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박익순 현대불교신문 기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생명윤리에 대한 불교적인 담론 형성을 위한 공개 심포지엄이 조계종 총무원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 주최로 12월 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렸다.

지난 1월 3일 발족한 ‘불교생명윤리정립을 위한 연구위원회(이하 불교생명윤리위)’가 그 동안 연구해온 결과물을 내어놓는 보고회를 겸한 이날 심포지엄은 △총론 △생명조작 △임신중절(낙태) △뇌사·장기이식·안락사 △사형제도 등 4개 주제별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됐다. 불교생명윤리위는 임신중절과 안락사, 그리고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제시했으나, 배아줄기세포연구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의 성립가능성만을 확인한 채 결론을 유보했다. 조계종은 불교생명윤리위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종단의 공식 입장을 확정할 방침이다.

이날 발표된 논문 가운데 불교의 세계·생명·인간관을 정리한 김종욱 동국대 교수의 <불교생명윤리 총론>과 특히 관심을 끌었던 생명조작분야팀(미산 스님, 허남결 동국대 교수, 우희종 서울대 교수)의 보고서를 요약 소개한다.

■불교 생명 윤리 - 총론

김종욱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1. 불교의 세계관

불교란 ‘불법(佛法)을 신앙하는 종교’라고 정의할 경우, 불교의 목표는 이런 신앙과 수행을 통해 괴로움(苦)의 현실에서 벗어나 열반(涅槃)이라는 이상을 달성하는데 있다. 여기서 불법은 붓다(buddha)께서 발견하고 깨우쳐 가르친 다르마(dharma)를 의미하며, 그 내용에선 연기(緣起)와 그것의 특징으로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이 세계의 근본 질서는 연기이고, 이렇게 연기이므로 무상과 무아라는 이치를 알지 못해, 집착과 망상을 일으키면 괴로움을 낳지만, 그 이치를 확연히 깨우쳐 집착과 망상을 여의면 곧 청정한 열반에 이른다는 점을 제시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이 연기하므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라는 초기불교의 일관된 가르침은 그 후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무상과 무아가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된다. 즉 무수한 조건들이 끝없이 개입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계속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연기적 추세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떨어져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자성(自性)과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상호의존하여 성립하는 연기이므로, 고정 불변의 실체성이 결여된 무자성의 공이라는 것이다. 이제 초기불교의 세계관적 지혜의 내용이던 연기관(緣起觀)이 대승불교에 이르러 공관(空觀)으로 재탄생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 본 무상과 무아와 공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은 모두 연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기야말로 모든 불교 사상의 근간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목표가 누구나 붓다가 되는데(成佛) 있다고 할 때, 붓다란 곧 “깨달은 자”를 가리키고, 그 깨달음의 내용이 되는 것이 바로 연기이기 때문이다. 이 연기야말로 어떤 한 인간의 출현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우주의 근본 이법으로서의 다르마다.

연기(pratityasamutp?da)란 세상의 모든 것은 무수한 조건(pratitya)들이 서로 화합(sam)하여 발생(utpada)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연기에는 크게 보아 두가지가 있다. 첫째, 그것은 세상 모든 현상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을 가리키는 일종의 외인연(外因緣)으로서, 불교의 세계관은 여기에 근거한다. 둘째, 그것은 생(生) 사(死) 노(老) 등 일체 중생의 고통이 어떻게 상관적으로 발생 소멸하는가를 보여 주는 일종의 내인연(內因緣)으로서, 불교의 인간관은 여기에 기반한다. 외인연이란 종자와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허공과 시절과 사람의 노력 등이 화합하여 싹이 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내인연이란 이른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의 각자가 앞의 것으로 인하여 뒤의 것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외부 사물 상호간의 관계성을 나타내주는 외인연으로서의 연기는 “고정된 실유의 성품이란 없는 것이니, 단지 인연에 따라 화합하여 일어날 뿐이고, 여러 인연의 각각이 화합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표현된다. 이처럼 일체는 무수한 조건들이 상호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연기적 세계관은, 세계 내의 각 대상들은 단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대상들을 서로 서로 포함하며, 사실상 각각의 대상은 서로 다른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니, 한 티끌의 먼지 입자에도 무수한 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화엄경의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사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無始無終) 직간접의 조건들(因緣)의 연쇄적 그물망(因陀羅網)으로 표상되며, 길가의 이름 없는 풀 안 포기에도 전 우주의 역사가 함장 되어 있듯이,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층층이 겹쳐 융섭하는 것(重重無盡緣起)이 마치 연씨가 서로 겹치는 것과도 같으므로 우주는 연화장세계(連華藏世界)라고 표현된다. 또한 이런 인드라의 그물망이나 중중무진의 연화장세계를 이루게 하는 원리가 연기이고, 이 연기야말로 삼라만상의 근본 이치로서의 다르마(Dharma), 즉 법(法)이므로, 연기에 의해 성립된 온 생명의 큰 바다를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즉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 관류되어 있는 세계, 상호의존하여 이루어진 모든 존재자로서의 일체법이 법계(法界, dharma-dh?tu)이고, 이런 연기한 제법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성격, 또는 연기한 모든 존재자를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연생성(緣生性, pratityasamutpannatva)은 법성(法性, dharmata)이다.

법성은 붓다가 될 수 있는 근본적 가능성인 불성(佛性, buddhatva)을 함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법성(法性)을 본성의 원리로 하고 법계(法界)를 전체의 범위로 하는 불교적 세계(法性自然,法界自然)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상의성(相依性)과 연생성(緣生性)과 공성(空性)을 법으로 하여 통일된 한 생명의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

2. 불교의 인간관
불교에서 인간은 윤회와 해탈의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다루어진다. 생명을 가진 사물이 자신이 지은 행위의 영향력(業力)에 따라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띄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되풀이하며 흘러가는 것을 일러 윤회(輪回, samsara, 흘러감)라 하고, 이런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일러 해탈(解脫, moksa, 벗어남)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사람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은 윤회의 여섯 단계(六道) 중 하나인 인(人, manusya)이다.

Manusya의 manu가 사유를 뜻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능히 생각을 가지고 일을 꾸며 사유 관찰하는고로 마누샤라 이름한다.”(以能用意思惟觀察所作事 故名末奴沙)그러나 인간은 이런 식의 분별 사유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무분별의 지혜로 전화시킬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윤회에 머물 수도 해탈에 이를 수도 있다.
십이연기를 풀어서 설명하면, 다르마(dharma)에 대해 무지하므로(無明),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앞세워(行), 물질과 비물질의 일체를 분별 인식한 후(識,名色,六入,觸) 거기서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을 느껴(受), 즐거운 것을 갈망하여 집착하니(愛,取), 그것을 영원히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有), 무상한 생로병사에 괴로워한다(生,老,死)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십이연기에는 이처럼 괴로움의 발생 과정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소멸 과정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무명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명을 제거하면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아울러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무지(無明)로 인해 괴로움 속에서 헤매는 미계(迷界)에 있지만, 자각(明)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난 오계(五界)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무명과 명으로 표현된 미오의 관계인 것이다.

인간의 상황이 미오의 이중적 복합성으로 되어 있고, 전미개오가 오직 마음가짐의 전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교에서 인간의 탐구가 마음의 탐색으로부터 시작하며, 그것이 비본래적 현실성과 본래적 가능성 혹은 염과 정의 구도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교적 인간관의 이런 구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성본정 객진소염”(心性本淨 客塵所染)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서는 ‘심성본정 객진소염’이라는 정과 염의 구조를 알라야식을 통해 종합적으로 파악한다. 유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단지 찰나 찰나 생멸하는 마음이 일정 기간 지속되는 것을 자아라는 개념으로 묶어 집착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자아의식(제7식, 意)과 대상의식(제6식, 識)을 총괄하여 마음의 흐름(心相續)에서 주체가 되는 일종의 잠재의식이 로 알라야식(제8식,心)이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알라야식은 정과 염, 선과 악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이 정(淨)이나 염( 染)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알라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식 사상에서는 인간의 상황에 담긴 미오나 염정의 이중적 복합성과 전미개오(유식의 표현으로는 轉識得智)의 가능성을 알라야식 이론을 통해 나름대로 종합하고 있지만, 심성본정보다는 범부의 마음 상태를 해명하는 객진소염 쪽에 비중을 더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에서는 심성본정 쪽에 강조점을 두고 객진소염과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여래장은 불성으로도 표현된다. 불성(佛性)에 해당하는 인도 원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 buddha-dhatu를 그 해당어로 본다. 붓다란 법(法, dharma)을 보아 깨달은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법을 본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담보해주는 표현이 다투이다. 다투의 어근 dha는 ‘야기하다, 일으키다’ 또는 ‘놓다, 위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전자의 뜻으로 할 경우, 다투는 ‘야기하는 것’(因)이고, 붓다-다투는 ‘부처가 되게 하는 근원’이나 ‘부처가 될 요소’ 등을 의미한다. 후자의 뜻으로 할 경우, 다투는 ‘야기되어 놓여진 것’(界)이고, 붓다-다투는 ‘그런 근원에 의해 야기되어 부처와 한 종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불성을 전자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 그 해당어는 buddha-garbha(佛藏)가 되고, 후자로 해석할 경우에는 buddha-gotra(佛性)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투의 이런 용법은 dharma-dhatu(法性,法界)에도 적용된다. 다투의 첫 번째 용법에 따를 경우, 다르마-다투는 ‘모든 존재자의 현상을 야기하는 근원’으로서의 ‘연생성’(緣生性, pratityasamutpannatva), 즉 법성(法性)을 가리키고, 그 두 번째 용법에 따를 경우에는 ‘연기라는 원리 하에 마치 하나의 가족이나 종족처럼 공존하며 모여 있는 것’ 다시 말해 ‘연기한 제법’(prat?tyasamutpanna dharmah), 즉 법계(法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법을 본 자를 부처라고 하는 이상, 부처를 되게 하는 근원은 법이고, 이 법에 해당하는 것이 일체의 근원으로서의 법성이며, 법성은 바로 연기성과 공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성은 곧 법성이고 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성불의 가능 근거와 일체의 존재 근거가 공성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인 불성이 공성인 이상, 인간의 그 어떤 본성도 실체시하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형성에서 중요한 계기인 식(識) 또는 알라야식도 어디까지나 연기적 관계성의 산물로 인간이 윤회하여 발생한다는 인연화합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주요 조건일 뿐 그 자체가 절대 유일의 주체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3. 불교의 생명관

우리가 현재 탐구하고 있는 생명 현상이나 생명체에 해당하는 불교 용어로는 중생(衆生, sattva)이 가장 적합하다. 중생 개념을 분석하기에 앞서 우리는 중생이라는 번역어의 원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산스크리트 sattva는 한 마디로 ‘존재자’(being, entity)를 의미하는데, 범부·유정·중연화합생으로 그 의미가 삼분된다.

이 가운데 불교적 의미에서 생물에 해당하는 것이 유정(有情, sattva)이다. 유정이란 정(情)이 있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 정이란 정식(精識)이나 업식(業識)을 지칭한다. 정식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수용 능력을 의미하고, 업식은 업상(業相), 즉 무명업상(無明業相)을 의미한다. 무명업상이란 “무명에 의하여 망념이 움직여 비록 생멸은 있지만, 아직은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무명(無明)과 인식(識)의 중간에 있는 것은 십이연기 상에서 보면 행(行), 즉 맹목적 삶의 의지와 그로 인한 행위이다. 이처럼 “마치 달리는 수레의 쐐기처럼 행위(kamma, 業)에 매여 있으므로 유정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정이란 ‘감각적 수용 능력을 지니고 맹목적 삶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것’, 즉 감수성(情)과 의지성(行)과 행위성(業)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하나의 개체 생명으로서의 유기체(organism)는 대사와 생식과 진화라는 특성을 지닌다. 대사(metabolism)란 생명의 유지를 위해 외부로부터 물질과 영양을 섭취하고 불필요한 것을 배출하는 것을 말하고, 생식(reproduction)이란 개체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유전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대사와 생식에 비해 훨씬 더 긴 종 차원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 진화다. 진화(evolution)란 변이에 의해 환경 적응력이 증가하는 것, 다시 말해 점진적인 변화를 통한 발전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생명 현상을 ‘대사’와 ‘생식’과 ‘진화’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들 개념 모두가 고립된 실체적 개체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적용시킬 수 없는 ‘관계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관계적 개념으로서의 대사와 생식과 진화를 특성으로 하는 생명체란, 내부와 외부의 일체 요소들이 끊임없이 순환 교류하면서 자신의 고유함을 전승시켜가는, 수많은 세월에 걸쳐 주변과 상호의존의 관계 작용을 계속해 온 누적적 역사의 산물이며, 이런 유기체로서의 개체 생명의 본질은 비실체적 ‘상호의존성’에, 다시 말해 불교적 의미로는 연기성(緣起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무상과 무아와 무자성의 공성으로 표현되는 연기성은 조건들의 무한한 연쇄성과 조건들의 철저한 비실체성을 함축한다. 연기를 무수한 조건들의 끊임없는 연쇄적 지속이라고 볼 때, 연속이란 계속된 변화를 뜻함과 동시에 일정한 성질들의 계속되는 유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계속 변화’가 찰나 생멸을 함축한다면, ‘계속 유지’는 업력의 전달자나 종자의 보존자로서 알라야식이나 중유(中有)를 필요로 한다.

끊임없이 매 찰나마다 생성 소멸한다 해도, 관계성의 한 양상으로서 나름대로의 성질을 어떤 주어진 기간 동안 지닐 수 있다. 마치 강물이 물결들의 끊임없는 부침 속에 계속 변화하며 흘러가도, 임의의 기간 내에 나름대로의 모양, 깊이, 속도, 순도 등을 간직하면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중유(中有)나 식(識) 등을 활용해 생과 생 사이의 상속을 이해하고, 수정시 반드시 이런 중유나 식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고 해서, 중유나 식을 ‘영혼’과 같은 어떤 실체로 여겨서는 안 된다. 불교의 대원칙은 어디까지나 연기론, 즉 인연 관계론이고, 이 관계를 다루는 조건들 중 어느 하나도 관계의 한 항일 뿐, 그 관계를 벗어난 실체적이고 독립적인 요소는 아닌 것이다. 중유를 비롯한 삼사(三事)가 화합하여 태아가 형성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실체적 요소로서의 중유나 식이 아니라, 화합이라는 과정적 관계성 그 자체이다.

이것은 연기론(緣起論)과 오온론(五蘊論)사이의 위상에서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인연의 관계론이 있고 이에 대한 해명으로서 조건적 요소론이 있는 것이지, 요소들이 실체로서 먼저 있고 이들간의 조우로서 관계론이 추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건들 중 어느 하나를 필수화하여 거기에 절대적 본질성을 부여한 다음, 이 본질적 요소가 등장해야만 생명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은 관계론적 조건론인 오온 연기론을 요소적 실체론으로 고정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불교의 윤리관

불교 윤리의 기본적 입장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 이른바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많은 선을 받들어 행하되,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은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라(止惡修善)는 뜻으로, 이것은 어떠한 형태의 윤리나 도덕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교훈이다.

그런데 선을 하고 악을 하지 말라는 것은 ‘좋은 일을 하면 즐거운 과보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괴로운 과보가 온다(善因樂果 惡因苦果)’는 원리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이렇게 악을 폐하고 선을 권하기 위해서도 선과 악은 즐거움과 괴로움만큼이나 확연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일반적인 윤리는 선과 악의 분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윤리학에서 논하는 선은 악과의 관계에서 악과 대립된 선, 즉 일종의 상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악에 반(反)해 선은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데, 세간의 상대적인 선은 부귀영화나 무병장수라는 미래의 즐거운 과보를 약속함으로써 인간에게 집착심을 유발시킨다. 결국 선과 악의 상대적인 분별의 근저에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번뇌심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의 선을 유루선(有陋善)이라고 부른다.

선과 악의 분별이 집착과 번뇌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상,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한다고 해서, 생로병사로 인한 근원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상태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착과 번뇌를 낳을 뿐인 이원적인 분별심, 그 자체를 가라앉혀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것이 세 번째 구절의 내용이다.

이렇게 선과 악을 초월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의 선(勝義善)이며, 선과 악의 상대적 분별과 대립(對)이 끊어진(絶) 절대적인 선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탐욕(貪)과 분노(瞋)와 무지(痴)로 인해 끝없이 새어나오는(漏)번뇌가 마침내 차단되기 때문에, 그것을 일러 무루선(無漏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선악 이전의, 선악의 경계선 너머의 본원적 절대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일반적 윤리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적 종교성의 핵심이다.

하지만 선악을 초월한다고 해서, 선악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선악 이전의 청정심의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를 윤리와 선악의 원천으로 삼음으로써,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저절로 세간의 윤리 규범에 상즉(相卽)하여 전혀 잘못됨이 없는 상태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이야말로 선악 초월의 자유(自由)와 선악 즉응(卽應)의 자재(自在)가 만나는 곳이며, 세속선과 승의선, 상대적 선과 절대적 선, 세간적 선과 출세간적 선, 유루선과 무루선이 융통하는 접점이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에서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고 도덕 판단을 내릴 때, 그 대상이 되는 어떤 것에는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의 구조 등이 해당된다. 이처럼 도덕 판단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행위를 불교에서는 업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업(業, karma)의 산스크리트 어원 kr에서의 ‘하다’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다’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다’이다. 그래서 이러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업도 의도나 동기로서의 ‘의지’, 그런 의지를 동반한 활동인 ‘행위’, 그런 행동에 의해 남겨진 ‘영향력’이라는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 업은 단순히 ‘행위’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원인의 측면(의지)과 결과의 측면(영향력)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의지를 동반하지 않은 활동은 단순한 운동일 뿐, ‘행위’나 행동은 아니다. 따라서 불교적 도덕판단의 대상은 반드시 의지를 동반한 활동이며, 이 '의지(cetana,思)'말로 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의지의 발동으로 인해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반드시 ‘영향력’을 미쳐 그 과보를 받는다. 업은 마치 식물과도 같아서, 일단 씨앗이 뿌려지면 과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지를 지닌 인간이 업을 일으켜 자신의 선악(善惡)업에 따라 생사를 유전하면서 고락(苦樂)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곧 업설의 취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업보의 사상을 다룸에 있어 꼭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좋은 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나쁜 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인과업보의 필연적 관계성을 잘 인식하여 언제나 선업을 쌓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즐거운 과보에 대한 목마른 기대는 집착과 번뇌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과업보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상대적 선의 세계와 선과 악 모두를 초월하는 절대적 선의 세계가 원융 상통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화의 관점에 바탕을 둔 인과업보의 사상이 선과 악에 대한 불교적 도덕판단의 기초를 이룬다.

이렇게 볼 때 불교적 관점에서 생명조작, 낙태, 안락사, 뇌사, 장기이식, 사형제도등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그것의 좋고(善) 나쁨(惡)을 판단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불교는 기본적으로 선악 너머의 절대선을 지향하므로, 업보를 유발하는 그런 세속의 유루적(有漏的) 매사안들에 대해 시비선악을 명시적으로 분별하여 어느 한 입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딜레마적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불교적 기준은 선악 너머 또는 선악 이전의 경지, 즉 자기 집착에 빠져 특정한 이익을 대변하는 데서 벗어난 무아(無我)와 비움(空)의 경지에서 과연 실상(實相)그대로 여법(如法)하게 판단할 수 있는가의 여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무아와 공의 경지에서는 자기를 넘어 타자를 향해 무한한 자비가 확산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체개공의 철저한 무아(無我) 사상에 설때에, 모든 것을 중도와 불이(不二)의 즉(卽)으로 보아, 자타가 무분별하고 자리즉이타(自利卽利陀)가 되는 참다운 무연(無緣)의 자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윤리와 관련된 불교의 모든 판단은 보다 많은 자비의 실현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비(慈悲)에서, 대자(大慈)는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대비(大悲)는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뽑아내는 것이므로, 모든 판단은 아파하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내려져야만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이타적 자비행을 구현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력을 고안해 내어야 하지만, 이런 자비의 방편력을 구사함에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침은 언제나 반야의 공관이라고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방편을 시행하는 주체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라는 자기기만을 철저히 비워내어야 하며, 그 방편의 대상에 대해서도 그것을 고정된 실체로 간주하여 또 하나의 집착을 유발하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비의 이타행의 궁극적 목적은 신체적 고통의 감소에 머물지 않고 일체의 번뇌가 제거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중생의 제도에 있으며, 이런 궁극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업의 누적은 끊이지 않을 것이므로 언제나 참회의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 역시 명심해야한다.

불교생명윤리_생명조작

(미산 스님, 허남결 동국대 교수, 미산 스님)의 보고서

인간은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하지만 삶의 현장은 온갖 괴로움과 번민, 갈등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의 과정은 이러한 괴로움과 불행에서 벗어나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2500여 년 전 붓다는 괴로움의 현상과 그 원인의 진단, 그리고 괴로움을 치유하기 위한 목표와 실제적인 치유방법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부터 인간의 괴로움을 치유하기 위한 종합적인 교리체계와 실천체계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괴로움 치유 이론과 실제는 시대와 지역의 지평을 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유효하다.

현대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인간들도 생·노·병·사라는 괴로움과 고통의 큰 틀 안에서 살아간다. 늙지 않고 더 오래 살며, 병들지 않고 건강하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법을 탐구하며 생명과학을 발전시켜왔지만, 여전히 인류는 생·노·병·사라고 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명과학의 발달이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치료해주리라는 기대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현상에 대한 인위적 조작과 간섭이 가져올 재앙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갖게 하고 있다. 난치병 환자들의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분별한 생명조작이 가져올 혼란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생명조작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생명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종교, 철학, 윤리학, 법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진지한 담론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불교는 인간의 괴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과 근원적인 행복의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므로 행복과 불행의 쟁점이 되는 생명조작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불교적인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번에 다루는 생명 조작 논의의 초점은 배아줄기세포 연구다.

1. 불교의 연기적 생명관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을 지칭할 때 인식 능력이 있는 존재란 뜻으로 ‘사뜨와’(sattva), 즉 유정(有情)혹은 중생(衆生)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특히 유정은 감정이나 의식을 갖고 사는 존재를 의미한다.

불교의 세계관으로 볼 때 인간을 포함한 유정들은 자기존재에 대한 강한 취착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 생명체들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5가지 존재의 생명현상들이 조건에 의하여 연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경전은 말한다.

존재의 5가지 생명현상들을 5온이라 한다. 인간은 물질적 요소인 색(몸)과 정신적 요소인 수·상·행·식 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불교는 인간을 5온의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이 결합된 존재로 본다. 5온으로 이루어져 연기하는 ‘나’라는 존재를 고정불변의 자아로 착각하여 취착(取着)한다는 의미에서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인간을 5온의 연기적 생명현상으로 볼 뿐 여기에 영구불변의 자아를 상정하지 않는다. 《중부(衆部)》의 〈마하땅하샹키야경〉에는 이에 대한 붓다의 입장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어느 날 어부의 아들이었던 사띠라는 비구가 동료 비구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세존의 가르침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식(vinnna)이 [주체가 되어] 돌아다니며 윤회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의아해하던 동료 비구들이 사띠의 이 말이 정말 붓다께서 가르치신 법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사띠의 사견(邪見)인지를 판명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붓다께서 사띠를 불러 확인하신 후 호통을 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가르쳤더냐? 식은 연기하는 것이라고 내가 여러 법문을 통해서 가르치지 않았더냐? 이 어리석은 사람아, 식은 조건이 있을 때만 생긴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경전에서 붓다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연기법을 친절히 다시 설해 주시면서 3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수태가 되며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조건이 성숙되지 않아 태아가 생겨 날 수 없다고 강조하신다.

부모가 교합을 해야 하며, 여성의 임신 주기가 되어야 하며, 간다바(gandhabba)가 임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간다바’이다. 장부(長部)의 《마하니다나경》에서는 간다바 대신 식(識)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 이하 유부로 칭함)에서는 이 경구를 인용하여 간다바 즉 중음(中陰)에 의한 윤회설의 전거(典據)로 삼고 있다. 범어로는 간다르바(gandharva)라고 하는데 유부의 초기논서인 《마하위바샤(Mahavibhasa,大毘婆沙論)》에는 간다르바 대한 여러 논사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기록되어 있다.

보통 유부에서는 욕계와 색계 중생들은 시간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 입태에서부터 일생을 산 후 죽음의 직전까지를 본유(本有), 죽는 순간을 사유(死有), 그리고 죽은 후에서 입태 직전까지를 중유(中有, antarabhava)라고 한다. 유부뿐만 아니라 독자부, 유식과 중간학파 등 대승불교학자들은 죽음과 재생 사이의 중간단계를 인정한다. 물론 대중부와 상좌부는 이러한 중음을 상정하지 않고 재생을 설명한다. 《마하위바샤》에서 어떤 논사는 “업력이 강열하고 예민한 이에게는 중유가 없고 업력이 미약하고 둔탁한 이에게만 중유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유가사지론》은 5온이 수정과 동시에 생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따르면 중음의 상태도 나름대로의 5온을 갖추고 있는데, 중음의 5온은 인연이 변화하는 순간 소실되어 아뢰야식과 업의 공능만 남아 다음 생의 새로운 5온을 획득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중음의 단계를 설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음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몸은 버리고 아뢰야식과 업력 만 전달할 뿐이기 때문이다.

2. 불교문헌에 나타난 배아와 태아의 발달과정

배아와 태아의 발달과정에 대한 설명은 여러 불교문헌에 기술되어있다. 《팔리니까야》를 비롯하여 《한역 아함경》, 《수행도지경》, 《불설포태경》, 《능엄경》 등 경전 뿐만 아니라 각종 초기 논서와 주석서 그리고 유식학의 초기 논서인 《유가사지론》과 《비나야잡사》 등 율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문헌에서 배아와 태아의 발달과정을 다루고 있다.

위의 자료들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표된 불교와 생명복제에 관한 논문들에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상좌불교의 전통에서 보존해온 《팔리니까야》와 그의 주석서에 나오는 설명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상윳따니까야(Samyutta Nikaya)》의 〈야카상윳따(Yakkhasamyutta)〉에 나오는 태내오위설(胎內五位設, 배아와 태아의 처음 5주 동안 자라는 모습을 7일 단위로 설한 것)은 인간을 실체론적 입장에서 보는 유아론자에게 설하신 설법으로 이 경전의 주석서에는 배아와 태아의 발달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특히 현대 태생학에서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자료와 비교하더라고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서 2000여 년 전에 어떻게 이 상세한 관찰이 가능했는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태내오위설

가장 초기의 형태로 추정되는 태내오위설은 《상윳따니까야》의 〈야카상윳따〉와 이에 상응하는 《잡아함경》 권49에 나온다. 태내오위설은 인간의 영혼이나 개아 혹은 아트만이 실체로서 영구히 존재하여 새로운 몸을 받아 살아간다는 유아론적 실체생명관을 바로 잡아주고 무아론적 연기생명관을 알려주기 위해서 설해졌다.

붓다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몸속에 들어와서 인간 개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명의 원인과 조건이 있으면 존재가 만들어지고 인연이 흩어지면 생명 또한 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으로 태어날 원인과 조건이 성숙되면 깔라라(kalala)가 생기며 이로 인하여 아부따(abbuda)와 뻬시(pesi) 등 자궁내 조건의 변화에 따라 태아가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조건 변화의 원동력은 어머니가 섭취한 영양분이며 태아는 이 자양분으로 인하여 신체의 각종 부위가 성숙돼 출생하게 된다.

배아와 태아의 발달과정에 대한 묘사는 여러 불교경전과 주석서에 나오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팔리어로된 《야카상윳따 주석서》와 《위방가 주석서》를 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① 깔라라-양털 끝에 맺힌 참기름 방울
깔라라는 수정 직후부터 7일 동안의 배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야카상윳따 주석서》에는 “마치 참기름 방울이나 투명한 우유기름과 같은 것, 깔라라는 이런 모습이라고 말한다”라고 묘사돼 있다.

② 아부다-고기 씻은 물 색깔의 작은 종기
깔라라의 상태에서 7일이 지나면 이 작은 기름방울이 종기처럼 부풀러 올라 고기 씻은 물의 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야카상윳따 주석서》에는 “7일된 깔라라가 성숙되어 사라지면 그 상태가 변하여 아부다가 생성된다”고 돼 있다.

③ 뻬시-정제된 납덩이나 백색 후추씨 모양
뻬시는 제3주째 배아를 가리킨다. 3주째에 접어들면 배아의 색깔이 정제된 납덩이처럼 변하고 백색 후추씨 크기로 성장한다고 묘사한다. 《야카상윳따 주석서》는 “7일된 아부따가 성숙되어 사라지면 그 상태가 변하여 뻬시가 생성된다”고 적고 있다.

④ 가나-작은 달걀모양의 살덩어리
가나는 제4주째 배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야카상윳따 주석서》는 작은 알처럼 타원형으로 변한다고 하며 “7일된 뻬시가 성숙되어 사라지면 그 상태가 변하여 가나가 생성된다. 마치 타원형의 알처럼 생긴 가나의 모습은 업의 조건에 따라서 생긴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⑤ 빠사카-머리와 양팔다리(四肢)
빠사카는 배아의 몸통에서 5부분이 볼록해지며 머리와 양팔다리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와 관련된 《야카상윳따 주석서》에는 “비구들이여, 5주째가 되면 업으로부터 5가지 종기(腫氣)의 모양이 형성된다”는 게송이 보인다.

이상은 제5주까지의 배아가 자라는 모습을 경전의 태내오위설을 중심으로 해설한 것이다. 제6주 이상은 생략되어 있고 경전에 머리털, 몸털, 손톱 등이 생긴다는 언급은 제42주째의 성숙된 태아의 형상을 묘사한 것이라 《야카상윳따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

3. 배아의 지위와 불교생명윤리

배아의 지위에 대한 생명윤리적 쟁점사항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산모의 자궁에 착상되기 이전의 배아는 단순한 세포 덩어리에 불과하므로 특별한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학적 실험의 대상이 되든, 그 과정에서 파괴 행위가 있게 되든, 이는 피실험동물들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윤리적 문제가 수반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으로 유물론자나 기계론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둘째, 인간의 배아는 생성 순간부터 온전한 인간 개체와 같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받으며,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배아를 활용한 연구나 배아조직의 실험적 사용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입장이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 및 생명윤리학자들의 견해가 이에 속한다. 수정 이후의 모든 과정이 자연적으로 진행되어 출생하는 인간과 수정란은 존재론적으로 동일성(identity)이 있으므로 포괄적인 보호의 필요성이 있다고 한다.

생명의 연속성(continuity)을 존중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정란 및 인간배아는 추후 완전한 인간으로 발달하는데 필요한 모든 잠재성(potentiality)을 갖춘 예비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배아의 생산, 잔여 냉동배아의 처리, 배아로부터 줄기세포의 추출 및 치료복제법 등 모든 관련 연구 활동들은 전면 금지 또는 윤리적 시험대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 두 입장 사이의 절충안이 있다. 인간의 수정란과 배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지위를 부여 받기는 어렵지만 잠재적 인간존재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배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윤리적 정당성은 그 연구결과가 산출할 잠재적 이익과 배아를 보호하고 존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 사이를 서로 비교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기론적 입장에서 본 배아복제
생명조작기술이 배아복제에서 원하는 조직으로 분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든 아니면 모태 내에 착상시켜 인간개체를 복제하든 연기법의 영역에서 이뤄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연기적 사실이 적용되었을 때 이것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가치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치판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배아와 실험실에서 배아를 만드는 자, 그리고 배아복제 시술을 받는 환자 간의 상호 관계성이다. 배아복제 시술을 받을 환자가 있기 때문에 배아를 복제하는 자가 있고 배아가 복제되어 환자에게 시술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주는 것’의 관계성이다. 불교의 수행덕목에서 강조하는 보시의 적합성과 청정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시자(施者), 수자(受者), 시물(施物)의 3가지 조건이 정당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이 단순한 물건이라면 그리고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 보시의 3가지 조건에 해당되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배아가 단순한 세포덩이가 아니라 인간 혹은 인간으로 될 잠재성을 갖춘 존재라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합의뿐만 아니라 ‘주는 것’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제된 배아가 단순한 세포 덩어리인지 아니면 엄연한 생명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무아론적 입장에서 본 배아복제
현재 논의 되고 있는 배아복제 연구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과연 배아를 생명권을 지닌 인간개체로 볼 수 있는 지, 생명체로 인정한다면 수정 후 어느 시기부터 인간개체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배아복제 연구의 찬반여부가 결정될 수 있는데, ① 단순한 세포 덩어리로 보는 입장, ② 온전한 인간 개체로 보는 입장, ③ 수정 후 14일 무렵, 원시선이 나타나는 착상의 완료 시점부터 인간 개체로 보는 입장이 있다.

위의 3가지 가운데 불교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 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위의 3가지 입장 모두 인간이라고 규정할 만한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하는 관점에 서 있는 데 반해 불교는 배아와 태아는 물론 인간 자체까지도 실체론적 입장이 아닌 관계론적 입장에서 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실체론적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자아가 실체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인식 때문이라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즉 배아복제의 인간개체성 논의는 사실상 5온을 자아로 취착하는 전도된 가치관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해탈의 삶을 망각하고 사는 존재들은 5온을 자아라고 생각하므로 몸(色)과 정신(受想行識)의 인연화합이 흩어지는 시점에서 스스로의 조건에 맞으면 새로운 5온으로 다시 태어나 윤회의 삶을 연속적으로 이어간다. 그렇다면 새로운 5온이 시작되는 시점이 언제부터인가? 상좌불교의 《위방가 주석서》와 대승의 유식 논서인 《유가사지론》은 5온이 수정과 동시에 생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단지 중음의 단계를 설정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다른 점이다. 하지만 중음의 유무는 다시 태어날 존재의 업의 강도에 따른 절차일 뿐이다.

불교학자들 간에는 이런 논서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초기경전에 나오는 입태의 3가지 조건, 부모의 교합, 여성의 적합한 임신 주기, 식 혹은 간다바의 출현 중에서 세 번째 즉, 정신적 현상의 결합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수정과 입태 혹은 착상은 구별돼야 하며, 수정될 때가 아니라 태(난막ㆍ태반ㆍ탯줄의 통칭)가 형성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인간 생명체로서의 감수성(情)과 의지성(行)과 행위성(業)을 갖추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착상 이전의 배아는 생명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생명이지 생명체는 아니다.

◇업론의 입장에서 본 배아복제
업론(業論)은 배아 지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배아를 생명체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배아 자체의 의도성과 행위성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고 배아를 복제하는 자와 배아복제 시술을 받는 자의 의도성과 행위성의 문제만 다루면 된다. 그러나 배아를 생명체로 인정할 경우 배아 자체의 의도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업의 작용과 함께 적절한 조건이 있으면 새로운 생명현상이 일어나 생명체가 형성된다고 본다. 불교 윤회설은 생명의 발생과 그 유지의 문제를 업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업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의도와 동기로서의 의지(cetana)와 그 의지적 행위로 인한 영향력(vasana)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업은 결과인 과보(果報)를 초래할 힘을 가지고 있는 행위이며 결과가 있으려면 의도와 그 의도가 좋냐 나쁘냐(善惡)의 윤리적 조건을 갖춘 행위여야 한다. 자궁 안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이루어진 수정이라면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bhavatanha)와 의도적 업력이 작용하여 수정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본다. 업론의 관점에서 배아복제를 보면 다음 3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①복제된 배아는 정신적 현상과 업이 이미 작용하여 생긴 생명체이므로 보호해야 한다.

②복제된 배아가 생명체인 것은 분명하나 난치병 환자의 고통을 제거해 준다는 목적으로만 활용된다면 그 업의 과보는 그리 크지 않다.

③착상 이전이 배아는 업의 잠재력만 지닐 뿐 감수ㆍ의지ㆍ행위성이 발현되지 않았으며 불교의 문헌에 나타는 태내오위설의 4주째인 가나 단계에 비로써 업보체로서의 업력이 발휘된다고 본다.

첫 번째는 배아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의 잠재성이나 그 연속선상에 있는 한 인간의 생명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불교적 윤리의 견지에서 볼 때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처사이며 배아는 자기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더욱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배아 자체의 의도성과 행위성이 비록 감각기관이 형성되지 않아 인간들이 인지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자신을 이용하여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에 대한 어떤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난치병을 치료하는 것은 기쁘고 보람 있는 행위라고 보살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삶의 의지를 꺾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배아를 복제기술을 시술하는 자와 이용을 당하는 배아가 동일한 좋은 의도를 갖고 행한 행위이므로 선업을 짓는다.

대승불교의 이상향인 보살이 입태한 것이 아니면 이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복제자는 시술을 받는 자에게 선행을 하였지만 배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아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배아라는 생명체에게는 악업을 지은 것이다.

세 번째의 입장은 착상 이전의 배아는 인간의 잠재태이지 자궁에 안착하여 성체로 나타난 현실태는 아니며 업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지 않아 생명체와 동일시할 수 없으므로 성체를 죽이는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감수ㆍ의지ㆍ행위성이 발현되지 않아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보살심이나 적개심을 느끼지 못하므로 이로 인한 선악의 업보도 상대적으로 작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업론의 입장에서 본 배아복제 지위의 도덕적 판단에 관한 논의는 결국 생명의 존엄성과 자비실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4. 생명존엄성과 자비실천의 의미

생명의 존엄성은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자비의 대상을 위해서 미시적 세계의 작은 생명은 희생시켜도 되는 것인가? 생명존중 사상은 불교 수행의 실천덕목 중에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불살생계의 정신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억압된 생명을 해방하고 살려주는 방생의 정신도 내포하고 있다. 배아를 생명체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작은 미시적 형태의 생명체라 할지라도 죽이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금해야하며 불살생계에 저촉되는 행위라고 본다. 그러나 생명존중에 대한 이런 절대적 입장은 당위적 이상일 뿐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이율배반적인 다양한 경우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 또한 감안돼야 한다.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는 무수한 다른 생명체의 희생의 대가가 있으므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중심적인 문명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윤택한 삶을 위해 동물들은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동기에서 가축을 사육한다. 고기를 생산하여 음식물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매일 수많은 소, 돼지, 닭 등을 도살한다. 인간들의 공익을 위한 행위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불살생 행위의 관점에서 본다면 업보의 양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죽이는 행위 자체에는 살생의 업보가 있지만 음식을 제공한다는 공익의 의도에는 선한 업보가 있다.

불교적 견지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논할 때 인간만이 존엄하고 다른 생명체는 인간생활의 편익을 위해서 당연히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인간 배아복제의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이 동물의 살상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설득력 없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인 것이다. 인간중심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존귀하고 자기 행위에 대한 인과법을 분명히 믿는 태도가 확산되었 때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5. 생명조작에 관한 불교적 담론의 시발점

현대사회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한 연기적 지혜와 중도적 행위는 무엇일까? 생명윤리의 논쟁은 항상 선과 악, 윤리와 비윤리, 이익과 불이익의 사이를 오가며 선악시비를 명시적으로 분별할 것을 강요한다. 붓다는 선악시비와 같은 대립적 개념은 넘어야 될 분별망상으로 보고,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라 전하는 게송에 “모든 악행을 하지 말라. 많은 선을 받들어 실천하라.

스스로 마음을 청정히 하라.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간단한 게송이지만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이상에 대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적 삶은 항상 악을 멀리하고 선을 증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선의 마지막 정점에 다다르면 상대적 개념의 선악을 벗어나야 궁극적 의미의 선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 자리는 선악의 개념이 벌어지기 이전의 청정심이며 유루(有漏)적 윤리도덕과 선악시비를 극복하여 더 높은 차원의 무루(無漏)적 세계를 열어가는 곳이다. 바로 이 청정심의 자리에서 선악판단을 했을 때 세간의 윤리적 판단에도 어긋남이 없고 진리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남이 없는 원융 자재한 지혜를 자유롭게 드러내 쓸 수 있는 것이다.

선악시비에 치우치면 연기ㆍ중도의 지혜에서 벗어난 것이며 선악시비에 미혹되지 않으면 연기ㆍ중도의 지혜를 쓰게 된다. 선악시비에 치우친다는 말은 배아가 생명체냐 생명체가 아니냐의 판단을 할 때 인과적인 세계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므로 옳고 그름의 한 쪽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견 아니면 단견에 떨어져 연기적 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선악시비에 미혹되지 않음이란 다양한 원인과 조건의 처음과 중간과 끝의 전체적인 흐름을 연기적으로 파악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 집착에 빠지거나 특정한 이익에 천착했을 경우 처음은 볼 수 있지만 중간과 끝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다양한 원인과 조건들이 다 파악되기도 전에 성급하게 배아가 생명체다 혹은 생명체가 아니다 라고 판단하였을 때 중간은 볼 수 있지만 끝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때로는 명료하게 입장을 밝힐 수 있지만 때로는 침묵하거나 입장을 유보할 수도 있다. 주어진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연기ㆍ중도적 지혜이며 이 지혜를 바탕으로 한 행위가 자비행이다. 연기ㆍ중도적 지혜와 자비행이야 말로 생명조작에 관한 불교적 담론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구는 생명조작에 대한 불교적 논의의 시작에 불과하다. 생명조작에 대한 과학연구의 추이를 계속 주시하고 이에 대한 타당성 있는 교학적 해석이 도출될 때까지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종단에 상설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생명윤리 전반에 관한 연구를 본격화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며 이에 불교생명윤리연구소의 설립을 제안하는 바이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