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정 수필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작가인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기에 한 번 가보았다. 세계의 노동현장, 곤궁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 기아와 질병에 관한 사진 등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전쟁과 분쟁,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한 자리에서 보아야 했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마음은 결코 편안할 수 없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참혹한 사진들도 있었다. 전시장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인도의 여성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진 서너 컷이 전시되어 있었다. 치렁치렁한 사리를 입은 여인들이 가파른 언덕에서 세숫대야 정도의 크기에 흙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나르는 사진, 상수도 공사의 현장인지 모래가 날리는 언덕에서 커다란 쇠 파이프를 여자 여럿이서 나르는 사진도 있었다. 살가도는 왜 이런 장면을 렌즈에 담았을까? 원색의 화려한 사리, 그리고 귀걸이? 팔찌? 발찌 등을 주렁주렁 달고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이 안타까워 보였을까? 나 역시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건설 현장이나 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 여자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인도의 아침 풍경은 어딜 가나 비슷하였다. 남자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짜이가게로 달려오는지, 짜이가게에는 새벽부터 남자들로 붐볐다. 그 대신 힌두사원은 새벽부터 기도를 올리기 위해 몰려 든 여자들로 붐볐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남자들도 새벽부터 신에게 기도를 바치기 위해 줄을 서 있기는 하지만, 나는 짜이가게에서 여자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물론 내가 번화한 도시보다는 북부의 시골을 돌아다닌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아직도 결혼 지참금이 있고, 그것이 자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곳이 인도이며, 시골에서는 샤티제도가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샤티제도란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도 같이 장작불에 올라가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가끔씩 시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행해지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단면들을 통하여 인도사회는 철저히 남성중심의 사회이며 여성들이 억압받는 사회임을 알 수 있었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획득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이만한 자유와 권리를 누리면서 살게 된 것도 앞서 간 수많은 여성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유마경>에서 이미 수천 년 전에 여성의 지위에 대한 담론이 오고간 구절을 보았다.

사리불은 천녀의 출중한 변재에 찬탄을 보내면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찌하여 여자의 몸을 돌려 남자의 몸으로 바꾸지 않습니까?”

“나는 이 방에 있은 지 열두 해 동안에 여자의 모습을 구하여 보아도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새삼 돌려서 남자의 몸으로 바꾸겠습니까?”

그러면서 천녀는 신통의 힘으로 사리불존자의 몸을 천녀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였고, 천녀 자신 또한 스스로 변하여 사리불존자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서는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여자의 몸을 남자로 바꾸지 않습니까?”

천녀의 모습을 한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자신의 몸이 여자의 몸으로 바뀌어 진 것을 몰랐습니다.”

“사리불존자여, 당신이 만일 여자의 몸을 바꿀 수 있다면 모든 여인들도 또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몸으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대가 남자의 몸이면서 여자의 몸을 나투는 것과 같이, 모든 여인들도 또한 그러하여서 비록 여자의 몸을 나타냈지만, 여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모든 법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녀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서는 사리불존자의 몸을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사리불존자여, 여자의 몸이었던 색상(色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자의 몸이었던 색상은 있는 데도 없고 있지 않는 데도 없소.”

사리불은 천녀의 말솜씨가 뛰어나고 마음 씀의 깊이가 대단한 것에 놀랐으며, 여자라고 해서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리불의 생각에는 천녀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깨달음을 증득하여 부처가 되었을 텐데, 여자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불과(佛果)를 얻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녀를 위로한답시고 “그대는 왜 남자의 몸으로 바꾸지 않는가?”라고 물어 보았다가 아주 혼이 난 것이다.

아직도 절에 가면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전생의 업이 지중한 탓’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러면서 ‘다음 생에는 꼭 남자 몸을 받아 성불하겠다는 원을 세우라’고 법문 아닌 법문, 충고 아닌 충고를 한다. 이 말의 밑바닥에는 여자들은 아무리 공부해보아야 성불할 수 없다는 여성에 대한 비하심을 깔고 있다. 여성 불자들이 훨씬 많은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이런 말이 나돌고 있는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한번쯤은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버지였던 정반왕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부처님은 얼마동안 카필라 성 부근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이모이자 왕비 마하파제파티가 부처님에게 출가를 청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의 비였던 아쇼다라를 비롯하여 많은 여인들도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한 번도 출가를 거절한 적이 없었던 부처님이 여성들의 출가를 거절하였다. 여인들이 다시 한 번 더 출가를 요청했지만, 부처님은 거절하고서는 바이샬리로 떠나버렸다. 그러자 많은 여인들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맨발로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걸어왔다.

여인들이 바이샬리에 도착했을 때 그 남루하고 비참한 모습을 본 아난존자가 가슴이 아파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성일지라도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에 힘쓴다면 남자만큼 불과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 여인들도 이 법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수행하면 남자만큼 불과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 용기를 얻은 아난은 여성들의 출가를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시면서, 출가한 여성들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계법을 마련하였다. 유마경이 설해진 바이샬리는 이렇게 해서 최초로 여성의 수행자를 배출한 곳이 되었다. 경전을 쓴 사람이 바이샬리의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결혼 지참금이 있고 시골에서는 공공연하게 샤티제도가 행해지고 있는 인도에서, 그것도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성차별에 대한 담론이 오고갔다는 것은 대단히 앞서가는 의식임에 틀림없다.

부처님이 정하신 여성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백 년 동안 중노릇을 한 비구니라도 새로 된 비구를 보거든 예배하고 공경할 것, 두 번째는 비구니로써 비구의 허물은 말할 수 없고,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말하게 할 것’ 등이다. 그 나머지도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이 극심하게 드러난다. 부처님이 이런 계율을 정한 데에는 그 당시의 인도 사회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지, 부처님이 여성에 대한 어떤 차별심과 분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수천 년 전에 정한 계율이 아직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태국의 여승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은 채로 비구들로부터 물러나야 하며, 비구들이 명상할 때 앉는 방석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가슴이 큰 비구니들은 여성성을 감추기 위해 가슴을 동여매어야만 한다고 하니 불교교단의 비구니에 대한 차별과 그 부당한 대우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비구니계를 받은 최초의 서양 여성 중의 한 사람인 ‘텐진 빠모’는 불교 교단의 남성우월주의에 분노를 느낀 나머지 “아무리 많은 생애가 걸리더라도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유마경>에서도 사리불은 여성을 하열한 존재로 여겼다가 천녀에게 지금 혼이 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사리불은 ”여성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이며 여성들의 육체는 깨달음을 방해하며 불결한 것“으로 보고는 여성의 출가를 반대했다고 하니 여성에 대한 그의 편견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여성의 육체가 불결하다는 그 이면에는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는 말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여성들이 남성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체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문제를 만들어 내는 건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들의 정신적인 부정함 때문이 아닐까?

부처와 예수와 모든 성스러운 존재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존재를 탄생시켰고 앞으로 탄생시킬 책임을 가진 모성적 본능과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육신이 왜 불결하고도 열등하게 여겨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깨달음을 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육신이라는 편견에 대해서도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유마경>에서 천녀는 여성을 열등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 사리불에게 “여자의 몸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서 여자가 아니며, 남자의 몸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남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체의 모든 법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라는 말로 강한 펀치를 한 방 날린다.

모습이 여자라고 해서 여자가 아니며, 남자의 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꼭 남자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성별에 따른 역할분담이 무너져 가고는 있지만, 그래도 큰 테두리에서 벗어 날 수는 없다. 사회나 가정에서 여자 ? 남자의 역할모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지, 결코 신체 조건이 그렇게 결정 지워진 것은 아니다.

여성으로서 예술가나 성직자나 학자가 남성들만큼 그렇게 많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여성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이다. 사회적인 환경이 여성을 억압하는 분위기였고, 그런 만큼 여성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며, 모든 것들이 여성에게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성(性)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것’이라 하였다. 가정이나 사회는 물론이지만, 여성 자신 스스로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작은 틀에 자신을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많은 부분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허물어졌고, 남은 장벽들 또한 앞으로 더 빨리 허물어 질 것이다. 그런데 불교 교단에서는 아직도 남녀의 불평등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유정? 무정 모두가 똑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교가 ‘일체 평등’을 주창하는 불교가 수천 년 전의 계율을 근거로 해서 아직도 여자들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법문을 할 때 ‘다음 생에는 꼭 남자의 몸을 받아 성불해야 한다’는 스님이 있다면 그 분은 유마경에 등장하는 천녀에게서 좀더 배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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