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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大學)》회통과 융섭으로 이끌어내는 새로운 통찰
불교로 읽는 고전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성태용 tysung@hanmail.net

1. 《대학(大學)》이라는 책 

   
공자
(BC 551-479)

《대학》이라는 책은 그것이 독립된 책으로 출현하는 데부터 불교와 연관이 되어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온 뒤 수, 당대를 지나면서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화엄 사상 등 중국화된 불교의 교리 체계가 자리 잡고, 중국의 지성사에 큰 획을 긋는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중국의 유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본디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나머지 나라들은 주변국이며 오랑캐라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중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랑캐 땅에서 온 불교라는 종교가 중국을 휩쓰는 것은 중국의 지성, 특히 유학자들에게 매우 불쾌한 일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당 말부터 유학을 새롭게 일으키자는 운동이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한유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러한 흐름을 계승하여 나온 것이 송대의 성리학이라 할 수 있다. 송대의 성리학은 한편으로는 불교 화엄 사상의 영향 아래 이기론이라는 새로운 유학 이해의 틀을 세우고, 강하게 이단을 배척하고 유학의 정통을 세우겠다는 기치를 세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분서갱유 이래 경전의 복원과 훈고에 치중했던 경학 위주의 학문을 벗어나 유학을 철학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철학적 새 틀 짜기에 가장 적합한 경전으로 뽑힌 것이 이른바 ‘사서(四書)’이다. 그 이전에는 사서라는 말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학》과 《중용》은 독립된 책이 아니라, 《예기》 가운데 있던 하나의 편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독립된 책으로 격상시키고, 《논어》 《맹자》와 함께 일컬어 사서라고 한 것이다.

사서 가운데 《논어》는 공자의 육성이 담긴 기본 경전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고, 《맹자》는 불교의 심성론과 수양론에 대응하는 성선설의 체계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경전이었다. 《중용》은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와 수양론의 근본을 제공하는 책이었다. 이들 경전에 비해 《대학》의 위치는 좀 특별하다 할 수 있다. 《대학》은 유학의 큰 얼개를 보여주며, 학문의 체계와 그 순서를 보여주는 경전으로, 유학을 공부한다면 가장 처음으로 공부해야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학문의 출발점은 어디이며,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학문적 지향이 올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대학》은 그 출발에서부터 성리학을 시작으로 하는 신유학(新儒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유학이 요구하는 이념을 제공하는 경전으로 부상된 경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이와 정호 등의 《대학》 이해, 그에 바탕한 주희의 《대학》 이해가 《대학》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된다. 그런데 정이는 《예기》 속의 《대학》이 착간과 빠진 곳이 있다고 보았고, 주희는 정이의 설에 따라 《대학》의 편장을 다시 정리하고, 빠진 것을 보충한다는 보망장(補亡章)이라는 것을 추가하였다. 그렇게 편장을 나누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베풀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학장구(大學章句)》이다. 성리학 일변도라 할 수 있었던 조선왕조 시절에는 당연히 원래의 《대학》이 아닌 주자의 《대학장구》가 《대학》의 표준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특히 정약용 같은 이는 원래의 《대학》이 착간이나 망실이 없다고 보고 새로운 틀 속에서 《대학》을 이해하였으나, 지금까지도 《대학》이라 하면 당연히 주희의 《대학장구》를 생각할 만큼 《대학장구》의 영향력은 크다.

 

 

2. 감산덕청(憨山德淸)의 《대학》 이해

 

중국의 불교는 격의불교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노장사상과의 친화성을 쌓았다. 그러하기에 승려들이 노장에 대해 주해를 한다든가, 노장사상을 끌어다 불교를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노장사상과 불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실제로 중국 선불교는 노장의 영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노장사상과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친화성은 양자가 모두 현실적인 삶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불교와 유학은 매우 대조적이며, 또한 상치하는 점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은 철저히 현실의 윤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씨족사회의 규범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한 유학적 관점에서는 혈연을 단절하는 출가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출가자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승단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비난받아 마땅했다. 유학은 불교에 비해 철저히 현실의 윤리적 실천을 통해 최고의 이상을 추구하는 중도적인 학문임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가 수행의 인도 전통과 접맥해 있는 불교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그에 바탕한 섬세하고도 치밀한 수행의 이론은 유학이 지니지 못한 것이었다. 《맹자》 《중용》 《주역》 등을 통해 이러한 측면을 보강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이 측면에 대하여, 유학은 일면 유학에 그러한 이론을 보강하면서 다른 측면으로는 불교가 지나치게 심성 수양에 몰두하여 윤리적 실천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불교는 이러한 유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큰 관점에서 말한다면 불교는 현실의 윤리 실천의 문제에 대하여는 거의 유교에 양보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문명에서 태동한 유학의 윤리 규범과 다투기보다는 일정 부분 불교적인 윤리에 대한 합리의 유학에 맡겨버리고 주로 종교적인 수행의 측면을 담당하는 파행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교는 끊임없이 유학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작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유학의 경전을 불교적 관점에서 풀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시도된다. 첫 번째는 유학의 가르침이 불교와 상통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적 관점에서 유학을 이해할 때 오히려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걸출한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2)이다. 그는 《노자》 《장자》 등 도가의 책에 대한 주해는 물론이요, 《중용》 《대학》 등 유가의 경전에 대하여도 주목할 만한 주석서를 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대학강목결의(大學綱目決疑)》의 대강을 살피면서 불교적 관점에서의 유교 이해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감산덕청은 “성인의 심인(心印)이 대학 경문 205글자 가운데 모두 드러나 있다”고 말하면서 《대학》의 의미를 높이 선양한다. 거기에서 성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공자이다. 감산덕청은 공자를 성인으로 높이 받드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의 심인이 담긴 《대학》을 불교적 수양론과 회통시키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 회통의 기본 방식은 유가적 개념 속에 불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대학》의 명덕(明德)은 ‘자기 마음의 본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나에게 본디 있는 성품’이다. 명명덕(明明德)이 그 본디 밝은 자기 마음의 본체를 되밝히는 것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안정된 뒤에 고요할 수 있다[定而後能靜]”는 “자성의 본체가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고, 익히지 않고도 본래 정(定)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을 해석하여 나가면 결국 《대학》의 핵심은 자기를 닦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를 닦는다는 것은 모두 “마음 위에서 하는 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 위의 공부는 단지 마음만 부여잡고 하는 공부가 아니라 안연이 공자에게 어짊을 실천하는 조목을 물었을 때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고 한 것처럼 철저히 마음과 실천이 함께 하는 길인 것이다. 여기에서 감산덕청은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선이라는 경지를 빌어 《대학》의 ‘수신’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논어》의 ‘네 가지 하지 말 것[四勿]’과 연결시키면서 매우 독특한 해석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더 나아가 격물(格物)의 격(格)을 감격(感格)으로 보면서 내가 참된 앎을 이루고 지극한 성실함에 이르면 사물과 통하여 사물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독특한 설이라 할 수 있다. 앎을 극진히 이루어 사물과 감통하면 내가 사물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을 굴릴 수 있다는 해석이니, 기존의 격물에 대한 설과는 다른 독특한 견해로 《능엄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승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각성 스님의 해설)

이러한 감산덕청의 대학에 대한 이해는 불교인들, 선 수행을 하는 일들이 읽으면 참으로 무릎을 칠 만한 탁견이라고 찬탄할 만한 곳이 많다. 또한 불교에 머물러 아전인수 격인 해석을 한 것이 아니고, 유학의 경전에 두루 통달한 감산덕청의 면모를 드러내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교의 경전 속에서도 불교의 이해를 높일 수 있고, 또 불교의 신행을 증장시키는 것들을 찾아내어 불교의 자산으로 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팔조목(八條目)의 선후관계에 대한 문제

 

이러한 감산덕청의 《대학》 이해에 시사 받아 좀 더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보기로 하자. 《대학》을 불교적으로 풀어보는 선을 좀 더 앞으로 밀어, 그것을 통해 《대학》 이해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눈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출발점은 유학 내에서도 논란이 있는 팔조목의 선후관계에 있다.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이라 하면 이 방면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은 익히 알고 있다. 격물(格物)-치지(致知)-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는 일련의 과정은 매우 친숙하게 알려져 있으며, 학문 외의 영역에서도 수신제가(修身齊家), 격물치지(格物致知) 등과 같이 따로 떼어져 말해지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이 팔조목에서 말하는 과정은 한 인간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성찰하고 고민해야 한다. 우선 익히 알려진 문제로는 격물(格物)에 대한 주희와 왕양명 사이의 이견이 있다. 주희는 격을 이른다는 뜻으로 보았고, 왕양명은 그것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는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난 문제이기에 여기서는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다. 

이런 주희와 왕양명의 이견 외에도 팔조목에 대한 이해 과정에 부딪히는 심각한 문제는 바로 팔조목의 선후관계다. 알려져 있듯이 팔조목은 순, 역으로 각각 말해지며 각각 이전의 조목이 다음 조목의 필요조건으로 제시된다. 즉 ‘평천하’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치국’이 말해지고, ‘치국’의 필요조건으로 ‘제가’가 말해지며…… ‘치지’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격물’이 말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그렇게 조건적인 관계라 하면 우리는 첫 번째 조건에서부터 다음 조목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될 수도 있다. 누가 완전히 ‘수신’을 마치고 다음 ‘제가’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완전히 ‘격물’을 마쳐서 ‘치지’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희가 격치보망장에서 ‘하루아침에 활연관통(豁然貫通)한다’는 비약의 과정을 설정한 것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해야 ‘활연관통’에 이를지, 아무리 해도 그 ‘활연관통’이 오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지……. 이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다산 정약용은 팔조목을 주석하면서 분명하게 이러한 문제를 제시한다. 그렇게 많고 많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어떻게 일일이 궁구하여 치를 이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과정에 매달리는 것에만도 한평생 걸려도 안 될 것인데 언제 그 과정을 마치고 실천으로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정약용은 팔조목을 격치육조(格致六條)라는 틀로 바꾸어 해석한다. 격물치지는 세상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제시하는 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본말과 선후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대학》에서 말하는 물(物)과 사(事)의 선후본말관계를 《대학》에서 말하는 대로 확실히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격물치지는 끝난다. 그리고 그다음의 육조목 실천도 반드시 시간적인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니라 한다. 그 본말선후를 아는 순간에 바로바로 실천에 들어가니 무슨 선후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4. 인드라망 연기의 관점에서 본 팔조목

 

그러한 정약용의 논리가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하는 것은 또한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이 글은 그러한 선후관계에 대한 논의들이 모두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유가를 넘어서 불교의 연기설, 특히 화엄의 인드라망 연기설을 그 매개로 삼고자 한다. 

인드라망 연기란 화엄의 연기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법장(法藏, 643~712)의 십현연기(十玄緣起)에 나오는 말이다. 정확히는 십현문 가운데서 일곱 번째인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온 누리를 뒤덮는 제석천의 그물, 그 그물코마다 마니주가 달려 있다. 그 구슬의 모습이 다른 구슬에 비치고, 그 비친 그림자가 다시 다른 구슬들에 비치고, 되돌아 원래의 구슬에도 비치고……. 그렇게 되면 한 구슬 속에 모든 구슬의 그림자가 비쳐든다. 한 구슬만 들어도 모든 구슬의 모습이 그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인드라망의 연기설에서 말하는 무한중중연기(無限重重緣起)이다. 이 이론을 《대학》의 팔조목에 적용해보자. 가장 근본은 ‘수신’이다. ‘수신’을 중심으로 하여 제가-치국-평천하는 향외적 확산이다. 격물-치지-성의-정심은 향내적 수렴이다. 우선 가장 쉽게 무한중중연기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향외적 확산 쪽이다. 간단히 말하면 ‘수신’이라는 것 속에 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이 녹아들어 있다. 

다른 시각에서 말해보자. 한 개인이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것은 불교 연기설의 근본 명제와 통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그리고 무아설을 들어 말할 수도 있다. 나라는 존재는 타자와 떨어져 고정불변한 실체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존재들과의 연관성 속에 있는 것이며, 그런 총체적 연관성을 가리켜 ‘나’라고 이름할 뿐인 것이다. 

이것을 팔조목과 연관 지어 말해보자. 애초에 나라는 존재 속에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천하가 들어와 있다. 나는 나 개인으로써 홀로 떨어져 존재한 적이 없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순간, 나는 가정의 일원이요, 사회의 일원이며, 국가의 일원이요, 세계시민의 하나이며, 모든 생명의 총체적 연관 가운데 놓여 있다. 그러하기에 나를 닦아나간다는 것도 ‘나’만을 똑 떼어내서 그것만을 닦아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나를 닦는다는 것은 가정의 일원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는 활동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들로서, 아비로서, 형으로서, 아우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바로 나를 닦아나가는 활동이다. 

그렇기만 한가? 나는 한 가정의 일원일 뿐 아니라 사회의 일원이요, 국가의 일원이다. 그러하기에 가정에 적용되었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나를 닦아나가는 것은 나만 따로 떼어내어 닦아나가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성실하고 올바르게 활동하는 것이 나를 닦아나가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올바르게 자신을 세워나가는 것이 나를 닦아나가는 활동이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으로는 나를 닦는다는 행위는 세계시민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모든 생명들의 연관성 아래서 나를 닦는 것이 된다. 팔조목의 표현에 따라 말한다면 몸을 닦는 것 속에 이미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 있고, 몸을 닦는 것 속에 이미 나라를 다스림이 있고, 몸을 닦는 가운데 이미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가’를 통해서 ‘수신’을 하며, ‘치국’을 통하여 ‘수신’을 하며, ‘평천하’를 통하여 ‘수신’을 하는 것이다. 

격물-치지-성의-정심에서 ‘수신’에 이르는 과정은 이처럼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큰 구조는 마찬가지이다. 몸이라고 표현되는 인간의 개체성에 마음은 귀속되며, 그 마음의 요소와 작용이 바로 ‘의(意)’와 ‘지(知)’이다. 여기서 ‘의’는 마음의 요소라 할 수 있다면 ‘지’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심에 이르기까지의 포섭관계가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천하에 국가가 포섭되고, 국가에 가정이 포섭되고, 가정에 개인이 포섭되는 것과 같은 분명한 포섭관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그 동시적 수행의 관계도 ‘수신’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을 몸을 닦는 한 행위 속에 ‘치지’ ‘성의’ ‘정심’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개인의 수양에는 자연히 ‘정심’이 내포되고, ‘정심’에는 필연적으로 ‘성의’가 내포된다. ‘치지’가 정약용의 설과 같이 여러 조목들의 본말선후관계에 대한 앎인지, 주자와 같이 사사물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활연관통의 앎을 이루는지에 따라 ‘성의’와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성의’를 하는 행위 속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행하려는 행위에 대한 앎의 추구가 따르는 것이기에 이 또한 조건적 선후관계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5. 앎이 먼저인가 실천이 먼저인가

 

‘수신’을 중심으로 하여 팔조목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할 때, 다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앎[知]과 실천[行]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앞의 논의와 같다면 수신(修身)이라는 한 행위 속에 나머지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와 있다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이 이런 관계에 대해 명확한 인식이 없다 할지라도, 한 개인의 인격적 수양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나머지 수양의 요목들이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된다. 즉 어떤 사람이 아무런 의식 없이 어떤 행위를 할지라도 그것은 온 천하와 관계된 행위가 된다. 좋은 방향이든 잘못된 방향이든 한 개인의 행위는 천하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한 개인의 행위가 훌륭한 방향으로 일어나고, 결국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러한 연관관계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나 한 개인이 한 개인으로서만 존재할 수가 없으며, 무한한 우주적 연관관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고, 내 속에 이미 그러한 관계성이 들어와 있다는 인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한 개인의 행위를 결정할 때 그러한 관계를 종합적으로 인식하여,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고, 나와 남과 가정과 이웃과 사회, 나아가 국가와 천하의 공통적인 선을 지향하여 실천하는 수양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에도 단계와 등급이 있을 수 있다. 자기 가정까지는 자기와의 연관성을 깊이 느끼고, 자기의 수양과 가정의 평화를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행위를 사회, 나아가 국가와 연관 지어 그러한 통찰 속에서 행위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천하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는(居天下之廣居)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의 지적인 지평이 확장됨에 따라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수양 지평도 확장된다. 가정의 평화까지만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 국가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을 수 있는 사람, 세계의 평화와 자신의 행위를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지행의 관계 속에서 지가 행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인가? 일단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지적인 지평의 확대가 바로 실천을 이끌어내는 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앎에 의해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을 넘어서서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적인 지평의 확대가 꼭 남을 사랑하는 행위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근본적인 조건이 다시 있다. 그것은 사람 마음의 본질이 바로 ‘어짊[仁]’이라는 것이다. 마음의 본질이 ‘인’이기에 자신의 존재 본질이 타자와의 연관성, 즉 가정과 사회, 국가, 천하와의 연관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바로 그 순간에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 발현되는 것이다. 앎이 일깨우는 내용에 바로 그 실천의 궁극적 지향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앎이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선행성은 명목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앎의 지평이 확장되어 그런 다음에 의식적으로 남을 위하고 사회 국가를 위하는 인의 실천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앎 자체가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지극한 사랑이다. 앎과 동시에 내재적인 사랑이 발현되어, 그냥 자연스럽게 사랑의 실천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앎이 있고 나서야 실천이 있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앎의 순간이 바로 실천성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말한다면 인(仁)의 실천성이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고, 앎의 지평이 확대되는 것은 그 내재된 실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자비와 지혜는 동시성이다. 깨달음에 의해 지혜가 완성된다. 그러면 그러한 지혜를 통해 중생과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서, 그 앎을 조건으로 하여 자비가 나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중생심의 근본은 생명성이요, 그 생명성의 본질은 바로 자비요 사랑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으로 발현되기에 그것을 경계하지만, 그 근본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괴로움의 윤회를 일으키는 갈애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자비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혜의 성취는 그 자비이며 사랑인 생명성의 본질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무너뜨릴 뿐이다. 나라는, 또는 내 가족이라는 한계 속에 집착으로 드러나던 자비와 사랑을, 강고하게 가로막고 있던 벽을 무너뜨림으로써 무한히 뻗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먼저라고 할 것인가? 지혜가 자비를 실천하는 전제조건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비가 근본이요, 지혜는 그 근본적인 자비의 물꼬를 트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교의 인(仁)과 불교의 자비(慈悲)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에 대하여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개념이 인간의 마음이 본디 지닌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지혜와 자비가 언제나 함께한다는 불교의 관점을 적용한다면 팔조목 안에서, 또 유학 전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앎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6. 유학이 얻는 것, 불교가 얻는 것

 

유학의 경전을 단지 불교적으로 풀이하여 받아들이는 선이 아니라, 불교의 관점에서 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내 유학 자체를 심화시키는 데까지 나가 보고자 한 것이 지금까지의 논의이다. 그 과정은 매우 거칠고, 세심한 논의를 거쳐야 할 부분을 건너뛰고 넘어간 부분이 너무도 많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시도가 필요하다. 아전인수 격으로 다른 종교나 학문을 끌어들이는 선을 넘어서 서로 간의 융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대학》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불교에도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자기 수양의 문제에는 탁월하지만 사회의 완성에는 부족한 측면이 많으며, 현실의 윤리적 실천에도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다산 정약용이 “불교의 마음 닦는 법은 마음 닦는 것을 일로 삼지만, 유학의 마음 닦는 법은 일을 통해 마음을 닦는 것이다”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불교가 당당하게 항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런 점에서 《대학》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개인의 수양, 개인의 완성과 이상적인 사회의 실현을 하나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불교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부처를 이루기 위한 자신의 수행과 불국토의 완성을 하나의 틀 속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 개인과 불국토라는 커다란 이상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극복하는 방식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가정-국가-천하라는 단계가 아닐지라도 한 개인과 불국토 사이에 그러한 단계를 설정하는 것은 현실적인 실천에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의도가 좀 앞서 나가다 보니 필요한 선행적 논의를 생략한 점이 너무도 많다. 조그만 시사를 던지기 위해 쓰인 것이라는 점을 좋게 봐주어, 거칠게 쓴 것에 대해 해량이 있기를 바란다. ■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한국고등교육재단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서 5년간 한학 연수. 1983년부터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과대학장, 한국철학회 회장, ‘우리는 선우’ 대표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주역과 21세기》 《오늘에 풀어보는 동양사상》(공저) 《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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