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라세케라(Malalasekera, 1899-1973) - 신념과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다

들어가는 말

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는 걸출한 학승들을 배출해온 승가의 존재만으로 세계불교의 무대에서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왔다. 뿐만 아니라 학자, 사상가, 사회운동가, 명상 지도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재가자들의 존재도 그러한 입지를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해왔다.

그러한 재가 불교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구나팔라 피야세나 말라라세케라(Gunapala Piyasena Malalasekera)이다(이하 말라라세케라로 호칭한다). 사실 그를 불교학자로만 규정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불교학자일 뿐만 아니라 교육가, 종교 · 사회 활동가, 외교관 등으로 활약한 ‘전천후 불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성장 과정

말라라세케라는 1899년 11월 8일에 스리랑카 남부 빠나두라(Panadura)의 말라물라(Malamulla)에서 유명한 아유르베다(Ayur-veda) 의사인 말라라게 시야도리스 페리스 말라라세케라 세네위라트네(Malalage Siyadoris Peiris Malalasekera Seneviratne)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낭송하는 빨리 · 산스끄리뜨 게송들을 들으며 자라서, 4세의 나이에 그것들을 모두 암송할 정도로 똑똑하였다고 한다. 그의 비범함과 탁월한 어학적 재능은 어쩌면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첫 싹을 틔웠을 것이다. 말라라세케라는 1907년부터 1917년까지 파나두라의 세인트존스칼리지(St. John’s College)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의 유능한 교육자인 시릴 아널드 잔즈(Cyril Arnold Jansz)의 지도를 받으며 영어 · 라틴어 · 그리스어 등의 어학을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빨리어 · 산스끄리뜨어 · 아유르베다 · 불교를 직접 가르침으로써 그의 공부가 더욱 완벽해지도록 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불교학자로서 대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처음에 그는 아유르베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의사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혹은 그의 부친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그래서 세인트존스칼리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서 17살의 나이에 콜롬보의 실론메디컬칼리지(Ceylon Medical College)에 입학했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의사가 되려던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1919년에 영국의 런던대학(University of London)에서 외부 학생(exter-nal student) 자격으로 수석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가 19세로서 그해 대영제국에서 수석 학사학위자들 가운데 그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진로 선회의 과정에서 그의 멘토(mentor)였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9세 소년이었던 말라라세케라는 파나두라의 란코트 위하라야(Rankoth Viharaya)의 한 집회에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웅변을 듣고서 자신의 서양식 이름인 조지 페리스(George Peiris)를 전통식 이름인 구나팔라 피야세나(Gunapala Piyasena)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학자로서의 경력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를 위시한 당시 불교 운동가들은 교육을 통해서 불교를 개혁하고 근대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감한 그는 1921년에 스리랑카 유수의 불교 학교인 콜롬보의 아난다칼리지(Ananda College)의 쿨라라뜨네(P.de S. Kularatne) 교장 밑에서 조교(assistant teacher)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는 물론 그의 학문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쿨라라뜨네 교장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해인 1922년에 그는 부교장(vice principal)으로 승진하고, 1923년에는 교장대행(acting principal)으로 승진하였다. 1923년, 그때까지의 교육가로서 역할을 잠시 접어두고 영국의 런던대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밟기 위해서 떠났다. 이는 그가 불교학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925년에 런던대학의 동양학 스쿨(School of Oriental Studies)에서 스리랑카의 빨리 문헌에 대한 주제로 석 ·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 교수는 세계적인 불교학자로서 빨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의 두 번째 회장을 역임한 리스 데이비스 여사(C.A.F. Rhys Davids)였다. 또한 터너(R. L. Turner), 버넷트(L. D. Barnette), 스테드 캐롤라인(W. Steds Caroline),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와 같은 쟁쟁한 불교학자들의 지도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그가 영국에서 습득한 서구의 학문적 방법론은, 그가 어린 시절 탄탄히 쌓은 어학 실력과 더불어 불교학에서 발군의 업적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1926년에 스리랑카에 돌아와서 나란다칼리지(Nalanda College)의 첫 교장이 됨으로써 교육자의 삶으로 복귀한다. 그다음 해인 1927년에는 콜롬보의 실론유니버시티칼리지(Ceylon University College)에서 런던대학의 과정시험(University of London degree examination)을 위한 싱할리어 · 빨리어 · 산스끄리뜨어를 영어로 가르치는 강사로 임명되었다. 실론유니버시티칼리지의 강사로 일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연구 및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939년 같은 칼리지에서 빨리어 · 산스끄리뜨어 · 싱할리어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2년에 실론대학(University of Ceylon)이 새로 생기면서 그는 그 대학에 개설된 빨리학부(Department of Pāli)에서 빨리어와 불교 문명을 가르치는 교수와 동양학부(Faculty of Oriental Studies)의 학장으로 임용되어 1969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무했다.


학문적 업적

말라라세케라는 불기(佛紀) 2500년을 경축하는 붓다 자얀띠(Bu-ddha Jayanti) 행사의 일환으로서 빨리 삼장을 싱할리어로 번역 · 출판하는 프로젝트인 붓다 자얀띠 뜨리삐따까 가란타말라(Buddha Jayanti Tripiṭaka Granthamāl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와 동시에 《불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Buddhism)》 편찬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시작하였다. 그리고 편집위원회의 회장(Chairman)과 초대 편집장(Editor-in-Chief)으로 활동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1년여의 사전작업을 거쳐 1955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 모두 8권의 출판으로 종료되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하고 1954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22년간 편집장을 맡았으므로, 이 프로젝트의 절반은 사실상 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말라라세케라는 《불교백과사전》의 프로젝트를 세계인들의 불교 이해에 대한 학문적 기여로 생각하였다. 말라라세케라는 《불교백과사전》 프로젝트의 완성을 자신의 학문적 성과의 대미(大尾)로 장식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생전에 그 완성을 간절히 열망했다. 타계하는 그날까지도 그는 《불교백과사전》의 편찬을 염려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불교백과사전》은 불교의 역사, 사상, 학파, 전통, 용어, 교리 등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는 남인도로부터 유입되는 불교의 각종 이단설들로부터 자파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그렇게 하여 정비하고 성문화한 테라와다를 다시 미얀마와 태국으로 전파한 바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불교백과사전》의 내용이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대승과 밀교의 전통들까지도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파격적인 일이라고 보아도 좋다. 동시에 이는 《불교백과사전》의 편찬 목적을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말라라세케라가 《불교백과사전》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 편찬 목적은 대승과 테라와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담아서 불교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불교백과사전》은 대체로 평이한 문체와 용어들로 서술되고 있다. 그 구성을 보면, 각 권은 대략 800페이지를 담고 있고, 인쇄의 편의를 위해서 3개의 분책들(fascicles)로 인쇄된 맨 마지막 권을 제외하고 각 권은 4개의 분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각 분책은 대략 200페이지를 담고 있다. 《불교백과사전》 제1권의 서문에서 그가 밝히고 있듯이, 원래의 계획은 각 권을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ṅgha), 문헌(literature), 예술(art)과 같이 서로 다른 제목으로 출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획은 당시 지식의 상황에서 그다지 실행 가능성이 없으며 엄청난 편집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출판이 너무 지연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의 제임스 하스팅스(James Hastings, 1852~1922)가 편집한 《종교 · 윤리학 백과사전(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New York: Bloomsbury T&T Clark, 2000)을 모델로 삼아 영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서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채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그는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적 명성, 그리고 외교관 등과 같은 화려한 사회적 활동에 힘입어 실론대학의 부총장(vice chancellor)에 도전하였지만 선임되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개인적으로 그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을지는 몰라도 불교학에는 오히려 큰 축복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불교백과사전》 프로젝트에 쏟아붓고, 자신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세계 각지의 불교 학자들로 구성된 인맥 네트워크를 통해서 《불교백과사전》에 들어갈 원고들을 많이 청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백과사전》은 공식적으로 시작된 1955년부터 마지막 제8권이 나온 2008년까지 따지자면 무려 53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편찬되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수정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내용이 적지 않다. 또 중요한 표제어가 누락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표제어의 설명은 너무나 간략하여 그 표제어를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방대한 분량에서 다양한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교백과사전》의 완성은 스리랑카 불교학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불교학의 역사에서도 가히 획기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초대 편집장으로 참여한 《불교백과사전》을 제외한 순수한 그의 저서들 가운데 그 내용과 분량 모두에서 가장 역작은 아마도 《빨리어 고유명사 사전(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Lon-don: PTS, 1937~1938)일 것이다. 이 책은 나온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가치가 빛나는 불교 문헌학의 백미이자 금자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이 사전은 초기불교와 빨리 · 문헌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곁에 없어서는 안 되는 ‘데스크 레퍼런스(desk reference)’이다.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빨리어 고유명사 사전》을 결코 일개 사전으로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1,370페이지의 빽빽하게 인쇄된 두 권짜리 사전으로, 빨리 문헌들에 나오는 모든 고유명사를 표제어로 하고 있다. 예컨대, 빠세나디(Pasenadi)를 찾아보면 6페이지에 걸쳐서 그의 전기가 나오는데,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에서 그가 거론된 경우가 모두 다 언급되어 있으며 그와 관계가 있고 사전에서 표제어로 등재된 다른 모든 인물이 굵은 활자로 강조되어 있다. 이 책 덕분에 후학들은 연구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유형의 사전을 집필하려는 구상은 리스 데이비스(T.W. Rhys Davids)가 먼저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구상은 여러 가지 사정들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부인 리스 데이비스 여사가 키워낸 제자인 말라라세케라가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한자 숙어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가장 알맞을 것이다. 1938년에 런던대학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명예문학박사(D. Litt.)를 수여하였다.

그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저서는 《실론의 빨리 문헌(Pāli Literature of Ceylon)》(London: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928)이다. 이 책은 1928년에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가다듬어 출판한 것이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왕립 동양학회 수상 출판 시리즈(Royal Asiatic Society Prize Publications Series)로 출판되었으며 스리랑카의 불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 BPS)에서 재판을 거듭해오고 있다. 이 책은 스리랑카의 빨리 문헌의 풍부한 유산을 개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불교사를 세련되게 기술하고 있다.

1935년에는 스리랑카의 고대 연대기들 가운데 하나인 《마하왕사(Mahāvaṃsa)》에 대한 주석서인 《마하왕사 띠까(Mahāvaṃsa Ṭīkā)》 또는 《왕사앗타빡까시니(Vaṃsatthappakāsinī)》를 편집하여 《왕사앗타빡까시니: 마하왕사에 대한 주석서(Vaṃsatthappakāsinī: Commentary on the Mah-āvaṃsa)》(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5-1936)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영어로 된 소개문까지 포함하면 모두 813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러한 문헌학적 연구의 연장선에서 그는 1937년에 태국과 캄보디아에서 사본(manuscript)으로 전해져오는 또 다른 《마하왕사》의 판본을 편찬하였다. 이 책이 바로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의 실론 지부(Ceylon Branch)의 알루위하레(Aluvihare) 시리즈로서 간행된 《증보된 마하왕사(Extended Mah-āvaṃsa)》(London: PTS, 1937)이다. 이 책은 스리랑카에 전해오는 《마하왕사》 버전보다 두 배나 많은 것으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스리랑카의 역사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두 업적을 통하여 그는 스리랑카의 불교사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는 유네스코(UNESCO)에서 자야틸레케(K. N. Jayatilleke)와 공동으로 《불교와 인종문제(Buddhism and the Race Question)》(Paris: Unesco, 1958)란 책을 출판하였다.

 

행동하는 지성

앞서 말한 대로, 말라라세케라는 불교학자뿐만 아니라 교육가, 활동가, 외교관으로도 활동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다채로운 경력이 증명하듯이 그는 단지 이론만 앞세우는 불교학자는 아니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유년시절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이 실천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학이 없는 실천은 맹목적인 수행이며, 실천이 없는 교학은 단순한 철학이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붓다는 사람들로부터 ‘말하는 그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그대로 말하는 이(yathā-vādin thatā-kārin, yathā-kārin tathā-vādin)’로 불린 것처럼, 평소 이론과 실천의 겸비를 강조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라라세케라도 학문과 실천을 동등하게 결합하였다. 즉 그는 강단과 연구실에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사회에서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는 영어와 싱할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다 연설도 아주 박력에 넘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의 프로젝트들을 후원하는 지지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탁월한 어학 능력이나 웅변의 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내면에 지닌 고귀한 이상이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표출되었고, 그러한 그의 진정성에 감복한 대중들이 그를 불교 활동가로서 인정하고 따랐을 것이다. 그의 지론은 다음과 같은 말에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불교의 이상은 아라한과의 증득이다. 이러한 이상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도 그러한 행복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불교도는 남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그의 행복은 전 세계의 행복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붓다는 선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행복과 복리에 관심을 갖고(sab-bapāṇabhūtahītānukampi) 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해야만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불교가 전파된 곳에서 불교는 관용, 인류애, 연민, 이해, 그리고 불교 교리의 두 축인 연민(karuṇā)과 지혜(paññā)가 특징인 문명과 문화의 성장을 고무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불교적 관점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는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론에 입각하여 그는 강단과 연구실을 벗어나 사회 속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불교 활동가로서의 그의 활약상은 전실론불교협회(All Ceylon Buddhist Congress, ACBC)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이 협회에서 불교와 관련된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입안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활동하면서 교육, 사회봉사, 불교의 물질적 재산(Buddhist temporalities), 폭력과 과도한 음주, 그리고 윤리학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ACBC의 프로그램에 대규모의 사회적 봉사 항목을 도입하였으며 고아원, 노인주택, 병원과 교도소 서비스를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는 많은 젊은 활동가들을 위한 공인된 멘토(mentor)가 되었다. 젊은 세대의 예술가 · 음악가 · 무용가 · 작가들이 그에게서 조언과 지도를 구했으며, 그를 후원자로 삼지 않고서 조직된 그들의 협회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콜롬보예술협회(Colombo Art Association)는 그를 간사로 삼았고, 콜롬보아트갤러리(Colombo Art Gallery)는 그의 창의적이고 끈기 있는 노력에 힘입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스리랑카 최초의 미인선발대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정부 후원의 실론예술위원회(Art Council of Ceylon)는 그를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말라라세케라는 스리랑카의 라디오 방송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원고 없이 영어와 싱할리어로 하는 즉흥 연설을 통해서 그는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대변자이자 주요 행사들에 대한 해설자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대중들이 제기한 이슈들을 매주 토론하는 즉문즉답(Brains Trust) 프로그램인 부디만달라야(Buddhi-mandalaya)를 주관하기도 했다. 또한 영어로 하는 그의 불교 강연은 영어를 말하는 스리랑카 엘리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와 국가적 유산을 이해하고 그 진가를 인정하도록 하였다.

말라라세케라는 일반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교류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1945년부터 1957년까지 콜롬보의 불교청년회(Young Men’s Buddhist Association) 기관지인 《더 부디스트(The Buddhist)》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으며, 일반 대중을 위해서 대중잡지와 신문에 불교와 관련된 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종교 · 문화적 활동들을 추구하는 많은 협회에 회장이나 간사로서 자발적으로 봉사했다. 그래서 초기에 그가 얻은 닉네임이 ‘모든 기구들의 간사’라는 뜻의 ‘사칼라 세크레다리스(Sakala Secredaris)’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라도 기회만 주어지면 대중에게 강사와 연설가로 나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강연을 들었던 청중은 외딴 마을의 담마스쿨(Dhamma School) 시상식에 참여한 학생들로부터 외국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말라라세케라는 교육특별위원회(Special Committee of Education), 교육을 위한 중앙고문회(Central Advisory Board for Education), 사와바사의 고등교육위원회(Commission on Higher Education in Swabhasa), 공용어협회(Official Language Commission), 라디오 실론의 국가서비스협회(Committee on the Reorganization of the National Service of Radio Ceylon), 싱할리어 어원사전의 편집위원회(Editorial Comm-ittee of the Sinhalese Etymological Dictionary) 등과 같은 스리랑카 정부 기관에서도 초청을 받아 활동하였다.

 

나가는 말

이제까지 본대로 말라라세케라는 불교학자뿐만 아니라 교육가, 종교 · 사회 활동가, 외교관 등으로 활약한 ‘전천후 불교인’이었다. 이러한 다채로운 경력은 그가 학문만 파고드는 불교학자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모두 겸비한 ‘행동하는 지성’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한국 불교학계에게도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라라세케라가 발의하고 22년간 편집장으로 참여한 《불교백과사전》과 그가 이루어낸 학문적 업적들은 지금도 불교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들과 불교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에는 “사람들의 몸은 늙지만 이름과 족성은 늙지 않도다!(Rūpaṃ jīrati maccānaṃ, nāmagottaṃ na jīrati)”22)라는 게송이 나온다. 비록 그는 타계했지만, 불교가 이 세상에 존속하는 한 후학들과 일반 대중의 가슴속에 롤 모델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

 

김한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스리랑카 켈라니야대학(University of Kelaniya) 빨리 · 불교학 전공 박사.역서로 《마라의 편지》 《초전법륜경》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니까야와 아비담마의 철학과 그 전개》 《빨리어의 기초와 실천》 《아비담마 연구: 마음과 시간에 대한 불교적 탐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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