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 아득한······.” 

어느 겨울밤, 찬찬히 눌러쓴 일기 한 줄.

 

쉬이 만날 수 있으려니 수월히 여기다가 훌쩍 두 계절이 지났다. 가지가지를 쳐서 여러 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또는 한꺼번에 밀려드는 도시 생활의 틈새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탓이었다.

오래전부터 함께 시인 활동을 해오는 권 시인과 저녁 식사를 한 곳은 인사동 초입부의 작은 식당이었다. 관광객 유치에 초점을 맞추어 거의 모든 식당이 테이블식으로 바꾸었지만, 그곳은 좌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詩) 테라피 연구 모임은 잘되죠?”

불교 관련 전문 서적을 펴내기도 한 독실한 불교도인 그는 시가 발휘하는 치유 효과를 명상으로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꾸준합니다.”

짧게 답했다. 기왕 ‘시 테라피’란 말이 나온 김에 그의 생각을 더 들어볼 요량으로 말을 보탰다. 안 그래도 이태 전에 발족한 연구회에서 활동의 우선 과제로 시가 지닌 질병 개선 효과에 관한 여러 의견을 두루 구하던 참이었다.

“시 테라피의 의학적 연구 결과들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정신 심리 질환과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제법 있더군요. 최근엔 심장 박동과 호흡 기능을 건강하게 조율시켜준다는 보고도 있고요.”

곰곰이 귀 기울이는 자세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물었다.

“시는 가장 오래된 의약품이라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반가운 효과들이군요. 그런데, 그 효과가 어디서 나오는지 밝혀진 게 있나요?”

즉시 마뜩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예상했던 대로 명상에 대한 그의 조예는 슬며시 대화의 주제를 시 테라피와 명상의 상관으로 바꾸어 갔다.

“시는 영혼을 감동시켜 평범함을 특별한 방식으로 보게 하잖아요. 명상도 우리를 깊은 상상 속으로 이끌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감각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혹시 깊은 데까지 닿지 않더라도 상상력을 명상의 공간으로 옮기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죠. 또 하나의 닮은 점은 언어에서 찾을 수 있죠. 시는 일상의 언어를 일상적으로 쓰지 않고, 명상 역시 일상 언어를 멀리하죠. 시적 중얼거림과 신비로운 침묵 둘 다 언어의 초월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막 본론으로 접어들 즈음 후식으로 매실차가 나왔다. 그는 굴먹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차를 마신 후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마저 채우려는 듯 잠깐 주춤하더니 불쑥 낯선 제안을 하였다.

“한번 가보죠. 가까이에 선방이 있으니까.” 

선방? 재빨리 앞선 그의 걸음을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빌딩과 빌딩을 경계 짓는 가느다란 실골목에 매달린 노래방, 피시방, 빨래방을 이리저리 지나 일시에 멈춰서는 차량 사이로 큰 도로를 건너, 조계사 옆으로 또다시 실골목. 절과 거의 등을 맞댄 옆 뒤편의 대여섯 층 건물. 어둑한 입구와 별반 다름없이 불이 켜져 있기도 하고 꺼져 있기도 한 무심한 층층을 지나 들어선 적당하게 너른 방. 승복을 입은 한 두 사람이 더러 오갈 뿐 인기척이 뜸했다. 마주 보이는 벽에 덤덤히 걸린 액자 속 명구들만이 기척을 내려는 듯 눈에 들어왔다.

“처음이죠?”

그의 가라앉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처음 접하는 분위기에 긴장과 호기심이 생겼다. 고갯짓을 따라 감도는 긴장한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방석을 챙겨주며 슬쩍 가다듬어 준다.

“그냥 앉아서 눈 감고 있으면 됩니다. 기도하듯이.”

얼핏 얼굴을 살피더니 신앙적 심기까지 배려한 듯 한 번 더 챙겨준다.

“화두니, 명상이니, 참선이니, 유식(唯識)이니 들먹이지 않아도.”

일기장엔 언제 어떻게 선방을 나섰는지, 둘이 어떻게 헤어졌는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서울 한복판에서 뜻밖의 공간으로 이끌려 잠깐 머물다 거리로 되나왔던 기억,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막 내렸을 때 문득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역에서〉가 떠올랐던 기억만이 듬성듬성하다.

 

군중 속에 갑자기 나타난 이 얼굴들

젖은, 검은 가지 위 꽃잎들

 

파리 지하철역에서 파운드의 눈에 띈 사람들의 얼굴들. 얼굴을 이끌어 꽃잎으로 닿게 하는 감각의 공간 이동. 단 두 행으로 완결된 시를 미국 퍼시피카대학원의 데니스 슬래터리는 한 문장으로 감상했다. “두 줄의 언어에서 간단하지만 신비롭고 잊히지 않는 깊은 명상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요즘도 집으로 향하는 묵묵한 골목길을 가끔 따라오는 물음이 하나 있다. ‘시는 아득히 말 없는 명상의 모습으로 질병의 고통을 덜어주는가?’

엉겁결에 겪은 짧은 선방 경험은 일기장에 한 줄의 묵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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