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또는 불교적 이미지에 대한 어떤 영화적 시선

영화를 읽는 과정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 중 하나는 특정 종교의 지시물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제시되는 경우 그 작품을 종교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태생적으로 시각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 종교적 지시물은 본래 그것이 가진 강렬한 도상성(圖像性)으로 인해 스크린 속 이미지 재현에 대한 영화의 욕망을 자극하기 쉽다. 

예를 들면, 영화에서 주요 인물들이 마음의 안식을 얻거나 깨달음을 구하는 공간적 배경으로 산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주인공은 노스님과 대웅전 앞을 함께 거닐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삶의 지혜나 혜안을 얻은 뒤, 주변의 갈등을 해결하고 문제를 봉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영화는 대개 강박적으로 고요한 산사 풍경, 노스님과의 선문답, 목탁과 풍경 소리, 대웅전의 부처님 등등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제시한다. 

굳이 특정작품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영화 또는 드라마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장면이다.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일부 할리우드 작품에서도 종종 확인이 가능하다. 작품을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연출 의도와 관련해서 이러한 묘사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교적 도상들의 시청각적 제시는 익숙함을 넘어 종교적 재현에 대한 영상 매체의 관습적 시선의 태도 문제를 환기시킨다. 스크린에 제시되는 대상의 본질적 의미보다 그 외양만이 시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물론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나 통찰이 있어야만 그러한 장면들을 작품 속에 담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이러한 불교적 대상들이 서사와 밀접한 관계 맺음을 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은 불교가 표층적 이미지로만 제시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세계관이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경우에 대한 고려를 의미한다. 

 

2. 일본 영화 속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작품을 통해 드러낸 감독들을 영화사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와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1898~1956) 감독을 우선적으로 떠올려볼 수 있다. 물론 영화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작품에 대한 불교적 독해는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1930년대와 1950년대를 전후로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들의 작품을 불교적이라고 해석하는 지점들이 있다. 이것은 스크린을 통해 투사되는 영화 속 삶에 대한 태도가 불교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두 감독의 주요 작품 속 특정 장면들을 살펴보면서 불교가 영화에서 재현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적 순간들에 대한 직관(直觀)과 체인(體認)

일반적으로 오즈 야스지로는 소시민의 삶을 통해 현대사회의 급변하는 가치관과 가족의 해체를 담담히 다룬 감독으로 거론된다. 주로 고정된 카메라의 수평적 시선을 통해 그는 부모의 죽음과 자식의 결혼, 이로 인한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가족의 탄생과 같은 삶의 변곡점이 되는 지점들을 관조적으로 그려내었다. 사실 대부분의 오즈 영화는 결혼과 죽음을 소재로 하는 엇비슷한 이야기를 가진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야기의 반복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오즈의 엄격한 형식적 스타일을 통해 구현되는데, 여기에는 낮은 위치의 고정된 카메라, 쇼트들의 직접적인 연결, 클로즈업의 제한적 사용, 그래픽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공간구성, 공간 속에서 마주 앉는 인물의 배치 구도, 비어 있는 공간의 정서적 강조 등 촬영 및 편집과 관련한 일관된 영화적 양식이 포함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언급한다 한들, 혼기가 찬 자식의 결혼 성사 여부를 고민하다가 결국은 자식들이 결혼하는 이야기가 전부이거나, 성인이 된 자식들의 녹록지 않은 처지를 걱정하던 부모의 갑작스러운 부재(죽음)를 다룬 이야기가 오즈식 서사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장르적 성격을 보여주었던 전기 영화들과는 다르게, 1940년대 말 이후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전자의 이야기로는 〈늦봄(晩春)〉(1949), 〈초여름(麥秋)〉(1951), 〈달맞이꽃(彼岸花)〉(1958), 〈가을 햇살(秋日和)〉(1960), 〈꽁치의 맛(秋刀魚の味)〉(1962)과 같은 작품을 거론할 수 있고, 후자의 이야기로는 〈동경 이야기(東京物語)〉(1953)와 〈고하야가와가의 가을(小早川家の秋)〉(1961)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에 〈오차즈케의 맛 (お茶漬の味)〉(1952)이라는 작품은 부부간의 불화와 화해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오즈는 가족 내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는데, 그 이야기라는 것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플롯의 측면에서 보아도 그다지 친절한 서사적 묘사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대표적으로 〈늦봄〉과 〈동경 이야기〉를 예로 살펴보고자 한다. 〈늦봄〉에서 아내 없이 딸 노리코와 살고 있는 대학교수 소미야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노리코를 시집보내고자 하지만, 딸은 혼자 남겨질 아버지 걱정에 결혼을 주저한다. 결국 아버지는 재혼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해서 딸을 안심시키고 그녀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한다. 

한편, 〈동경 이야기〉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노부모와 이들을 둘러싼 자식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각자 바쁜 삶을 살아가는 자식들은 노부모 모시는 것을 서로 회피하고, 이 와중에 남편을 잃고 혼자된 며느리만이 그들을 진심으로 대한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머니의 임종을 맞이하고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오즈의 서사에서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사건이 없고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생략과 비약이 과감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서 서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의 결혼이나 부모의 죽음은 언제나 생략된다. 서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의 생략은 곧 비약으로 연결된다. 

어떤 형태로든 가족의 해체가 영화적으로 제시되었을 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그와 같은 이별의 순간보다는 그 이후의 일이다. 서사의 흐름상 가장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늦봄〉에서는 딸의 결혼식이, 〈동경 이야기〉에서는 어머니의 임종 장면이 화면에 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경유하여 스크린에 제시하는 세계에 자신의 관점을 자연스레 표출시킨다. 오히려 딸이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아버지의 모습과 더불어 딸의 부재가 느껴지는 집 안 구석구석의 빈 공간을 보여주거나, 어머니가 떠난 후에 며느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권유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오즈가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떠난 이들의 빈자리로 묘사되는 영화 속 빈 공간이다. 오즈의 빈 공간은 주로 인물들이 머물렀던 장소들(또는 그 주변의 공간들)을 위주로 보여주는데 여기서 공간의 비어 있음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무(無)’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경향이 있다. 불교가 세계를 둘로 구분하여 인식하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 ‘무’의 의미는 단순히 비어 있거나 없음을 지시하는 부정적 수사로 기능하지 않는다. 공(空)의 세계에서 ‘유(有)’와 ‘무(無)’의 이원적 구분이 무의미하듯이 오즈의 빈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비어 있는 영화 속 장소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간 이들의 자취와 그곳에 남겨진 이들의 감정을 동시에 아로새겨 놓는다. 그 공간에 인물은 부재해도 정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에 대한 긍정은 있음으로 해서 없음이 드러나고 없음으로 해서 있음이 나타나는 유와 무의 상호의존적인 관계성에 대한 환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삶의 비애로 작동하는 그러한 순간들은 이 또한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서 인물들이 무상(無常)의 정서를 체인하도록 만든다. 감독은 여기서 떠나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남겨진 인물들의 슬픔을 외면하거나 또는 반대로 그 부분만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늦봄〉에서 부녀의 이별로 인한 가족의 해체는 달리 보면 딸의 결혼으로 인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끝과 시작이 결국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일체성의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경 이야기〉는 노부모를 둘러싼 자식들의 이기적인 행태와 며느리의 지극정성을 묘사하면서도 어머니의 임종 장면 그 자체보다는 그 장면을 생략하고 서사적으로 비약을 이루면서 그 이후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오즈 영화에서 불교적 공간이 등장할 때가 있는데, 〈동경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장례식 장소로 사찰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서 스님들의 법문이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교적 도상들을 클로즈업으로 확대하여 그들의 종교적 의미를 직설적으로 강조하려는 영화적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즈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공간을 통해 ‘무’와 같은 삶에 대한 불교적 시선과 태도를 자연스럽게 새겨 놓는다. 

유와 무의 관계성을 조망하는 과정에서 무의 의미에 기반을 둔 빈 공간의 활용과 더불어 부재와 존재, 그리고 떠남과 머무름을 감독이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는 영화 속 기차의 등장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기차는 단순히 교통수단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즈의 인물들은 기차역에서 만나고 잠시 머무르고 대화하고 그리고 기차를 타고 오고 또 떠나간다. 여기서 기차는 삶의 순환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시작과 끝의 이어짐을 은연중에 함축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동경 이야기〉에서 며느리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과 〈피안화〉에서 딸의 결혼을 반대하던 아버지가 딸과 화해하고자 그녀가 있는 곳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관계의 회복과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른 봄〉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 내내 갈등을 겪던 부부가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재결합의 의지를 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오즈 영화에서 기차를 타고 떠난다는 설정은 인생의 한 챕터가 마무리되는 동시에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오즈가 생각하는 삶의 원형성이란 이러한 사실과 맞닿아 있다. 이를 통해 감독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모든 것들, 특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비애감이라는 것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에 삶이 그쳐서는 안 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한편 이것은 오즈가, 그리고 오즈의 인물들이 삶을 경험하고 수용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생각해보게 되는데, 오즈의 인물들이 삶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 방식은 타자나 외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곧 ‘직관(直觀)’과 ‘체인(體認)’의 문제와 결부된다. 선에서 깨달음은 문자나 경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상과 현상을 스스로 보고 경험하는 것에 이루어진다. 

오즈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가족의 해체와 이별의 과정을 통해 삶의 비애를 경험하지만, 그것들을 담담히 수용한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삶의 일부이다.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어떤 특별한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 속에 있다. 평소의 마음가짐이 곧 도라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곧 일상성에 대한 강조인 동시에, 살아가는 순간순간에서 현재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큰 사건 없이 단조롭게 흘러가는 오즈 영화의 서사에서 인물들의 일상성이란 이러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밑바탕이 된다. 달리 보면 일상 속 경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즈의 카메라는 인물과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는데, 이것은 관객이 영화를 체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관객 역시 오즈의 카메라처럼 차분히 그의 인물들이 그리는 삶을 관조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가 주로 다루는 가족의 일상이 우리의 삶을 환유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일상에서 스스로 직관하고 체인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오즈 영화를 불교적 맥락에서 보면 한마디로 ‘선적(禪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적 도상의 직접적인 시각적 제시가 없더라도, 오즈는 인물들의 일상을 관조적으로 그리면서 그 안에서 선적인 깨달음을 구한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미조구치 겐지가 불교적 시선으로 삶을 그리는 방식

미조구치의 영화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먼저 여성의 고난과 희생 서사를 주로 다루면서 그것들을 유발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고 성찰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감독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촬영을 하는 롱테이크(long take), 멀리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넓고 세밀하게 화면에 담는 롱숏(long shot), 렌즈의 초점거리 안에서 모든 대상을 선명하게 포착하는 전심초점 이른바 딥포커스(deep focus) 등과 같이 리얼리즘 영화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즘 감독으로 호명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일반적으로 미조구치 겐지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감독으로 논의된다. 오즈가 주로 현대극을 통해 산업화를 이루던 시기에 직면했던 가치관의 변화와 가족의 문제를 일상적인 톤으로 다루었다면, 미조구치는 대부분 시대극을 통해 다시 말하면 과거를 배경으로 현재의 문제를 그려낸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오사카 엘레지(浪花悲歌)〉(1936)나 〈수치의 거리(赤線地帶)〉(1956)처럼 당대를 배경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의미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사실 미조구치의 영화에는 시각적으로 화면 안에 불교적 도상이 명백하게 제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화 장면이 인물들 간의 이별이나 누군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대개 그러한 장면 전후에 부도(浮屠)가 등장한다. 서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사라지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부도만을 강조하여 그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물 주변의 배경처럼 화면 후경에 배치해놓고 이것을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멀리서 지켜보게 할 뿐이다. 다른 한편, 불상을 멀리서 보여주며 구원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이러한 불교적 지시물을 스크린 전면에 내세우며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롱숏의 넓은 프레임 구석구석에 이들을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전체로서의 이미지를 읽는 과정에서 세부로부터 그러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1952)에서 하급 무사인 가츠노스케가 귀족 신분인 오하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에피소드 후반부에 그의 주변에 있던 부도만을 카메라가 따로 보여주면서 강조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부도 장면 이후 두 남녀는 결국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계급사회의 희생양이 된다.

이러한 불교적 도상의 시각적 제시와는 별도로, 작품의 궁극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미조구치 영화에서 불교를 읽는다면 세계에 대한 연기론적(緣起論的) 인식에서 비롯되는 삶의 태도와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인간의 삶이 고(苦)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연기론이 궁극적으로 설파하는 중도(中道)라면, 이는 곧 관계성의 인식에 기반을 두는 것임을 영화가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오즈가 깨달음의 실천적 수행으로서 선을 영화에 담고자 하였다면 미조구치는 ‘공(空)’의 문제를 화두로 던진다. 이에 관한 대표적 작품으로 1953년 제작된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를 예로 들 수 있다. 영화는 도공 부부와 도공의 여동생 부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도공인 겐주로는 전란을 틈타 큰돈을 벌 욕심으로 아내 미야기와 아이를 남겨둔 채 시장에서 도기를 팔다가 와카사라는 여인의 유혹에 빠진다. 매제인 토베이는 농사일을 팽개치고 사무라이로 출세를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아내 오하마와 헤어진다. 이후 미야기와 오하마가 전란 속에 온갖 끔찍한 고초를 겪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물욕과 색욕에 빠진 겐주로는 와카사의 저택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출세욕에 빠진 토베이는 적장의 목을 벤 것처럼 꾸며 사무라이가 되는 것에 성공한다. 뒤늦게 자신들의 그릇된 욕망과 그로 인한 여인들의 고난과 희생을 알게 된 두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신성한 땀과 노동의 가치로 삶을 일구어 나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기서 마무리된다.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두 아내의 희생에서 기인한다. 헛된 망상과 집착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아내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영화에서 여인들의 처연한 이야기가 전쟁터라는 끔찍한 현실적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망집에 사로잡힌 남성들의 이야기는 실재와 환영의 경계가 모호한 비현실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이 영화를 불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을 형성한다. 영화 후반부에 겐주로를 유혹하는 와카사가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혼령이었으며, 그녀의 으리으리한 저택 또한 실제로는 잡초만이 무성한 폐가였다는 점이 밝혀진다. 전란 속에 남겨진 가족을 철저하게 도외시했던 겐주로는 화려한 저택에서 묘령의 여인과 보내는 달콤한 순간을 실재하는 것이라 믿었지만,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을 뒤늦게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다. 

물질[色]에 대한 인식론적 오류 중 하나는 그것을 자신의 손안에 쟁취하여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에 있다. 깨달음은 이러한 물질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공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에서 이것은 번뇌를 유발하는 인간의 망집이 사실은 허상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과 집착임을 감독의 비판적 시선을 경유하여 확인하게 된다. 이 영화를 단순한 판타지 영화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감독은 존재와 부재, 실재와 환영의 모호한 경계를 통해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곧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을 환기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일체성의 관점에서 물질과 실체 없음, 즉 색과 공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삶의 방향성과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허상의 문제는 세속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사무라이를 꿈꿨던 토베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가 출세의 공간으로 욕망했던 전쟁터는 사실 고통과 번뇌를 유발하는 망집과 허상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토베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창과 칼을 흐르는 물에 버리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이후 그가 손에 쥐는 것은 무기가 아닌 농기구이다. 결국 그는 본연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겐주로 역시 전란에서 가능한 한 많은 도기를 구워 일확천금을 꿈꾸던 모습에서 벗어나 도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구워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손에 흙을 묻힌 그들의 표정은 이전에 돈과 사무라이 갑옷을 손에 넣을 때와는 다르게 평온해 보인다. 

 

서사의 관점에서 볼 때, 미조구치 영화의 인물들은 이처럼 대개 고(苦)를 유발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예를 들면, 〈오하루의 일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폐쇄적인 봉건사회의 억압이 평온했던 한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우게츠 이야기〉에서는 일확천금과 입신양명에 대한 두 남성의 과도한 욕망과 집착이 결과적으로 가정을 파탄에 빠뜨리며, 〈게이샤(祇園囃子)〉(1953)와 〈수치의 거리〉(1956)에서는 돈이라는 물질이 인물들의 삶을 옭아매며 고난에 처하게 만든다. 

미조구치의 인물들이 고난에 직면하고 번민하게 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아 내부의 망집과 헛된 욕망이고, 또 다른 것은 불합리한 제도와 같이 외부로부터 기인한 억압이다. 이로부터 인물들이 깨달음을 얻는 방식은 영화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전자의 경우는 전술한 것처럼 실재와 허상의 비경계성을 경유하여 삶의 본질적 가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영화 속 인물들이 자신이 직면한 삶의 고난을 스스로 수용하고 해결하는 방식을 통해 묘사된다. 공통점은 아무리 힘든 과정을 거치더라도 인물 자신의 직관과 경험에 의해 깨달음을 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하루의 일생〉에서 여주인공 오하루는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이후 영주의 후처가 되지만 자신의 아이를 빼앗긴 채 성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하고 괴롭히기만 할 뿐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정작 그녀 자신인데, 그것은 일체의 무상함을 깨달은 뒤에야 가능해진 것이었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결국 그 깨달음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한 것도 아닌 그녀 스스로의 체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같은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냉철하리만치 롱테이크의 긴 호흡과 롱숏의 넓은 화면으로 거리를 유지한다. 이처럼 카메라의 시선이 감정적인 개입을 자제할 때, 관객은 능동적으로 영화를 읽어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하여 어떤 대상이나 현상만을 특정하여 제시할 경우, 관객은 아무래도 자신의 독해 의도와는 다르게 그에 따라 영화를 무비판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독은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와 집단의 폭력적인 부조리를 비판하고, 인간이 취해야 하는 삶의 태도와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관조적 입장을 취한다. 

세계에 대한 관조적 시선은 오즈와 미조구치가 유사하지만 촬영과 편집과 같은 영화 형식적인 측면에서 결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불교적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승려가 되어 길을 떠나는 오하루가 사찰을 향해 합장하는 마지막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불교적 도상의 물리적 시각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의 삶을 힘겹게 관통해 온 그녀가 비로소 깨달은 삶의 무상함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본질적으로 겐주로와 토베이, 오하루가 다가갔던 지점은 공의 의미에 대한 깨우침이다.

 

 

3. 불교로 읽는 영화, 영화로 읽는 불교

 

불교적 지시물이 등장한다 해도 불교적인 영화가 아닐 수 있으며, 반대로 그것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불교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어떤 영화가 불교적인 영화냐는 질문을 던질 때, 이에 대한 가장 용이한 답은 불교적 이미지와 더불어 그 세계관이 주제로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나 고승의 생애를 다루었거나 또는 불교적 공간이 영화 서사의 공간으로 환원되어 자연스럽게 불교적 맥락이 읽히는 영화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간략하게나마 오즈와 미조구치 영화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불교적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묘사가 되더라도 감독의 세계관을 통해 영화적으로 충분히 불교적인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감독의 세계관을 표출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카메라가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고 스크린에 제시하는가의 문제는 감독이 세계를 그리는 방식과 결부된다. 

오즈와 미조구치 영화에서 불교적인 부분들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삶의 원리와 관련하여 그 답을 불교적인 세계관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답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의미 있는 순간들일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영화를 읽든, 영화에서 불교를 읽든, 오즈와 미조구치 영화에 대한 짧은 이 글이 어느 정도나마 최소한의 답을 찾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

 

임철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연세대학교 영상학박사. 연세대, 고려대, 명지대 강사 등을 역임하고, 영화 연구와 작품연출을 병행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사진사(들)〉(2010)과 〈피안화〉(2014), 주요 논문으로 〈장률의 〈경주〉에 나타난 영화 시공간의 상의성과 비경계성〉 〈영화공간의 사유-일본 전통건축의 잠재적 개방성을 활용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공간 구성〉 〈외화면과 내화면, 두 영화 공간의 변증법-오즈 야스지로의 〈외아들〉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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