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환경재앙
     
환경문제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 남궁선
특집 | 환경재앙,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남궁선 namgung0302@naver.com

1. 머리말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말없이 호령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이 멈추었다.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멈추었다. 바다를 떠다니던 배가 멈추었다. 사람들의 이동이 멈추고 돈의 순환도 멈추었다. 그 결과로 하늘이 맑아지고 지구가 깨끗해졌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얄팍한 지혜를 믿고 더 이상 오만방자하게 굴면 안 된다고. 세월이 지나 이 어둠의 터널을 탈출하면 인간들은 얼마나 달라진 모습으로 이 지구를 운영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우리 자신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스스로 돌이켜 보면서 점검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얼마 전에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래도 이러한 시국이라 한번 기대해 보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환경개선을 위한 국회의 지평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감이었다. 환경의 개선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는 녹색당이 국회의원을 한 명이라도 배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보았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러한 꿈을 무너뜨렸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람들의 생태의식에 대한 관심도의 현주소다. 환경개선을 위해 입법할 사항이 수없이 많은데도 그 방면에는 무관심한 국민인 것 같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가까이하다 보면 중생들의 의식이 바뀌어 환경문제의 해결책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불교의 책임이기도 하다. 불교에는 온 생명이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물창고가 여기저기에 있다. 우선 절집에 전해져 내려오는 두 가지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자. 

 

2. 사찰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① 단명을 면하게 한 개미 방생

옛날에 한 어린아이가 덕이 높은 고승의 제자가 되었다. 이 고승은 그 사미가 오늘부터 계산해서 일주일 후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매우 괴로워하였다. 더구나 그 사미가 자신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말을 잘 듣고, 정성껏 시봉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 애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고승은 사미에게 말을 하였다. 

“얘야, 어머니 뵌 지가 오래지? 오늘 집에 돌아가 어머니께 효도하다가 8일 이후에 다시 절로 돌아오너라.” 

고승은 그 아이가 7일 후면 반드시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8일 후에 사미가 절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고승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사미의 얼굴을 보니 더욱 광채가 나 보였다. 

“얘야, 나는 평생 앞으로 다가올 일을 귀신같이 모두 잘 알고 있다. 내가 보기엔 네가 7일이면 죽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해서 오늘 돌아왔느냐? 그뿐만 아니라 너의 얼굴에 있던 어두운 그늘이 모두 없어졌구나.” 

사미도 그 얘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하여 스님께 무어라 대답할지  몰랐다. 고승은 즉각 좌정하고 입정하여 삼매에 들어가니, 곧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사미에게 물어보았다. 

“얘야, 네가 집에 가는 도중에 혹시 많은 개미를 구해준 일이 없느냐?”

“예, 스님. 집에 가는 도중에 많은 개미가 물에 갇혀 있기에 나무 막대기로 그들의 위험을 구해주었습니다.” 

“음, 그랬구나. 방생을 하면 반드시 장수하느니라. 옛날 고승 말씀에 생명 하나를 구해주면 칠 층 탑 하나를 쌓는 것보다 공덕이 더 낫다고 하였다. 너는 무수한 생명을 구하였으니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장래의 복이 많을 것이다.” 

② 도인 스님을 찾아가다 벌어진 일

옛날 어느 젊은 스님이 도를 구하기 위해 명성이 높은 대덕 스님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는데 냇물에 배춧잎 하나가 둥실둥실 떠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스님은 “이렇게 음식 재료 하나도 아낄 줄 모르는 절에 무슨 대덕 스님이 있겠는가?” 하고는 발길을 돌리려 하였다. 

그때 위쪽에서 어린 사미승이 뛰어 내려오면서 “스님, 스님! 올라오시면서 혹시 배춧잎 하나가 떠내려가는 것을 못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발길을 되돌려 절로 올라갔다고 한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만 들어도 불교가 환경문제에 전하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환경문제는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소비를 일삼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오만과 방종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고통을 받지 말라고 여기저기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 승려의 지물(持物)과 일상생활

붓다는 자발적인 가난이 나와 남 그리고 다른 뭇 생명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소욕지족을 추구한다. 그러한 사상이 반영된 것이 승려의 소지품[持物] 규정이다. 

소욕지족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자가용 자동차,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전화기 등을 생필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갖추지 못하면 불편을 견디지 못하여 불행에 휩싸인다. 우리는 이러한 도구의 발명을 문명의 개가라고 생각하면서 과학기술을 신줏단지 떠받들 듯하며 이 시대에 누릴 수 있는 편리한 삶을 만끽하고 있다. 

불교 하면 고행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지만, 불교에서는 중도를 벗어난 고행을 강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자에게 최소한의 생필품을 소지할 것을 허용하였다. 그것이 근본불교 시대의 육물(六物)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대승불교에서는 십팔물(十八物)로 소지할 수 있는 항목을 늘린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주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은 사치품이 추가된 것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중에는 생필품이 아닌데도 소지품으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 녹수낭(漉水囊)과 석장(錫杖)이다. 이 두 가지는 일상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생명체의 살생을 막기 위한 도구이다. 

녹수낭이란 근본불교 시대 이래로 비구가 소지해야 할 물건 중의 하나로 물을 마실 때 물속에 들어 있는 벌레를 죽이지 않기 위해 물을 걸러내는 주머니이다. 석장이란 승려가 지니는 18물의 하나로 성장(聲杖) 또는 명장(鳴杖)이라고도 부르는 고리가 달린 지팡이다. 고리를 달고 다니는 이유는 석장이 흔들릴 때마다 고리에서 소리가 나도록 하여, 길을 갈 때 이 소리를 듣고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 물러가도록 해서 살생을 막거나 또는 독사 · 독충 따위를 쫓기 위해서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민가를 돌며 탁발(托鉢)을 할 때 소리를 내어 탁발하러 왔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이다. 또 석장은 산길을 가다가 노인을 만났을 때 부축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불교의 생명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4. 전각에서 기원하는 세상의 평화

불교 경전의 내용을 건축물로 형상화한 것이 사찰의 전각이다. 여기에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날마다 불전사물(佛殿四物)을 친다. 사격(寺格)을 갖춘 절에서는 범종각에 비치된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을 쳐서 그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한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발로이다. 

1) 범종(梵鐘)

절에서 사용하는 큰 종을 범종이라 하는데 범(梵)은 청정(淸淨)을 의미한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시작하기 전에 범종을 치는 것은 그 종소리가 부처님의 법음이 되어 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의 영혼을 제도하고, 악업을 지어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이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을 모으거나 때를 알리기 위한 신호로 범종을 치기도 한다.

2) 법고(法鼓) 

법고는 ‘법을 전해주는 북’이라는 뜻이다. 북을 치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 즉 불법(佛法)을 널리 전하여 중생들이 번뇌를 물리쳐 해탈을 이루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법고의 소리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짐승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어리석음을 깨우쳐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의 소리이다. 온갖 중생들이 자비 대상이기 때문이다. 

3) 운판(雲板)

운판은 청동이나 쇠를 구름의 형상으로 만든 금속판이다. 운판은 본래 중국 선종의 사찰에서 부엌이나 재당에 매달아 놓고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 쳤던 도구였다. 비를 머금은 구름 모양의 판을 부엌에 걸어두면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운판은 민가에서도 사용하였다. 그런 용도의 운판이 언제부터인가 불전사물에 편입되어 아침 · 저녁예불 때 치는 의식 용구가 되었다. 운판이 울리는 소리에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이 제도되고, 허공을 떠도는 영혼들이 천도되기를 바라면서 절에서는 날마다 운판을 친다. 

4) 목어(木魚)

목어는 절에서 불공과 예불을 할 때 또는 식사와 공사(公事)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의식 용구이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하여 수행자에게 잠을 자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의미에서 목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끼니때를 알릴 목적으로 목어가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독경이나 의식에 쓰이는 법구로 바뀌어 불전사물에 편입되었다. 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목탁도 바로 이 목어가 변형된 도구이다.

 

5. 불살생계를 실천한 비구

① 초계(草繫) 비구 

어느 때 여러 비구가 넓은 황야를 지나가다가 도적 떼를 만나 입은 옷을 다 빼앗겼다. 한 도적이 말했다. 

“놓아두면 관가에 알릴 테니 그대로 죽여 버리자.” 

다른 도적이 말했다.

“아니다. 사람을 죽이면 지옥에 떨어진다. 비구는 풀 한 포기도 죽이지 않는다 했으니 풀로 그들의 몸을 묶어 두고 도망가자.” 

그리하여 그들은 비구들을 제각기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풀로 묶어놓고 도망쳤다. 비구들은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 찌들어 견딜 수 없었고 목이 탔으며, 밤이 되면 모기, 파리, 여우, 들새, 올빼미들의 성화에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뒤척이면 풀이 죽을 것이고 풀이 죽으면 계를 파하는지라 차라리 신명을 버릴지라도 불살생계를 지키기로 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 그때 국왕이 시종들을 데리고 사냥하러 나왔다가 비구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모두 체격이 건장하고 병도 없고 힘도 세어 보이는데 무슨 이유로 풀에 묶여 움직이지 않는가?” 

“예, 풀을 끊어 버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다만 부처님의 금강계(金剛戒)를 지키기 위하여 감히 연약한 풀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장하다, 비구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을 수호하여 계를 범하지 않는 성자들이여,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지심귀명(至心歸命)하며 스님들의 큰 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 명을 버려 귀의하겠노라.” 하고 곧 그들을 풀어 궁중으로 모시고 가 불계(佛戒)를 받았다.

② 아주(鵝珠) 비구

옛날 어떤 비구가 구슬을 줄에 꿰어 목걸이를 만드는 집으로 탁발하러 갔다. 집주인은 임금님의 값비싼 마니주 구슬을 줄에 꿰고 있다가 스님이 오자 공양 올릴 음식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갔다. 마당에 서 있는 스님의 붉은 가사가 투명한 구슬에 비치자 구슬이 적홍색으로 변하였다. 갑자기 거위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그 구슬을 고기 살점인 줄 알고 먹어버렸다. 주인은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가 구슬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비구를 의심하였다. 주인은 비구를 도둑으로 여기고 잡아 묶어 마구 때렸다. 훔친 구슬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비구가 의심받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실대로 거위가 삼켜버렸다고 말하면 당장에 거위를 잡아 죽일 것이 뻔하였다.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비구는 모진 수모와 곤욕을 달게 받으면서도 거위의 생명을 지켜주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난 주인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비구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그때 구슬을 삼켰던 거위가 벌겋게 흘린 피를 먹으려고 기웃거리다가 그만 홧김에 주인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죽어버렸다. 그때야 비구는 거위의 생명을 살리고자 이 모진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거위가 죽었으니 구슬이 사라진 이유를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비구는 주인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음식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간 사이 갑자기 이 거위가 나타나 구슬을 고기 살점으로 알고 삼켜 버렸으니, 이제는 죽은 거위 뱃속에서 그 구슬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진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초계와 아주 비구 이야기는 하찮게 생각되는 풀줄기와 거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스님들이 모진 고통과 곤욕을 견뎌낸다는 내용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 그냥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넘겨버릴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노력하는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보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사소한 나의 이익을 위해 고통 없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명체들을 얼마나 해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바른 마음으로 실천하는 불살생 정신이야말로 지구촌을 모든 생명체가 함께하는 행복한 생태공동체로 만들 것이다.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실천 현장이 부처님과 함께하는 불국토가 될 것이다.

 

6. 불교의 생태지향적 식생활

불교의 식사법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불식육계와 발우공양이다. 채식을 하며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살생 금지를 지키기 위해서이고 발우공양은 음식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약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 불식육계(不食肉戒)

불교에서는 육식의 금지를 계율로 제정하여 강조한다. 그러나 탁발을 식생활 수단으로 하던 근본불교 시대에는 육식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었다. 탁발이란 음식물 제공자가 주는 대로 받아서 음식에 대한 선호도와 식습관과 관계없이 먹는 식사법이다. 일종의 수행 행위였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식을 권장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고기나 다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붓다는 ‘삼종정육(三種淨肉)’만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가치관을 이어받은 초기불교는 《사분율》에 ‘탈축생명계’와 ‘고기를 먹지 마라’는 계율을 어기면 ‘바일제’를 범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동물성 식품이 들어있지 않은 채식식단의 공양을 한다. 

육식 습관에 길든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짐승들은 인간을 위해 죽을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대변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채식을 하는 것은 식물의 생명을 죽이는 것인데 생명을 죽이는 데는 육식과 채식이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한다. 

짐승은 결코 인간에게 자신의 살코기를 바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위해서 태어났다면 도살을 당할 때 그런 비명을 지를 리가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위해 죽을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수명을 연장하고 싶은 생존 본능을 타고났을 뿐이다.

동물은 다른 생명을 희생으로 하여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예를 들면 소는 풀이나 곡식을 먹어야 생존할 수 있다. 우리가 쇠고기 한 근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곡식을 먹는 것보다 여섯 배 이상의 곡식을 소가 먹어야 우리에게 살코기로 돌아온다. 쇠고기는 수많은 양의 풀을 뜯어 먹은 소를 죽여야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게 된다. 육식은 엄청난 양의 식물을 희생시키고 살생의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가는 동물을 죽이는 과정을 다시 겪어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채식을 해야 할 당위성이 뚜렷해진다. 또한 수많은 자료가 생태적인 측면에서 육식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채식 위주의 식단은 우리 사회를 위한 확실한 상생 수단이다. 탄소 발자국이 더 적은 음식을 먹으면 탄소 배출량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고 만성 질환의 비율도 낮아진다. 틱낫한이 말했듯이, 개인이 기후변화를 막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식물성 식단으로의 전환이다.

2) 불교의 식사법

앞의 배춧잎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음식물을 버리거나 남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식욕을 채우거나 식도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반열반경》에 음식을 탐착하지 말고 광야에서 자식의 살을 먹는 마음으로 음식을 싫어하고 미워하라고 하면서 음식의 맛을 즐기지 말라고 하였다. 

중아함 권 53 《치혜지경(癡慧地經)》에서는 음식에 탐착하면 그 과보로 축생도에 태어나 큰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을 때는 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처럼 그 맛에 탐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사찰에서 식사 전에 한자로 된 공양게(供養偈)를 낭송한다. 공양게를 오관게(五觀偈)라고도 부르는데, 음식을 먹을 때 다섯 가지를 관찰해야 한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음식이 온 곳과 그 공덕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보고 공양을 받기에 자기 덕행이 완전한지 부족한지 헤아려 보라. 마음을 다스려 탐욕 등의 허물을 벗어나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 양약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몸을 치료하는 약으로 여겨 도업을 이루기 위하여 이 음식을 받아야 한다. 

 

음식을 먹는 목적이 도업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약으로 알고 그 음식에 대한 공덕을 깊이 느끼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준비하는 과정이나 식사를 마치면서 음식물을 남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찰에서 식사가 끝나면 음식물 쓰레기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사찰음식은 육고기를 비롯한 기름진 음식을 식재료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식후에 발우를 닦을 때 세제를 사용하지 않아 환경오염을 일으킬 염려가 없다. 다른 미생물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 생태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사찰의 식사법이다. 대부분의 사찰은 도심을 벗어나 있어 사찰 부지의 토지에 작물을 재배한다. 그 과정에서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생산된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농작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식재료가 신선하고 식품 이동거리가 짧아 생태식의 조건을 만족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불교의 식사법과는 달리 먹다 남은 음식물로 쓰레기가 넘쳐나서 그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식량이 모자라 수입하는 나라에서 음식물을 남겨서 버린다는 것은 경제적 무감각과 생태적 무감각증이 도에 넘치게 지나치기 때문이다. 

 

7. 연기론적 자연관

우리 생명의 근원은 태양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물과 오염되지 않은 토양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무조건적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졌던 자연의 혜택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연은 너무 당연히 있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당연한 것이기에 고마움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지구의 지배자로 등장한 인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유정 · 무정물들을 착취하면서 다른 생명체들의 입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이 지구를 인간의 독무대로 생각하고 살아왔다. 인간만이 최고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다른 생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생태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은 감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인간 중심의 자연관을 동양사상은 일찍이 옳지 않은 것으로 부정해 왔다. 장자는 “천지는 나와 함께 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다.”라고 하였다. 불교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승조는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라고 하였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을 중심에 두지만, 동양의 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나 물(物)은 동일한 것이다. 잡초라고 해서 항상 꽃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생의 의지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보다 잡초가 우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만물 가운데 무엇을 중심에 두고 보는가는 이처럼 꽃과 잡초에 비유할 수 있다.

서양인들의 오만방자함은 자연관에서뿐 아니라 피부색이 다른 타 지역의 인간들을 대하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불과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백인들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생명이고 흑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에서도 원주민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동물 같은 취급을 받았고 당연히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에 속하지도 않았다.

오대양 육대주가 서양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온 지구인들은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자연관과 생명 존중 사상까지도 서구 사상에 오염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 대한 외경 사상은 점차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모든 교리에서 이분법을 배척하듯이 자연과 인간을 연기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연기론은 상호연관성은 물론 조건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연기론적 관점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가 아닌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자연을 인간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라 하여 의보(依報)라 부르고, 인간 즉 유정을 의지의 주체라 하여 정보(正報)라 부른다. 이들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생각하여 의정불이(依正不二)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생명체)들끼리는 물론이고 자연과도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 유기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깨달음이 불이사상의 지향점이다. 

 

8. 불교에서 생명의 존엄성

불교는 불살생 계율을 가장 중요시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선 살생 행위를 비난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내용을 경전에서 살펴보자.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 살아 있는 것들을 괴롭히지 말라. 남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더욱 안 된다.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호하듯 살아 있는 이 모든 생명체에 한없는 연민(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위의 내용으로만 보아도 불교에서는 살생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생을 좋아하는 자는 포악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나와 동일체적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생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또한 생명체의 소중함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뿐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임을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생명체라도 약한 것이건 강한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 것이건, 아무리 미미하거나 육중한 것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나려 하는 것이나 살아 있는 것들아 부디 행복해져라.

 

불교에서는 다른 생명체에 고통을 가하거나 살상을 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특히 산란기의 동물이나 태아를 살생해서는 안 된다. 생물종의 멸종을 염려해서다. 또한 미래세대의 행복까지 염려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과학의 발달을 핑계로 미래세대가 사용해야 할 자원을 고갈시키고 공기, 물,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다. 후세에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 없이 우선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불교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에서 더 나아가 불교는 미생물까지도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 축생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에 대하여 《대방등대집경》은 축생의 종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방등대집경》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단지 현미경으로나 식별이 가능한 미생물도 육도윤회의 중생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이런 미생물까지도 생태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겨 소중한 생명체로 취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체까지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세대에 대한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절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생명체에 대한 살생 행위가 벌어지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3독심 때문이다. 3독심 중에서도 나와 남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인 치(癡)가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다. 자타불이의 연기론적인 사고에서는 나와 남이 다르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의해서 살생이 벌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생물의 멸종도 인간의 절정에 달한 탐욕심과 어리석음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은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남획이나 서식지 파괴로 동물들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든다. 생물의 멸종문제는 개인적인 윤리의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어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바로 인간의 집단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발생하는 살생과 생물 멸종이다. 어리석음에 의해 벌어지는 살생에 대하여 《구사론》 권 16에 짐승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이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뱀이나 전갈 등을 죽이는 것도 어리석은 살생 행위라는 것이다. 인간에 해롭다고 생각되는 생물들도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그들 나름의 삶의 가치와 역할이 있다. 지구는 인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인간 중심의 판단과는 달리 어느 생물종이건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에 생존해야 할 내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파리나 모기도 마찬가지다. 생태계에서 나름대로 그들의 역할이 있다. 모기는 더러운 물에 살면서 그 물을 정화시킨다. 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그러한 곤충을 씨를 말리겠다고 화학약품을 온 천지에 뿌려댄다면 아마 인간이 지구에서 먼저 사라질 것이다.

9. 환경문제에 대한 해결책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생각하며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그로 인해 부작용이 생긴다 해도 과학의 힘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현대인들은 자연을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과학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원과 물질의 창고로 여겨왔다. 그동안 인간은 자연을 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 삼아 마음대로 재단하려 하였다. 아직도 인간들은 제동장치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자연을 재료 삼아 경제성장을 위해 앞으로만 달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인간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였다.

환경학자들의 얘기를 듣지 않더라도 현재의 지구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지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환경위기에 대한 경고이자 신호탄이다. 오히려 코로나19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인류는 차분히 지구 생태계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판을 짜야 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함께 힘을 모으고 국제적으로 협조하여 생태권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

집이나 산에 불이 나면 당장 불을 꺼야 하지 계획을 세운다고 머뭇거리다가는 모두 다 타버리고 재만 남게 된다. 지금 지구가 불타고 있다.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무슨 일이든 시작해보자. 자기 하나의 행동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실천해보자. 다음에 소개하는 산불을 끈 앵무새의 마음을 일으켜보자. 

1) 산불을 끈 앵무새

옛날에 설산 한쪽에 큰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 숲속에 환희수(歡喜首)라는 앵무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람이 몹시 불어대자 대나무끼리 서로 부딪쳐서 불이나 숲을 태우기 시작했다. 모든 새와 짐승들은 두려워 떨면서 도망칠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었다. 그때 앵무새는 자비심으로 새와 짐승을 가엾이 여겨, 물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서 날개를 적셔 불 위에 뿌리기를 반복했다. 

다른 생명을 가엾이 여기는 앵무새의 염원이 너무나 간절하여, 하늘신의 왕이 사는 궁전을 진동시켰다. 하늘신의 왕인 제석천은 무슨 이유인지 살펴보았더니, 한 앵무새가 큰 자비심을 일으켜 불을 끄려고 온 힘을 다하여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석천은 곧 앵무새를 향하여 말했다. 

“이 숲은 넓고 크기가 수천만 리인데 네 날개가 적시는 물은 고작 몇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너의 그 작은 날개로 그 큰불을 끌 수 있겠는가?”

그러자 앵무새가 대답했다. 

“내 몸은 비록 작으나, 내 마음은 크고 넓으므로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면 반드시 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몸이 다하도록 불을 끄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맹세코 불을 끄고야 말 것입니다.” 

제석천이 그 큰 뜻에 감동되어 큰비를 내리니 불은 곧 꺼졌다.) 

 

온 지구가 더럽혀져 있는데 나 혼자 노력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로 일종의 범죄 행위이다. 미래 세대에게 고통을 주게 되고, 생물종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와 아무런 관계없는 일인 것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지구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지구의 생태환경이 그냥 바라만 보기에는 상황이 심각하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들의 노력은 너무 미온적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을 해결해보겠다고 날개에 물을 묻혀 산불을 껐던 앵무새 환희수가 인간으로 환생하여 나타났다. 바로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로, 2003년에 태어난 어린 소녀다.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변화가 얼마나 긴급한 당면 과제인지 세계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며 나무 심기와 과학의 발전을 기다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젊은 세대가 바라는 것은 탄소 배출과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를 단계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중단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것을 보면서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결국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직접 행동하기로 나선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달걀과 우유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방울방울 떨어지며 시작한 발원지의 물이 큰 강물을 이루듯이 나의 조그만 노력이 위험에 처한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지금부터 각자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자기의 조그만 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천지에 널려 있다. 이제 지구를 더럽히지 않는 행동에 직접 나서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방생 운동에도 참여해야 할 것이다.

2) 적극적 생명살림: 방생(放生)

방생이란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不殺生]에서 더 나아가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한 생명을 구하는 데 직접 나서는 것이다. 《범망경》 권 220)에서는 방생을 실천해야 할 당위성을 설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의하면 중생을 죽이는 것은 전생의 내 부모를 죽이는 행위이고 그들을 잡아먹는 것은 나의 옛 몸을 먹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살생 현장을 목격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구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적극적인 생명살림(방생)을 권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크거나 작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그 자체로 소중하다. 앞으로는 생명의 시대다. 온 세상의 생명평화는 지구 환경을 살릴뿐더러 인류가 공멸에 빠지는 것을 막는 중요한 시대의 화두다. 

이제는 시대에 맞는 방생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작지나 방목지 확보를 위해 불을 놓아 숲을 태우거나 삼림을 벌채하는 행위를 막아야 한다. 원자력 폐기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 가공할 살상력을 가진 무기로 싸우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 화학물질로 인한 살생을 막아야 한다. 살생을 막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숱한 생명이 우리의 방생을 기다리고 있다.

 

10.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는 환경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위한 수없는 교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수많은 불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산하대지도 다른 나라와 별로 다를 바 없이 오염과 기후변화에 시달리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 손끝과 발끝에서 행동으로 나타나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환경 악화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스럽지 못하다. 이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환경문제인데 시대의 요청을 멀리한 채 마음공부만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현실이 안타깝다. 

냉철히 말하면 종교가 다 없어져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 환경이 악화되면 모든 생명체가 고통받다 멸종되고, 세상이 망하고,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 현시대에 최우선 순위로 해결해야 문제가 바로 환경문제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불교의 가르침을 보배로 만들기 위해서는 불자들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고 근검절약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환경이 개선될 수 있는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불교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생태문제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 실천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문제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이다. 개인적인 행동의 변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제도의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불자들이 환경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

 

남궁선
정형외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불교학 박사). 박사학위 논문은 〈불교 업사상의 생태철학적 연구〉이다. 주요 저서로 《붓다를 애먹인 사람들》 《템플스테이 길라잡이》 《불교로 바라본 생태철학》 등이 있다. 현재 의사로서 요양병원에 근무 중이며, 불교환경연대 회원이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