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 미술가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의 작품

한국의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아직 생소할지 모르나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 1973~  )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설치미술가이다. 주로 거울 등을 이용한 시각적 착시를 적용해 엘리베이터, 계단, 수영장 등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설치 작품을 선보여 왔으며, 작품성과 동시에 대중성을 입증하며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현대미술 작가이다. 특히 눈으로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물리적 체험이 가능한 그의 작품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에를리치는 베니스비엔날레(2001, 2005년), 휘트니비엔날레(2000년) 등의 미술 행사를 비롯해 PS1 MoMA(뉴욕), 바비칸 센터(런던), 모리미술관(도쿄), MALBA(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부산비엔날레, 2012년 송은아트스페이스의 개인전,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에를리치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수영장〉(1999)으로 에를리치가 텍사스 휴스턴미술관의 코어 프로그램(1998~ 1999)에 참여하면서 구상해 발전시킨 작품이다. 얇게 깔린 물이 수면을 형성하는 〈수영장〉은 관람객이 마치 물속에 들어간 것 같은 몽환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 밖에도 건물에 매달린 듯한 착시효과를 통해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건물〉(2004)도 대중이 열광하는 작품이다. 이처럼 에를리치는 실재와 환영을 넘나드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실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인식의 불완전성’은 에를리치 작품의 핵심 메시지이지만, 그의 작품이 가진 다양한 층위를 아우르기에는 부족하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번 전시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에서는 에를리치의 작품세계가 보여주는 다양한 층위 가운데 기존에 포착되지 않았던 지점을 조명하고자 했다. 이에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 어떻게 불교철학의 사고와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에를리치는 기본적으로 ‘본다’라는 인간의 행위,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소재로 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 오감 가운데서도 특히 시각에 주로 의존한다. 그리고 봄으로써 대상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본다는 것은 빛을 매개로 나의 신체가 대상의 신호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사물이 반사한 빛의 입자가 망막에 허상의 이미지를 만들고 이것이 전기신호로 전환되어 뇌로 전달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상의 이미지는 그 사물의 진정한 정보를 반영하는가? 사과를 빨갛다고 느끼는 것은 사과의 표면이 빨간색에 해당하는 가시광선을 반사해 나의 망막에 들어왔기 때문일 뿐이다. 실제로 동물이 보는 세상의 색감과 풍경은 인간이 보는 것과 다르다. 더구나 내가 보는 행위를 하는 동안 대상과 매개체인 빛 사이에, 그리고 반사된 빛이 나의 눈에 들어오는 과정에 그 어떤 변수(예를 들어 굴절과 같은)나 주변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 빛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에를리치는 이러한 시각적 인식을 과학적인 접근을 넘어, 인식과 존재라는 철학적 맥락까지 포괄해 작품의 주제로 아우른다.  

에를리치의 작품에서 자주 사용되는 거울은 눈이라는 우리의 감각기관과 닮았다. 눈이 몸 바깥의 세계를 감지하기 위한 감각기관이라면, 거울은 그 기원부터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즉 나를 타자의 시선에서 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잔잔한 수면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반영 이미지를 볼 수 있었고, 망막에 허상의 이미지가 맺히듯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었지만 거울은 인간의 역사에 걸쳐 ‘빛’ ‘또 다른 시공간으로의 통로’ ‘신성함’ ‘주술성’ 등 다양한 문화적 상징성을 성취해왔다. 에를리치는 이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감각기관이라 할 수 있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각적 인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에서 소개하는 〈엘리베이터 미로〉(2011), 〈탈의실〉(2008), 〈잃어버린 정원〉(2009)은 작가가 거울을 활용하는 공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엘리베이터 미로〉와 〈탈의실〉은 각각의 형태를 반복해 결합하는 과정에서 거울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에 거울을 없앰으로써 기존의 엘리베이터와 탈의실이 가졌던 기능과 맥락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잃어버린 정원〉은 이와 반대로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이 실은 거울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것을 관람객으로 하여금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의 과정에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복제된 나의 모습들, 그리고 다른 관람객과의 시선의 교차가 있다. 나는 분명 여기 있는데 창문 너머로 곳곳에 내가 보이며, 마치 내가 분열되어 분신들로 존재하며 원래의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거울 외에 그림자라는 반영 이미지를 전시의 주요작인 〈탑의 그림자〉(2019)의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탑의 그림자〉는 에를리치의 대표작인 〈수영장〉(1999)의 구조를 발전시킨 것으로, 〈수영장〉을 처음 선보인 지 20주년이 되는 2019년, 자신의 작품을 진화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과 한국적인 색채를 담아내고자 하는 기획 의도가 만나 제작된 신작이다. 

전시의 기획 과정에서 에를리치의 작품을 새롭게 읽어보고자 하는 많은 논의와 고민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동양철학,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에를리치의 작품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한국의 역사, 문화에서는 오래전부터 시각적 인식의 불완전함과 허상에 대한 의식이 존재했고 이는 구전설화와 다양한 문학 작품에 암시되어 있다. 다음 구전설화는 인식의 불완전성의 다양한 층위를 짧은 문장 안에 해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산골에 사는 부부가 있다. 아내가 서울 시장으로 가는 남편에게 반달을 가리키며 저 달을 닮은 빗을 사다 달라고 한다. 남편이 서울에 도착하니 보름달로 바뀌었는데 이를 모르고 상인에게 달을 닮은 물건을 달라 하니 상인은 거울을 준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아내에게 거울을 주니, 거울을 처음 본 아내가 “서울에서 여자를 데려왔구나.” 하며 소리를 지른다. 

 

이 이야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핵심이 있다. 첫째, 반달에서 보름달로 대상(달)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 그것으로 소통하려니 누구는 ‘빗’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거울’을 이야기하는 등 오해가 생긴다. 둘째,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달이니 보름달이니 하는 것도 달에 비치는 태양 빛의 면적에 따른 인간의 자의적인 구분일 뿐 실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실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진실로는 고정된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의해 사물이 그렇게 보이고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거울 속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화를 내는 아내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허상 속에 살고 있는지에 위트 있는 방점을 찍는다. 

이는 긴 역사에 걸쳐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한 축을 이룬 불교적 세계관과 닿아 있다. 《화엄경(華嚴經)》의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이나 유식학의 일수사견(一水四見)은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견해가 다름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일수사견은,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의미이다. 

 

세간에서 보는 법은 

마음으로 주인을 삼은 것

이해 따라 모양 취하면

뒤바뀌어 실제와 같지 않으리라

 

〈탑의 그림자〉 제작에 직접적인 영감이 된 무영탑 설화 역시 실재와 허상의 관계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석가탑 건설에 동원된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가 주인공인 설화에서, 아사녀는 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승려의 말을 믿고 기다리다 끝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연못에 몸을 던진다. 이야기는 그림자라는 반영 이미지는 실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음을 강조하며, 나아가 그림자를 제공한 대상도 마찬가지로 온전한 실재가 아닐 수 있음(비어 있음)을 시사한다. 

위의 두 설화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로 알려진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세상의 형태가 있는 모든 물질(색)은 자성이 없는 상태로 비어 있다(공)”라는 이 문구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보는 세상(색)은 자아가 투영되어 만들어진, 우리의 시선을 광원으로 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에를리치는 무영탑 설화에 반영된 이러한 세계관과 자신의 작품세계와의 접점을 단번에 발견하고 설화 속 탑의 그림자를 실제 물리적 공간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전시장 2층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수면 아래 얼핏 그림자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실은 반전되어 뒤집힌 탑의 구조물이다. 수면을 기준으로 탑과 탑의 그림자가 상하 대칭을 이룬 이 작품에서는 무엇이 실재고 환영인지가 무의미하며 어느 하나가 우선순위 없이 동등하게 존재한다. 일렁이는 물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반대로 위에서 수면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안과 밖, 실재와 허구,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듯한 몽환적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각은 마치 《화엄경》에서 꿈, 그림자, 물, 거울, 아지랑이 등의 비유를 통해 자타불이(自他不二)가 심화되는 단계와 닿아 있다.

 

환상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물속의 달 같고 거울 속의 영상 같고 아지랑이 같고 화현(化現) 같으므로 평등하며, 있고 없음이 둘 아니므로 평등하다. 

저명한 불교학자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우리는 신기루에 목을 적실 물이 없다는 것을, 메아리는 사람의 목에서 나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살아 있는 소리가 아님을, 꿈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지만 그 대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런 개념도 덧씌우지 않고 실재를 비어 있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이원성(二元性)은 사라진다. 

 

전시 후반부에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물, 모래, 구름 등은 비정형성과 비고정성을 지닌 것으로 ‘실체의 경계 없음’과 ‘무상함’을 상징한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은 주변 조건에 따라 속성이 변하고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것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래 자동차 13대와 달리는 자동차 영상으로 구성된 〈자동차 극장〉(2019)은 ‘모래’라는 재료가 지니는 이러한 연기적 관점과 철학적 의미를 바탕에 깔고, 에를리치 작품의 중요한 특징인 ‘타인을 바라본다’에서 ‘타인’을 ‘다른 사물(자동차)’로 대체한 작품이다. 지금 달릴 수 없지만 도로 위를 달리는 본래의 나를 바라보는 모래 자동차는 달렸던 과거, 달리고 싶은 미래의 열망을 상기한다. 모래는 바위가 부서져 마지막으로 갖게 된 형태이기도 하지만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콘크리트, 반도체 등의 재료가 되며 생성과 소멸을 구분 없이 아우른다. 

일찍이 18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 1827)는 자신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으로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라고 자연과 인간 세계의 순수성을 노래했다. 〈의상조사 법성게(義湘祖師 法性偈)〉에도 이와 비슷한 말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이 나온다. “티끌 하나가 온 우주를 머금고, 찰나의 한 생각이 끝도 없는 영겁이어라”라고 해석되는 이 문구에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는 하나고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한다. 

특히 전시의 마지막 작품인 〈구름(남한)〉(2019), 〈구름(북한)〉(2019)은 에를리치의 전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름 조각의 한국 버전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에 ‘주체’와 ‘타자’의 관계성이라는 새로운 층위를 더한다. 기획 단계부터 북한과 대치되어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전시에 반영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갖고 출발하였다. 초기의 구상이 모두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구름(남한)〉 〈구름(북한)〉의 제작 배경에는 북한과 관련한 리서치와 협의 말고도 한국 뉴스와 관련된 대화 등 작가와의 교감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제삼세계 국적의 에를리치에게 남한과 북한은 중립적인 대상으로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이 현실에서 드러난 흥미로운 예시이다. 국제 정세와 내부 정치 상황에 따라 관계가 변하며 서로를 통해 각자의 성격과 정체성을 규정하는 두 사회는 바람 따라 흩어졌다 모이며 형태가 만들어지는 구름과 닮았다. 앞서 언급한 연기론적 관점의 연장선에서 결국 ‘나’ 혹은 ‘주체’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경계는 조건과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가변적인 것으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는 모호하다. 구름이 지닌 ‘실체의 경계 없음’과 ‘무상함’은 이 전시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캐나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Joni Mitchell, 1943~  )의 노래 〈보스 사이즈 나우(Both Sides Now)〉의 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니 미첼은 구름에서 사랑, 인생으로 사색의 대상을 확장해가며 실체의 비고정성과 양가성을 노래한다. 

 

난 이제 구름을 양쪽에서 보고 있죠

하늘 위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건 구름의 환영일 뿐 

구름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요

— 조니 미첼 〈보스 사이즈 나우〉 중에서

 

인식의 불완전함, 불확정성은 에를리치 작품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이다. 이것은 단순히 관객이 있어야 작품이 완성되는 참여형 작품이라는 것을 넘어서 나의 감상에 다른 관람객의 존재가 개입해 작품의 의미와 맥락 자체를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없는 시간 혼자 전시를 관람하는 것과 다른 관람객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내가 보일 것으로 생각한 엘리베이터의 거울 면이 사실은 뚫려 있어서 뒤의 엘리베이터 거울이나 벽면이 보이는 것과, 뚫린 거울의 자리에서 불쑥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잃어버린 정원〉에서 내 옆에 다른 관람객이 나란히 섬으로써, 현실에서는 마주 볼 수 없는 거울 속의 그와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마치 다중 우주에 있는 듯한 묘한 이질감과 몽환적 느낌을 제공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작품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작품의 의미와 구조를 변화시킨다. 

에를리치의 작품에서 중요한 ‘상반된 것의 공존’과 ‘타인의 시선, 관찰’이라는 요소는 최근 대중에게도 흥미를 끌고 있는 양자역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떠올리게 한다. 양자역학의 이론은 너무나 방대하고 계속 발전 중이기에 구체적인 설명은 논외로 하고, 에를리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세계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이중 슬릿 실험’의 결과만 언급하고자 한다.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 즉 서로 양가적인 속성을 모두 지니며, 관찰(혹은 관측)이라는 행위의 개입 여부에 따라 다른 성질을 보인다는 것이 실험의 요약된 결론이다. 구체적으로, 매우 좁은 두 개의 구멍(슬릿)으로 빛을 통과시켜, 슬릿의 뒷면에 빛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다양한 변주를 주며 관측한 실험인데, 빛이 이중 슬릿을 통과할 때 관찰자(관측장치)가 없으면 간섭무늬를 만듦으로써 파동의 형태를 보이고, 관찰자(관측장치)가 있으면 입자의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전자가 어떤 성격을 보이는지는 전자가 놓여 있는 주변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다. 

작품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양자역학 이야기를 하는 것이 뜬금없게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에를리치의 작품과 양자역학 모두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실재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거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 교집합이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나 태도 또한 매우 유사하다. 상반된 것이 하나에 공존할 수 있고, 그 양가적 속성은 어느 것도 될 수 있으며, 외부의 시선이 속성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 말이다. 에를리치의 경우 실재와 시각적 인식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의문을 기저에 깔고 있다면, 양자역학은 주로 원자나 전자 등 미시세계에서의 실재를 관측하고, 실험하고, 설명하며 거시세계(예를 들어 우주)까지 아우르고자 한다.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물리학자 보어(N. Bohr, 1885~1962)에 따르면 관측 대상은 관측자와 분리된 상태로 독립적인 속성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엇을 보는 순간 이미 대상은 우리와의 상호작용에 얽혀 거시세계에서는 감지되지 않더라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관측이 대상의 속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러한 질문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는가? 믿고 싶은 것을 보는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처럼, 우리는 믿고 싶은 대로 대상을 바라보고 속성을 규정하고 그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 

눈으로 보는 것이 온전한 실재가 아님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 삶의 많은 믿음을 시각적 인식에 의지해 만들어내고 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이는 결국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정치, 종교, 성별, 계층…… 등, 서로 상대가 틀렸다며 불통(不通)으로 답답한 현재의 우리 사회. 이번 전시가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전부가,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유연한 사고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

 

방소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학예연구사.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졸업. 뉴욕 소더비즈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Sotheby’s Institute of Art, New York)에서 미술경영(MA) 전공. 뉴욕 앤드리아 로젠 갤러리 인턴으로 시작해, 한국의 카이스 갤러리, 갤러리 플래닛, 대림미술관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전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새로운 시선과 해석을 담아낸 전시를 기획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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