 추구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똑똑하고 지혜로운 수행승’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행동이 죄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어떤 기준에 근거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의 이런 판단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던 일군의 수행승들이 그에게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말하지만 거부하자 권리정지를 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이 갈마, 즉 자신에게 권리정지라는 처분을 내린 승가회의가 ‘원칙에 맞지 않고 허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견해가 같고 친하기도 한 다른 수행승들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다음 장면은 그 수행승과 한편이 된 일군의 수행승들이 권리정지를 내린 수행승들을 찾아가 ‘이 수행승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정지가 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자 다른 수행승들이 ‘원칙에 맞고 부당하지 않고 경우에 맞는 갈마에 의해 권리정지가 내려졌다.’고 항변함으로써 갈등이 절정에 이른다. 그 갈등의 과정을 지켜본 다른 수행승이 붓다에게 가서 상세한 내용을 전하자, 그는 ‘수행공동체[僧伽]가 분열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권리정지를 처분한 수행승들과 그 처분에 대해 반대하는 수행승들을 차례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우리에게 자명하다. 우리에게 자명하다.’라고 그때마다 수행승에게 권리정지를 처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죄를 짓고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죄를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이 죄를 지었다. 그는 그 죄를 무죄라고 인지했지만, 다른 수행승들은 그 죄를 죄라고 인지했다.

그러나 이런 붓다의 노력은 쉽게 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시내의 식당에서 만난 두 집단의 수행승들은 처음에는 말로 다투고 싸우다가 결국 몸싸움을 벌이고 손찌검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은 ‘어찌 석가의 아들들인 수행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비난했고, 수행자들 가운데서도 한탄하는 사람들이 나와 붓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붓다가 처음 보인 반응은 ‘그것이 사실인가?’이다. 사실임을 확인한 그는 다음과 같이 경책한다.

수행승들이여, 승가가 분열되고 원칙을 따르지 않고 불화를 일삼을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 부적절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하거나 손찌검을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승가는 분열되었지만 원칙을 따르고 우호적인 때는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

이런 가르침과 경책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드디어는 입을 칼로 물고 서로를 찌르는 사태에까지 이른다. 붓다는 그들을 다시 찾아가 ‘다투지 말고 언쟁하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분쟁을 일으키지 마라.’고 타이르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런 다툼과 투쟁, 쟁론은 자신들의 일이니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기다리지 않고 서로 원수가 된 두 왕(코살라국 왕 디기띠와 까시국 왕 브라흐마맛따)의 이야기를 길게 하면서 화합을 시도한다.

승단의 분열을 지켜보며 그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고 다시 화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붓다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대안들이 ‘다투지 말고 언쟁하지 말고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와 같은, 도덕주의자의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들게 할 정도다. 분열된 승가는 지속적으로 붓다의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그의 충고를 제대로 듣지 않고 다른 편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동의해달라는 듯 행동한다. 그들은 모두 ‘잘 배운 사람들이고, 승가의 전승에 밝고 계율도 지키는 현명하고 총명한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붓다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는 듯하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몸으로 싸우다가 이제는 입에 칼을 물고 서로를 찌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붓다는 포기하지 않고, 옛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내놓고자 한다. 그 대안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이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붓다의 갈등해소 방법과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 몇 가지만 기억해 두고자 한다.

첫째는 붓다는 분쟁이 있을 때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먼저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한편의 주장은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다. 또한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 또한 확인되기 전까지는 아직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어느 편의 말만 듣고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특히 그가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친지일 경우 더 쉽게 그렇게 하곤 한다.

둘째는 분쟁의 당사자들을 모두 찾아가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가르침을 펼치면서 자신들의 견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붓다의 가르침 방법이 어김없이 이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확인할 사실은 그런 붓다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을 확인하고 승단이 분열되었다고 선언한 후에 붓다는 쉬지 않고 두 당사자 집단을 찾아다니면서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현실 상황은 악화일로로 전개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위에 근거한 윤리적 요청이 얼마나 쉽게 무시되는가를 함께 확인하게 되고, 어떤 점에서는 불교윤리가 지니는 현실적 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도 하다.

3. 길게도 말고 짧게도 말라  : 갈등에 내재된 감정의 두 차원

강대국의 왕 브라흐마맛따는 가까운 약소국에 침입해 모든 것을 약탈하고 그 나라의 왕과 왕비까지 끝까지 찾아내 살해한다. 그렇게 살해된 왕의 아들인 디가부는 신분을 감추고 상대방 왕 주변에 접근해 원수를 갚을 기회를 노린다. 마침내 사냥터에서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원수를 죽일 기회를 얻는 디가부는 그러나 그 순간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남긴 교훈을 떠올리면서 결행을 하지 못한다. 붓다는 그 교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짧게도 길게도 보지 마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고, 오직 그 원한을 여읨으로써만 쉬어진다.

자신을 칼로 죽이려고 하는 꿈을 꾸다가 잠이 깬 브라흐마닷따는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디가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결국 서로의 목숨을 보존해주기로 약속하고 돌아와 왜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디가부는 위와 같은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고, 브라흐마맛따는 그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길게도 말라’고 한 것은 ‘오래 원한을 품지 말라’는 뜻이고, ‘짧게도 말라’고 한 것은 ‘급하게 친구와 갈라서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브라흐마맛따 왕은 그 지혜와 인내, 자애에 감탄하면서 빼앗은 모든 것들을 돌려주었음은 물론, 자신의 딸까지 그의 왕비로 주어 온전한 화합을 이룬다.

이런 이야기를 수행승들에게 길게 들려준 붓다는 다음과 같이 간곡한 가르침을 편다.

수행승들이여, 폭력을 휘두르고 무기를 사용하는 이런 왕들에게도 이와 같은 인내와 자애가 있을 수 있다면, 여기 그대들은 이렇게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했으므로 인내와 자애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그만하라. 다투지 말고 언쟁하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

그렇다면 이 방법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돌아온 대답은 “세존이시여, 기다리십시오. 이런 다툼과 언쟁, 논쟁, 분쟁은 저희의 일입니다.”였고, 결국 붓다도 “이 어리석은 자들은 몽매하다. 이자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라고 말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나고 만다.

물론 이것으로 붓다의 노력이 끝나지는 않는다. 그는 다음날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꼬삼비 시로 탁발을 나간다. 돌아온 후에는 다시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분열된 승가 한가운데 서서 시를 읊는 방법으로 분쟁의 해소와 화합을 촉구한다.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

 ……

어리석은 자와 벗하기보다는
홀로 유행하는 것이 낫다.
숲속의 코끼리가 힘들이지 않고 가듯
홀로 유행하며 악을 짓지 말라.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갈등의 해소가 단순한 논리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기도 함을 확인한다. 자신의 진리 주장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견해가 비슷한 가까운 사람들을 동원하는 집단적 확언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주장이 허위사실이나 허약한 논리적 기반 위에 서 있음이 드러나더라도 쉽게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 충돌의 과정에서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또 이른바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억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붓다와 같은 탁월한 중재자도 그다지 현실적 성공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임을 선언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예수와 비교되는 붓다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로 힘이 없어 보인다. 그는 다만 진리 주장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감정적 대립을 인내와 자애심으로 넘어설 수 있어야만 한다고,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고 외롭게 외쳐보지만, 그의 제자라는 수행자들은 결국 스승으로 하여금 ‘이들이 몽매해서 설득하기가 쉽지 않구나’라는 한탄을 하도록 만들고 만다.

인간들 사이에 생기는 갈등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희소성이 있는 재화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현상 또는 사실 인식을 둘러싼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이다. 물론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해서, 첫 번째 갈등이 분배정의의 문제로 비화되고, 분배정의 논의는 다시 그 논의의 당사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환경 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견해 사이의 갈등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갈등은 그런 점에서 몸과 마음 모두에 걸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면 마음의 분노가 몸의 떨림으로 나타나고, 그것들이 강화되면서 원한 감정으로 쌓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갈등은 기본적으로 감정의 갈등을 일정 부분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 못지않게 감정적 해소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린다. 붓다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수행승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디가부 왕자의 인내와 자애심을 등장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주진은 “한국문화에서는 문제해결에서 명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분석하면서, 그런 이유 때문에 각자의 입장을 접어두고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추라는 일반 협상이론의 원칙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명분에 대한 집착은 한편으로 합리적 추론의 결과로 도달할 정당화 근거에 대한 집착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설정한 감정적 정당화 기준에 대한 집착, 즉 자존심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갈등해소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공론장을 전제로 하는 토론과 대화에 초점을 맞춤과 동시에, 감정대립의 양상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심을 가질 필요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 논의의 맥락 속에서 감정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길게도 말라’는 명제에 포함된 원한 감정과 같은 부정적 감정의 해소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짧게도 말라’는 명제에 포함된 우정의 지속적인 공유와 같은 긍정적 감정의 유지 차원이다.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는 이 두 차원 중 어느 하나에 기우는 경우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위 사례의 왕과 왕자 사이의 관계처럼 두 차원 모두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긍정적 감정을 유지하고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병행할 수 있으면, 갈등해소는 보다 쉽게 가능해질 수 있다.

4. 공동체 존립 기반의 구조변화를 통한 갈등해소

    : 불교 사회윤리적 대안

지금까지 살펴본 꼬삼비 승가의 분열을 대하는 붓다의 노력, 즉 갈등 상황 자체를 확인하고 각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그 갈등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까지 고려하는 가르침과 호소는 갈등해소라는 목표에 비추어보면 그다지 진전이 없었음을 우리는 함께 살펴보았다. 오히려 이런 갈등과 분쟁은 우리들의 일이니 제발 스승은 빠져주시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을 통해 갈등해소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바로 승가의 존립 기반을 이루는 재가자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인한 상황 변화다.

이 꼬삼비 시의 수행승들은 우리에게 불이익을 끼쳤다. 그들에게 시달리다가 세존께서는 떠났다. 이제 우리는 이 수행승들에게 인사를 하지 말고 영접하지도 말고, 합장하여 맞이하지도 말고 존경과 존중, 공경도 하지 말고, 공양하지도 말고 가까이와도 음식을 주지 말자. 만약 이들이 우리에게서 존경받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고 공경받지도 못하고 공양도 받지 못하면, 섬김을 받지 못하는 까닭에 이곳을 떠나거나 환속하거나, 세존과 다시 화해할 것이다.

붓다 당시 수행에 전념하는 승가의 구성원들인 수행자들은 그 생존의 기반을 재가자들의 존경과 공양에 두고 있었고, 수행자들의 분쟁이 붓다의 적극적이고 간곡한 노력에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드디어 재가자들이 승가 외호(外護)를 철회하는 방안을 마련해 실천에 옮긴다. 이 조치는 수행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으로 성과를 나타낸다. 존경과 존중은커녕 가까이와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공양물도 주지 않자, 의견을 모아 붓다를 찾아가서 그의 앞에서 이 분쟁을 끝내자고 말한다. 이때 붓다는 꼬삼비 시를 떠나 싸밧티 시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아난다, 라훌라 등 가까운 제자들이 붓다에게 가서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붓다의 답변은 ‘원칙에 따라 처신하라’로 모이고, 제자들은 다시 원칙과 원칙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붓다는 열여덟 가지 기준을 들어 원칙이 아닌 것과 원칙인 것을 알 수 있다고 제자마다 반복해서 길게 설하고 있다.

불교윤리는 붓다의 가르침, 즉 ‘일상 속 어두움[無明]에 기반한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해소하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가르침에 근거한 윤리이다. 일상 속 어두움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으려면 그 일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고, 그 알아차림으로 나와 타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연기적 진리를 깨달음과 동시에 그 타자를 향한 자비의 눈길과 손길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실천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동체(同體)의 인식과 자비(慈悲)의 실천은 불교윤리를 이루는 양 날개이고, 그 둘 사이의 순서는 따로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동체 인식의 지혜와 자비 실천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심화되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자칫 이 불교윤리는 개인 차원의 깨달음에 몰두함으로써 승가의 본래 의미, 즉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망각하게 하거나 경시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수행승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의 내용은 붓다가 말한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생겨난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연기와 공(空)의 인식과 실천임을 감안하면 그런 ‘소승적 차원의 깨달음’은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런 우려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불교윤리 또한 생존의 기반인 사회구조와 역사에 눈감고 개인의 수행과 도덕성 문제로 한정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교 사회윤리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와 마주한다. 불교 사회윤리는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윤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가르침을 역사와 사회구조의 영역까지 확장해서 적용하고자 하는 윤리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특히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와 같은 자본주의 기반의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상징되는 생존의 토대에 대한 정당한 주목과 직결된다. 현재 우리의 승가는 재가자들의 보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재 관람료나 막대한 부동산 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재가보살들의 저항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외부 시민사회의 언론 등에 의한 견제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우리 시민사회가 처한 현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는 가짜뉴스들과 자신들의 견해만이 옳고 다른 견해들은 틀린 것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일부 지식인을 포함한 시민들, 그로 인해 제대로 된 대의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협하는 선거문화 등으로 우리 시민사회의 갈등은 쉽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화와 무조건적 타협을 기계적으로 외치는 사이비 화쟁의 목소리나, 형식적인 토론과정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학교 시민교육으로서 토론교육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문제의 실상을 감춤으로써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 사회도 이미 서구 자본주의 사회 못지않게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돈으로 환원하는 ‘신이 된 시장’을 신봉하는, 세속종교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많은 갈등은 그 배경이 되는 생존기반을 은폐하면서 외형적인 충돌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승가의 화합을 위해 재가자들이 그 생존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과 같은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대안들이 함께 마련될 수 있어야만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제대로 해소의 길에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 불교 사회윤리의 관점이다.

5.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불교윤리적 대안

    : 결론을 대신하여

한국불교는 붓다 시대의 불교와 비교해서 재가자들의 비중과 역할이 획기적으로 커진 대승불교이다. 출가보살과 함께 재가보살을 자리매김하고 있고, 출가의 의미를 ‘사회의 나쁜 관행에 물들지 않을 가능성’의 측면에서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망을 중심으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옅어지는 디지털 시대를 맞게 됨으로써, 그 가능성마저 점점 더 특별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은 어떤 점에서 진정한 사부대중 공동체의 형성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재가보살들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수행을 놓지 않고, 출가보살들이 자신들의 승가 안에서 수행자로서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지고 있다.

우리 시민사회의 주체는 당연히 시민이다. 이 시민은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자유와 권리, 평등을 바탕으로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갈등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사회구조의 차원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생멸(生滅)과 진여(眞如)의 두 차원에 걸쳐 있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에 일정한 갈등은 불가피하고 또 삶에 적절한 긴장을 가져다주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이미 공유한 것처럼, 인간의 욕망과 재화의 희소성 문제와 인식능력의 절대적 한계로 인해 동일한 현상을 보는 관점의 불가피한 다수성 등으로 인해 갈등은 피할 수 없고 화쟁(和諍)의 과정을 잘 간직해낼 수 있다면 진리의 일단들을 모아 보다 나은 진리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은 압축적 근대화 또는 산업화로 인한 후유증들 속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고, 그중 많은 갈등은 소모적인 방식으로 나타나 우리 시민과 시민사회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갈등이 아닌 것이 특정세력의 이해관계에 의해 갈등으로 부각되기도 하고, 사소한 갈등이 중대한 갈등으로 자리매김되면서 현실 속에서 실질적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 사회의 지역갈등을 꼽을 수 있다. 특정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장된 지역갈등은 이미 시민사회의 성숙과 함께 극복되는 과정에 있음에도, 선거철이 되면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과장된 양상으로 등장하면서 실질적인 갈등으로 비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불교윤리적 관점에서는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을 꼬삼비 수행자들의 갈등과 분열, 화합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살펴보고자 한 이 작은 논의를 마무리할 차례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윤리적 분석과 실천이라는 의미의 불교윤리는 우리 사회의 갈등해소라는 과제에도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함께 고찰한 꼬삼비 수행자들의 사례를 통해서도 그 적절성과 현실성 등에 관한 함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 논의의 순서에 따라 그 과정을 구별해보면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누어 대안을 제시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갈등 자체에 관한 사실 확인의 과정이다. 갈등이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곧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가 꼬삼비 수행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보인 반응은 ‘그것이 사실이냐?’였다. 사실임이 확인되자 비로소 ‘승가에 분열이 생겼다.’라고 선언하고서 해결을 위한 실천과정으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은 사실 확인이 필요한 것들이고, 이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확인은 갈등해소를 위한 첫 단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갈등에 내재된 감정과 같은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 양상을 분석하는 과정이다. 붓다의 전언 중에서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는 명제에 대한 해석으로 제시되고 있는 ‘원한을 오래 간직하지 말고 우정을 쉽게 끝내지 말라.’와 같은 것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갈등 속에 내재된 감정의 요소를 포함하는 합리적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갈등은 비로소 온전한 해소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 방향의 적실성은 몸과 마음의 깊은 관련성에 관한 뇌과학의 성과나,18) 도덕감정을 윤리의 핵심 요소로 설정하고자 했던 흄(D. Hume)과 스미스(A. Smith)의 도덕감정론이 새롭게 주목받는 현상을 통해서도 상당 부분 정당화의 근거를 지닌다.

불교윤리적 관점에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토대로, 갈등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 서로를 견디는 인내와 동체의식(同體意識)에 근거한 자애 또는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안으로 구체화시켜 볼 수 있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끝없는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망설이다가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원수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한 디가부 왕자의 사례를 통해 붓다가 강조한 것도 바로 갈등해소 과정에서 인내와 자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우리 사회의 갈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구조적 요소에 대한 충분한 고려에 기반을 둔 제도적 대안의 모색이다. 사회윤리의 관점을 갈등 양상에 적용하는 것인데, 특히 불교 사회윤리적 관점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구조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연기(緣起)의 관점에서 규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그리스도교 사회윤리에서 비롯된 서양 사회윤리 논의의 한계 중 하나는 개인과 사회구조 사이의 차별성에만 주목함으로써 사회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개인과 사회구조를 연결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자칫 개인의 도덕성으로 회귀해버리거나 그 개인을 배제한 사회구조와 제도 개혁으로 충분하다는 인식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사회 갈등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 불평등과 그와 연결되는 교육 불평등 등의 구조적 원인을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인 윤리적 문제로 부각되어 있는 세계 빈곤 문제가 우리에게는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 안의 빈부격차는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고 그 격차는 다시 정년 연장과 청년취업 사이의 긴장과 같은 세대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20)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갈등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그 갈등을 둘러싸고 있는 감정적 맥락들을 함께 살피면서 인내와 자애심을 가지고 해소의 과정에 접어들어야 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그로 인한 인정(認定) 구조 등을 함께 살피면서 제도적 개혁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구조와 제도의 개혁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당연히 우리 시민사회의 시민이고, 그 시민은 개인의 도덕적 차원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사회의 구조적 차원까지 인식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불교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제안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대안이고, 같은 맥락에서 시민교육까지 고려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 갈등의 해소는 보다 현실성 있는 목표로 다가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 대학원장.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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