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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박병기 본지 편집위원장
   
박병기
본지 편집위원장

환경위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경제성장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경고를 담은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온 것이 1972년이다. 그 당시 우리는 석유파동과 같은 위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었다. 공장은커녕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학교에서 어쩌다 접할 수 있었던 공장 굴뚝의 뽀얀 연기는 강 너머 무지개 같은 설렘의 대상이었을 정도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성장을 이뤄낸 우리는 외형적으로는 이른바 선진국 수준의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충분히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성인병과 다이어트를 염려하고, 해외여행이나 긴 휴가 같은 여유도 이제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이뤄낸 20세기 중후반의 성과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와 함께 자부심을 느낄 만한 수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젊은 층의 끝없는 절망과 갑자기 늘어난 수명으로 삶의 의미 상실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과격한 인정투쟁을 벌이는 태극기 부대의 일그러진 얼굴, 일상 속으로 파고든 초미세먼지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다. 그에 더해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와, 극심한 경쟁의 파고 속에서 목숨을 던지기도 하는 아이들의 절규와도 만나야만 한다.

우리 삶의 배후로서 환경

부처가 발견한 진리는 연기(緣起)와 공(空)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가르침은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연기적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는 우리의 삶은 그 관계망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절대적 한계로 인해 끊임없는 탐욕과 성냄을 불러내는 어리석음을 기반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상황이 고(苦)이고, 따라서 그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다면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이때 윤회는 단지 다음 세상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차원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삶 자체 속에 들어와 있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 자체의 반복을 의미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환경은 한편으로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후 또는 배경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배후는 주변이 아닌 내 삶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인드라의 그물망에서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불교에서 환경은 주변이면서 곧 중심이고, 내 삶의 배후이면서 동시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살아내고 있는 이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중심에 두는 자유주의와 경쟁적 시장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토대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의미의 민주자본주의는 서구 근대의 산물이면서 인권과 자유, 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개인을 이기적인 존재이자 고립된 존재로 만들어버렸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의 심각한 불평등을 가져와 지구촌 상당수의 사람에게 넘쳐나는 음식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했으며,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후이자 조건 자체이기도 한 환경을 지속적으로 파괴해 숨을 쉬는 일조차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이런 상황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석탄과 석유, 원자핵에 의존하여 불필요한 수준의 편리함까지 누릴 수 있게 된 우리가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물론 우리 자신의 노후까지도 보장받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진 이 상황과 만나야만 한다. 기후변화 담론이 더 이상 학자들의 실험실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원자핵 발전의 치명적인 위협이 작은 불편을 견딜 수 없다는 단말마적인 공허한 외침에 묻혀서는 안 된다. 

환경재앙 극복을 위한 성찰과 실천의 지혜

환경위기는 위기의 수준을 넘어서 이미 재앙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그것을 몸으로 느낀 학생들이 학교에 결석하면서까지 기성세대의 관심과 실천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한 응답은 없거나 미미한 수준이다. 그런 가운데 나온 미국 대통령의 폭력적 수준의 반응은 그들이 더 이상 선진국일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선진국 담론이 지니는 허구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여전히 일본과 미국을 따라갈 수 없는 선진국으로 받아들이는 친일파와 친미파가 주변이 있기는 하지만, 점점 더 그들의 입지는 좁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환경재앙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그 실태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을 불러온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상 속에서 의식할 수 없는 정도로 누리고 있는 편리성에의 중독이 곧 환경재앙을 불러온 원인 자체임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전기의 혜택을 처음 받은 사람들은 그 전기가 가져다준 편리함에 대해 환상 수준의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에 살게 되면서 처음 만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이제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일상의 부분이 되어버렸음을, 고장으로 인한 불편함을 통해 느끼곤 한다.

바로 이 진실, 다시 말해서 환경재앙을 불러온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임을 자각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인식과 함께 소비를 통한 편리함에 지속적으로 중독되도록 유혹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허점에 대해 알 수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공론장을 마련해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대화와 실천을 이어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마련되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념할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같은 점진적 대안을 함께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여름호 특집으로 환경재앙을 다루고자 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어쩌면 식상하기까지 할 정도로 많이 이야기되면서도, 결정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현재의 위기를 지속적으로 심화시켜가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 현재의 위기상황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으면서 눈앞에 놓아보고, 그것을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분석해보며 불교의 눈으로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등을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개인과 기업, 국가 등 환경재앙의 책임 주체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 제안하면서, 우리 자신의 실천 의지를 함께 다져보고자 한다. 쓰기 쉽지 않은 주제를 감당해주신 필자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위기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으면 기회로 만들 수 있다. 환경위기와 재앙은 그 뿌리가 나 자신의 일상 속 편의성에 기반한 어두움[無明]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그 극복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나 자신은 이 사회와 체제의 산물임과 동시에 그것을 바꿔 가는 주체이다. 나의 불편함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환경재앙으로 인한 모든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의지와 일상의 실천과 연대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2020년 6월

박병기(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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