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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정치적 갈등의 기원과 양상 / 손호철
특집 | 한국사회의 갈등, 그 극복을 위한 청문(聽聞)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화쟁정치’를 향하여

 

"파당이란…… 공동의 열정이나 이해관계의 충동에 의해 단결되고 활성화된 복수의 시민들을 의미한다. 파당들의 부작용을 고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효과를 통제하는 것이다."  — 미국 《연방주의교서》

"현대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잠재되어 있지만, 오직 몇몇 갈등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는 갈등 간의 지배와 종속을 다룬다. ……모든 정치는 특정 종류의 갈등은 이용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갈등은 억압하는 편향성을 갖고 있다." —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1. 들어가며

역사적인 촛불항쟁의 승리로 끝난 지 3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나아지는 기색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촛불과 함께 가졌던 기대와 달리, 소위 ‘촛불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현실정치와 정책 속에는 노동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코로나를 기화로 모든 집회 등을 억누르고 있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고공농성, 천막 투쟁 등 ‘거리의 정치’는 촛불 이전보다 특별히 줄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촛불연합’에 의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입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양대 ‘거대 보수 지역정당’이 위성정당을 통해 입법취지를 희화화하고 오히려 소수자의 목소리를 더욱 축소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이 같은 현실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 글은 일차적으로 한국 정치의 갈등 기원과 이후 전개과정을 살펴본 뒤 이에 기초해 한국의 정치갈등 구조, 정치균열 구조가 가진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의 극복방안에 대해 간략하게 고민해보고자 한다.

 

2. 왜 ‘정치균열’ 구조 분석인가?

한 나라의 정치를 분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나라의 정당들이 어떻게 되어 있나를 분석하는 정당체제, 정당구조를 분석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권력을 잡고 있는 정권의 성격과 그 변화를 추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같은 다양한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법, 즉 최소의 노력으로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나라의 정치가 무엇을 놓고, 어떻게 갈등하고 대립하는가 하는 정치적 갈등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정치적 균열(political cleavage)’ 분석, 또는 ‘정치균열구조’ 분석이라고 부른다.

북아일랜드 같은 나라는 정치가 종교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고 어느 나라는 인종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해방정국이 분단의 최종 봉인으로 마감한 1953년 이후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의 시기는, 정권이란 시각으로 분석하자면 이승만 정권(1953~1960년). 박정희 정권(1961~1979년), 전두환 정권(1980~1987년)으로 나뉘고, 정당체제란 시각으로 분석하자면 자유당 대 민주당(1953~1960년), 공화당 대 신민당(1963~1979년), 민정당 대 민주당 등 다당제(1980~1987년)로 나뉜다. 그러나 정치갈등 내지 정치균열구조라는 시각에서 보면 정권의 변화, 경쟁하는 정당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본 틀은 ‘민주 대 반민주’였다. 이처럼 정치균열 분석은 왔다가 사라지는 정치인들과 정당을 넘어서 그 핵심에 내재하는 정치적 갈등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분석방법이다.

정치균열 분석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균열’과 ‘정치적 균열’ 간의 관계이다. 앞에서 인용한, 정치적 갈등에 대한 한 대가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잠재되어 있지만, 오직 몇몇 갈등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사회적 갈등과 사회적 균열이 정치적 갈등과 정치적 균열로 나타나지 않는다. 미국 건국 당시 《연방주의교서》의 저자들이 이미 잘 지적했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파당과 갈등은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의 갈등”이며, 현대사회에서도 ‘자본 대 노동’의 갈등은 기본적인 것이다(그렇다고 계급만이 중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유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같은 사회적 갈등이 정치적으로 사회당, 사회민주당과 같은 ‘진보 대 보수’라는 정치균열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신세계에 따른 ‘봉건적 계급질서’의 부재, 이민에 의한 다인종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선진국 중 유일하게 사회주의정당, 진보정당이 부재한 나라이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미국예외주의’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부재하다는 ‘한국예외주의’가 있다.

 

3. 한국예외주의, 거리의 정치, 화쟁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정치란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제도의 틀 내에서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행위”이다. 갈등 연구의 선구자 샤츠슈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글 도입부에 인용한 파당의 부작용과 관련해, 노동자(노동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농민, 재벌, 중소자본가,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각을 가진 집단들 간의 갈등을 정당과 의회와 같은 제도정치(전문용어로 ‘정치사회’)에서 조정하여 국가정책에 반영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이다.

불교에 대한 문외한으로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최고의 정치는 원효가 이야기했고 한국불교가 추구해온 ‘화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종파와 이론적 대립을 소통시키고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화쟁이야말로 정치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고 정치의 본래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각들을 소통시키고 조절하여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해방정국에서 폭발했던 다양한 민중적 요구들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압살한 뒤 역대 정권들은 최소한 1987년까지, 아니 그 이후도 상당 기간 이 같은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와 견해, 이에 따른 갈등을 죄악시하고 미국 《연방주의교서》가 지적한 첫 번째 방식, 즉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특히 진보와 좌파를 죄악시하면서 우익만 존재하는 ‘불구화된 반쪽 정치’가 지배해 왔다. 한국예외주의가 제도화된 것이다. 그리고 《연방주의교서》가 잘 지적했듯이, 이 같은 방식은 이것이 치료하려고 했던 갈등의 부작용보다 훨씬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해 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달라졌지만, 정치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특히 빠른 산업화에 따라 계급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사회적으로 계급적 갈등이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지만, 정치는 여전히 보수 독점의 한국예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골리앗투쟁, 희망버스, 거리투쟁 등 ‘거리의 정치’다. 즉 정치가 여전히 노동자계급,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제도정치 내에서 이들의 요구를 조정해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과거와 같이 독재정권이 물리력으로 이들 요구의 표현과 분출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억압된 요구는 거리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촛불과 거리의 정치는 한국 ‘제도정치의 무능력’ ‘화쟁 능력 부재’의 결과일 뿐이다. 외국의 의식 있는 학자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이 우리의 거리의 정치를 부러워하지만, 제도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져 이들이 부러워할 거리의 정치, 우리가 자랑할 거리의 정치가 사라지는 것이 진짜 한국 정치가 나아야 할 방향이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자면, ‘정치사회’라고 부르는 제도정치권(정당, 의회 등)은 계급 계층, 젠더 등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사회균열)를 (정치균열로) 반영하고 조정하여 국가정책에 현실화시키는 ‘시민사회의 전동벨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시민사회의 통제를 받고 시민사회에 종속되어야 한다(다음 페이지의 〈그림 1〉).

   
그림 1

그러나 우리의 정치사회는 1987년 이전에는 과거 독재 시절에는 자유로워야 하는 국가에는 종속되어 있고 거꾸로 종속되어야 하는 시민사회로부터는 자유로운 존재였다(〈그림 2〉). 그람시는 일찍이 서구와 러시아의 차이에 대해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있다면,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고 아직 시민사회는 원시적이고 무정형적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러시아에 대해 지적한 국가의 ‘과대성장’과 시민사회의 미성숙, 아니 제대로 된 시민사회의 부재가 바로 분단이 최종 봉인된 1953년 이후의 한국의 모습이다.

   
그림 2

1987년 민주화 이후 상황은 바뀌었다, 정치사회는 과거에 비해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율성은 별 변화가 없었다. 제도정치가 시민사회의 통제를 받고 계급 계층, 젠더 등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사회균열)를 (정치균열로) 반영하고 조정하여 국가정책에 현실화시키는 ‘시민사회의 전동벨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 독점의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3〉과 같다.

   
그림 3

 

4. 한국 정치균열의 기원과 전개

한국 정치가 이렇게 된 데에는 역사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해방정국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균열의 기원을 돌아보고 이 균열이 이후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45년 해방을 맞자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일제의 의해 심화되어 왔지만, 조선총독부라는 막강한 국가에 의해 억압되었던 식민지 봉건제의 모순이 폭발했다. 해방정국의 ‘좌우갈등’이 그것이다(제1기). 좌우갈등은 크게 보아 친일파의 처리 문제, 농지개혁, 앞으로 건설할 국가의 성격이라는 3가지 쟁점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미국의 도움 아래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극우 세력이 승리했다. 1953년 종전과 함께 8년간 지속됐던 해방정국과 이의 핵심이었던 좌우 이념대립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53년부터 1987년 민주화까지 30여 년간(제2기) 한국 정치를 지배한 것은 ‘민주 대 반민주’의 정치균열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진보세력의 몰락과 부재다. 진보세력이 사라지고 보수세력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유럽과 같은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예외적으로, 1950년대 조봉암의 진보당 실험이 있지만 이는 아주 예외적인 ‘일탈 사례’일 뿐이다. 사실 조봉암이 진보당을 만든 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본인은 민주당 합류를 원했지만 민주당이 조봉암에 대해 빨갱이라고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신익희가 급사했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미는 대신에 신익희에 추모투표를 하라고 했고, “민주당은 용공적 노선을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서는 한 표라도 고 신익희 씨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투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 같은 정치갈등 구조는 1980년대 들어 일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비극적인 광주학살 이후 1953년 이후 사라진 반미와 진보가 부활한 것이다. 즉 1980년 이후-1987년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진보 대 보수의 정치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갈등 구조는 새로운 국면(제3기)에 들어간다. 그것은 민주화에 따라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약화된 것이다. 그것은 빠른 산업화에 의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계급갈등 등 그동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 의해 억압되었던 ‘진보 대 보수’의 갈등구조를 전면화시켜 서구식의 계급정치로 나아갈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직선제 선거제도의 복원, 그리고 민주화운동 세력의 중심이었던 양김의 분열과 관련해, 민주 대 반민주를 대체한 것은 지역갈등, 지역주의였다. 물론 이 지역주의는 1기) 초기의 4개 지역의 지역할거주의(민정-TK, 통일민주-PK, 평화민주-호남, 공화-충청)로부터 2기) 반역사적인 3당통합에 의한 호남 대 비호남의 지역패권주의, 3기) DJP연합에 의한 호남충청연합 대 영남 등의 변화를 겪지만 1987년 이후 지역주의가 가장 지배적인 정치균열이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의 압도적인 우위 아래 약화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은 민주 대 반민주, 부상하고 있지만 자리 잡지 못한 진보 대 보수가 착종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큰 틀 아래 2002년 이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노무현과 이회창이 충돌한 2002년 대선에서 2030 대 5060이라는 ‘세대갈등’이 등장한 것이다. 2002년 이후의 한국 정치는 1) 약화되고 있지만 아직 지배적인 지역주의의 아래 2) 약화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은 민주 대 반민주와 부상하고 있는 세대갈등이 부차적 갈등으로 결합하고, 3) 부상하고 있지만 자리 잡지 못한 진보 대 보수가 3차적 갈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간단하게 그림으로 표시하면 위의 〈그림 4〉와 같다.

   
 

최근의 우리의 정치적 갈등, 정치균열의 내용과 강도를 통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선거를 중심으로 우리의 지역갈등을 살펴보면, 점차적으로 그 강도가 약해지고 있지만, 그 강도가 아직도 심각한 것을 잘 알 수 있다(〈표 1〉 참조). 참고적으로 지역, 인종과 같은 1차적 균열로 균열지수가 60% 이상 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촛불항쟁의 결과로 치러진 2017년 대선의 경우 지역균열이 상대적으로 덜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호남에서 62.2%, 영남에서는 29.8% 득표해, 지역균열지수가 32.4%, 홍준표 후보는 영남에서 38.5%, 호남에서 2.5% 득표해 그 차이가 36%를 기록했다. 따라서 2017년 대선의 지역균열지수는 이 수치의 평균인 34.4%로 예전보다 크게 낮아졌다.

   
 

하지만 이 선거는 촛불항쟁과 박근혜 탄핵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인 데다가 문재인, 홍준표 이외에도 안철수, 심상정 등이 완주한 다자구조로 사실상 양자구도로 치러졌던 이전의 선거와 지역균열의 지수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약하다. 따라서 지역균열이 크게 약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2016년 총선에서 김부겸 의원 등이 대구에 입성하는 등 그나마 지역주의에 균열을 냈던 것이 2020년 치러진 총선에서 오히려 후퇴하고 특정 정당의 지역독점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의석의 96.5%를 차지했고 미래한국당은 영남의석의 86.3%를 차지했다(〈표 2〉 참조).

   
 

그러면 2002년 이후 급부상하고 있는 세대균열은 어떠한가? 2030세대에서의 득표율과 5060세대에서의 득표율의 차이를 계산한 세대균열지수(GCI, Generational Cleavage Index)는 30% 수준의 높은 균열을 나타내고 있지만, 60%에 가까운 지역균열에 비해서는 아직 약한 수준이다(다음 페이지의 〈표 3〉).

 

   
 
 

주목할 것은 이 같은 세대균열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2020년 총선 결과를 보면 세대균열지수가 2017년 대선 때의 27.7%에서 19.1%로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표 4〉).

   
 
   
 

이같이 세대균열이 줄어든 것은 50대의 ‘진보 노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에서 5060세대의 노인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주면서 고령화에 따라 보수세력이 유리해질 것으로 전망했지만, 2020년 총선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50대들이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에 더 많은 표를 던진 것이다. 이는 코로나19에 대해 문재인정부가 상대적으로 잘 대응한 반면, 미래한국당은 선거 과정에서 연이은 막말로 자폭을 한 것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적 요인을 넘어서 60년대 생으로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소위 ‘386세대’가 50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이 겪은 역사적 경험에 기인해 ‘진보 노인’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세대갈등은 ‘2030 대 5060’이 아니라 ‘2030 대 60 세대’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는 미래한국당으로 상징되는 냉전적 보수세력이 근본적인 변신을 하지 않는 한 앞으로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주목할 또 다른 현상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는 젠더갈등이다(〈표 5〉). 특히 18세 이상 20대의 경우 여성 유권자들의 경우 무려 63.6%가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했고 26.1%만이 미래한국당을 지지해 그 격차가 무려 37.5%에 달했다. 그러나 같은 나이 또래 남자들의 경우 47.7%가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고 40.5%가 미래한국당을 지지해 그 차이가 7.2%에 불과했다. 이는 이들 나이 또래(1820세대)의 경우, 젠더균열지수가 30%를 넘어설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대의 경우 젠더균열이 있지만, 그 지수가 13% 정도로 1820세대에 비해 훨씬 덜했다.

 

5. 한국의 정치균열, 무엇이 문제인가?

위에서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갈등의 기원과 역사적 전개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민주의 갈등구도가 약화되면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계급균열과 진보 대 보수가 주된 균열구조로 자리 잡아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지역주의가 주된 균열구도로 자리 잡아 왔음을 살펴보았다.

지역균열구조가 한국 정치의 주된 균열구조로 자리 잡은 것은 양김의 분열 등 정치적 선택과 정치적 동원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TK의 패권주의와 호남 소외 등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지역주의, 특히 호남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보루를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호남의 인구 감소와 영남의 절대적인 인구 우위를 고려하면 지역주의는 중장기적으로 ‘지는 게임’이다(이제 충청의 인구까지도 호남을 추월해 인구에서 영남 다음에 충청, 그다음에 호남이라는 ‘영충호’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지역주의와 같은 1차적인 균열의 또 다른 문제는 이 균열이 계급문제와 같은 다른 균열을 은폐하고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앞에서 소개한 정치갈등 연구의 선구자는 미국 정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남부의 보수주의자들이 가난한 백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묶어두기 위해 인종적 적대를 이용한 경우나 1890년대 급진적인 농민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지역갈등 구도를 이용한 경우”가 잘 보여주듯이, 하나의 갈등을 전혀 다른 갈등으로 대처하는 “갈등의 대체는 가장 파괴적인 정치전략”이며 “갈등의 치환이 정치전략의 최고의 수단”이다. “모든 형태의 정치조직은 특정 종류의 갈등은 이용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갈등은 억압하는 편향성을 갖고 있다. 조직은 편향성의 동원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역주의는 계급적 균열의 정치적 표출을 억압한다. 약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1987년 이후 지금까지의 한국 정치는 거지에서 재벌까지 영남은 영남으로, 호남은 호남으로 뭉쳐 투표하는 ‘초계급적 지역연합’이다.

주목할 것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계급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997년 IMF 경제위기 후 무비판적으로 전면화시킨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양극화와 ‘흙수저사회’가 전면화되어 사회적 통합을 위협하고 있다(다음 페이지의 〈표 6〉). 불평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는 1이면 완전불평등, 0이면 완전평등으로 선진국 중 복지가 가장 잘 되어 있는 북구는 0.24. 프랑스, 독일과 같은 대륙형은 0.27 수준을, 영미는 0.34 수준으로 우리는 선진국 중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미국 수준(0.36)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사회적 유동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다음 페이지의 〈표 7〉). 오죽했으면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해 활동해온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2016년 “이제 자본독점 앞에 학벌독점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해체를 선언했겠는가?

객관적 통계뿐만 아니라 국민의 의식도 사회적 갈등을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민이 가장 심각하고 빨리 해결해야 할 갈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계층계급과 노사갈등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없애버렸지만, 국민대통합위원회가 2016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갈등은 계층(75%), 노사(68.9%). 이념(67.7%). 지역(55.9%)의 순서였다. 특히 계층갈등은 이를 조사하기 시작한 2010년 이후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민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갈등이라고 지적한 것은 이념, 계층, 노사, 지역 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정치는 이 같은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 한 선거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선거를 좌우하는 것은 이념이나 계급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지역연고이고 그다음에 연령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국민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갈등은 계층과 노사문제인데 실제 정치는 이와는 거의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 정치균열이 사회균열과 분리되어 있고 계층계급과 같은 심각한 사회갈등이 정치갈등, 정치균열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 속의 계급적 균열을 정치사회의 정치적 균열로 반영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초계급적인 지역연합을 지역을 넘어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함께하는 초지역적 계급연합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화쟁으로서의 정치’에 관한 한, 한국 정치는 촛불 이후에도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 제도정치에서 푸는 정치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 바로 비례대표이다. 이 역시 거대정당 중심으로 되어 있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즉 헌법재판소가 지역구의 인구 편차로 유권자의 표 가치가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정했지만, 소수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표는 거대정당에 투표하는 표의 4분의 1로 취급받아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같은 위헌적 상황을 개선하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촛불세력이 연합해 준연동제를 도입했지만, 거대양당이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어 거대정당의 독점은 더욱 심화되고 말았고 소수정당 지지자들의 과소대표화, ‘비대표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구체적으로, 거대양당의 의석 독점율은 4년 전의 82%에서 94%로 12%포인트나 높아졌다. 특히 이들은 70% 미만의 표를 받고도 94%의 의석을 차지한 반면,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12%의 표를 얻었지만 의석수는 2%(정의당의 6석)에 그쳤다.

다시 말해, 보수 양당에 투표한 표는 소수 진보정당에 투표한 표의 거의 8배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과거 표의 가치가 4배가 차이가 났던 것이 8배로 늘어난 것이다. 준연동제까지 편법을 동원해 독식하는 한국 정치는 ‘화쟁’이 아니라 ‘전쟁’이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사회적 다윈주의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한 가지만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글이 계급, 계층균열을 강조하고 있지만, 계급만이 중요하다는 계급환원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그것이 그 중요성에 의해 경시되고, 과소대표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노동자계급 등 기층민중만이 아니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선거제도, 제도정치권과 정치사회의 개혁이 시급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불행하지만 우리의 현실, 그것도 ‘촛불 승리’ 이후의 우리의 현실이다.

 

6. 나오며

한국사회가 갈등과 대립의 ‘거리의 정치’를 벗어나 다양한 갈등들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조정하고 진정한 의미의 ‘국민통합’으로 나아가는 ‘화쟁정치’로 나아가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화쟁에 대해 연구해온 이도흠 교수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화쟁이란 단순히 대화하고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물 사이의 조건과 인과, 특히 그 사이에서 적용하고 있는 힘과 고통에 대해 연기적 관계를 깨우치고…… 상대방의 조건과 맥락 속에 들어가서…… 소통을 하여 고통을 없애고 서로를 하나로 이루는 것”21)이어서 “권력이 심하게 기울어진 곳에서 화쟁은 가능하지 않다.” 제대로 화쟁이 되려면 “양자가 놓인 조건을 파악하고 대화의 장인 만큼 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22)

권력이 심하게 기울어진 곳에서 화쟁정치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화쟁정치를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거대 보수지역정당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다양한 차별을 방지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 할 일이 많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선거민주주의의 경기규칙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최소한 소수세력이 자신들이 받은 표만큼이라도 의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독일식의 제대로 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리한 선거와 정치의 규칙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화쟁정치는 불가능하다. ■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텍사스주립대학교(오스틴, 정치학 석 · 박사) 졸업.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등 역임. 저서로 《한국과 한국정치》 《국가와 민주주의》 《현대한국정치: 이론, 역사, 정치, 1945-2011》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 5 · 18진상조사위 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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