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얼굴을 만나보기 어렵게 되었고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 선 모습에도 익숙해졌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우리 모두 ‘묵언수행’을 하는 수도자처럼 보인다.

묵언수행이란 입으로 짓는 업(口業)을 삼가고 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모으려는 특별한 수행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영화 〈달마야 놀자〉는 그 어려움을 매우 코믹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인물인 명천 스님(류승수 분)은 절집에 들어온 조폭들이 무슨 말을 시켜도 입을 꼭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폭 측과 스님 측이 대결하는 369 게임을 관전하다가 “그만! 400에서 박수를 쳤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묵언수행을 깨트린다. 이 장면에서 관중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단편 〈두자춘〉은 침묵의 금기를 통해 신선이 되려다 만 젊은이 이야기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몰락하여 자살까지 생각하는 주인공 두자춘은 우연히 외눈의 사팔뜨기 노인을 만나 비밀스러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석양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 머리 부분’의 땅을 파보라는 말대로 한밤중에 땅을 팠더니 그 속에는 천금이 들어 있었다. 그는 뜻밖에 굴러들어온 돈으로 사치를 하다가 금방 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다시 노인을 만나 같은 방법으로 거금을 얻었으나, 역시 탕진한다. 돈이 많을 때는 곁에 사람이 몰려들더니, 돈이 없어지자 모두 모른 척했다. 

그런 인간군상을 보면서 두자춘은 환멸을 느낀다. 그는 깨달은 바 있어 그에게 거금을 생기게 한 노인의 제자가 되어 신선술을 배우기로 한다. 스승은 그에게 ‘어떠한 경우라도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이른다. 두자춘은 호랑이, 뱀, 불기둥, 폭풍을 만나도 묵언하고, 신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는 끝내 목숨을 잃고 저승으로 가 염라대왕을 만나 불꽃의 골짜기와 얼음바다에서 고초를 받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를 악물고 묵언을 한다. 

그런데 어디서인가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는 어떻게 되더라도 너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단다. 대왕이 뭐라고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아라.’ 그것은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눈을 떠보니 말 한 마리가 힘없이 땅에 넘어진 채 슬픈 듯이 그의 얼굴에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말의 모습을 한 어머니가 사자(使者)들의 채찍에 맞는 고통 속에서도 아들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두자춘은 노인의 당부도 잊고 어미 말에게 달려가서 말의 머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하고 외쳤다. 아무리 신선이 된다 한들 지옥에서 채찍질 당하는 어머니를 보고는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두자춘은 말의 모습을 하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 앞에서 노인과의 약속을 잊고 ‘어머니’라고 외쳐 선인이 되려는 꿈을 포기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에서 선인이 되고자 했던 그였지만,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간애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물질적인 탐욕, 인간의 이기적 태도에 대한 환멸, 묵언을 통하여 신선이 되려는 수행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성이라는 인간애의 소중함을 긍정적 시선으로 표현함으로써 진정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은 세속의 시비선악에서 떠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선이 된들 지상의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다면 그 신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묵언수행이란 이런 가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지 쓸데없는 신비나 환상에 사로잡혀 지상의 가치를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년에 자주 무문관 안거에 들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언수행을 하던 한 스님이 기억난다. 나를 시인으로 추천해 준 그분은 저명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분이 쓴 〈어미〉라는 시가 있는데 읽으면 절로 서러워진다. 산문시 형식의 이 작품에서 어미 소는 죽도록 일만 하다가 힘이 떨어지자 젖도 못 뗀 새끼를 두고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가는 길에 송아지의 울음을 듣고 어미 소는 당산 길 앞에서 주인을 떠받고 되돌아와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

동진출가 하였던 그 스님은, 생모가 90세가 넘어 절에 찾아왔는데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고향 읍내 여관에서 묵으며 꽃을 보내 이별을 고했으나, 끝내 상가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는 어머니에 대한 스님의 마음을 그린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 스님을 뵈러 갈 때면 늘 나의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우리 어머니보다 두 살 아래인 그 스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가리키며 “인천에 있는 의과대학 의사인데 늘 어머니를 모시고 다닌다. 저런 효자 없다.”고 여러 번 칭찬의 말씀을 하셨다. 그때마다 아직 효도가 부족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곤 한다. 아마도 스님은 부모 모시기를 소홀하여 후회될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스님은 나에게 두자춘을 가르치던 스승 이상의 스승이다. 

그 스님은 재작년에 입적하셨다. 아마도 스님은 극락왕생하여 생전에 그토록 그리던 생모를 만나보셨을 것으로 믿는다. 내가 만약 신선이 되기 위해 묵언수행을 하는 중이라도 그분을 만나면 “스님!” 하고 부르고 말 것을 나는 안다. 그런 분을 스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신선이 된들 무슨 즐거운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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