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등불을 서양에 전하다

1. 젊은 시절의 공안(公案) 참구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로서 서양에 선(禪)을 전하는 데 지대하게 공헌했던 스즈키 다이세츠는 1870년 11월 11일 일본의 이시카와현(石川縣)에서 태어나 95년간 활발발하게 활동하다 1966년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본명은 테이타로(貞太郞)이며, 다이세츠(大拙)는 그에게 선을 전수한 스승인 샤쿠 소엔(釋宗演, 1860~ 1919)에게서 받은 호(號)이다. 《도덕경(道德經)》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줄인 ‘대졸(大拙)’이란 말은 선어록의 백미인 《벽암록(碧巖錄)》 제100칙 ‘파릉의 취모검(巴陵吹毛)’에서 선어(禪語)로서 재등장한다. 취모검이 무엇인지를 묻는 선객에게 “산호의 가지 끝마다 달이 달려 있구나.”라고 답한 파릉의 모습을 송(頌)에서 ‘대교약졸’ 곧 ‘크게 못난 듯 보이지만 참으로 뛰어난 솜씨여!’라고 노래한 것이다. 원오는 이 구절에 대해 “그의 말이 너무나 교묘하여 도리어 못난 듯한 것이다.”라는 평창을 붙였다. 

1960년 스즈키의 90회 생일을 기념하는 논문집에 실린 그의 유년 생활에 대한 기술을 보면, 젊은 시절 선(禪)의 체험과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의사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부친, 조부 등은 모두 요절했다고 한다. 특히 스즈키의 부친은 그가 6세에 세상을 등졌으므로, 그 역시 경제적 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17, 18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자신이 왜 이런 불행 속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답을 철학과 종교에서 구하던 중, 자신의 가족이 속해 있던 임제종(臨濟宗)의 선(禪)에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서 그는 20대에 가마쿠라에 있는 엔가쿠지(圓覺寺)에 주석하던 임제종 선사 코센(洪川, 1816~1892)으로부터 ‘외손바닥이 내는 손뼉 소리를 들었는가’ 하는 내용의 척수공안(隻手公案)을 받고 참선에 몰두했지만, 캄캄한 골목에 들어선 듯 막혔다고 한다. 코센이 입적한 뒤, 그의 후계자가 된 샤쿠 소엔으로부터 다시 ‘무(無)’ 자 공안을 받고서 4년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모두 고투를 벌이면서 이 공안을 풀고자 애썼다. 그는 미국에 가기 한 해 전인 1896년 성도절의 정진을 마지막 기회로 여기면서 모든 영적인 힘을 쏟아서 이 공안에 집중하던 중 이른바 견성(見性)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회고하였다. 

나는 ‘무’와 하나가 되고 동질화되어 ‘무’를 의식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은 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상태야말로 진정한 삼매였다.

스즈키는 이 체험 이후 공안을 꿰뚫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 기술하였는데, 주체적 체험에 입각하여 선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풀이하고자 했던 그의 일관된 견해는 젊은 시절 체험했던 공안 타파의 경험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적 체험은 이후 그가 합리주의와 이성주의가 강한 서양의 풍토에서 선을 선뜻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소개하는 기반이 되었고,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선을 이해해야 한다는 호적(胡適)의 관점에 대응해서는 본질주의적 입장에서 선을 바라볼 것을 강조하는 굳건한 태도의 토대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볼 점이 있다. 젊은 시절의 스즈키는 9세기 이후 당에서 전개된 남종선의 흐름과 12세기 이후 정착된 간화선 전통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7~8세기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초기 선종의 역사적 사실을 해명하고 있던 호적의 비판을 직면한 뒤 한편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주체적 선적 체험의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호적의 비판을 적극 수용하여 그 자신도 돈황 출토 선문헌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처럼 스즈키나 호적 같은 대가들이 돈황 문서를 통해 초기 선종을 연구하게 됨으로써, 20세기 선종 연구는 이전 세대와 비약적으로 달라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 서양에 영어로 선을 소개하다

일본의 불교도들은 1893년 미국에서 열린 시카고 세계종교회의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교의를 서양에 널리 전파하고자 하였다. 5명의 대표단 가운데는 선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스즈키의 스승이었던 샤쿠 소엔(釋宗演) 역시 들어가 있었다. 일본 임제종의 선사였던 소엔은 스리랑카에서 상좌부불교를 연구하기도 할 만큼 열린 시각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미국에 선을 전파하고자 했던 그의 진취성은 이후 제자인 스즈키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된다. 

미국 체류 당시 소엔은 출판사 편집자이자 동양학자였던 폴 캐러스(Paul Carus, 1852~1919)와 교분을 맺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스즈키는 1897년 미국으로 가서 캐러스 아래서 11년 동안 불교 자료의 번역과 같은 일을 돕게 되었다. 스즈키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캐러스의 《도덕경》 번역을 돕기 위해 미국으로 가고자 결심하였다. 미국에 있는 동안 스즈키는 《대승기신론》(1900)을 영역하고, 영문으로 된 《대승불교개론》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선에 대한 글을 영어로 짓기도 하였다. 1909년 일본으로 귀국한 뒤, 1911년에 신지학도(神智學徒)였던 베아트리체 레인(Beatrice Lane)과 결혼하였다. 1921년에는 오타니(大谷)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같은 해에 오타니대학 내에 동방불교도협회(東方佛敎徒協會)를 설립하고 영문잡지인 Eastern Buddhist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선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스즈키의 저작으로는 1927년에 나온 Essays in Zen Buddhism: First Series를 들 수 있다. 이 시리즈는 1933년에 Second Series가 나오고, 1934년에 Third Series가 나왔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선불교를 Zen Buddhism으로 부르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스즈키에게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은 ‘禪’의 중국어 발음인 찬(Chan)과 한국의 발음인 선(Seon)을 병기해서 쓰고 있지만, 90여 년 전에는 일본어 발음인 젠(Zen)이 곧 선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젠’이라는 용어를 필두로 중국에서 기원하여 일본에 전해진 선종의 가르침은 스즈키를 통해 서양에 전해졌다. 오늘날 서양 학자들 가운데 스즈키를 중국에 처음으로 선을 전한 보리달마에 비교하는 이가 있을 만큼 그의 위상은 높다. 

한편 1927년에 나온 선에 대한 그의 저작이 출판된 이후 스즈키는 이후 선학 연구방법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될 호적과 조우하게 되었다. 호적은 스즈키의 책을 본 뒤, 그에 대한 비평의 글을 〈타임스(The Times)〉에 기고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스즈키가 초기 선종의 전승에 관해 후대에 만들어진 사실에 의거하고 있다는 지적이 들어가 있었다. 이를 본 스즈키는 영미권에서 자신을 비판할 사람이 있다는 점에 매우 의아함을 가지면서 처음으로 호적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자신 역시 돈황 출토 자료를 확인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학 연구와 관련된 스즈키의 얘기는 조금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여기서는 선과 관련된 영어 저작 가운데 1934년에 간행된 스즈키의 《선불교 입문(An Introduction to Zen Buddhism)》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책에는 서양의 저명한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 1875~1961)이 서양인의 시각에서 선을 이해하고자 쓴 장문의 서문이 들어 있다. 융의 글에 따르면, 선을 소개하는 글 가운데 가령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 1867~1934)과 같은 일본의 선학자가 쓴 글에 대해서는 누카리야가 ‘서양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선을 풀어쓰고 있기 때문에 무미건조한 설교조의 글이 되어 버렸고, 이는 도리어 난해하긴 하지만 짧은 선사들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만 못하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스즈키의 글에 대해서는 서양인들이 선을 이해하기 쉽게 독특한 표현양식을 개발했다는 점에 감사를 표하였다. 스즈키는 선을 설명하면서 신비주의, 비합리성, 비논리성 등의 용어들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런 용어들을 과감히 사용함과 동시에 그것의 범위에 섬세한 제한을 둠으로써 서양인들에게는 무척 낯설었던 선의 면모를 가급적 입체적으로 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즈키 자신이 이 책에서 선(禪)에 대해 기술하는 내용을 들어보자. 

이 종파는 종교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로 특이하다. 그 교설은 학술적으로는 사변적 신비주의(思辨的神秘主義, Speculative Mysticism)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랜 훈련을 거친 후에 그 체계에 대한 통찰력을 실제로 획득한 사람들만이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이다. 또 실제로 그렇게 증명되어 왔다. 오랜 훈련을 통한 통찰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즉 현실 경험에서 선(禪)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선의 가르침이나 표현들이 매우 특이하고 기괴하여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스즈키가 말한 ‘사변성’이란, 일상의 영역에서 다양한 문답을 통해 선의 길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어록(禪語錄)의 기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비주의 역시 단지 기괴하고 비합리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이란 규정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동양적 심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스즈키의 글이 일차적으로는 서양인을 대상으로 선을 이해시키기 위해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가 선을 지나치게 신비화시켜, 비논리의 영역으로 깊이 몰아넣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스즈키가 선의 체험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것의 비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데 지나치게 열중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선에 대한 스즈키의 영문 저작이 발표된 이후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다만 일반인들은 선에 대한 고차원적 접근보다는 스즈키가 소개하였던 당대 선사들의 일화들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단하 선사가 추운 겨울 작은 사찰을 방문하여 나무로 된 불상을 쪼개어 때면서 ‘부처의 사리를 얻고자 한다.’고 했던 일화들은 스스로를 얽어매는 어떤 우상도 거부하는 선사들의 면모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랜 전통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지복을 누리려던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서양인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주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3. 돈황 출토 선문헌의 연구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1927년 영문으로 선을 소개하는 저작이 간행된 이후 스즈키는 신문(〈타임스〉) 지면을 통해 호적에 의해 초기 선종의 역사에 대한 그의 몰이해를 비판받게 되었고, 그 자신 역시 직접 돈황에서 출토되었던 선문헌을 연구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선종의 계보는 9세기 이후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정립된 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과 같은 문헌에서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바와 같은 서천 28조, 동토 6조, 그리고 5가 7종의 흐름으로 전개된다. 호적의 지적을 받기 전까지 스즈키 역시 주로 9세기 이후 나온 어록과 전등사에 근거하여 선의 계보와 역사를 접했기 때문에, 호적의 비판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스즈키와 호적의 선과 관련된 입장이 서로 다른 시대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즈키가 자신에게 익숙했던 9세기 이후 선종의 문화에 입각해서 선을 일반화시켰다면, 호적은 7~8세기 격동의 시대를 거쳤던 초기 선종의 역사적 흐름에 입각하여 선을 보고자 하였으므로, 양자 간에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존재했다. 어쨌든 20세기 초 · 중반에는 돈황 출토 문헌의 발굴로 인해 초기 선종의 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들이 무더기로 쏟아졌으므로 스즈키 역시 이를 간과할 수 없었고, 매우 적극적으로 돈황 문헌의 해독과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스즈키는 1930년 영문으로 《능가경》에 대한 연구인 Studies in the Lankavatra sutra라는 책을 런던에서 출판하였다. 《속고승전》의 기재에 따르면, 《능가경》은 달마가 혜가에게 전한 책인 만큼 선종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된 뒤, 스즈키는 자신의 제자였던 조선의 김구경(金九經, 1900~ ?)에게 이를 보내고, 이 책에 대한 비평을 호적에게 청하게 하였다. 한편 호적은 1926년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돈황사본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를 입수하여 사진으로 찍어둔 상태였는데, 마침 김구경을 통해 스즈키의 《능가경》 관련 연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구경을 중간에 두고 두 사람의 교류가 펼쳐졌는데, 이때 스즈키는 호적이 발견한 사본을 출판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이 책은 김구경에 의해 1931년 9월 북경에서 《교간당사본능가사자기(校刊唐寫本楞伽師資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재교정을 거쳐 김구경의 《강원총서(薑園叢書)》에 다시 수록되었다.

이들의 교류에 의해 출판된 《능가사자기》는 ‘《능가경》을 전수한 스승과 제자에 대한 기록’을 뜻하는 초기 선종 문헌으로, 《능가경》을 한역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를 비롯하여,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신수로 이어지는 전등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육조단경》의 전승과 두 가지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첫째, 달마가 전한 경전이 《금강경》이 아니라 《능가경》이고 둘째, 5조 홍인의 가르침은 혜능이 아닌 신수에게 전해졌다는 점이다. 돈황에서 출토된 이런 신자료들은 천 년 이상 굳건하게 정립되었던 기존의 선불교 역사를 뿌리째 흔들어버렸으므로, 선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이들이라면 이 분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스즈키 역시 북경의 국립도서관에서 직접 돈황 문서를 조사한 뒤, 달마의 작품으로 인정된 《이입사행론장권자(二入四行論長卷子)》와 몇 종류의 선문헌을 발굴하여 《소실일서(少室逸書)》(1935년)를 간행하였고, 이듬해인 1936년에는 여기에 해설을 더한 《교간소실일서급해설(校刊少室逸書及解說)》을 다시 간행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선학자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1922~2006)에 따르면, 이 《소실일서》의 간행은 일본에서 본격적인 초기 선종사 연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스즈키는 1933년에 일본에 전해지던 흥성사본(興聖寺本) 《육조단경》을 발굴하여 세상에 선보이기도 하였다. 혜흔(惠昕)의 서(序)가 붙어 있는 이 책을 통해 《육조단경》의 계통이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처럼 호적과의 교류를 통해 시작된 돈황 출토 선문헌에 대한 스즈키의 발굴과 연구는 이후 이 분야에서 일본 학계가 뛰어난 업적을 이어가는 데 주춧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 스즈키와 호적의 선(禪) 연구방법론 논쟁 

선에 대한 주체적, 실존적 체험을 강조하면서, 합리성을 뛰어넘는 신비주의의 얼굴을 지닌 선(禪)을 서양에 전파했던 스즈키에 대한 호적의 비평은 스즈키의 선학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주었다. 그러나 초기 선종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선을 바라보는 스즈키의 입장은 젊은 시절 이후 매우 일관되었다. 스즈키는 1949년 호적(胡適, 1891~1962)과 하와이대학에서 열린 제2회 동서철학자대회에서 만나 선을 연구하는 방법론과 관련된 각자의 입장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이 두 사람의 대가가 펼친 선과 관련된 대립적 관점은 오늘날 선을 연구하는 데에 여전히 유용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선의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곳에서는 더욱더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호적은 〈중국 선불교-그 역사와 방법〉이라는 글에서 스즈키가 지닌 ‘인간의 지성으로 선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태도’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드러내며, 자신이 수십 년간 발굴해서 새롭게 정립했던 초기 선종 연구를 소개하며, 중국의 다른 철학 학파가 역사적 배경 안에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듯이, 선 역시도 그것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 안에서 연구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스즈키가 서양에 선을 소개하면서 말했던 “선은 시공(時空) 관계를 초월하고 물론 역사적 사실마저도 초월한다.”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호적은 선이야말로 그것이 발생했던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時空] 안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때만이 선이 지니고 있는 중국 지성사 내에서의 위상이 정확히 드러날 것이라고 보았다. 

호적에 따르면, 선은 단적으로 불교 내에서 일어난 구습타파의 신선한 종교운동이다. 또한 9세기 이후 당의 수많은 선사가 주고받았던 마치 동문서답과도 같은 문답에 대해서도 ‘평범한 말을 대신한 특별한 선 교육법’이라고 설명하였다. 호적은 선사들의 언행이 표면적으로는 마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선사들이 개발한 ‘말해주지 않음[不說破]’ 등의 교수법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결코 비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호적의 비판에 대해 스즈키는 〈호적(胡適)에 대한 답변〉이란 글을 통해, 단적으로 호적이 역사에 대해서는 매우 박식하지만 역사 이면의 주체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스즈키에 따르면, 선은 단지 역사적 배경을 파악한다고 모두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 이면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호적에 대한 스즈키의 반론을 직접 들어보자. 

선이란 비합리적인 것이며 우리의 지성적인 파악 능력을 넘어선 것이라는 나의 주장에 호적은 상당히 당혹감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선이 역사적인 배경에 놓이게 될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선을 이렇게 놓을 경우, 중국 불교사에 있어 선의 움직임이란 ‘불교의 내적인 개혁이나 혁명이라고 정당하게 규정될 수 있는 좀 더 큰 움직임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이후 스즈키의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전개된다. 첫째 선은 단순한 지적 분석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고, 둘째 선을 그 자체, 있는 그대로 먼저 파악하고 난 뒤, 호적과 같이 역사적으로 객관화시켜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스즈키는 둘째 논지를 해명하는 데 주력하는데, 주로 9세기 이후 활동했던 선사들의 문답을 예로 들어가면서, 선사들이 그들의 언행을 통해 ‘언어를 넘어선 것, 혹은 개념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음을 강조하였다. 

만약 우리가 선이 그 자체에 있어서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선은 내면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사실로서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호적은 선 연구의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스즈키는 호적이 ‘말해주지 않음[不說破]’을 단지 하나의 교육방법으로 본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은 교육법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선에 의해 드러나는 궁극적인 진실은 언어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는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 체험이 개념화로 이행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체험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 되고 만다.”라고 서술하였다. 결국 스즈키는 ‘선’이란 단지 역사를 이해한다고 해서 파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 그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하와이에서 두 사람이 만난 1949년은 스즈키가 79세, 호적이 58세가 되는 해로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견해를 확고하게 세우고도 남음이 있는 시간이었다. 이 두 학자는 선을 대하는 배경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있다. 스즈키는 어린 시절 삶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일본 임제종의 간화선에서 찾고자 시도하였고, 공안이 풀리는 경험을 한 인물이다. 그에게 선은 개인의 가장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체험에서만 공감되는 어떤 영원의 빛과 같은 것으로, 시공(時空)과 인과(因果)의 제약을 벗어난 상태이다. 그것은 언어로도 포착할 수 없고 사유로도 다가설 수 없으므로, 선사들은 부득이 그에 대해 역설적인 게송을 짓기도 하고, 기괴한 몸짓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은 아무래도 그 속에 몸을 푹 담그는 일이 급선무라고 스즈키는 봤던 것 같다. 

반면 호적은 중국 철학자의 입장에 서서 불교를 포함한 선 역시도 중국철학의 흐름에서 파악해야만 그것의 진정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선사들의 궁극적인 체험이 아무리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인물이었으므로,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선사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인 셈이다. 호적의 견해는 특히 달마 이후의 능가종이라든가, 혜능을 둘러싼 6조 선양 운동의 정체를 해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업적을 보여주었다.

아마 이 두 학자의 논쟁에 대해서는 우월을 가리기보다는,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더 적절한 시각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어떤 방법에 의거하여 선을 이해하고 연구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는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같이 선불교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이 문제가 오히려 등한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을 수행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스즈키와 호적의 견해를 발판으로 삼아 보다 자유롭게 선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스즈키와 호적의 이 논쟁에 대해 저 바다 건너 미국의 불교학자들은 매우 진중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미국 선학 연구에서 실증주의적 역사적 연구방법론과 낭만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본질주의로 접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선연구(禪硏究)에 적합한가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였고, 후대의 학자들로 하여금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견해를 융합할 가능성에까지 도달하게 했다고 한다. 

 

5. 나오는 말

스즈키 다이세츠는 선뿐만 아니라 범어 《능가경》 연구를 포함한 불교의 다양한 방면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긴 학자이다. 또한 서양에 선을 전파하는 데에서는 저 보리달마에 비견될 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이 글은 스즈키의 방대한 활동 가운데 ‘선’에 국한해서 아주 일부에 대해서만 살펴보았다.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스즈키와 관련된 글들 가운데 매우 유용하지만, 너무 오래전에 간행되어 사람들이 잘 찾을 수 없는 자료들을 활용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런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선 칼 융의 긴 서문이 들어가 있는 An Introduction to Zen Bu-ddhism(1934)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심재룡 선생이 《아홉 마당으로 풀어쓴 선》(현음사, 1986년)이라는 제명으로 번역했다. 30여 쪽에 달하는 역자 후기를 보면, 영국 불교협회 초대회장인 크리스마스 험프리즈(Christmas Humphreys)가 1996년 7월 13일에 쓴 스즈키에 대한 추도사, 그리고 스즈키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고한 글 역시 함께 실려 있어 스즈키의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스즈키와 호적이 1949년 벌였던 논쟁의 결과물 2편은 《다보(多寶)》 17호(1996년)에 나란히 번역되어 실려 있다. 스즈키의 글은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의 김종욱 선생이 번역했고, 호적의 글은 연세대 철학과의 신규탁 선생이 번역했다. 이와 더불어 스즈키와 호적의 바로 다음 세대로서 선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일본의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의 글은 《다보》 16호(1995년)에 신규탁 선생의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야나기다 세이잔은 스즈키와 호적의 선 논쟁에 대해 그 경과를 담담히 소개함과 동시에 그 의의를 조심스레 드러내었는데, 선배 학자의 업적을 대하는 그의 경건함과 존경심이 글 곳곳에서 묻어나와 새삼 숙연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선과 관련된 스즈키의 입장을 보면, 그는 자신의 실존적 불행과 고민을 선을 통해 풀어내었고, 이런 강렬한 체험에서 나온 그의 울림 있는 목소리는 서양에 선을 전하는 데 가장 큰 밑천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서 있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돈황에서 출토된 초기 선종 문헌의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던 스즈키의 일생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심도 있게 곱씹어봐야 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

 

박인석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조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하택신회의 선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영명연수 《종경록》의 일심 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종경록(宗鏡錄)》의 관심석(觀心釋)〉 등 논문 다수가 있으며, 주로 한국불교전서의 번역과 관련된 업무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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