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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출신 작가의 1990년대 불교소설 / 유한근
특별기획 - 현대소설에 나타난 불교 ⑥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유한근 yhkpoet@hanmail.net

-고은의 《화엄경》과 황충상의 《무명초》를 중심으로

19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을 일별하기 전에 먼저 전제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먼저 1990년대 이전 혹은 90년대에 등단하여 불교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들의 모든 작품을 거론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하나의 예로, 1982년에 등단하여 1994년 소설 《유마경》을 쓴 정찬주의 불교소설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전제 사항의 둘은 물의를 일으킨 시인 고은의 소설을 자연인으로서 평판과 작가로서 삶의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고 문학적으로만 평설한다는 점과 고은의 시에 대한 담론은 이 자리에서 유보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불교소설로는 고은1)의 《화엄경》과 황충상2)의 《무명초》를 중심으로 탐색해 보려 한다.

   
 


1. 고은의 구도소설 《화엄경》
    -선재동자와 화엄법계   

   
 

고은은 작가적 삶을 통해서나 자연인으로서의 실천적 삶을 통해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한국의 지성인적 면모를 보여 왔다고 평가된다. 특히 “고은의 문학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경험적 진실성과 연관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적 진실성이란 삶의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폭넓은 관심에서 비롯되는 신념을 뜻하는 것이다. 고은의 소설 가운데 〈어떤 소년〉이라든지 《화엄경》 같은 작품은 모두 현실 속에서의 삶의 고뇌를 중심으로 그 서사적 골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삶의 세계를 들고 나는 인간의 모습이 각인된다. 현실과 대응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미 존재론의 근본 문제를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화엄의 사상처럼 오묘하기조차 하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불교문학적인 측면에서는 1952년 입산, 효봉 선사의 상좌(법명 일초)로 1962년 환속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방랑 생활과 선 수행을 통해서 얻은 체험으로 불교소설을 써왔다. 이 체험과 지식이 결집된 소설이 《화엄경》과 《선(禪)》 2, 3권이다. 특히 《선》은 달마 대사가 중국에서 선종을 연 이래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 선사에 이르기까지 남북조 시대 난세를 배경으로 하여 대선사들의 선적 수행인 기행의 일화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그 선승들의 공안과 게송 들을 흥미롭게 소개한 선불교 입문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고은의 불교소설로 주목을 받은 장편소설은 《화엄경》이다. 이 소설은 선재동자(善財童子) 이야기(《화엄경》 〈입법계품〉)를 서사구조로 하여 주인공의 깨달음 여정을 작가적 상상력의 확대로 픽션화한 작품으로, 고은 소설의 중심적 위상을 자리매김한 불교소설이다. 고은은 《화엄경》을 쓰기 전 앞에서 잠깐 언급한 선불교 소설 《선》 1, 2권 이외에도 여러 권의 소설을 쓴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불교소설은 《화엄경》이다.

고은은 첫 장편 《피안앵(彼岸櫻)》(1962)을 시작으로 《어린 나그네》(1974), 《일식(日食)》(1974), 《밤 주막》(1977), 《산산이 부서진 이름》(1977), 《떠도는 사람》(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1980), 《어떤 소년》(1984) 등 소설 작품을 꾸준히 펴내 왔는데, 어쩌면 모두가 《화엄경》(1991)을 집필하기 위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일제 강점기에 핍박받고 사는 민중들의 저항적인 삶의 모습과 당대적 사회의식으로 깨어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아가 작가의 사회역사적 책임을 통해서 지식인들의 죄악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자아 성찰의 내면보다는 역사 ·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다분히 민족 · 민중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불교적 세계관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전적 소설인 《나 고은》을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나라는 실재가 아니다. 나는 오온(五蘊, 색 · 수 · 상 · 행 · 식)이 한동안 모인 상태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라는 그림자일 뿐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일체가 다 허망한 것이다”라고 토로하면서 자아 성찰에 시각을 돌린다. 또한 “이런 공관(空觀)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차츰 제어하기 어렵게 되었다. 나에게 잠든 허무주의가 새로운 상태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전쟁 기간 고향에서 목격한 좌우상잔의 참극이 나에게 준 정신의 외상은 더 이상 나를 고향의 아이로 둘 수 없게 만들었고 내 청소년적 의식에도 착란 현상을 일으켜 주었던 것이 사실”이 이미 소설 《화엄경》의 선재를 구체적으로 잉태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심정적 추측이 객관성을 훼손할 수 있지만, 창작의 동기나 창작열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은은 《화엄경》의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창작 계기를 밝힌다. “1959년이었던가, 선학원(禪學院)에서 운허(龍夏 李鶴洙) 스님께서 귀때기 새파랗고 방자한 나더러 《화엄경》을 보라 했다. 나는 진작 명봉(明峯) 강백으로부터 신역(新譯) 화엄경을 배운 바 있다. 운허 스님이 나더러 하필 《화엄경》을 보라 한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 안의 남순동자(南巡童子) 선재(善財)가 진리를 찾아다니는 오랜 편력 일대기를 서사시로 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창작적 역량으로 미숙해서 선재동자의 소설적 형상화를 할 수 없었고, “《화엄경》의 근본 법륜(基本法輪)보다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심취했기 때문에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구도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22년이 걸린 셈”이라고 토로한다. 이러한 토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화엄경》 이전에 쓴 소설들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개요에 대해서 덧붙여 거론하고 있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이다. 연화장(蓮花藏)이다. 갖가지 색깔의 꽃으로 장식된 부처님의 세계를 뜻한다./ 이 화엄경 입법계품이 바로 어린 선재의 구도기이기도 하다.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구족하기 위하여 남인도 여행에 나서서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처음의 문수보살과 마지막 보현보살의 가르침으로 대단원을 이루어 그가 찾는 바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어느 때는 불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녀, 신들까지 포함되고 있다. 말하자면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드넓은 확신이 여기에 할러 넘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대방광불(大方廣佛)의 세계인데 이 끊임없는 진리에의 추구는 먼 후대의 현상학에까지 반영되고 있는 성부르다.

위의 인용문에서 작가는 소설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 이야기의 서사구조를 차용하여 쓴 소설임을 밝히고 있다. 《화엄경》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하여 끝없이 전개되는 약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연화장세계에서는 항상 《화엄경》의 중심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대광명을 비추어 모든 조화를 꾀하고 있다. 《화엄경》은 우주의 질서를 미적으로 표현한 경전이”며, 〈입법계품〉의 입법계는 법계(法界)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법계는 세계와 우주 전체를 불교에서 일컫는 말로 법(法)의 세계, 진리의 세계, 진여법성의 세계라는 것으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선재동자 이야기는 근본법회(根本法會)가 아닌 지말법회(枝末法會)인 법계에 들어가는 과정으로서 원인을 밝힌 내용이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서 남쪽으로 구법(求法)의 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선재동자가 찾는 선지식은 바라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자, 왕, 야차, 비구니, 창녀 등 신분의 고하를 망라하여 풍부한 인생 경험을 거친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선지식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나름대로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구도자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의 선지식은 미륵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찾아가게 된다. 

이 이야기를 고은의 《화엄경》은 첫 장 ‘소나강의 새벽’에서 선재가 문수보살과 물살이 센 소나강을 어렵게 건너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60장 ‘미지의 세계를 위하여’에서는 마지막 스승인 보현보살의 말(“부처의 한량없는 바다 가운데서 나는 다만 한 방울의 빗방울로 그대들에게 말하노니……”)이 빗방울로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 소설의 서사구조는 60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 있다. 이 소제목을 열거하면 이렇다. 

소나강의 새벽-어린 나그네의 첫걸음-아제나루터의 밤나룻배-산속의 방황-바라문 바닷가의 고독-한 알의 모래가 만들어가는 시간-여덟 비계를 모르는 몸-기나 승원을 떠나다-소녀 세이야의 환생-슬픈 노래를 부르는 늙은 장님의 밤-12년 동안의 여행-안개 속의 사랑-내가 만든 잠-12년 동안의 꿈을 실은 코끼리-불의 골짜기-소녀 미다라니의 춤-산속의 푸른 연꽃의 눈-윤나 나라의 여행을 위하여-소년과 소녀-깊은 집의 미인들-재를 먹은 사람과 더불어-헤어지지 않고 만날 수 없다-모든 노래가 이룬 한 송이 꽃-다시 이련 아씨와 함께-산에 가서 말하다-과거와 환영-그것을 버리고 삶과 죽음을 버려라-그대의 빛의 무덤-아아, 영원한 강물 위의 여행-낙영락성을 찾아서-수메라와 사뇌타-햇빛동산-어느 털보 영감-관자재보살의 노래-거인 ‘구름 그물’-마가다 땅 보리수 아래-밤의 여신 춘화의 과거-구름의 사랑-털구멍마다 구름 일다-노래와 춤을 비쳐 해탈이어라-서른일곱 번째의 만남-산을 무너뜨리면 거기 지혜-이 세상 밤이므로 밤의 신 있음이여-허공에 떠다니며-나, 북녘으로 돌아가노니-아가씨 구파 이전-북힌두에 돌아오다-가비라성의 처녀-33천의 아가씨-꼬마 변우-신동 선지중예의 학문-강을 건너는 자유-목마른 자의 샘물-1백10유순 사이의 만남-장자 무승군과의 하룻밤-최적정 바라문 이후-이 세상 이후의 스승-비는 바다 가운데 한 방울의 물-미지의 세계를 위하여

이렇게 지루하리만큼 세세하게 열거하는 것은 이 소제목을 통해 스토리의 진행을 다소 짐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한 소제목 가운데 ‘구름의 사랑’에서 선재는 가비라성 밖 나가다 나라에서 한 젊은이를 만난다. 그 젊은이는 길을 가는 선재를 불러 세워 자신을 생명의 은인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대를 만나 적이 있소. 남녘 세상에서 말이오. …… 내가 도적을 만나 다 빼앗기고 나서 며칠을 굶은 데다 병이 나서 쓰러져 있는데, 그때 그대가 지나다가 나를 구해 주었소…… 그때 그대가 준 마른 열매와 물 한 모금으로 나는 살아났던 것이오.” 하고 말하면서 은인인 그대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그때 선재는 자신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다고 쌀쌀하게 말한다. 그리고 “돌아가십시오. 저는 저 혼자로 능히 새 스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답 없는 그에게 다시 “돌아가십시오. 마가다 땅은 마가다 땅의 밤의 신 무구광으로 넉넉합니다. 스승이여, 이곳에서 당신은 여신이 아닙니다. 한낱 먼지입니다.”라고 말하며 아래와 같이 전생에 대해 회상한다.

허술한 옷차림의 남정네로 변신한 춘화 아가씨가 그의 본 몸을 감추고 선재로부터 생명이 구조된 전생의 일을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백 생 이내의 가까운 전생의 어떤 세상에서 전생의 선재로부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던 괴로움으로부터 건져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서 어떤 거짓도 그것은 전생다생의 윤회를 통해서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짓은 사실이다. 그 남정네가 선재더러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원수라고 해도 그 말은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다생의 어느 세상에서 둘 사이는 원수의 인연으로 만난 적도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은 헤아릴 수 없는 과거의 전생다생이라는 역사로부터 태어난 작은 규칙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경건한 뜻과 규칙이란 한편으로는 아무런 진실도 아니게 된다. 선재가 남정네의 은혜 갚음을 거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화엄경》의 중심 사상이 법계연기(法界緣起)임을 확인하게 된다. 우주의 모든 일은 어떤 일이라도 독자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무한한 시공간, 즉 전생과 현생에서 서로의 씨앗이 된다는 것과 대립 없이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게 된다는 사상이 법계연기이다. 허술한 남자로 변신한 춘화 아씨가 전생에서 선재가 구해준 사람임을 깨닫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지혜의 마음 청정하고 원만한 선재는 그 지혜의 마음에 보살이 원(願)을 일으키고 그 지혜로 하여금 일체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구름을 일으켜 그 구름으로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다 덮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춘화 아씨의 변신과 끊어진 자리에서 선재 자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곧 다음 스승과의 약속으로 이어지는 단계의 길과 하나로 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이렇게 연기(緣起)에 따라 선재는 선지식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 장 ‘미지의 세계를 위하여’에서 선재동자는 늙은 사공을 만나고 죽은 어미의 왕생을 비는 아이를 위안해주고, ‘무량(無量)의 우주와 자아’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되고 선재 보살이 된다. “주관[能]과 객관[所]을 융합하는 보융무애문(普融無碍門)에 이르러 개체와 전체, 전체와 개체, 주관과 객관, 객관과 주관을 번갈아가며 서로 융합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는 무애자재의 화엄법계(華嚴法界)에 깨쳐 들어가”며 소설은 대미를 장식한다.


2. 황충상의 《무명초(無明草)》
  -대승적 소설 미학

   
 

황충상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무색계(無色界)〉가 당선되어 등단한 후, 부단히 우주적인 상상력으로 불교를 모티프로 하는 소설을 써온 작가이다. 그의 문학을 권영민은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을 통해 인간의 삶과 사유의 방식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시간 인식과 실존, 영원성에 대한 인식, 번뇌와 아름다움에 대한 불교적 인식이 주조되면서 종교적인 깨달음과 성찰을 얻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는 소설이 《옴마니 반메훔》(1992)이나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다》(1994)가 있기는 하지만, 단편소설 7편이 묶인 《무명초》(1997)가 그의 대표적인 단편 불교소설이다. 

이 소설집의 발문 자리에 고은은 〈대승적인 미의식〉이라는 제목으로 황충상의 인간과 문학을 시의 구조로 간명하게 표현한다. “언제나 너럭바위인 양 듬직한 작가 황충상은/ 사실인즉 서울 인왕산 암굴 속에/ 숨어서 수행하던 젊은 사미승이었다./ 이번 소설 《무명초》는 아마도 그의 회심의 소산인 것 같다. 저 중국 오지의/ 돈황 막고굴의 그 극채색의/ 아름다움과 함께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작가의/ 대승적인 미의식이 출세간과/ 세간을 넘나드는 구도의 역정을/ 펼치고 있는 데 그 파란만장의 곡절이/ 구성진 바 있다”라고 찬사를 보낸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소설가 황충상 이전에 그는 승려였다는 사실과 대승적 미의식이라는 문학세계에 대한 언급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무명초》의 ‘책머리에’서 “그간 발표된 소설들 중에서 순전하게 불교 소재를 다룬 일곱 편을 모았다. 굳이 ‘황충상 불교소설’이라 하고, 이 책자가 청소년 시절 가피 입은 불은(佛恩)에 값하기를 바란다”라는 토로로 답할 수 있을 것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여러 국면에서 다각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대승적인 미의식이 출세간과/ 세간을 넘나드는 구도의 역정”은 단편소설집 《무명초》에 같이 묶인 7편의 단편소설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무명초》에 실린 표제작 〈무명초〉는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된 불화의 대가 혜봉 화백이 회상을 통해서, 불화를 공부하는 제자 가회와 무명(無明) 속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리고 〈삭도〉는 무명을 깨치기 위한 무소 스님의 기행(奇行)에 가까운 참혹한 삭도질를 통해서 인간의 초월 의지를 보여준 소설이며, 〈사바에 와서〉는 속(俗)과 이속(離俗)의 경계가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불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소설이다. 〈화택〉은 욕망의 미망 속에서 그 욕망의 불을 끄지 않으면 그 구렁텅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실족〉은 선과 악의 갈등, 그 중생의 두 가지 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며, 〈사리〉는 극기를 통한 깨달음의 표상으로 인식하는 사리가 하나의 돌덩이와 다르지 않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황충상의 등단작인 〈무색계〉는 문명세계의 병폐를 영성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소설이다. 

이렇게 조야하게 살펴보았지만, 일곱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모티프는 상구보리를 참구하는 출세간과 하화중생을 원하는 세간 사이에서 방황하는 불자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대승적 미의식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황충상은 《무명초》를 펴내면서 ‘책머리에’서 ‘무명초’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무명초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모여 물이 되기도 하고, 바람으로 떠돌다가 불꽃 풀포기가 되기도 하는 상징적 조어다”라고 하면서, “어둠 중에서 영원히 빛스러운 이 말은, 그래서 곰곰 되새김할 양이면 광대무변한 중생과도 통한다”라고 작가적 의미를 부여한다. 결론적으로 무명초는 깨달음이 없는 중생을 의미한다. 무명초가 깨달음을 얻으면 물이 되고, 바람에서 불꽃과 풀포기도 될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는 의미로 어둠, 혼돈, 카오스를 의미한다. 불교용어 사전적 의미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하는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근본의(根本義)에 통달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이다. 따라서 무명은 불자에게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무명초인 중생이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해탈 대상이다. 

소설 〈무명초〉는 해봉 화백의 병상에서 시작된다. 해봉이 제자인 가희에게 화가로서의 삶을 설명한 “선의 예술은 곧 선(禪)이다. 환쟁이는 그래서 행복하다. 자신의 그림 속에 빠짐으로써 곧 도(道)를 이루거든.”이라는 말을 가희가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곧 이 소설의 화두가 된다. 이러한 화두는 그 뒤의 서사를 통해서도 계속된다. 노화백인 해봉이 탱화전 준비를 위해 돈황의 막고굴 여행 중, 동행한 가희에게 명사산이 보이는 호텔에서 한 말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무명초(無明草)이다. 그럴진대 이생에서의 삶은 무명을 벗는 일이지. 저 모래산이 우는 소리가 들리느냐? 무명을 벗으면 저 소리는 이곳에 오지 않고도 들을 수 있어.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어야 했다. 일찍이 혜초가 이곳을 지났지만, 원효는 오지도 않고 이곳을 지났다. 내일은 우리 그만 돌아가자.”고 하며 도중에 귀국하자고 말한다. 그런 뒤 화선지와 붓을 가져오게 하여 가희를 모델로 비천상을 그린다. 

여기에서 해봉의 말에 주목해야 할 부분은 중생은 무명초라는 사실과 혜초와 원효의 다른 길이다, 혜초는 불경을 위해 인도행을 위해 이곳을 지나갔지만, 원효는 당 유학길 도중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간 이야기가 그것이다. 전자는 소승행인 데 반해 후자는 대승행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위해서이다. 고은이 지적한 대승적인 미의식은 여기에 단초를 두고 있다. 

또한 칠십 평생 불화만 그린 해봉의 고희 기념 첫 개인전에서 일곱 작품만 내건 것도 구도적인 화가로서의 단초가 된다. 그 작품들은 “유년 시절의 불화 수련기를 회상하며 그렸다는 〈사천왕〉, 절대 보시의 극단으로서 알몸을 땅속에 감추고 있는 〈지장보살〉, 미망의 화염 속에서 지성을 깨닫는 〈화불(火佛)〉, 인간 속에 내재한 부처를 투사한 〈인불(人佛)〉, 현세가 곧 불국토이자 지옥임을 인과현상으로 나타낸 〈사바세계〉, 불교미술의 극치를 대변한 청회색조의 〈비천상〉, 그리고 단청 문양을 환상의 고리로 교직시킨 비구상화 〈단청의 환(幻)〉” 등의 불화가 곧 해봉이라는 화백에 투영된 작가의 ‘대승적 미의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요체는 그림을 그리는 해봉과 그의 제자이며 알몸으로 노화백 앞에 선 가희와의 관계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보고도 썩은 고깃덩이에 천녀(天女)의 숨결을 불어넣는 스승을 보고, “저 노인의 정기는 욕정이 아니라 청정이다. 여체의 신비를 한낱 고깃덩이로만 알 수 있는 청정”으로 인식하는 가희와 해봉의 관계이다. 해봉 문하에 입문하여 불화를 그리려는 가희를 보고, 스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한다. “선생으로 부르거라. 승복을 걸친 자로 보지 말고 앞선 자로 보란 말이다. 사바의 무명초(無明草)란 본디 스승이 없는 법, 하나 방편일진대, 앞선 자는 슬픈 존재다. 이 말에는 뼈가 있다. 선생을 앞질러 무명을 스스로 벗으란 말이다 (……) 예라는 것이 본디 답이 있는 것으로 추구되었다면 너나 나나 이 길에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환언하면 이미 너의 물음은 스스로 답을 가졌다는 뜻이다. 허나 굳이 답을 듣고자 한다면 이런 정도의 표현이 가능하다. 무명초, 즉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색, 즉 끝없는 있음이 가능한 없음의 색, 그것에 이르고자 하는 기를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침을 준다. 

또한 가희의 복부 통증으로 인해 사제간의 신체 접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봉은 “가령 젊은 여자 제자가 늙은 스승을 시험하려 들었는데 역시 늙음은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고, 아무튼 그쪽이야 뭐라든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았다는 말뜻은 중요하다. 사바의 인간은 모두가 번뇌 망상에 끄들리며 괴로워하는 무명초다. 그런 무명초인 너와 내가 한순간이나마 무명을 벗고 시험의 벽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가희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가희의 감동의 눈물을 작가는 무명을 벗어난 눈물, ‘순수한 무명의 눈물’로 인식한다. 그리고 가희가 복부 통증이 가시고 마음이 편해져 졸음이 온다고 하자, 해봉은 그것을 ‘순진한 무명초의 기(氣)’라고 말한다. 

‘순진한 무명초의 기(氣)’는 사성제(四聖諦)로부터 벗어남을 말하는데, 작가는 이렇듯 해봉과 가희와의 관계를 통해 무명을 벗은 중생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다. 욕망에 붙들려 있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불태워 버려 해탈의 길, 혼돈으로부터 벗어난 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길임을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가희는 소공과의 이야기에서 “선생님은 모든 중생을 무명초라 하셨지요. 혼돈이 있는 한 무명초의 창조도 지속되겠지요.”라고 하면서 창조의 시원이 무명이라는 스승의 예술관을 말하기도 한다. 무명과의 투쟁 과정이 곧 창작 활동이라는 사유다. 무명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서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가회의 무당 신내림 체험이다. 가희는 대학 1학년 때 민속학 시간에 지노귀굿을 끝낸 무당을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무당은 학생들을 휙 훑어보더니 가희의 손목을 잡고 “여기서 신 내릴 소지가 제일 강한 사람이 이 학생입니다. 시대를 앞질러 태어났다면 나처럼 무당이 될 수 있는 인자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노귀굿 일부를 재현하여, 가희에게 신내림 굿을 하자 가희는 신명의 리듬을 타고 “어화, 한이로다. 무주고혼 영가를 다시 부르옵니다. 이 신딸의 천도재 받자와 부디 왕생극락하사이다. 원왕생 원왕생 원왕생……”이라고 무성을 터뜨린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가희의 영성적인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삽화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토착화 현상을 보여주는 구조미학에서 나온 것이며, 한국소설의 전통성을 계승하기 위한 서사구조로도 보인다. 한국소설의 전통 한 가지는 김동리의 토속적이고 종교적인 소설이다. 김동리의 〈무녀도〉와 〈등신불〉을 계승하는 마땅한 소설이 부재한 현대소설에서, 그 한 자락을 황충상의 이 소설에서 탐색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나칠 수 없다. 김동리는 황충상의 스승이다. 황충상은 서라벌예술대에서 소설가 김동리의 문하생이었고, 김동리는 황충상의 등단작 〈무색계〉를 당선작으로 뽑아준 문단의 스승이기도 했다. 

최근에 황충상은 모 문예지에 김동리 실명소설인 〈마음 건너기〉를 재수록하면서, 스승의 시 5편에 대한 평설적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 필자는 이렇게 그의 소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황충상의 “김동리 인물소설 〈마음 건너기〉는 분명 기존의 소설을 전복시키는 요인이 다분하다. 그 첫 번째의 것은 소설 문법을 완전 일탈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두 번째 것은 시보다도 더, 철학보다도 더 사유하게 하는 동양철학 소설, 또는 불교소설이라는 점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인물소설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건너가게 하는 무지개와 다른 독자에게 걸쳐질지는 아직 섣부른 판단이 될 것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자명한 것은 이승과 저승은 하나이고, 현실공간과 초월공간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경계 없는 소설이라는 점”21)이 그것이다. 이 평설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 소설이 김동리의 인물소설이며,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요체는 저승과 이승이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현실공간과 초월공간의 경계 허물기는 샤머니즘 혹은 불교적인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황충상의 소설관이 김동리 소설 계승의 한 단초적 계기가 되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황충상의 소설적 행보는 불교적 세계관과 상상력을 통해 세속적인 삶과 이속적인 삶에 대한 사유 성찰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본체와 삶에 대한 본질, 그 원형적 모습을 종교적인 깨달음으로 얻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삶과 본질적인 참인간 탐구에 주목하는 작가로, 현실적 삶을 초월하려는 관념적 무속 세계를 통해 존재의 의미로까지 확대해나가는 작가라는 점이다. ■

 


유한근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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