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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下心 ) / 정명희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정명희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투명하고 밝은 햇살이 초록의 잎새를 비춘다. 예전보다 더 고운 봄,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사방으로 스며들어 살랑댄다. 연둣빛 새순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물드는 사월, 산을 오른다. 언제 발을 들여놓아도 헝클어진 머릿속이 흐린 물 가라앉듯이 맑아지는 최정상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 말사, 눈감아도 선하게 오르는 고향이다. 세상을 등지고 출가라도 하는 날이면 꼭 이곳에 와서 산중생활을 하리라 마음먹은 곳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오르듯 홀로 산사를 찾으면 한적한 절 마당에 피어 있는 산벚꽃이 봄이면 늘 화사하게 반겨주곤 하였다. 어머니가 그리워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면 어머니 이름자 새겨진 탱화가 모셔진 산신각이 다가선다. 언제 우리 이름까지 적어서 그 탱화를 걸어두셨을까? 불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먼저 찾아가서 마음을 전하곤 하시더니……. 탱화 속에 우리 가족과 어머니 이름자가 들어가 있는 줄, 돌아가신 뒤에야 알아보다니.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올린 49재도, 아버지의 49재도, 젊은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오라버니의 재도 늘 우리를 지켜 주리라고 믿었던 영혼의 고향인 그곳에서 올릴 수 있었으니 어쩌면 큰 행운이지 않은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극락왕생하게 해달라며 간절하게 재를 올리던 어머니, 정작 어머니는 그곳에서 49재를 올려드리지 못하였다.

사람의 인연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던가.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늘 다니던 절에 연락하니 재를 올릴 수 없는 사정이라고 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문득, 어릴 적 외가에 가면 늘 같이 놀아주던 친구가 유명한 스님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은 것이 떠올랐다. 

그가 출가하여 어느 절에 주지 스님으로 계신다는 소식에 예전부터 여러 차례 연락하고 찾아보았지만, 그때마다 바로 얼마 전에 다른 절로 옮겨갔다는 아쉬운 소식만 듣게 되었다. 자꾸만 한 발짝 늦어지는 바람에, 살짝씩 비켜 가는 인연이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포기하고 살았다. 

어머니가 떠나가신 그날, 49재를 꼭 잘 아시는 분께서 올려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늘 다니던 절에서는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으니 누가 재를 올려주시면 좋을까, 고민이 되었다. 누구보다 어머니를 고향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고 더더욱 유명한 스님이라고 하니, 바로 그가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나 해서 연락처를 여기저기 묻다 보니 화장장 대기실에서 바로 옆에 있던 이가 연락처를 안다는 것이 아닌가. 적어주는 전화번호로 전화하였더니 신호가 울리자 곧 받아서 순식간에 연락이 되었다. 어제 만난 듯 반가워하면서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 아닌가. 유골함을 모시고 절에 오면 재를 올릴 수 있게 준비를 해놓겠다면서 그도 반가워하였다. 

조그마한 꼬마였을 때 외가에 갈 때면 만나고 방학이 끝나면 헤어지곤 하였는데, 어느 순간 자라면서 서로 바빠 더는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멀어지고는 거의 사십 년 만에 처음 만나는 터였지만, 어제 본 듯 그때 얼굴이 남아 있었다. 정말 맑고 깨끗한 얼굴로 말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열심히 한 덕으로 그런 초연한 모습일까? 맑은 음성은 세속에 찌든 나의 목소리가 스스로 탁하게 여겨져 저절로 가다듬어 소리 내어야 할 지경이었으니. 그렇게 찾으려 해도 못 찾았는데 어머니 49재를 올리려고 하는 그 순간에 연결이 되다니. 어머니가 나의 곁을 떠나게 되자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리하셨을까? 이 세상에 어머니를 대신해 곁에서 보살펴줄 누군가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기어코 당신이 사람을 찾아 보내셨을까? 

어머니 49재를 모시면서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다. 마음이 가난하던 그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 한 동네에서 뛰놀던 그때처럼……. 정말이지 한 뜻이 되어 내 어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다음 세상을 내내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기도하였다.

재를 올리면서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보이면, 허전한 마음을 이해한 스님은 부드러운 설법으로 잘 풀어 주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형체만 바뀔 뿐이지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이라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듯이 모습만 안 보이는 것으로 바뀐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이승에서 너무 슬퍼하는 이가 있으면 떠나는 영혼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머뭇거릴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정말 어머니가 내 곁에서 언제나처럼 나직이 이야기하는 듯 온기가 느껴지고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부처님오신날만 되면 어머니는 해남 대흥사로 달마산 미황사로,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장대비가 쏟아지더라도 산속 깊이 있는 절을 찾아 백팔 배를 하곤 하셨다. 절집을 열심히 찾아다니시고 정성 들여 사경(寫經)을 하시고 자식들을 위해 소원을 비셨다. 

어머니가 아직도 곁에 계시는 것 같은 지금, 나는 때때로 허둥대는 마음을 잘 내려놓고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나의 보살계 법명은 하심(下心)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가라는 뜻 아니겠는가. 죽어서 저승 가서 염라대왕 앞에 서도, 보살계를 받은 사람은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날마다 더욱 어진 마음을 갖고자 노력한다. 계율을 잘 지키겠노라고 맹세한다. 연비를 하고 하심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니 늘 마음을 잘 내려놓고 자비심을 실천하면서 순간순간 보살로서 살아가리라.

mhchung4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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