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대한민국은 2개의 죽음을 둘러싸고 4갈래로 갈라졌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의 죽음과 장례절차 때문이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은 모두를 당황에 빠뜨렸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기 하루 전까지 시정업무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그였다. 그러던 사람이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하자 자살했다.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가로, 서울시장으로, 잠재적 대통령 후보군으로 그가 보여주었던 지도자로서 면모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장례 절차를 놓고 여론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서울시는 재직 중에 사망했으므로 규정에 따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른다 했다. 도덕적 과오와 평생 쌓아온 공적을 평가하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권과 여성단체 등에서는 성추행 의혹을 받는 사람에게 세금을 써가며 장례를 치른다는 건 2차 가해라며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며칠 사이에 백선엽 장군이 별세하자 역시 장례 절차로 시비가 일어났다. 그는 6 · 25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으로 알려졌다. 아군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 다부동 전투를 지휘했고 미군과 함께 평양으로 진격했다. 그 공으로 최초의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그의 장례는 ‘육군장(葬)’으로 엄수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근무한 경력 때문에 2009년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행위자로 규정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 처형하는 일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국립현충원에 안장하면 안 된다는 주장과, 전쟁영웅으로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두 사람의 죽음과 장례를 둘러싸고 일어난 시비는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냉정하게 말하면 박 시장이 시민운동에서 중요한 일을 했다 해서 성추행의 과오가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백 장군이 6 · 25 전쟁영웅이라 해도 일제강점기에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던 때의 친일 행위를 지울 수는 없다. 공과를 따져 뒷날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사실은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옳다.

문제는 그것을 논의하는 의도와 과정과 방법이다. 두 사람에 대한 도덕성 문제나 친일 전력 문제를 따지는 방식은 정파적 입장에 따라 포폄의 잣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여권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박 시장의 과오를 애써 거론하지 않는다. 야권은 ‘백 장군을 서울현충원에 모시지 않는 나라가 나라인가’라고 정부를 공격한다. 여기에 더해 언론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색깔에 맞추어 사실이나 맥락보다는 단장취의(斷章取義)로 세간의 여론을 호도해갔다.

비단 두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사안이 다 그렇다. 정치인들은 말끝마다 국민을 들먹이지만 실제는 정파적 이익에 따라 편파적 주장을 할 뿐이다. 작은 일도 크게 만들고, 없던 일도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일은 이제 일상사가 되었다. 이를 비판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역할이라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갈등을 부채질한다. 이러한 이념적, 정파적 몰입 현상은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더욱 구조화시켜 나간다.

우려되는 것은 갈등의 구조화가 고착화될 때 생기는 고통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일도 나의 이익에 반하면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쓰레기소각장이나 장례식장 같은 것은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지만 우리 동네에 들어서는 것만은 반대다. 엄중한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조차 자신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 갈등을 부채질한다. 이로 인한 불필요한 논쟁과 대립의 격화는 우리 사회를 고통의 수렁에 빠뜨린다. 이념적 대립과 갈등은 더욱 그렇다.

시장에서 자유경쟁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는 불평등구조를 심화한다.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주의는 생산성의 저하와 가난한 평등을 초래한다. 그런데도 서로는 문제를 외면한다. 갈등론자들은 갈등 과정 자체가 이해관계를 조정해준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혼란과 상처는 대립을 격화하는 원인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미노스 미로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상황이 현대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다.

그렇다면 정녕 해결의 길은 없는가. 불교의 경전에는 실마리가 될 가르침이 많다. 다음 두 개의 경전은 평범한 듯하지만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

부처님이 코살라의 벨루드바레야 마을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성인의 제자는 어떤 마음가짐을 살아야 하는지를 여쭈었다.

“만약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내 물건을 훔치려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내 아내를 유혹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나를 속이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나를 욕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꾸며대는 말을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남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남이 싫어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를 헤아려 처신해야 성인의 제자라 할 것이다.”

—잡아함 37권 1044경 《비뉴다라경(鞞紐多羅經)》

부처님이 위야국 금반 녹야림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나형외도(裸形外道) 가사파가 부처님을 찾아와 ‘당신은 다른 종교 수행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고행자를 비난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라고 힐문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외도를 닦는 사람도 선한 사람이 있고 불도를 닦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외도를 닦는 사람의 주장에도 나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도 있다. 나는 같은 법은 지키라 하고 다른 법은 버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법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말이 나도는 것은 내가 옳다고 해도 그르다 하고, 내가 그르다 해도 옳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다.”

—장아함 16권 《나형범지경(裸形梵志經)》

두 경전은 사람들 사이에 시비나 갈등, 반목과 분열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제공한다. 첫째는 이해와 양보다. 모든 갈등의 주범은 이기주의다. 남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그 뿌리다. 그렇지만 남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염소’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먼저 양보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다.

둘째는 존중과 배려다. 모든 다른 주장에는 내가 귀 기울여야 할 내용이 들어 있다. 신을 믿건 안 믿건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라는 주장은 존중해야 한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전부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고 주장하다 보면 내 생각과 일치되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가 생긴다. 보수든 진보는 서로 존중할 것은 존중하고 배려할 것은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만 잘났다는 아집(我執)과 내 생각만 옳다는 법집(法執)에 사로잡혀 한쪽 눈을 감고 외눈으로 판단하려 한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과 불행의 반복이었다. 조선시대의 사색당쟁은 참혹한 사화(士禍)의 원인이었고 해방공간의 좌우대립은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복잡한 이해갈등이 충돌하는 세속적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이해와 양보, 존중과 배려라는 종교적 가르침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프랑스의 삼색기(三色旗)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 혁명을 거치면서 얻은 결론은 자유와 평등,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화해시킬 묘책은 종교적 가치인 ‘박애(博愛)’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불교의 가르침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불교평론》이 창간 21주년을 맞아 갈등문제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2020년 9월

홍사성(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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