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징자 칼럼니스트

사람은 태어나면서 왜 우는가?

어떤 이는 평소 인생에 불만이 많았던지 ‘불만 많은 인생을 시작하면서 그 불만을 토로하는 불평으로서의 첫 신호를 보낸 것.’이 라기도 하지만 의학적으로야 큰 소리로 울어서 기도(???를 열어야 그 때부터 이승의 ‘숨’을 쉬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태어나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는 사람도 있다. 조로아스터교를 연 조로아스터가 크게 웃으면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아마 겁쟁이처럼 울면서 태어나는 보통 사람들 하고는 다르다는 ‘차별화’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태내에서의 흡족한 환경에 만족하며 배내 웃음을 짓던 버릇을 태어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을지도 모르고….......

보통 아기도 태어나면서 한 바탕 운 다음, 누군가의 손길 속에 자신이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곧 잠들면서 슬그머니 배내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는 것과 웃는 것을 슬픔이나 기쁨의 대립된 감정표현이어서 서로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한 바탕 호탕하게 웃은 다음 우리 눈에는 눈물이 고이게 마련인데, 육체적으로는 웃으면서 울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울음과 웃음이 동일한 두뇌회로와 함께 수많은 근육들을 함께 쓰고 있다는 사실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모여서 데굴데굴 구르며 함께 웃는’ 웃음의 종교, ‘폭소 교’나 중국에서 성업 중이라는 ‘통곡의 공간 제공’은 웃거나 울거나 간에 스트레스 해소에는 똑같은 효과를 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니, 몸 안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제거하는 데는 웃는 것 보다 오히려 크게 우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실험적 주장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태어날 때 울었건 웃었건 입을 크게 벌리면서 처음 들 숨 날 숨의 길을 뚫을 수 있었다는 데에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태어 날 때 왜 우는가.’에 대한 질문에 또 하나 그럴듯한 의견이 있다.

이전까지 한 치의 여유 공간도 없이 모태와 한 몸을 이루고 있던 태아가 갑자기 무한의 공간 속으로 홀로 떨어져 나온데 대한 공포심의 발로로 울게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기가 속한 생명체를 살아 나가게 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는 유전자의 교묘한 충동질이 공포심을 조장하고 이로 인해 크게 울게 되면서 삶을 향한 길인 기도(氣道)를 자연스럽게 열게 한다는 구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낮선 것, 어둠, 텅 빈 공간,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스스로 위협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어떤 대상 등이 공포심을 일으키며, 적어도 포유류를 비롯한 모든 척추동물은 이 공포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 인간의 탄생이 공포와의 첫 대면이라고 한들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 감정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공포는 생물이 갖기 시작한 최초의 감정이며 모든 종류의 감정은 이 공포를 부모로 해서 생겼을 것이라 한다. 두려움, 불안, 외로움은 물론 기쁨도 환희까지도 그 뿌리를 공포에서 찾으려 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공포에 대한 반응이 대상의 실체에 의해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이 그 대상을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 결정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같은 개 한 마리를 볼 때도 어떤 사람은 다가가 쓰다듬어 주면서 친해 질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무서워하면서 도망 가다가 개에게 쫒기기도 하고 물리기도 한다.

공포심을 갖게 되는지 아닌지는 이처럼 대상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느끼는가에 달린 것인데 이럴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위협을 과소평가한다면 공포심은 생기지도 않겠지만 무방비 상태가 되어 그야말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반면 대상의 위협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필요 이상의 공포심에 휩싸여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없게 되어 이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느낌은 위험을 가져오므로 대상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야말로 합리적인 공포심을 조성할 수 있게 된다.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공포심이라 해도 이의 극복과 함께 이를 지혜롭게 다스릴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나면서 공포심에 젖어 한바탕 울고 난 아기에게는 그 ‘공포심의 극복’이란 평생의 과제가 주어 졌다고 볼 수도 있다.

아기 때의 공포심은 어둠이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드러난다.

아기가 빈 공간의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무서워하게 되며, 큰 소리를 듣게 되면 ‘무엇인가 분명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되고, 그 반응으로 크게 울어 보호자의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 하게 된다. 스킨십의 유용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현대적 감성의 글을 잘 쓰는 영국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라고 말한다. 공포의 장자(長子)에 속하는 불안이 욕망의 하녀라면 공포 역시 욕망을 위해 봉사하는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는 공포와 불안을 하나의 같은 감정으로 묶지 않는다. 불안이 공포에서 보다 진화된 감정이기 때문에 좀더 복잡하다. 거기에다 불안은 보다 현대적인 특성을 갖는다.

공포와 불안은 교감신경에 대한 자극, 위장 활동의 둔화, 아드레날린 분비량 증가, 빠른 호흡 등 육체적 반응은 같은 증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원인과 심리적 대응에서는 다르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 공포심은 위협적인 대상에 대한 일시적 반응으로, 위협적인 대상이 사라지거나 어른 등 보호자의 등장으로 위협이 사라진다면 공포심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불안의 경우 위협의 대상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 영역에서 오는 것이므로 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상태가 된다. 어쩐지 우울하고 이유 없이 불만에 차는 등 불안의 심리적 증세는 다양하다. 그 불안은 나이가 들수록 더 복잡한 형태가 된다.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보다 많은 관심과 보다 많은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분명한 담보인 명성 영향력 등의 사회적 성공을 성취하려는 갈망, 즉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이 불안을 만든다고 본다.

사회적 성공의 추종으로 인해 ‘속물근성’이 만연하고 그 속물근성은 이름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 등을 무시하게 되며 그런 가난과 무시 따돌림 소외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 주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미래에 대한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도 불안을 커 가고 있다. 무신론의 대두로 내세가 없을 것이라는 불신도 한몫 한다

적어도 보통의 분석에 따르면 그렇다.

보통은 여기서 그런 불안의 해법도 제시하는데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등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면 서양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데 이는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개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감정들 역시 불안과 마찬가지의 효용성을 갖는다.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 두면 건강과 미덕을 지니게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 한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 할만한 것인지에 대해 자문해 보라는 것과 함께..........

본성이 애초부터 명성이나 권력 부 등에 큰 관심이 없는 떠도는 집시민족, 그 보헤미아 적 성격도 추천할만한 것이라 본다.

보통이 내 놓은 해법은 고대 이후 동 서양 어느 시대에서나 내 놓았던 해법이다. 현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그 해법은 ‘욕망의 하녀’라는 공포 불안 등 대부분의 감정이 그 주인인 욕망을 스스로 조종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미술에 공간외포(空間畏怖)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공간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말한다. 그 공간이란 ‘무한 공간’일 수도 있고 그냥 텅 빈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공간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이 세상에 막 태어나는 아기가 첫 체험의 텅 빈 공간에 대한 공포감을 맛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간외포’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알로이스 리글을 비롯한 몇몇 미술사가에 의해 ‘일체의 허무를 싫어하는 인간본성이 자신 앞에 펼쳐진 공간에 공포감을 가지게 되며 이를 극복하기위한 한 방편으로 쉬운 대로 평면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원시 미술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도 공포심의 극복을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빈 공간에 무서운 동물 그림, 복잡한 장식문양들, 인물상 등을 빈틈없이 채움으로써 악령이 드나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튼 공간외포에 대한 미술사가 들의 해석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공간, 공허를 두려워하는 심리’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그림이라면 그 공간을 어떻게 처리해 왔느냐가 극복의 수준을 말해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 서양 미술에는 차이가 난다.

서양 미술이 공간을 충실히 메워 온 것에 비해 동양화에는 여백이라는 것을 두어서 공간을 그림 속에 끌어 들였다.
문인 화에 낙관 하나 찍는 것에도 여백과의 조화 같은 것을 생각했다. 공간극복이라는 점에서는 동양화 쪽 이 한 차원 높다 하겠다.

요란한 덧칠을 한 중국 명, 청대의 도자기에 비해 여백이 많은 조선백자나 중국 송 대의 백자를 절품으로 보는 이유도 ‘공간극복’ 차원에서의 평가일 것이다.

공포나 불안은 타락을 가져오기 쉽다던가? 현란하고 화려한 문양에 요란한 덧칠을 해서 공간을 온통 채우는 것은 공포나 불안의 반영이며 퇴폐와 타락과의 함수 관계, 시대의 반영이라고도 본다.

여백을 즐기는 동양 미술의 근원에는 노장사상과 불가의 선가 사상이 스며 있다.

‘요체를 얻으면 형상은 떠날 수 있다.’든가, 비워진 공간으로도 그려진 부분을 초월한 표출이 가능하다는 수묵의 공간 개념들이 이에 속한다. 이와 같은 공간개념은 그리지 않고도 그려진 그림, 유위적(有爲的)화면 아닌 보다 초월적 상징과 상상의 공간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체의 장식을 거부한 한국의 석굴암 역시 공간극복의 높은 경지로 평가받는다.

공간극복이 어디 동양예술에만 있을까?

종교적 풍경을 들여다보면, 불가사량의 우주를 향해 활짝 열린 공간인 보리수 아래 정좌한 석가모니부처님 모습은 무한공간과의 일체감 그 자체이다.

욕망의 노예인 공포를 비롯한 여러 감정들, 그 감정들을 극복한 최고의 정점을 우리는 그 풍경에서 읽을 수 있다.
잡아함 경에 ‘나는 이미 세 가지 때와 두려움의 근본을 버렸나니, 두려워하지 않는 자리에 머물며 악마 군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욕망과 기쁨과 모든 어두움을 버리고 지극히 고요함을 증득했나니 온갖 번뇌 다하여 편히 사노라. 나는 네가 악마인줄 깨달아 알았거니 마땅히 스스로 사라져 가라.’와 함께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잘못된 망상을 떠난다.’는 반야심경의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의 모습을 우리가 대웅전에 모시는 이유를 알만하지 않은가.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