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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학자 <3> 외젠 뷔흐눕 / 심재관
‘불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문헌학자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심재관 phaidrus@empas.com

외젠 뷔흐눕(Eugène Burnouf)을 찾아서

   
외젠 뷔흐눕
Eugène Burnouf

파리-벨빌 건축학교는 건축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가길 원하는 그런 학교다. 건축 이론과 인접 학문과의 협업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일 터인데, 뛰어난 명성으로 이제 한국의 건축학도들에게는 꽤나 친숙한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동양의 고전건축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파리를 다시 방문했을 무렵에도 일부러 이곳을 방문할 만큼 건축에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를 타고 내가 이 학교 근처를 찾아가 배회했던 것은 단지 이 학교 뒤편에 연결되어 있었던 어떤 샛길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뒷거리가 특별히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의 20여 년 전의 어느 날, 내가 찾았던 뤼 뷔흐눕(Rue Burnouf)은 파리 변두리 지역에 있는 다소 삭막하고 쓸쓸한, 좁은 언덕배기 찻길에 불과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더운 여름날 생수 한 병도 변변히 살 수 없었던 뷔흐눕가(街)에 온 것을 후회했었다. 슬라이드 필름을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그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예의 그 평범한 푸른색 도로표지판뿐이었다. 도착하기 전에는 마치 키파를 쓰고 카프카의 무덤을 찾았을 때처럼,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이 그 동네 길을 일종의 순례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뷔흐눕가의 거리 이름은 인도학자나 불교학자에게는 너무 낯익은 이름, 인도 문헌학자 외젠 뷔흐눕(Eugène Burnouf)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내가 뷔흐눕가를 헤매던 그 무렵은 일본 불교학자 유야마 아키라(湯山明)가 뷔흐눕에 대한 오랜 연구 결과를 마무리해 막 출간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불과 몇 달 전 《불교평론》으로부터 뷔흐눕에 대한 이 원고를 청탁받은 무렵에는 노학자 유야마 교수가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유야마의 뷔흐눕 연구물은 나중에 개정을 거쳐서 《외젠 뷔흐눕, 그의 법화경 연구배경(Eugène Burnouf-The Background to His Research in the Lotus Sutra)》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책은 《법화경》에 대한 일본 창가학회(創價學會)의 열렬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20여 년 전 당시 나는 그의 출간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며, 오랜 뒤 금강대학교에서 그의 책을 열어본 이후에도 뷔흐눕가(街)로 명명된 지금의 그 거리가 무슨 이유로 그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파리 도로명 사전(Dictionnaire historique des rues de Paris)》까지 뒤져보았으나 그 사연은 여전히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살림집을 꾸렸던 곳은 파리의 6지구인 오데옹가(Rue de l’Odéon)였으며, 결혼한 곳이자 그의 처가는 파리의 외각인 루아시(Roissy)였기 때문에 이마저도 가능성은 없었다. 아마도 뷔흐눕이 사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프랑스 제3공화정 당시에 학자와 문필가들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지정했던 과정에서 그의 거리 이름이 임의로 붙여진 것이 아닌지 추측만 될 뿐, 파리의 그 거리가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사연은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파리지앵에게도 그는 분명히 자랑스러운 문필가였음은 분명하다. 그들의 시청 과장 앞 정면에 서면, 시청사 벽면에 새겨진 그의 전신조각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인도-이란 학자 뷔흐눕의 생과 사

   
 

외젠 뷔흐눕의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기초적인 자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인간적 면모와 생애에 대한 탐색은 그의 사후에 출판된 서간문집(Choix de lettres d’Eugène Burnouf, 1825-1852)을 통해 비교적 잘 드러난다. 반면, 그의 학문적 경향과 관심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소장했던 장서목록집(Catalogue des livres imprimés et manuscrits composant la bibliothèque de M. Eugène Burnouf)이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수고(手稿) 목록(Papiers d’Eugène Burnouf conservés à la Bibliothèque nationale)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의 수고 목록을 살피면, 이미 출판되어 알려진 연구물 외에 상당수 연구가 묻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연구 분야가 예상외로 훨씬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베스타를 포함해 고대 페르시아어에 대한 연구는 이미 잘 알려진 바 있지만, 설형문자 연구나 다리우스 비문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학문 영역의 폭이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를 단순히 초기의 인도불교 학자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비교적 자수성가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교양 있는 여성과 결혼했던 것으로 보이며, 비록 50세의 짧은 인생(1801~1852)이었으나 매우 의미 있는 이란학 또는 인도학 관련 연구물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외젠 뷔흐눕은 두 차례의 독일과 영국 여행을 제외하고 거의 파리에서 살았던 파리지앵이다. 그의 아버지 장 루이 뷔흐눕(Jean-Louis Burnouf)은 가난한 집안에서 학자로 성공한 경우였는데, 라틴어와 그리스어 고전학자로서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가 되었다. 

외젠의 고전어 감각이나 당시 유럽의 동양 언어에 열풍은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었고, 당대 문헌학자들이 그렇듯, 이미 숙달된 인도-유럽 고전어들에 대한 감각 위에서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를 습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뷔흐눕도 프랑스에서 산스끄리뜨어를 익히기 시작한 매우 초기의 학자군에 속하기 때문에 외젠이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산스끄리뜨어 수업을 받기 이전에 이미 인도문화나 언어를 접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외젠이 어려서부터 곧장 문헌학자의 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외젠의 일생 가운데 종종 그의 젊은 날 수업 이력이 생략되곤 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라틴어 공부와 법률 공부를 했다는 점이다. 23세 때에는 법률학교까지 다니며 변호사 자격증까지 획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고대 페르시아어와 산스끄리뜨어에 꽤 깊이 천착하고 있었던 시기였고, 생계를 위한 법률 공부보다는 이미 당대 최고의 동양언어학자들과 학회를 꾸려가던 시기였다. 1822년은 저 유명한 프랑스 동양학회(Société Asiatique)가 설립되는데, 외젠 뷔흐눕은 쉐지(Chézy), 아벨 레뮈사(Abel-Rémusat) 등을 도와 이 학회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이때가 불과 21세의 나이였다. 이 무렵은 이미 동양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확실해 보인다. 25세가 되던 1826년에는 노르웨이의 동양학자 크리스티앙 라센(Christian Lassen)과 더불어 빨리어에 대한 연구서(Essai sur le Pāli)를 작성해서 출판하게 된다. 라센(후에 본(Bonn)대학의 인도어과 교수로 말년까지 재직한다)은 뷔흐눕과 같이 고대 페르시아어와 산스끄리뜨어, 그리고 빨리어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의 관심사를 주고받으며 말년까지 학문적 교류를 지속해갔던 친구였다. 프랑스에 쉐지와 외젠 뷔흐눕이 있다면, 독일에는 슐레겔과 라센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인 1826년 외젠 뷔흐눕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니콜라 크리스토프 뿌와헤(Nicolas Christophe Poiret)의 딸 헨느 빅뜨와 안젤릭 뿌와헤(Reine Victoire Angelique Poiret)와 결혼한다. 안젤릭 뿌와헤와 사이에는 네 명의 자식들이 있었으며, 옥스퍼드로 필사본 연구를 위해 여행을 갔을 때도 부인과 장문의 편지를 수시로 주고받을 정도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젠의 딸들도 나중에 대부분 문헌학자나 역사학자들과 결혼했는데, 그의 첫째 딸 로흐 뷔흐눕(Laure Burnouf)은 아키비스트로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는 동안 앞서 말한 외젠 뷔흐눕의 서간집을 발간했다. 

1815년은 앙뜨완 레오나르 드 쉐지(Antoine Léonard de Chézy)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처음 산스끄리뜨어 강좌를 개설하여 가르치기 시작한 해인데, 불행하게도 쉐지는 1832년 당시 창궐하던 콜레라로 사망하고 만다. 이미 1780년대 콜레주 드 프랑스에는 동양학 연구가 세분화되고 있었는데, 각 동양 지역의 고전어 연구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어, 인도, 중국어 전공자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죽음의 대열에 초대 중국학 교수였던 아벨 레뮈사도 합류한다. 이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산스끄리뜨 강좌는 쉐지의 제자인 외젠 뷔흐눕이 맡게 된다. 이후 외젠은 그가 사망하던 1852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콜레주 드 프랑스에 재직하며 조로아스터교 문헌들과 힌두 문헌들, 그리고 불교 문헌들에 대한 저작들을 차례로 내놓게 된다. 앞서 말한 바처럼 그의 수고 목록집(Papiers d’Eugène Burnouf conservés à la Bibliothèque nationale)은 뷔흐눕의 학문적 여정을 잘 보여주는데, 이 목록집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조로아스터교의 종교 문헌들이다. 뷔흐눕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재직하기 전후에 조로아스터교의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파리에 들어왔던 파르시들의 문헌들은 거의 인도에서 수집된 것들이었다. 이 이란학 연구의 초석이 되는 문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례 문헌 야스나(Yaśna)의 주석집에 관한 것이었는데, 뷔흐눕 전에는 아베스타 문헌의 언어가 단지 산스끄리뜨 방언의 하나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뷔흐눕은 야스나 문헌을 언어학적으로 접근해 아베스타의 언어들이 산스끄리뜨 언어와 계통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혀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독립적인 고대 이란어와 문헌연구 분야가 독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통 인도-이란학(Indo-Iranian studies) 분야를 인도-유러피언 연구 내에 정초시킬 수 있었던 것도 뷔흐눕의 연구에 토대한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 여러 편에 걸친 그의 고대 이란 연구 중에서 그의 야스나 연구(Commentaire sur le Yaçna, l’un des livres liturgiques des Parses)는 그만큼 아베스타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풍부한 사전과 문법으로서 역할도 겸하고 있다. 

두 번째 연구 분야는 설형문자(楔形文字)에 대한 연구이다. 통상 페르시아 제국의 문자로 알려진 설형문자의 해독은 전적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관료였던 헨리 로울린슨(Henry Rawlinson)의 작업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리아 연구를 개척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로울린슨의 설형문자 해독(1849년)은 그가 직접 베히스툰(Behistun)의 바위산에 기어 올라가 다리우스 대왕의 설형문자를 베꼈던(1835~1837년)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설형문자의 해독은 전적으로 그의 독단적인 연구결과가 아니었다. 당시 설형문자의 연구자료 가운데 하나였던, 독일의 카스텐 니부르(Karsten Niebuhr)가 1778년 전사(傳寫)한 페르세폴리스 금석문을 라센과 뷔흐눕이 개별적으로 해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뷔흐눕은 그 금석문에서 다리우스 대왕 당시 지방 행정관들의 이름을 해독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1838년 출간되었다(Mémoire sur les inscriptions cunéiformes). 이는 로울린슨이 발표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이러한 뷔흐눕의 연구는 그의 동료였던 라센의 설형문자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최종적으로 로울린슨이 이들의 연구를 반영해 자신의 최종연구를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세 번째 뷔흐눕이 주력했던 또 다른 연구 분야가 바로 불교였다. 그러니까 대략 학문적 여정의 마지막 10여 년 정도가 불교에 집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바가바따 뿌라나(Bhāgavata Purāṇa ou histoire poétique de Krichna. 3 volumes, 1840~1847) 같은 힌두 문헌의 번역도 있지만 이는 정부에 의해 기획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 삶의 끝자락을 불태웠던 것은 불교 연구가 분명하다. 뷔흐눕의 삶 전체로 보아 본격적인 불교 연구는 후반후에 놓여 있으며 그의 전체적인 업적을 놓고 볼 때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은 뷔흐눕에게 불교 연구는 다소 이차적인 것이라고 평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뷔흐눕은 자신의 삶 전체를 매우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학문에 투여했으며 또한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몸을 돌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학문에 집중했던 뷔흐눕은 평상시에도 몸이 약해 수시로 병원에 들나들었는데, 유야마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병원 근처로 집을 옮기면서까지 드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52년, 금석문 및 문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 lettres)의 종신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며칠 뒤 뷔흐눕은 영면에 이른다. 

왜 그를 불교학의 아버지라 부르는가

   
 

외젠 뷔흐눕을 불교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건 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불교학 연구사를 썼던 드 용(de Jong)이나 뷔흐눕의 생애를 연구했던 유야마, 그리고 백여 년이 지난 뷔흐눕의 역작 《인도불교사 입문(Introduction à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을 다시 번역해 낸 로페즈(D. Lopez)나 실크(J. Silk), 그 외의 많은 학자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를 이렇게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처럼 외젠 뷔흐눕에게는 몇 가지 영예로운 명칭이 따라붙는다. 그는 이란 고전학의 아버지이며, 불교학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직도 반년에 한 번 꼬박꼬박 학술지 《주흐날 아시아티크(Journal Asiatique)》를 찍어내는 아시아학회(Société Asiatique)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불교학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게 했다는 것일까. 이는 분명히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이미 오래전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지만, 예를 들어 재론하자면, 학문의 제도적 정착을 고려할 때 그것은 단순히 어떤 외형 조직의 형성만을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학자들이 연구의 대상에 접근할 때, 세대를 거치면서 따를 수 있는 어떤 규준의 등장과 정착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당시 문헌학(Philology)이 갖는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뷔흐눕 당대의 문헌학은 두 가지 실천적 맥락에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식민지 경영의 수단으로서, 또 하나는 과학적 탐구의 수단으로서 그 역할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프랑스 내에서 초기의 동양언어학은 대개 ‘현대’ ‘살아 있는’ 등의 명칭이 따라붙었다. 예를 들어 18세기에 설립된 ‘살아 있는 동양어 특수학교(L’École Spéciale des Langues Orientales Vivantes)’ 같은 곳이 그런 곳이다. 뷔흐눕의 스승이었던 쉐지는 여기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과학적 탐구의 수단으로서 문헌학이 정착하는 과정은 더 견고하고 오래된 역사를 갖는다. 18세기와 19세기 산스끄리뜨어의 발견에 의해서 문헌학적 전통이 새로운 언어학(즉, 비교언어학을 말하며 이것은 과거 고중세의 문헌학과 구분된다)을 탄생시키고, 동시에 당대 학문의 새로운 왕자로 등장했던 생물학과의 관계 속에서 당대의 과학적 도구로 이념화되어 갔다. 고중세의 문헌학이 신학의 문학적 아름다움이나 신성의 본질을 드러내려 했던 신학적 장치였다면, 근대의 문헌학은 과학이라는 다른 차원의 학문으로 옮겨간 것이다. 

문헌학을 자연과학의 반열에 위치시키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종교나 철학도 그러한 자연과학적 문헌학의 대상으로 취급하고자 했던 것이 보편적 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럽의 초기 산스끄리뜨 학자뿐만 아니라 초기 모든 불교학자에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외젠 뷔흐눕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1833년 쉐지의 뒤를 이어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취임한 뷔흐눕은 산스끄리뜨 언어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공개 강연(Discours d’ouverture: De la langue et de la littérature sanscrite)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동양에서 전해진 광휘로운 빛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되며 우리는 우리 시선 속에 제공된 웅장한 광경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언어를 통해 연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철학과 신화, 문학과 법률이 있는 인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 해석해 나가야 할 분야는 바로 인도 그 이상의 것, 즉 세계 기원의 한 페이지, 인간 정신의 역사 첫 장인 것입니다. ……반면 언어를 사상의 가시적 기호로 취급했던 언어의 연구는 충실하고 심오한 것입니다. 언어 작용에 대한 연구 역시 관찰의 과학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진정한 인간 정신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아니라면 적어도 인간의 정신이 그 자신을 드러내게끔 하는 가장 경이로운 능력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동양의 정신을 드러내는 과학으로서의 문헌학을 뷔흐눕은 웅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술적 조직과 그것을 이끌어가는 내적 규준으로서의 (불교)문헌학이 외젠 뷔흐눕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우리는 그를 현대 불교학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당시 유럽에서 불교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들은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구대상은 그야말로 일차적으로 인도나 네팔 등에서 입수되는 필사본 그 자체였기 때문에 산스끄리뜨 불교 필사본의 입수는 불교 연구의 성과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었다. 뷔흐눕은 1834년과 1835년 각각 독일과 영국을 여행하는데 이 두 차례가 거의 유일한 해외 학술여행이었다. 특히 뷔흐눕은 영국 방문 시에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과 보들레이언도서관(Bodleian Library)에서 필사본을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의 필사본은 불교 필사본이 아니라 아마도 그 무렵에 관심이 있었던 조로아스터교 문헌이 아닐까 추측된다.      

잘 알려지다시피, 외젠 뷔흐눕이 산스끄리뜨 필사본을 통해 불교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된 것은 네팔에 오랫동안 상주했던 영국인 브라이언 호지슨(Brian Houghton Hodgson, 1800~1894)이 뷔흐눕에게 산스끄리뜨 필사본을 보내면서 시작된다. 호지슨은 이미 18살의 십 대 나이에 영국을 떠나 인도로 들어가는데, 다시 스무 살 때 네팔에 들어가 1843년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카트만두에 살게 된다. 그 후 1844년 다시 인도로 들어가 다즐링에서 1858년까지 머물게 되었는데, 거의 평생을 네팔과 인도에서 거주했다. 네팔의 언어나 문화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 그가 수집한 불교 필사본들의 대부분은 대승불교 문헌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영국인 호지슨이 당시 옥스퍼드에 최초 산스끄리뜨 교수였던 호라스 윌슨(Horace Hayman Wilson, 1786~1860)이 있었음에도 뷔흐눕에게 네팔 산스끄리뜨 필사본을 보냈다는 점이다. 물론 뷔흐눕이 영국 여행 당시 윌슨과 친분을 쌓아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어떤 개인적 친분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니라, 뷔흐눕이 호지슨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필사본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지슨은 1820년대 중반부터 네팔에서 수집된 문헌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영국 아시아학회에 논문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파리의 연구자들을 관심을 촉발시킨 것이었다. 

1834년 7월 7일 뷔흐눕이 호지슨에게 보낸 편지는 현대 불교 연구사에서 인상적인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1834년 무렵은 뷔흐눕이 자료를 탐색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 해이기도 한데, 그해 처음으로 뷔흐눕이 초면의 호지슨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그가 수집하고 있던 필사본의 구입을 요청했던 것이다. 7월 7일 자 편지에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호지슨에게 필사본 구입을 요청하는 내용이 보인다. 지불 방법은 호지슨이 편한 방법으로 원하는 사람에게 보낼 것이고, 필사본을 보낼 때는 반드시 필사본 앞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다른 기관이나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호지슨이 네팔의 필경사에게 요청해 카피한 불경을 포함해 모두 24권의 필사본이 1836년 9월 뷔흐눕 앞으로 처음 발송되었다. 이 필사본은 7개월 뒤인 그다음 해인 1837년 4월 파리에 도착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뷔흐눕이 소장하고 있었던 200여 권이 넘는 여러 동양학 관련 필사본 가운데 네팔에서 온 불교 산스끄리뜨 사본은 모두 59권에 이른다. 그 대부분은 대승 경론서의 사본들인데, 《십지론(十地論)》 《화엄경(華嚴經)》 《보요경(普曜經)》 《불본행집경》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아미타경(阿彌陀經)》 그리고 《법화경》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외젠 뷔흐눕의 소장도서와 필사본들은 그의 사후 2년 이내에 모두 경매에 부쳐져 흩어지고 말았는데, 그래도 필사본의 꽤 여러 권은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 그리고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 건물 내에 있는 아시아학회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뷔흐눕을 불교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그가 당대 과학적 의미의 문헌학적 규준을 불교학에 투여하고 그것을 통해 불교 저작과 번역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불교 연구의 일차 소스인 필사본의 구입과 분석, 연구는 필수적인 일이었으나, 일차 사본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문헌학적 규준 속에서 진행하는 일은, 지금의 불교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의 《인도불교사 입문》과 《법화경의 연구는 십여 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쓴 불교 관련 단독 저작은 단 두 가지, 《인도불교사입문(Introduction à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1844)과 《법화경 번역(Le Lotus de la bonne loi, traduit du sanscrit, accompagné d’un comment-aire et de vingt et un mémoires relatifs au buddhisme)》(1852)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저작은 불교 연구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연구물이 되었다. 심지어 그의 《인도불교사 입문》은 비교적 최근(2010)에 로페즈에 의해서 영역될 정도로 학문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도불교사 입문》과 《법화경》의 번역

앞서 말한 호지슨이 뷔흐눕에게 처음 발송한 24권의 필사본 다발 가운데 《법화경》 필사본이 들어 있었다. 현재 파리 아시아학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인상적인 것은 2년 뒤인 1839년 뷔흐눕이 호지슨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는 호지슨이 보내준 《법화경》 산스끄리뜨 필사본을 다 번역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다. 번역은 완료된 상태이나 아직 1839년은 출판되기 이전이었음을 알리는 글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법화경》 산스끄리뜨 필사본을 받은 지 거의 2년도 채 걸리지 않아 번역을 완성했다는 말이다. 거의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가 뛰어난 산스끄리뜨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대승 불전의 특성을 이해한다거나 불교의 사전적인 이해가 거의 초보적인 상태였다는 것, 그리고 참조할 만한 연구가 거의 부재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놀랍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매우 열정적으로 《법화경》 연구에 매달렸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뷔흐눕은 1837년 6월 호지슨에게 《반야경》 연구와 《법화경》 연구의 고충 등을 길게 편지로 다시 쓴다.  

팔천송 반야경을 읽으면서,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사람들의 공덕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거듭 반복하는 것을 보고 있지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고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선생님께 고백하자면, 저는 (법화경) 탐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저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법화경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어 번역할 생각입니다. 그것만이 선생님께서 유럽학계에 기여하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겨울까지 최선을 다해 저는 “묘법연화경의 분석 또는 탐구(analyse ou des observations sur le Saddharma pundartka)”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출판사를 찾아 출간해볼 생각입니다.  

뷔흐눕은 《반야경》을 읽다가 포기하고 《법화경》을 집중적으로 읽어가며 노트를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년 뒤인 1839년 그는 《법화경》 번역을 완성했다고 다시 편지를 썼지만, 그는 아마도 이 《법화경》의 번역과정에서 불교 전체에 대한 이해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판단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법화경》의 번역이 출간되어도 제대로 학자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의 번역은 유럽 최초의 《법화경》 완역인데 3백여 쪽의 본문 번역과 150여 쪽의 주석이 붙은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을 끝내놓고도 원고는 여전히 출판되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된 불교 연구서가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고, 그 결과로 《인도불교사입문(Introduction à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1844)이 등장하게 된다. 이 역시 640쪽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였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불교사 입문이라기보다는 다소 산발적인 주제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경률론(經律論)에 대한 설명과 밀교에 대한 설명, 그리고 네팔 필사본 수집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법계(法界)나 열반(涅槃), 또는 연기(緣起) 등과 같이 대승 경전 속에 등장하는 전문용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뷔흐눕이 보여주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고전번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번역 형태는 현대 학자들도 거의 차이 없이 동일한 포맷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사후인 1852년, 뷔흐눕의 《법화경》 번역은 줄 몰(Jule Mohl)에 의해 두 권으로 출판된다. 1권(Tome Ⅰ)은 앞부분의 해설과 본문, 그리고 노트로 구성되어 있다. 노트(Notes)는 285쪽에서 434쪽까지 이르는데, 이것은 본문 번역에 대한 주석으로 미주 형태로 번역 뒤쪽으로 몰아넣었다. 그 양이 워낙 번역 본문만큼이나 방대하기 때문이다. 2권(Tome Ⅱ)은 부록과 인덱스로 이루어지는데, 부록(Appendices)을 보면 435쪽에서 시작해 867쪽에 이르는데 그 분량은 전체 원고의 절반이 넘는다. 이 부기의 내용은 21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지는데, 주로 《법화경》을 번역하면서 부딪혔던 불교의 특수 개념들에 대한 논의들이다. 이 논의들은 《인도불교사 입문》에서 보여주었던 주제들보다 더 작고 세부적인 개념들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비구승단에 대한 개념, 불타의 위신력의 개념에 대한 논문이나 5신통(abhijñā, 神通)에 관한 논문, 또는 무간지옥(無間地獄, lokāntarikā) 등등에 관한 논의를 다른 불전들을 활용하면서 길게 설명하는 식이다. 부기 뒤쪽에는 불교용어에 대한 인덱스를 만들어 쉽게 확인해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연구서의 체제는 현대 연구와 조금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치밀하고 집약된 학술연구물의 특징을 보여준다.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전형적인 인도학/불교학의 고전번역도 거의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제임스 피츠제럴드(James L. Fitzgerald)의 《마하바라따》 번역이나 로버트 골드먼(Robert Goldman)의 《라마야나》 번역은 원숙한 말년 산스끄리뜨 학자들의 밀도 있는 깊이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러한 전통이 현대 불교 문헌학을 일으킨 뷔흐눕의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법화경》 번역은 1837년에 처음 시작되었지만 1852년 그의 사후까지 번역을 중심으로 계속 추가적인 해설이 수년 동안 첨가되어 가며 최종 출판을 계속 미루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학문적 완벽성을 추구하다 출간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게 된 것이다.  

필자의 서가에는 아직 그의 《인도불교사 입문(Introduction à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이 꽂혀 있다. 한국의 불교 연구자라면 다 알 만한 영문사에서 수십 년 전 카피된 것이다. 이 책의 재판본(再版本)조차 백 년 하고도 수십 년이 훨씬 지난 전의 것이라 그 정보의 효용성은 이제 다 휘발되어 버리고, 지금은 버려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책을 버리기 전 늘 떠올리는 일이지만, 어떻게 국내 대학도서관에도 찾아보기 힘든 그 낯선 프랑스의 책이 한국의 골목 복사집에 흘러오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나는 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

 

심재관
상지대 교수. 동국대학교에서 고대인도의 신화와 의례 연구로 석 · 박사학위를 마쳤다. 동국대, 금강대, 서울대, 상지대 강사 및 연구교수 역임. 고대, 고중세 힌두 문헌과 필사본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인도의 건축과 예술로 연구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불교연구사에 대한 관심으로 관련 글들이 다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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