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환경재앙,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문제의 시작

1) 생태위기 담론은 현대 인류가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대사적 과제가 되었다. 2020년을 들어서면서 전 세계의 일상을 멈춰 세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19에 의한 질환은 현대사회에서 생태계 파괴가 초래하는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사람과 동물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인수공통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이 전염병은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일상적 삶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당연히 여겼던 사회의 모든 체제를 새롭게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21세기에 접어들어 심각하게 진행되는 생태계 파괴와 함께 환경위기 문제가 자리한다. 크게 보아 이 위기는 먼저 지구온난화 현상에서 보듯이 심각하게 진행되는 기후변화 문제가 자리한다. 또한 엄청나게 쏟아지는 각종 생활 쓰레기와 산업폐기물, 화학폐기물, 화석연료 남용과 핵 위험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인구증가와 개발 위주의 산업기술 확대, 경제적 불평등에 따라 동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사회적 문제 역시 생태계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 뒤에는 근대 이래의 산업기술이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 종속됨으로써 성장주의로 치닫게 되는 사회적 요인이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한다. 생태학(ecology)은 가정과 그 살림살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유래한다. 경제(economy) 역시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음에서 보듯이 이 두 범주는 인간이 지구 생명체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개념이다. 과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우리의 생활환경을 위기로 몰아가는 현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산업기술이 원인인가, 아니면 그 산업기술이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에 종속됨으로써 초래된 사회문제가 진정한 원인일까. 이런 논의에 인간의 정신적 체계는 어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장자》 〈천지편(天地篇)〉에 언급된 자공(子貢)의 이야기는 중요한 생각거리를 보여준다. 자공이 유람을 마치고 진나라로 돌아오다가 힘겹게 우물물을 긷는 노인을 마주하고, 그에게 쉽게 물을 푸는 기계를 사용하기를 권했다. 그 권유를 거절하면서 노인이 대답한다.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쓰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이 있게 된다.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이 깃든 사람에게는 마음이 순백하지 못하여 도가 깃들지 않는다. 나는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다.” 

산업기술과 그 부산물이 생태계 위기를 초래하는 작인(作因: agency)이라면, 그 기술을 사용하는 마음은 원인일 것이다. 무한한 경제성장을 갈망하는 사회체제가 원인(cause)이라면 그 원인은 그러한 결과를 불러일으킨 정신적, 철학적 체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생태위기 담론의 중심과제는 작인과 원인을 구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그 위기를 초래한 정치경제와 사회체제는 물론, 그 뒤에 자리한 근본적 사유체계와의 대결 없이는 결코 올바르게 해명할 수 없다. 현재의 생태계 위기 문제에서 자연과 생명을 객체화하는 서구 근대의 자연 이해의 전환이 중요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 지구상에 생명체가 생겨난 이래의 역사는 끊임없는 생태계 변화와 생명체 간의 생존경쟁으로 이어져 온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역사는 미시적으로는 대결과 생존경쟁의 부정적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공감과 공존을 통한 공생의 과정이었다. 자연과 생명의 역사는 미시적 대결과 거시적 공생이 상호작용하는 생성과 생명의 과정인 것이다.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공존재(共存在)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 합병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로 진화했기에 이 말은 비유적 표현을 넘어 사실에 관한 진술이기도 하다. 생명체는 또한 자연을 일부이며 자연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생명이 미시적 차원에서 생존경쟁에만 머물러 있거나 일방적으로 다른 생명을 독점할 때 지구 생명의 거대한 생태계는 멸종이라는 해결책으로 생태계를 복원하였다. 

생명의 역사 이래 이 지구 생태계에서는 5차례의 생명체 대멸종이 있었으며 그 마지막 대멸종은 약 6,500년 전의 공룡 멸종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지구에 살던 대략 90% 정도의 생명종을 멸종시킨 이 사건은 소행성 충돌에 의한 기후변화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것은 당시 지구 생태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종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생태계 위기를 경고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한결같이 제6의 멸종이 가까웠다고 말한다. 이제 제6의 멸종이 다가온다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멸종을 초래한 생명과 그 멸종의 대상이 되는 생명체는 동일하리란 사실이다. 생명과 생태계의 공존재성의 원리를 거스르는 생명에 대해 지구 생태계는 멸종이란 해결책으로 대답할 것이다. 

2000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크뤼천(Paul Crutzen)은 지금의 지질시대를 홀로세(holocene)가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 까닭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지질이 18세기 후반 이후의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최고치의 이산화탄소 배출과 합성 유기화합물, 플라스틱과 살충제, 방사능 물질에 의한 지구 대기의 변화는 물론, 화석연료의 무분별한 사용과 핵실험과 핵발전, 희토류원소, 콘크리트, 알루미늄, 생활 쓰레기 등에 의한 환경 변화가 지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이로 인한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오존층 파괴, 이상기후 등의 문제 역시 이런 변화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가 신생대 4기 홀로세에 속하지만, 인간이 초래한 생태학적 변화가 지질학적 흔적까지 남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려 한다. 

인류세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들이 자연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서식지를 빼앗긴 야생 생물의 멸종과 인수공통 바이러스의 확산 등의 문제는 물론, 육식을 위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현재 지구상 포유류의 5~10% 정도만이 야생에서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인류세 지정을 위한 공식 제안서를 계획하고 있는 인류세 워킹 모임(Anthropocene Working Group)이 닭 뼈 화석을 지표화석으로 제시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2. 생태위기 담론의 시작

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빚어지는 결과는 야생 생물의 생존 터전이 상실되고 그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데 있다. 이 현상은 인간의 생활세계가 파괴됨으로써 인간 역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박탈당하는 데서는 예외일 수가 없다. 생태계 파괴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보다 생활세계의 파괴와 그에 따른 삶과 생명에 미치는 치명적 결과에 있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지적함으로써 생태계 오염이 곧 생존과 생활세계를 파괴하는 것임을 경고한 책이 카슨(Rachel Carson)의 기념비적 작품 《침묵의 봄》(1962)이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생태계 위기를 경고하고 환경운동을 확산시킨 기원이 되었다.4) 

생태계 파괴로 인해 야생동물에 서식하던 바이러스가 면역체가 없는 인간에게 전파됨으로써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지금 이 세계를 위기로 몰아가는 코로나19 바이러스다. 또한 모기를 매개로 한 말라리아나, 지카바이러스 질병, 뎅기열 등은 매년 3백만 명 이상의 환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말라리아는 DDT 살충제로 퇴치 가능했지만 이런 합성 살충제는 그런 긍정적 효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카슨의 책은 이런 사실을 명확히 우리에게 알린 저서인 셈이다. 그는 화학 살충제가 토양과 지하수를 오염시킬 뿐 아니라 강과 호수로 스며들어 수생 생태계를 심각하게 죽음으로 몰아감으로써, 인간의 생명세계와 생활세계를 파괴하고, 나아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카슨은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우리에게 생태계 위기 문제를 처음으로 명백히 각인시켰다. 현대 생태 이론의 시작은 여기서 비롯된다.

1972년 로만 클럽(Roman Club)은 산업과 자본의 무한 성장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힌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열역학의 근본원리인 엔트로피(entropy) 법칙에 따라 지구 생태계에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때까지 우주에는 무한히 사용 가능한 에너지(energy)가 있기에 물질적 성장과 진보가 계속되리란 신화가 가득했으나, 이 보고서는 그러한 신념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생태계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에너지 고갈 문제는 단순히 대체에너지를 사용하거나 또는 새로운 기술개발로 극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생명과 자연은 궁극적으로는 에너지에서 나와 에너지로 돌아간다. 물질과 에너지가 같은 것이라고 밝힌 현대 물리학의 성과에서 보듯이 모든 것은 에너지로 귀결된다. 생태계 문제 역시 궁극적으로는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 과정의 부작용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산업사회 이후 생태계 위기가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 까닭은 에너지 남용과 오용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생태계를 이용하여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과거 지구가 저장했던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후손과 그 세대가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우리가 미리 앞당겨 사용하는 셈이다. 경제학자들은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말로 이런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려 한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모순이며, 실질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 사회현상 전반에서 보듯이 경제 논리는 생태계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하고 무한 성장이란 패러다임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올바른 생태계 회복을 위해서는 에너지를 남용하는 물질적 성장 패러다임을 벗어야 한다. 기술개발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욕망이 무한히 이어진다는 측면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은 주장이다. 

 

3. 현대 생태담론의 형태

1)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

생태계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는 참으로 다양한 주장이 있다.6) 그럼에도 이들 주장은 이론-해석학적 관점과 실천-윤리학적 관점이라는 두 범주 안에 자리한다. 이론-해석학적 범주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관계를 이해하고 새롭게 해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이다. 사회생태학이나 근대 인식론적, 실증주의적 철학을 넘어 자연 이해를 존재와 동 근원적으로 해명하려는 철학이 이 관점을 대표하는 주장이다. 그에 비해 실천-윤리학적 범주는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실천적 행위를 바꿈으로써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는 관점을 대표한다. 다양한 형태의 생태 이론은 실천적이며 윤리적인 행위의 변화 없이 생태계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범주는 강조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생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실천-윤리학적 주장과는 별개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표적인 이론으로 심층생태학(deep ecology)과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을 들 수 있다. 

심층생태학은 직접적으로 카슨의 《침묵의 봄》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브로워(D. Brower), 엘리히(P.R. Ehrlich) 등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이후 드볼(B. Devall)과 세션즈(G. Sessions)의 저서 《심층생태학(Deep Ecology)》(1985)과 환경운동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 어스 퍼스트(Earth First!) 활동을 통해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들은 환경문제를 단순히 과학 · 기술적 개선이나 윤리적 실천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표층생태학적 접근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인 체제 변화는 물론 철학적 패러다임 전환 없이는 생태계 위기 극복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흐름은 이후의 모든 근본적 생태운동의 기원이 된다. 심층생태학은 1973년 노르웨이 철학자 네스(Arne Næss)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벗어나 생태 중심적으로 관점을 바꿀 때만이 산업사회가 초래한 생태계 파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생활방식의 전환은 물론, 산업사회 체제와 그 근거가 되는 인식체계의 전환이 필요하다. 네스는 생태문제를 산업사회의 부산물로 보는 관점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세계관과 문화, 철학 등의 근원적인 원인을 찾는다. 이를 통해 모든 사회문제와 세계에 대해 심층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생태-과학기술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생태-철학적 관점 전환을 이끌어내는 데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환을 그는 생태학과 지혜를 결합한 ‘생태지혜(ecosophy)’라는 말로 그 특성을 표현한다.

생태여성주의는 한편으로는 여성주의(feminism)의 산물이지만, 다른 한편 유럽의 68혁명 이후 인간과 남성, 이성 중심주의에 의해 소외되고 배제된 자연과 여성, 감성을 회복하려는 이론과 실천 운동이기도 하다. 각종 중심주의는 그 대척점에 있는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배제하거나 억압함으로써 그 존재 의미를 지워버린다. 생태여성주의는 본질적으로는 이렇게 배제되고 억압된 존재로서의 여성과 자연 존재를 회복하려는 데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또는 급진적 여성주의 등 여성주의의 다양한 갈래처럼 이 이론에도 주장하는 바에 따라 수많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생태여성주의의 출발은 보통 68혁명 이후인 1972년 프랑스 여성주의자 도본느(Françoise d’Eaubonne)가 시작한 ‘생태여성주의 센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후 Feminism or Death(1974)를 통해 도본느는 생태여성주의를 ‘여성운동과 생태운동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주장은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여성 문제와 생태위기 문제를 연결짓지 않는 다른 여성주의와 달리 생태계를 위한 혁명에 여성이 함께함으로써 소외된 두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의 생태여성주의는 사회인식과 여성 및 자연에 대한 이해의 차이와 발전을 통해 새롭게 변형되고 심화된다. 배타적이거나 대립적인 초기의 형태를 넘어 지금은 자연과 인간, 여성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방향,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면서 그럼에도 차별이나 억압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지향점은 생태여성주의의 긍정적 모습일 것이다. 생태여성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적 해체주의 등의 철학에 의해 끊임없이 영감 받고 변형되면서 새로운 사회 문화적 이론-실천으로 발전하고 있다.  

2) 사회생태학과 정치생태학

미국 사회철학자 북친(Murray Bookhin)은 Ecology of Freedom (1982)을 통해 변증법적 자연주의에 입각한 사회학적 생태학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자연과 생태계의 모든 존재는 변화, 발전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있으며, 서로가 전체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연은 스스로를 파악하는 자기-의식적 실체다. 북친은 1차 자연으로 생태계를, 문화적인 2차 자연과 함께 자유자연으로 자연을 구분한다. 생태계와 문화적이며 사회적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자유자연은 자연의 새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이 자신의 자의식과 자기 결단의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인간사회를 통해 자연은 물질적 층위를 넘어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연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사회생태학은 자연과 인간, 문화와 자연이 조화로운 상태를 만들어가는 생태계를 지향한다. 

북친은 일방적 생태운동의 위험을 강도 높게 경고한다. 생태계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생태 파시즘은 조악한 근본주의적 생태주의를 조장한다. 조악한 생태근본주의는 생태계에 미치는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생태문제는 결국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한 경제구조에 있음에도 생태근본주의는 이를 보지 않는다. 부의 불평등한 구조에 의한 절대적 가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생태계 파괴는 결코 해소하지 못한다. 선진국의 환경운동은 역설적으로 제삼세계 민중을 더 열악한 생태환경으로 몰아간다. 생태계 문제는 인간과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세계 문제다. 경제성장을 위해 방치하는 산업개발은 전 세계의 야생 생명의 거주지, 밀림과 강, 호수와 바다를 파괴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절대적 빈곤은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면서 경작지 확대와 서식지 파괴가 진행되며, 산업화가 덧붙여지면서 초지의 사막화는 급속도로 진행된다.

사회생태학은 한편으로 생태계 자체만을 보면서 생태주의를 주장하는 근본적 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성장 위주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적 권력관계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와 함께 정치생태학은 사회생태학의 주장을 한층 더 정치적 문제로 확산한다. 이들은 생태위기의 본질을 자본과 자본에 종속된 기술에서 찾으며, 그 위기의 극복은 자본이 소외시킨 인간다운 삶의 회복과 노동 존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회 문화적 혁명은 물론, 생태학적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의 폐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사회철학자 고르츠(André Gorz)가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생태계 위기를 부추기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현대사회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다. 콜버트(E. Kol-bert)는 생태계 위기의 문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에너지 생산력을 장악하는 성장주의를 거부하고, 생태에너지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체제는 자연을 상품 생산의 자원으로 간주하며, 사회를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자본주의 경제와 우리 삶의 경제적 조건을 동일한 체제로 간주할 때 우리는 이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경제 모형에 대해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경제체제를 넘어 정치와 사회는 물론, 심지어 과학기술과 인문학조차 이 논리에 따라 변형시킨다. 그에 따라 인간과 생명, 자연 전체가 그 존재론적 의미를 상실하고 객체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체제의 전환 없이 생태계 위기 극복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도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정치 · 경제체제와 함께 그에 종속된 산업기술 문명이 생태계 파괴의 작인이며 원인이라면, 이러한 정치 · 경제체제를 근거 짓는 정치철학과 함께 인간과 이성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근대 계몽주의 철학이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다. 생태위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명과 함께 하는 실천적 측면이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사회생태학의 문제 제기처럼 사회변혁에 근거한 생태주의와 공생명의 사유를 통한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모순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침묵하는 자연과 생명이 파괴되고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 죽음은 결국 공존재인 생명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3)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재설정

생태계의 위기 상황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자연과 맺는 인간의 관계를 전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환은 일차적으로 일상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말한다. 또한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 나아가 인간과 생명계 전체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자연에 올바른 존재론적 위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도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연이 파괴되고 생태계가 훼손되면 인간의 삶과 생명도 올바르게 유지되지 못한다. 현재의 기후변화는 불과 150여 년간의 산업화로 인한 짧은 시기의 결과다. 현대의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문화는 자연을 철저히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잉여가치를 위해 상품화한다면, 이에 종속된 기술은 자연과 생명을 부품화한다. 어떤 경우든 자연과 생명은 그 존재론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연 이해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여기에 자연에 대한 이론-해석학적 관점과 실천-윤리학적 관점이 통합적으로 작동할 때 이것이 가능할 것이다. 지난 17세기 이래 유럽에서는 자연을 바라보는 특별한 관점이 생겨나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객체적인 지식을 이끌어내는 방법론을 확립했다. 이런 특정한 지식체계를 자연과학이라 부른다. 자연과학은 서구 근대성의 산물이며, 이러한 학적 체계가 그 이전까지 인류가 자생적으로 발달시켰던 기술과 결합하여 우리의 삶과 지식체계는 물론 문화와 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탈근대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연을 자본이나 과학기술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성을 넘어 자연과 생명이 인간과 함께하는 공존재임을 체계화하는 사유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 없이 생태계 위기 극복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버치(Ch. Birch)와 캅(J.B. Cobb)은 생태학을 생명체의 본성에 미루어 그 유형을 설정하려는 생명체적 생태학 모델을 주장한다. 생명체적 생태학 모델은 모든 사람의 본래적 가치와 관계성, 초월성과 그 한계, 인간과 자연세계 사이의 연속성, 생명체가 공생할 수 있는 타당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 등 6가지 특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관계성이란 인간과 인간 및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초월성이란 생명체의 외적 범위를 넘어 생명체가 생명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물리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고려와 그 초월성의 한계를 의미한다.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려는 실천-윤리학적, 이론-해석학적 작업의 본질은 생명이 생명체로서 자유롭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공동의 지평인 자연의 존재 의미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한 노력은 생물학적 생태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와 자연과의 정당한 관계 맺음은 물론, 사회적 층위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약한 고리에 대한 존중과 함께 생명을 상품화하거나 부품화하는 현대 소비경제와 기술문명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수용하고, 그 존재 의미를 지켜내는 생각의 틀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이들은 생명과 자연을 새롭게 이해하는 철학 체계, 생명체적 생태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4. 통합생태학

통합생태학은 지구 생태계의 통합적 특성에 미루어볼 때 충분히 타당성을 지닌다. 지구는 모든 생명체는 물론 무생물적인 대기권, 토양과 대양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는 단일한 생태계이며 생명권이다. 이 이론은 생태계가 생명체와 무생물이 상호작용하여 이룩하는 단일한 생태계란 사실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생태계의 중요한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와 함께 생태계 위기 문제를 초래하는 까닭이 자연생태계에 대한 기술적인 작인을 넘어 정치, 경제를 비롯한 사회적인 체제와 철학적 사유체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지닌다. 

현존하는 세계 지도자 가운데 생태위기 문제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통합생태학을 주창한 사람은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Pope Francis)다. 그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e Si)〉를 통해 생태위기를 인류 공동의 집에 대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생태문제와 인간의 사회문제가 밀접히 관련되기에 생태문제와 사회문제를 연결시켜 포괄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생태학은 물론 경제와 사회 생태학, 문화와 일상생활의 생태학을 통합한 생태학(integral ecology)이 필요하게 된다. 통합생태란 자연생태, 인간생태, 사회생태 개념을 확장한 말이다. 여기에는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하고 뭇 생명과 그 생명의 터전을 위한 통합적 생태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인간 사이의 문제와 사회적이며 구조적인 모순과 불평등 문제가 자리한다. 이런 문제들이 결국 생존의 위험에 빠진 약자들이 더 약자인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다. 

생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고 생명 전체를 존중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적 회심’이라고 부르고 있다.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생명을 새롭게 이해하는 이해의 전환과 함께 생명과 인간,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위한 교육과 문화적 전환 없이 생태적 회심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생태영성(ecological spirituality)이라 부를 수 있다면 생태위기를 극복하고 생명과 더불어 근본적인 공생을 이룩하는 길은 이러한 영성적 전환에 뿌리내릴 것이다. 그러기에 다가올 시간에 필요한 생태적 전환은 이런 근본적인 생명 영성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종교적 직관은 제도종교 체제와 무관하게 인간에게 풍부한 영성적 원천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생태계가 훼손되는 상태를 지나 생명이 살아가는 터전 전체가 파멸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생명을 위한 ‘생태학적 회심’을 강조한 것은 종교의 유무를 떠나 분명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외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 회칙은 생태계 파멸의 원인이 다만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만 이해되지 않고 사회적이며 경제적, 정치적 맥락과 연결되어 심층적인 원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생태학적 회심과 생태영성은 자연과 인간 사회를 포함하는 ‘총체적 생태학’에 관계된다. 

생태학적 전환은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 전반을 바꾸어 놓는 데 있다. 그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이 회칙을 반포한 이유가 “인류 공동의 집이 파괴되어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다고 강조하는 데서도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실천과 절제와 배려, 자기희생을 새롭게 자각하는 ‘생태학적 회심’, 이로써 가능해지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요구된다. 현대 문화는 이러한 덕목을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이러한 덕목 없이 인간의 삶과 생명은 불가능하다. 생태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과 근본적이며 초월적인 존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등과 생태, 경제란 세 가지 주제를 결합하여 하나의 통합적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생태계 위기는 단순히 훼손되는 환경을 보호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반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선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있다. 또한 일방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자연을 다만 인간의 욕망과 경제 논리의 대상으로 삼는 데 생태위기의 근본 원인이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시대적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통합생태학은 이를 위한 생명철학과 생명영성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5. 생명철학적 생태학 

1) 생태위기 문제는 산업화에 따른 환경파괴와 인간 우월주의에 기반한 경제성장주의가 직접적 원인이지만, 그 뒤에는 그를 근거 짓는 근대 이래의 ‘생산성의 철학’이 자리한다. 지금은 환경 내지 생태인문학을 비롯한 생명철학적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근대 이전의 유럽과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자연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자연을 거대한 책으로 이해했다. 즉 자연은 그 안에 어떤 비밀스러운 진리와 의미, 중세적 표현으로 신의 창조 의지와 신비가 새겨진 거대한 책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자연이란 책을 읽음(legere libro in naturae)”으로써 삶과 생명의 의미 및 그 가치의 원천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과 동화하고 자연과 더불어 삶으로써 인간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켜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언어화의 형태는 다르지만 근대화 이전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요나스(Hans Jonas)는 이미 1970년대 후반 생명체에 대한 철학을 전개하면서 생태윤리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물질적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인 자연과 자연의 자원이 결국 지구의 오랜 생태 역사가 축적한 결과이며, 그러기에 이것을 지금의 세대가 남용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 차이를 넘어서서 다가올 세대, 우리 아들딸 세대가 누려야 할 자원에 대한 권리와 생명권을 앞당겨 쓰는 행위가 된다고 주장했다. 생태계를 바라볼 때 필요한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의 윤리다. 이 윤리는 일차적으로 자연과 생명체에 대한 것이면서 또한 동료 인류는 물론, 미래 세대의 인류와 생명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미래의 자연과 생명, 인류가 우리가 오늘 저지르는 생태적 남용과 오용에 의해 마땅히 누려야 할 생명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의 원칙, 세대 간의 정의는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돌아봐야 할 규범이다. 생태위기는 현재의 생명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생명권까지 침해한다. 그러기에 생태윤리는 현세대는 물론, 생물종과 함께 미래 세대의 권리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요나스는 죽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예전에 세계의 종말에 관한 판결을 경고했던 것은 종교였다. 오늘날에는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지구 자체가 세계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한때 아름다운 창조물로 나타났던 이 지구의 황무지에서 몰락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탐욕스러운 권력을 억제해야 한다. 이렇게 경고하는 것은 이 말없는 피조물이다.” 

2)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체제에 따라 움직인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며 소비를 통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해야만 유지되는 체제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긴다. 생태계 위기를 환경오염이나 산업 · 기술문제로만 보는 것은 문제의 작인을 원인으로 혼동하여, 그 체제를 왜곡하여 유지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불평등은 물론, 세계적 불평등이 생태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지금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여기서 관건이 되는 윤리적 원칙은 인류 공동체가 함께 지켜가야 할 공동선의 원칙이다.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오늘날 인간은 지금껏 마주한 적이 없는 전 세계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인간을 제어하면서 생기는 인간공학적 위기이며, 자본주의가 전 세계화되면서 생겨나는 세계화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면역성의 인간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생명체의 터전에 닥친 위기와 사회적 위기는 물론, 철학적 위기를 극복하는 치유의 인간학이다. 생명을 살리는 면역성의 인간학은 새로운 사유와 삶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 면역학을 통해 우리는 지금껏 이어왔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며, 사회체제와 정치경제체제를 전환하고, 사유와 철학을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 생명철학은 이를 위한 존재론적 토대를 제시한다. 생태계 위기를 포함한 지금의 파괴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에 근거한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계 위기 극복이 생명을 향한 열정에서 시작된다면, 그 과제는 생명의 원리를 언어화하는 지성적 작업은 그 과정에서 달성될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말처럼 땅에서 넘어진 자는 그 넘어진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생태계 위기를 초래한 자가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이는 인간의 지성적이며 열정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이를 인간중심주의로 왜곡할 수는 없다. 인간은 생명의 중심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생명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와 의무의 역할조차 주변부로 돌릴 수는 없다. 36억 년에 걸친 생명 역사의 끝자락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결단에 따라 생명과 자연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삶과 존재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생명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더 이상의 내일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

 

신승환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현대철학 전공자로서 근대성 극복과 생명철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주요 저서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지금, 여기의 인문학》 《철학, 인간을 답하다》 《해석학-새로운 사유의 철학》 《형이상학과 탈형이상학》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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