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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에 반영된 ‘중도’ ‘공’ ‘무아’ 개념* / 장회익
세미나중계 - 중도포럼 2019: 중도와 과학-이 시대의 가치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장회익 zm530@hanmail.net

*  이 글은 2019년 10월 12일, (사)고요한소리 주최 ‘중도포럼 2019: 중도와 과학-이 시대의 가치’(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불교의 ‘중도’ 개념과 현대과학 사상〉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논문을 일부 축약한 것임.

   
 

들어가는 말

불교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는 ‘중도(中道)’ 개념은 사물에 대한 표피적 관념을 벗어나 그 내면에 담긴 심층적 이해를 도모하려 한다는 점에서 근대 과학의 탐구 방식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중도 개념을 통한 불교의 가르침과 과학에서 거두어낸 성과 사이에 일정한 유사성이 있을 것임이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이러한 유사성을 그 일부나마 파악해낸다면, 이는 곧 불교와 과학에 두루 통하는 하나의 보편적 탐구의 길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며, 이를 활용해 불교와 과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불교에서의 중도 개념에 해당하는 현대과학의 사례들이 있는지, 있다면 이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를 살펴나간다. 그리고 중도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 공(空) 개념과 무아(無我) 개념이 현대과학과 어떤 의미에서 관련을 맺을 수 있는지도 조명하기로 한다.

 

1. 중국 삼론종에서 본 중도의 의미

불교의 중도 개념은 초기 경전에 이미 잘 나타나 있으며, 이것은 이후 대승 경전과 중관(中觀) 학파를 거쳐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에 이르면서 더욱 정교해졌다. 그 대표적 논의가 《대승현론(大乘玄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 사중이제(四重二諦)와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대승현론(大乘玄論)》에는 앎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세상에서 통용되는 앎을 세제(世諦)라 하고 이를 넘어서는 한층 심층적인 앎을 진제(眞諦) 혹은 제일의제(第一義諦)라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합하여 이제(二諦)라 부르는데, 이러한 이제가 네 개의 층위에 걸쳐 형성된다고 하는 이른바 사중이제(四重二諦)이다. 또 《대승현론(大乘玄論)》에는 이러한 이제(二諦)를 각각 설정해내는 지혜를 이제각명중도(二諦各明中道)로, 그리고 이러한 이제를 현명하게 결합해내는 지혜를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로 부른다.

이제 이렇게 규정된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가 앞에서 설정된 사중이제(四重二諦)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우선 사중이제에서는 유(有)와 공(空) 개념을 대응시켜 이제를 말하고 있음에 비해 이제합명중도에서는 생(生)과 비생(非生)을 대응시켜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중이제에서는 “유(有)를 세제(世諦)로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로 삼는다”고 말하는데 이제합명중도에서는 이를 비생비불생(非生非不生)이라고 하면서 중도(中道)의 하나로 보고 있다. 사중이제에서 말하는 세제가 유(有)만을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를 가유(假有)로 보아 공(空)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면 이는 이미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진제 또한 공(空)만을 내세우지 않고 최소한 가유(假有)로서의 유(有)를 인정한다면 이 또한 일정한 중도의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보며, 그런 점에서 이들이 각각 이제각론중도(二諦各論中道)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이제(二諦)는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바탕은 여전히 세제와 진제에 두고 있어서 엄정한 의미의 중도에는 아직 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이 둘을 함께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중도가 요구되는데, 이를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세제는 ‘진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세제’여서 진정한 세제일 수 없고, 진제 또한 ‘세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진제’여서 진정한 진제일 수 없으니, 이 둘을 완전한 하나로 엮는 중도 그것이 바로 이제합명중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앞에 말한 사중이제(四重二諦) 구조는 네 단계에 걸쳐 점점 심화되는 이제합명중도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하필 네 단계에서 그쳐야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선종(禪宗)에서는 이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흔히 사구백비(四句百非)라 하는데, 백 번을 부정해도 역시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사중이제론에서도 이를 몰랐을 리 없지만, 같은 논리를 무한히 되풀이한다는 것은 무모할 뿐이므로, 넷째 단계에서 나머지 모두를 아우르는 최종적 진리의 가능성 곧 목표치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해 여기서는 사중이제(四重二諦)와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결합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고, 뒤에 이것이 현대과학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피기로 한다.

 

1단계:

유(有): 세제(世諦), 공(空): 진제(眞諦)

2단계:

유′(새로운 유와 앞의 공 포함): 세제, 공′(새로운 공): 진제

비공′비유′(非空′非有′):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

3단계:

유˝(새로운 유와 앞의 공′ 포함): 세제, 공˝(새로운 공): 진제,

비공˝비유˝(非空˝非有˝): 이제합명중도

4단계:

이들은 모두 우리가 찾은 상대적 진리이다.

참 이치는 오직 가능성만으로 남아 있다.

2. 현대과학에 나타난 중도와 공의 개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중도(中道)의 논리 그리고 이를 확장한 공(空)의 논리는 그 자체가 특정 대상에 대한 어떤 사실을 말한다기보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논의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므로 이는 인간 사고에 대한 메타적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적용 범위에 어떤 제한을 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의 패턴이 불교적 전통 못지않게 치밀한 사고와 논리를 적용해 나름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 현대과학에 적용되지 않았으리라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러한 논의들이 현대과학 특히 물리학의 바탕 관념 구성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장에서는 먼저 사중이제(四重二諦)의 논리가 시공간 개념의 전개 과정에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가를 논의하고, 다시 공(空)이라는 개념이 사물의 구성 물질을 이해하는 데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1) 사중이제(四重二諦) 관점으로 본 현대과학의 공간 개념

현대인들은 거의 누구나 공간이 3차원 구조를 가졌음을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전역학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수평 방향의 평면과 수직 방향의 높이를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지평면을 구성하는 수평 방향의 평면 위에서도 동서남북의 구분은 있었지만, 이는 지형지물 등 우연적인 여건에 기인하는 것일 뿐 원천적으로 모든 방향이 대등하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높이를 나타내는 아래위 쪽 방향은 무거운 물체를 떨어지게 하는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수평 방향과는 원천적으로 구분되는 그 어떤 것이라고 보기 쉽다. 이를 현대의 차원 개념에 맞추어 말한다면 수평 방향의 평면은 2차원 공간을 형성하며, 수직 방향은 이와 독립된 별도의 1차원 공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만에 근거한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공간 개념이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공간 개념과 고전역학을 통해서 얻게 된 3차원 공간 개념은 자연의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우리가 자연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진 바탕 관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관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묻게 되는 물음의 성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적 공간 관념을 취할 경우, 물건이 떨어지는 현상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그런데 우리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것이 왜 안 떨어지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다. 실제로 중세의 동아시아 유학자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엄청난 고민을 해 왔다.

반면 우리가 일단 3차원 공간 개념을 수용하게 되면, 물건이 떨어지는 현상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된다. 수평 방향과 수직 방향은 원천적으로 대등한 것인데, 왜 유독 수직 방향에는 이런 이상한 현상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다. 이것이 바로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라는 유명한 뉴턴의 물음이다. 그리고 뉴턴이 이 물음에 대해 흡족한 해답을 제시했기에 오늘 우리는 3차원 공간 개념을 어렵지 않게 수용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대승현론(大乘玄論)》에 나타난 중도(中道)의 개념과 연결해 해석해보자. 실제로 우리가 지닌 일상적 공간 개념을 세제(世諦)라 하고 고전역학 이후의 3차원 공간 개념을 진제(眞諦)라 할 때, 이것이 사중이제(四重二諦)의 제1단계 즉 “유(有)를 세제(世諦)로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로 삼는다.”는 언명에 적용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유’는 수직 방향의 공간이 “물체를 떨어지게 하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有]”는 주장에 해당한다면, ‘공’은 “그러한 성질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非有], 혹은 그러한 성질의 자리는 비어 있다[空]”는 주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그러한 성질은 다른 이유 때문에 나타나는 겉보기 현상[假有]에 해당하므로 이를 세제중도(世諦中道)라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성질이 본질적으로는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나타나므로 이를 단순한 비유(非有)가 아니라 숨겨진 비유[假非有]로 볼 수 있기에 이것을 진제중도(眞諦中道)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세제와 진제가 모든 면에서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2차원+1차원 관점으로만 보던 것을 3차원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이해의 폭을 한 차원 넓힌 새로운 깨달음에 해당한다. 세제(世諦)에 대비해 진제(眞諦)라는 용어를 쓴 것 자체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 이 단계에서는 이 둘이 합하여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를 형성한다고 볼 수는 없다.

현대과학에 나타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시간 공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한 단계의 이제(二諦)에 그치지 않고, 그다음 단계 곧 “유(有)와 공(空)을 모두 세제(世諦)로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라야 비로소 진제(眞諦)라 부르게 됨”을 밝히는 단계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인데, 여기서는 3차원 공간 개념마저도 가유(假有) 곧 겉보기 관념의 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한 단계 뛰어넘는 4차원 시공간의 개념이 좀 더 적절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사중이제(四重二諦)의 둘째 단계인데, 이를 유와 공의 관점에서 풀이해보면, 앞 단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3차원 공간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성격을 가지고[有] 있었던 것임에 반해, 새 관점에서는 이것마저도 공간의 한 성분일 뿐 그 독자적 내용이 비었다[空]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유(有) 안에는 이 시간의 개념과 함께, 앞 단계에서 진제라 생각했던 3차원 공간 개념이 포함되며, 새로운 공(空)으로서 4차원 시공간이 새 진제(眞諦)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대등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공간의 한 축을 실수(實數)에 대응시킨다면 시간 축은 허수(虛數) 축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만큼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것은 다시 비공비유(非空非有)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두 관점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에 이르게 된다.

현대과학에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셋째 단계의 사중이제 곧 양자역학을 통한 도약으로 나아가고 있다. 양자역학 이전의 단계에서는 4차원 시공간 이외에 이와는 별개로 4차원 에너지-운동량 공간이 있는[有] 것으로 상정해왔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이 독자적인 공간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이 지닌 또 다른 측면 즉 이것의 푸리에(Fourier) 변환 공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 또한 시공 개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사중이제의 셋째 단계에 맞추어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둘째 단계에서의 공(空)인 4차원 시공간과 4차원 에너지-운동량 공간이 새로운 유(有)로 떠올라 모두 세제(世諦)를 구성하게 되고, 이들과 구분되는 4차원 겹-공간이 새로운 공(空)이 되어 진제(眞諦)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서 4차원 겹-공간이라는 것은 푸리에 변환으로 연결된 특별한 관계로 엮어졌다는 점에서 기왕의 세제와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를 다시 이제합명중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제 남아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은 현대과학의 공간 개념이 여기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을 넘어 더 높은 단계의 진제, 그리고 더 높은 단계의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로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현대과학에서는 한층 더 높은 단계를 추구해야 할 것이며, 또 실제로 추구하고 있다. 단지 아직은 모색 중이어서 이렇다 할 성과가 공인되고 있지는 않다.

앞에 소개한 사중이제론(四重二諦論)에서는 이 넷째 단계에서 또 하나의 상대적으로 진전된 합명중도를 제시하기보다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수용된 세 단계의 이제(二諦)가 모두 우리가 설정한 상대적 진리 즉 ‘가르침[敎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아직 진정한 진리[理]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고, 더 이상의 ‘유(有)’가 발생하지 않을 완결된 경지에 이르러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 또한 이것의 성취를 궁극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을 뿐, 그 어떤 손쉬운 완성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다.

이렇게 볼 때 현대과학의 공간 개념 확장에 관한 이러한 도식은 앞 장 말미에 소개한 사중이제(四重二諦)의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 구도 도식과 매우 잘 일치하는 것이며, 이는 불교적 직관과 현대과학의 사고 사이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음을 말해주는 한 사례가 된다.

2)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의미와 현대과학의 물질 개념

우리가 앞에서 본 사중이제 논의에 공(空)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했지만, 이는 대체로 유(有)에 대한 상대적 개념, 더 정확히는 유를 넘어서는 비유(非有)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반야심경》과 용수(龍樹)의 《중론》, 그리고 선가(禪家)의 중심 사상에 자리 잡은 공(空)의 개념은 이를 훨씬 넘어서는 적극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이란 말이 그것인데,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을 이제 과학의 표현 방식에 따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색(色)=공(空), 공(空)=색(色) (1)

이것을 도대체 과학과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을까? 이것이 단순한 동의어의 반복만으로 보지 않으려면 이 언어 속에 숨겨진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숨겨진 항 α를 도입해볼 것을 제안한다.

색(色)=공(空)+α, 공(空)=색(色)-α (2)

이렇게 할 때 이 α라는 항은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는 여건’ 곧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각각의 색(色)이라는 것은 기본 바탕인 공(空)에 각가지의 연기가 덧씌워져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며, 그러니까 그 색에서 이 연기를 다 제하고 나면 기본 바탕인 공만이 남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위의 (2)식에서 이 숨은 여건 α를 제외하고 읽으면 바로 (1)식이 말해주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나오며 이를 일러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 부르게 된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과학 속에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 해석할 수 있는 면모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 가장 간단한 사례로 물의 경우를 보면, 그 형태가 액체인 물뿐 아니라 고체인 얼음이 있고 기체인 수증기도 있다.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물, 얼음, 수증기가 모두 각각 서로 다른 색(色)에 해당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들은 모두 H2O 분자들의 서로 다른 모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이 공통 요소인 H2O 분자들을 공(空)이라 부른다면 위의 (2)식에 나타난 바와 같은 형태가 된다.

색(色)=공(空)+α

여기서 α는 주변의 온도를 비롯한 내외의 여건 곧 연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 α를 제외하고 “물은 H2O다” “얼음은 H2O다”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H2O가 공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H2O 또한 하나의 색(色)이라고 보아야 옳다. H2O뿐 아니라 각양각색의 분자들이 모두 색이며, 이들을 이루는 공통의 요소인 원자들을 상대적으로 공이라 칭할 수 있다. 이 분자들은 모두 이 원자들로 구성되며 오직 이를 구성하는 여건 α만이 다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자들 또한 그 자체가 공(空)이 아니라 다른 더 기본적인 입자들이 서로 다른 여건에 의해 얽혀 이루어진 구성물 곧 색(色)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인 바탕 곧 진정한 의미의 공(空)은 무엇인가? 이것은 아직도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있다고 상정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색(色)은 이 진정한 공(空) 위에 각양각색의 α들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곧 색(色)=공(空)+α1+α2+α3+…… 형태로 적을 수 있으며, 여전히 α들을 빼고 읽으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된다. 마찬가지로 α들을 빼고 말하면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공(空)은 현대과학이 아직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는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우주의 최초 이른바 대폭발(Big Bang) 당시, 모든 것이 하나의 점에서 아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것이 공(空)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 α1, α2, α3……들이 붙어 오늘의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3. 온생명 관점에서 살펴본 아(我)와 무아(無我)의 의미

불교 경전에는 아(我)와 무아(無我)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이들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아(我), 무아(無我) 개념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 특히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는 ‘나[我]’의 개념 또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온생명에서 보는 ‘나’의 개념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아(我) 혹은 무아(無我)의 개념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지는 않을까?

이 점은 학문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가 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학문 특히 과학이 담고 있는 개념들은 사물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지만, 삶의 지향성 문제에 대해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의가 삶의 주체인 ‘나’와 관련될 때는 곧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문제는 생명의 이해라는 과학적 관심의 주제와 관련이 되면서도 또 삶의 지향이라고 하는 실천적 과제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여기서는 먼저 현대과학 특히 온생명 이론에 나타나는 ‘나’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것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아(我)와 무아(無我) 개념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나’라는 관념 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이며 또 내게 있어서 이 생명을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이기에 이 논의는 결국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가 그간 추구해 온 바에 따르면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온생명’이다. 그러나 아직 많은 이들에게 이것이 생소한 개념이기에 여기서 그 개요만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흔히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구분하고 살아 있는 존재가 지닌 ‘살아 있음’이란 성격을 추상화하여 이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존재, 예컨대 다람쥐나 소나무는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것 예컨대 바윗돌이나 시냇물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 본다. 그런데 문제는 고립된 다람쥐나 소나무가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소나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공기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햇빛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람쥐가 살아 있기 위해서도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하고 또 먹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생명은 분리된 이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그 어떤 전체가 함께하는 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이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모든 인과관계의 그물 속에 존재하기에, 생명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인과의 실타래가 어디까지 뻗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과의 실타래가 더 이상 밖으로 뻗어 나가거나 들어오지 않는 전 영역을 찾아내었다면, 생명은 바로 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지구상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태양과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한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이루며, 이 안에 비로소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이 인과의 실타래를 말하기 전에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사람도 없었으며 이를 지칭해 부를 수 있는 이름조차 없었다. 따라서 필자는 처음으로 이를 ‘온생명(global life)’이라 명명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렇게 할 때, 다람쥐나 소나무와 같은 낱낱의 생명체들은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이런 하나하나의 낱생명은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 할 때에 한해 생명의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조건부 생명이 된다. 우리가 이제 온생명의 이 나머지 부분을 ‘보생명’이라 부른다면, 하나의 낱생명은 그 보생명과 함께 할 때에 비로소 생명으로서 자격을 가진다는 이야기이다.

현대과학은 이러한 온생명과 그것의 생리를 밝힘으로써 생명에 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 안에는 여전히 과학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숨겨져 있다. 즉 이 안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물들이 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서로 섞이고 변형을 이루어낸다면 점점 더 정교한 존재들이 나타나게 됨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심오한 물리학 법칙으로도 그 안에서 ‘주체로서의 나’가 발생하리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방도는 없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적어도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를 설명할 가장 적절한 방식은 일원이측면론(一元二側面論)을 택하는 길이다. 즉 이를 기존의 객체적 현상들과 같은 반열에 놓인 또 하나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현상 그 자체의 이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숨겨진’ 속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모든 객체적 현상의 모습을 이것이 지닌 외적 혹은 표면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현상의 내부에서 파악의 주체가 나타나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게 되는 내적 혹은 이면적 속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둘은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나타내는 두 가지 양상, 곧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나’가 굳이 어떤 제한된 범위의 실체 곧 ‘내 몸’과 연계를 짓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 의식이 내 몸에 국한된 신경조직망을 통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고, 더 중요하게는 이것의 활동을 통해 보호해야 할 대상이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경조직망은 외부의 정보도 입수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보호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개별 신체를 넘어서기도 함을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너’와 ‘나’를 다시 아울러 ‘집합적 주체’인 ‘우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주체 곧 ‘나’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작은 나’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를 인식함에 따라 ‘더 큰 나’로 그리고 ‘더욱더 큰 나’로 내 주체성을 계속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인간의 집합적 주체 안에 담겨 있던 자아의 내용은 ‘인류’ 곧 생물종으로서 인간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인간은 인간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을 ‘자연’이라 부르며 이를 오히려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을 당연시해왔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오랜 기간 자연 속에서 자연을 극복 혹은 활용해가며 인간의 자리를 넓혀가는 것을 발전이라 여기고, 이러한 발전을 문명이 지향할 주된 지표로 삼아 오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이들이 합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 온생명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온생명에로까지 확장해야 한다. 사실 온생명이야말로 나를 포함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체이고 또 진정으로 보호해야 할 소중한 존재이기에 ‘더 큰 나’ 속에 온생명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이러한 상황을 ‘삶’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해보자. ‘삶’이란 한마디로 ‘생명의 주체적 운영’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만일 주체가 없다면, 현상으로서 생명의 일부는 될 수 있으나 진정한 의미의 ‘삶’을 가졌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는 ‘나’ 속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어떠한 의미의 삶을 사느냐 하는 말을 할 수 있다. 낱생명으로의 ‘내 몸’을 ‘나’로 의식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며 또 불가피한 것이지만,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가장 작은 ‘삶’ 곧 소인(小人)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류’로서의 ‘나’까지 의식한다면 이는 전통적 윤리에 부합되는 ‘삶’ 곧 군자(君子)의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 안에 온생명까지 담길 때 비로소 대인(大人) 또는 성인(聖人)의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삶의 형태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요소를 주체적으로 균형 있게 배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배합을 얼마나 조화롭게 이루며 사느냐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이제 온생명 관점에서 보는 이러한 ‘나’와 불교 경전에 나오는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또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불교 경전에서는 ‘나’ 자체에 대한 직접적 논의보다는 ‘무아’와 ‘자아’를 말하는 과정에서 ‘나’의 성격을 다분히 역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즉 무아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무아(無我) 사상이 가진 진정으로 중요한 면모가 바로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한 중요한 요소를 부정하는 데에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무아 사상이 부정하는 진정으로 중요한 대상은 개체 생명으로서의 ‘나’, 좀 더 정확히는 개체 생명으로의 ‘나’를 전부로 여기는 그 생각 자체에 해당한다.

이를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생명은 오히려 온생명이며 낱생명은 그저 온생명을 바탕으로 하여 잠시 조건부적으로 머무는 것인데, 이를 생명의 전체로 보아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모든 바른 삶을 살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수많은 고통과 재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도로서 깨우침을 얻어 이 작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진정한 무아(無我) 사상의 본질이며, 이 점에서 경전의 가르침은 온생명을 진정한 생명 그리고 진정한 ‘나’로 생각하는 현대과학의 관점과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온생명 관점에서는 온생명을 위주로 한 여러 단위에서의 ‘나’ 즉 동심원적으로 조화된 ‘나’의 의미를 긍정하고 이 안에서 삶의 뜻을 찾아 나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보는 데에 반해, 불교 경전에서는 이 작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는 데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적인 차이일 뿐 그 본질에서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닐 수 있다. 강조점을 온생명에 두고 이를 진정한 ‘나’라고 할 경우, 자연히 낱생명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서 이것이 초래하는 고통과 재앙에서 벗어날 것이고, 반대로 강조점을 무아(無我)에 두어 낱생명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하면 자연히 더 큰 의미의 삶 곧 온생명을 지향하는 삶으로 그 중심점을 옮겨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자세로 본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온생명에 대한 어떤 직관적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그 실천적 내용을 설파한 것이라 보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맺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개념이 실제로 현대과학 사상 안에 매우 중요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대과학 안에 중도의 개념이 반영된 것이 불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과학 자체의 독자적 발전을 통해 이루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곧 중도의 방법 혹은 중도의 지혜라는 것이 종교의 영역에서 그리고 과학의 영역에서 진리를 깨우쳐 가는 근원적 방식임을 각각 독자적으로 입증해 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로 무관한 두 영역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동일한 메타 진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 메타 진리 자체의 신빙성을 그만큼 더 높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우리는 이제 진리를 깨우쳐 가는 매우 유력한 방법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이 점은 우리 시대에 각별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오늘 우리는 놀라운 기술문명을 이루어내었음에도,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기술문명으로 인해, 우리 생존의 바탕 여건이 붕괴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를 되돌려 바른 삶의 길을 찾아 나갈 진정한 지혜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경전의 오래된 가르침이나 현대과학의 새로운 조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대다수의 사람이 이를 제대로 깨우쳐 나갈 올바른 방법론과 적절한 지혜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깨우침이나 과학에서 말하는 자연의 바른 이해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우침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몇몇 선각자들이 아무리 외쳐본들 쇠귀에 경 읽기밖에 되지 못한다. 결국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이러한 깨우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깨달음의 방법론 곧 중도의 지혜이다. 이 방법론의 신빙성을 이제 불교에서뿐 아니라 과학에서 함께 입증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긴급한 요청에 부응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장회익
경희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물리학과에서 고체물리학 연구(논문 〈GsSb의 에너지밴드 구조〉)로 박사학위 받음. 미국 텍사스대학교 연구원과 루이지애나대학교 방문교수를 거쳐 30여 년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주요 저서로 《물질, 생명, 인간: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등.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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