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 근대 불교학의 새 방법론을 제시하다

1. 들어가는 글

오늘날 일본은 세계의 어떠한 나라보다도 불교에 대한 다수의 연구성과가 방대하게 쏟아지는 가히 불교학의 메카와 같은 나라이다. 도쿄대학을 비롯한 국립대학뿐만 아니라 각종 불교종단에서 건립한 많은 사립대학에서 매년 다량의 연구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는 자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으로서 한문에 의거한 문헌뿐만 아니라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티베트어 등 다양한 불교 원전 언어에 의거한 문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교학의 메카로서 다양한 불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일본에서 최초로 근대의 불교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새로운 불교학의 모델을 제시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한문의 해독에 의거한 불교적 이해에서 불교의 원전 어인 산스끄리뜨어 즉 범어(梵語)의 불교문헌 해독으로 눈을 돌려, 범어에 의거한 새로운 학문 방향과 모델을 제시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러한 물음에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운 불교학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이 글에서 다루는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이다.

난조 분유는 일본 근대기 최초로 서양에 유학해 범어를 배우고 귀국해 일본의 불교계에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전하고 아울러 많은 업적을 배출한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여 스승인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 아래서 범어학(梵語學)을 습득하여 큰 성과를 냈고, 일본에 전해지고 있던 범어 불전을 서양에 소개해 일본을 비롯한 동양불교의 전통을 서양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닦아놓은 일본인 불교 연구자의 서양 유학길은 동서양의 불교 이해를 위해서는 물론, 진리에 대한 탐구를 위한 동서양의 종교적인 이해를 위한 큰길의 초석이 되었다. 하지만 난조 분유가 최초로 서양에 유학하게 된 데에는 어떠한 배경이 있었던 것일까? 특히 근대기 일본은 소위 폐불훼석(廢佛毁釋)의 극단적인 불교탄압이 이루어져 불교계로서는 극심한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불교인으로서 최초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난조 분유가 유학의 길에 올라 새로운 불교학의 길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대기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것도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다.

따라서 이 글은 일본 근대기 불교계에 새로운 불교학적 방법론을 제공한 난조 분유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와 더불어 그가 유학을 가게 된 배경, 그리고 그가 이룬 범어 불전 연구의 구체적인 업적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불교의 역사에서 유사 이래 극심한 불교탄압을 감내하던 근대 초기에 서양에 유학해 세계적인 불교 권위자로 인정받아 국제적으로는 물론 국내에서도 불교적 위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난조 분유의 삶과 업적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당시의 불교계 상황과 결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의 작성에는 근년 출간 예정인 필자의 저서에 크게 의존하였다. 아울러 난조 분유를 비롯한 일본 근대불교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우리나라의 근대기 불교 이해에 보다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생애

난조 분유(이하 난조라 약칭)는 1849년 현재의 기후현(岐阜縣)에 해당하는 미노(美濃)의 오가키(大垣)에 있는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의 절 서운사(誓運寺)에서 태어났다. 6세경부터 불교, 유교, 한시 등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0대 후반 메이지유신(1868년)에 이르는 시기에서는 오가키번의 승병(僧兵)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 승병이 소속된 부대가 해산된 1868년 4월, 난조는 대곡파의 교육기관인 고창학료(高倉學寮)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우수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우수성을 인정받은 까닭인지 그는 1871년 에치젠(越前) 난조군(南條郡) 억념사(憶念寺)의 당시 유명한 종학자인 난조 신코(南條神興)의 양자가 되었고, 양부를 따라 각지에서 강설과 설교를 하였다. 1872년 5월에는 본산 사무소에 근무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후에 영국으로 함께 유학을 가는 가사하라 겐주(笠原硏壽, 1852~1883)도 만났다. 1872년 9월에는 난조가 속한 진종대곡파의 법주 겐뇨 상인(現如上人)이 종단의 사람들과 함께 해외 시찰을 떠난다. 이는 일본의 종단 가운데는 정토진종 본원사파에 이은 두 번째의 해외 시찰로, 외국의 종교 사정을 파악하여 종단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겐뇨 상인 일행은 1873년 7월 귀국하여 종정(宗政)의 쇄신과 인재 양성 등의 업무에 실질적인 힘을 기울였다. 특히 해외 시찰 중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범어 불전을 보고 당시 수행 중이던 종단의 사람에게 그곳에 남아 범어 불전의 연구를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연구는 불완전하였고 연구에 임했던 인물도 뒤이어 귀국하였지만, 법주 이하 종단 사람들에게도 범어 불전 연구의 필요성은 확실하게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외 시찰 이후 1875년(메이지 8) 12월 대곡파는 종단에서 만든 학교의 교사를 양성하는 교사교교(敎師敎校)와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종단의 인재를 양성하는 육영교교(育英敎校)를 설립,발족시켰다. 이러한 교육기관이 발족할 즈음 난조와 가사하라는 종단으로부터 영국에 유학하라는 명을 받고 1876년 6월 출항하였다. 영국에 도착해 2년 반 정도 영어를 배운 뒤 1879년 2월, 당시 영국에서 인도학과 범문학 내지 종교학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고 있던 막스 뮐러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함께 유학한 가사하라는 유학 중에 병을 얻어 일본으로 귀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하였다(1883). 난조는 1884년(메이지 17)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막스 뮐러 교수 밑에서 범어학의 토대를 쌓고 다수의 업적을 냈다. 또한 일본에서 전해지고 있던 다수의 범자 관련 문헌도 영국으로 보내 막스 뮐러 교수와 합동으로 연구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유학 중 난조의 가장 큰 성과는 일명 ‘난조 카탈로그[南條目錄]’로 불리는 《대명삼장성교목록(大明三藏聖敎目錄)》의 완성으로, 3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완성된 이 문헌으로 난조는 영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영국에서 받은 이 학위는 후에 일본에서 인정되어 불교계 최초의 문학박사로서 1887년 6월 새롭게 학위수여식도 거행되었다.

영국에서 9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난조는 이듬해 1885년 2월 이후 도쿄대학 문학부의 범어학(梵語學) 촉탁강사에 임명되어 일본에서 최초로 범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범어를 대학에서 가르친 것은 난조가 최초이지만, 일본에서는 실담학(悉曇學)이라는 이름으로 범자를 서사하는 전통이 종단별로 전승되고 있었다. 하지만 범어 문법에 의거한 해독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한문 불전과의 비교를 시도하는 불교학적 방법은 난조에 의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도쿄대학에서 범어학의 강좌 개설은 근대불교학의 실질적인 출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난조는 도쿄대학뿐만 아니라 동본원사가 세운 도쿄의 대곡교교(大谷敎校) 교수가 되어 영어와 범어를 담당하였고 또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가 설립한 철학관(哲學館)에서도 범어 문법을 강의하며, 많은 사람들게 범어의 중요성은 물론 빨리어, 티베트어 등의 불교 원전어 습득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렇지만 1887년 1월 난조는 인도 여행을 위하여 도쿄대학(이 시점에서 정확히는 帝國大學)과 동본원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일본을 떠나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거쳐 콜카타로 들어가 인도의 불교 유적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중국의 상해로 가서 많은 불교 유적을 둘러보고 5월에 귀국하였다. 이 인도와 중국의 불교 유적 순례는 난조에게 불교의 포교와 전파에 강한 의지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난조는 진종대곡파 승려의 신분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 불교계와 교육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가 지녔던 사회적 직함에서 그가 당시 사회적으로나 불교계에서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직함으로 들 수 있는 것으로는 나고야보통학교장(名古屋普通學校長), 겸학일등학사(兼學一等學師), 화족여학교촉탁교수(華族女學校囑託敎授), 진종제일중학료장(眞宗第一中學寮長), 진종경도중학료장(眞宗京都中學寮長), 특파전도사(特派傳道使), 불골봉영사절단장수행장(佛骨奉迎使節團長隨行長), 법주구주순화수행장(法主九州巡化隨行長), 일청전후위문사(日靑戰後慰問使), 제국학사원회원(帝國學士院會員), 진종대학학감(眞宗大學學監), 진종대곡대학학장(眞宗大谷大學學長), 법주상해별원하향수행장(法主上海別院下向隨行長) 등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활동 속에서도 범어학자로서 연구성과를 꾸준히 거두어 일본 불교계에 범어 원전을 사용한 불교학의 방법론에 씨를 뿌리는 역할은 잊지 않았다. 1927년(쇼와 2) 9월 스스로의 삶을 기록한 《회구록(懷舊錄)》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운명하였다. 세수 79세.

이상과 같이 난조 분유는 일본인으로서 최초로 영국에 유학해 범어학과 관련해 화려한 업적을 남기고 귀국해 일본 불교계에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영국 유학의 배경과 범어학 관련 업적 등을 장을 달리해 살펴보기로 한다.

3. 영국 유학의 배경

난조 분유가 영국 유학을 위해 일본을 떠난 것은 1876년(메이지 9) 9월로서, 이 시점은 메이지유신(1868)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는 여전히 메이지유신 이후 본격화된 불교탄압으로서 소위 폐불훼석의 역풍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던 때는 난조의 나이 20세로 진종의 교육기관인 고창학료에 입학하던 때이지만, 이 메이지유신은 불교계로서는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메이지유신의 근대 시작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 정책에 의거한 천황제(天皇制)가 실시되어 당시까지 전승되어온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제도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곧 1868년 3월 공포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에 의해 오랫동안 신사와 사원이 공존했던 상황에서 엄격한 분리가 시행되어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불교탄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불교사원의 강탈로부터 불교사원 파괴, 통폐합, 승려의 강제 환속, 사원의 신사화 등이 무리하게 강제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일본 역사에서 유례없는 정부에 의한 불교탄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에도막부의 근세 시기에 국교의 위상에 있었던 불교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불교탄압이 갓 시작되던 1868년 12월, 호법(護法)의 의지를 가진 불교인들은 정부로부터의 불교탄압에 합심하여 대응할 수 있는 불교종단 연합체 성격의 단체인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 이하 회맹)을 조직하였다. 에도막부의 근세기에는 불교계 종단 간의 교류나 협력은 거의 금지되어 있던 상태로서, 메이지유신 이후 불교계에 대한 통제 관리가 일절 없어진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이 회맹이었다. 이 회맹은 처음에는 교토에서 모임을 가졌고 이후에는 오사카, 도쿄로 그 모임의 외연이 넓어졌다. 도쿄에서 거행된 회맹의 규약서(規約書)를 보면, 회맹에 가입한 종단은 여덟 개의 문제를 핵심으로 하여 함께 단결하여 정부의 방침에 대응할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 여덟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왕법과 불법은 분리할 수 없다는 논(王法佛法不離之論)

2. 기독교를 깊이 연구해 비판 배척한다는 논(邪敎硏窮毁斥之論)

3. 자기 종파의 교학을 잘 연구한다는 논(自宗敎書硏覈之論)

4. 불교, 유교, 신도의 정립을 위해 잘 연구해야 한다는 논(三道鼎立練磨之論)

5. 자기 종파의 폐단을 없앤다는 논(自宗舊弊一洗之論)

6. 새로이 학교를 세워 운영한다는 논(新規學校營繕之論)

7. 각 종파의 인재를 등용한다는 논(宗宗人才登庸之論)

8. 각 지역의 사람들을 잘 가르친다는 논(諸州民間敎諭之論)

 

이러한 여덟 가지의 문제는 당시 불교계가 정부의 탄압에 맞서 불교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였지만, 서구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는 메이지유신의 신풍조 속에 불교계가 새롭게 감당해야 할 내용이기도 하였다. 특히 5, 6, 7의 자기 종파의 폐단을 고치자는 것이나, 학교를 세우는 것,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 것은 각 종단으로서 초미의 관심사로서 실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기도 하였다.

회맹의 단합된 노력도 결실을 맺어 1872년에는 불교도 신도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 종교로 인정하는 새로운 정책에 의거한 종교담당기관인 교부성(敎部省)이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교부성이 발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정토진종 본원사파 소속의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1838~1911)로서, 그는 교부성의 설치 이후 불교계 교육기관인 대교원(大敎院)의 설립이나 폐지 등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마지가 속해 있던 정토진종 본원사파가 불교계로서는 처음으로 서구의 종교 상황 시찰을 명목으로 해외 시찰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1872년 1월의 일이다.

이에 대해 난조가 속해 있던 진종대곡파도 1872년 9월, 본원사파에 이어 두 번째로 해외시찰을 나가게 된다. 여기에는 분명 회맹에서 결의한 종단의 쇄신이나 서양의 상황을 알고자 하는 시대적 사명이 반영되어 있지만, 아마도 본원사파와의 경쟁 관계에서 뒤지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종대곡파의 해외 시찰을 이끈 겐뇨 상인은 그 이듬해 7월 귀국해 종단의 쇄신과 교사교교나 육영교교 등의 새로운 교육기관 설치 등을 감행한다. 그러던 중 종단의 인재로서 난조 분유와 가사하라 겐쥬를 선발해 서양에 유학을 명(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양 유학을 명하게 된 데는 겐뇨 상인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서 본 범어 불전에 대한 기억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곧 서양에 있는 범어 불전에 대한 연구는 당시 일본 불교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종단의 인재를 서양에 유학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발되어 영국으로 간 사람이 난조와 가사하라였지만, 후에 돌아와 일본의 불교계에 범어에 의한 새로운 연구방법을 제시하고 그 성과를 크게 국내외에 과시한 사람이 난조였다.

난조가 영국에 유학하는 사이 일본에서는 1877년 도쿄대학(東京大學)이 설립되고, 2년 뒤인 1879년에는 하라 탄잔(原坦山, 1819~ 1892)에 의한 ‘불서강의(佛書講義)’가 이루어졌다. 이 ‘불서강의’의 이름으로 시작된 불교학 강좌는 이후 인도철학(印度哲學)으로 이름을 바꿔 꾸준히 이루어진다. 난조가 귀국해 범어학을 담당하던 1885년 시점에는 이미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의 불교학이 뿌리를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에 바탕을 둔 범어학을 불교학의 터전에 새롭게 뿌리내리는 계기가 난조에 의해 처음 마련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난조는 범어학자로서도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진종대곡파의 승려로서도 종단의 정책에 앞장서서 따르며 포교와 설교 등을 행해 불교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4. 범어 불전 연구의 업적

난조와 가사하라가 종단의 명령으로 영국에 유학한 것은 종단 내에서는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는 진종대곡파의 법주(法主) 겐뇨 상인의 의지가 깊게 작용하였다고 생각되며, 또 범어 불전을 공부해오라는 종단의 뜻도 난조에게 분명히 전해진 듯하다. 실제 난조가 영국에 도착해 영어를 배우고 있던 중 당시 빨리어의 대가로 영국에서 Pali Text Society 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던 리스 데이비스(T.W. Rhys Davids)가 난조를 방문해 빨리어 문헌의 연구를 권하였지만, 난조는 이를 거절하고 범어를 배우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한다. 난조와 가사하라는 영국에 도착해 2년 반 정도 영어를 배운 뒤에 1879년 2월 옥스퍼드대학의 막스 뮐러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뮐러 교수의 밑에 들어간 이후 난조는 뮐러 교수와 함께 범어 불전에 대해 연구하였고, 이 연구의 결과를 뮐러 교수는 당시 그가 편집책임자로 있던 《동방성서(東方聖書)》에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조는 일본의 법륭사(法隆寺)나 고귀사(高貴寺) 등에 있던 실담문자(悉曇文字)의 불전을 요청해 뮐러 교수와 함께 정리,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 유학 중에 《무량수경(無量壽經, Sukhāvativ-yūha)》 《반야심경(般若心經, Prañāpāramitāhŗdayasūtra)》 등의 범어 불전을 뮐러 교수와 함께 연구, 출간하였다.

 

F. Max Müller : Buddhist Texts from Japan ; Anecdota Oxonien-sia, Ariyan series Vol. 1, Part 1, Oxford 1881, Meiji 14.

F. Max Müller and Bunyiu Nanjio : Sukhāvati-vyūha ; Part II, 1884, Meiji 17.

F. Max Müller and Bunyiu Nanjio : The ancient Palm-leaves containing Prañāpāramitāhŗdayasūtra and the Uṣṇīṣa-vijaya-dhāraṇī ; Part III, 1884, Meiji 17

 

그리고 난조는 이렇게 범어 불전의 연구를 행하는 가운데 후에 그의 학위논문에 해당하는 소위 ‘난조카탈로그(Nanjio Catalogue, 南條目錄)’의 제작에 임하게 된다. 이 ‘난조카탈로그’는 1880년 런던의 인도 사무성(事務省)에서 황벽판(黃檗版)의 대장경을 보고 그 목록의 편찬에 뜻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황벽판은 명(明)의 만력판(萬曆版) 대장경을 황벽종 본산인 우지(宇治)의 만복사(萬福寺) 승려인 철안(鐵眼)이 1681년(天和 元年) 완성시킨 복각판으로, 총 6,950권(속장경 26권 포함)에 달하는 일대총서였다. 이 대장경은 1872년 이와쿠라 견외사절단(岩倉遣外使節團)이 런던에 왔을 때 당시 영국의 중국학자로서 《법현전》을 번역한 바 있던S. 빌(Samuel Beal)이 요청하였던 것으로, 영국에 1875년(메이지 8) 기증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식으로 인도 사무성에 기증되기 전에 영국의 일본 외무성 직원이 잘못 다루어 그 전체 내용이 흐트러졌고, 이것을 정리한 S. 빌도 흐트러진 그대로 정리를 하였다. 이것에 대해 난조는 총 1,662부의 책을 경 · 율 · 논 · 잡장의 4부로 나누어 정리하고, 그 책의 내용에 한역 제명(題名) · 중국어 발음 · 범어 제명을 붙이고, 그 제명의 영역, 역자명과 번역 일시, 간단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것이 난조카탈로그로 알려진 것으로, 정식 이름은 《대명삼장성교목록》이며 이것의 영어 이름은 다음과 같다.

 

A Catalogue of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Buddhist Tripiṭaka : the Sacred Canon of the Buddhists in China and Japan, compiled by the order of the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by Bunyiu Nanjio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883.

 

난조카탈로그는 거의 3년여에 걸친 노력으로 완성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난조는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책은 당시 동양의 서적이 부족했던 유럽에서 한역의 불전을 연구하는 데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책으로 중시되었다. 이렇듯 옥스퍼드에서 범어 불전 연구에 매진한 난조는 9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1884년 5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다음 해 1885년 도쿄대학에서 최초로 범어학 강의가 개설되어 난조가 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인도철학을 담당하고 있던 하라 탄잔(原坦山)은 난조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고 한다.

 

英雄古今有家風 獨把梵書立宇中

영웅은 예나 지금이나 가풍을 갖는데,

홀로 범서를 독파해 우주에 섰네.

君是後生可畏者 何須老朽贊成功

그대는 실로 후생의 가외자이니,

어찌 모름지기 늙었다고 성공을 기리지 않겠는가.

 

난조는 도쿄대학에서 범어학을 가르치던 중 인도 여행을 위해 강사직을 사임하였지만, 실제 퇴직하게 된 것은 1891년으로, 7년여간 도쿄대학에서 범어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난조는 도쿄대학을 그만둔 뒤에도 각종 사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가운데 범어학자로서 연구성과를 꾸준히 냈고, 그의 사후에 결과물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해 출간된 《범문법화경(梵文法華經, Sadd-harmapuṇḍarīka)》 《범문능가경(梵文楞伽經, Laṇk-āvatāra-sūtra)》 《범문금광명최승왕경(梵文金光明最勝王經, Suvarṇaprabhāsa- Sūtra)》 등은 다음의 제명으로 출간되었다.

 

H. Kern and Bunyiu Nanjio : Saddharmapuṇḍarīka, Bibliotheca Buddhica, Vol. X, Saint Petersbourg, 1908-1912, Meiji 41-Tasho 1.

Bunyiu Nanjio and Hōkei Izumi : The Laṇkāvatāra Sūtra, Bibliotheca Otaniensia, Kyoto, 1923, Taisho 12.

Bunyiu Nanjio and Hōkei Izumi : The Suvarṇaprabhāsa Sūtra, Kyoto, 1931, Showa 6.

 

 

5. 나오는 글

난조는 영국에서 귀국해 당시 인도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교학의 교과목이 강의되고 있던 도쿄대학에 최초로 범어학을 강의하였다. 동아시아 전통의 한문 전적에 의거해 이루어지던 불교학의 이해가 서구의 방식 즉 불교 원전어인 범어로 불전을 해독하여 이해하는 새로운 불교학의 방식이 도입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범어 불전의 해독은 자연히 동일한 한문 전적과 비교, 대조로 이어져 불교 연구에 원전어의 습득은 필수적이라는 강한 학문적 인상을 남겼다. 따라서 도쿄대학에서 7년여간 범어학을 강의하는 가운데 난조의 강의는 불교 연구에 범어는 물론 빨리어, 티베트어 등 불교 문헌의 전통을 잇는 제 언어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심어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 일본으로 귀국한 난조에게 막스 뮐러는 인도에서나 티베트에 남아 있는 불교 문헌을 가능한 한 다수 입수하여 연구하라는 뜻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난조의 인도 여행에서는 실제 그러한 불교 문헌을 입수하지는 못한 듯하지만, 난조는 인도 여행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교 언어의 습득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특히 티베트 문헌의 중요성과 불교에 대한 이해로서 티베트 언어 습득을 강조한 난조의 주장이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 노우미 유타카(能海寬)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등이 티베트로 향했다고도 전해진다.9) 그리고 이러한 불교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후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66~1945)가 난조의 추천서를 가지고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남방의 빨리대장경 완역과 같은 거대한 연구성과로 이어진다.

난조 분유는 폐불훼석의 영향으로 불교가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즈음 종단의 유학생으로 영국에 유학해 돌아와 범어 불전에 의거한 새로운 불교학의 연구와 불교의 포교와 전파에 일생을 바쳤다. 난조가 보여준 범어 불전을 이용한 불교학의 방법론은 실제 일본의 근대 불교학이 새로운 방법론에 의거해 불교 문헌의 재이해, 재해석으로 이어져 명실공히 근대 불교학이 정초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난조의 영향 아래 대내적으로는 불교 위상의 제고와 대외적으로는 불교의 세계화, 국제화의 기회가 만들어져 불교학이 더욱 활성화되는 토대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난조는 일본의 근대 불교학이 진정으로 뿌리를 굳게 내리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근대기 최초의 본격적인 불교학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이태승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일본 인도학불교학회 이사, 인도철학회 편집이사 등 역임. 주요 저서로는 《실담자기와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공저), 《을유불교산책》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사상》 외 다수와 역서, 논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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