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1. 통계로 본 한국사회의 자살 현황과 유형

최근 많은 매체와 논문들은 OECD 회원국 중 한국의 자살률이 1위라 말해왔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리투아니아가 1위였고 한국은 2위였다. 그러나 최근 OECD 데이터를 살펴보면(2017년 통계자료 기준)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24.4명의 리투아니아를 제치고 다시 1위를 탈환했다. 3위는 러시아, 4위는 헝가리, 5위는 일본이었다. 러시아는 10만 명당 자살자가 2007년에는 28명이었으나 2017년에는 17.9명으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으며, 헝가리도 2007년 23.3명에서 2017년 15.1명으로 줄고 있다. 일본 또한 2007년에는 22.1명이었으나 2017년에는 15.2명으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2007년 28.7명이었고 2017년에는 24.6명을 기록하며 자살률이 줄어들고 있지만,1) 다른 나라의 자살률이 20명대에서 15명대로 진입한 데 비하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자료에 의하면 국내 사망원인 1위는 암이고 심장질환, 뇌혈관 질환, 폐렴에 이어 자살은 5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며 40대부터 50대까지의 사망원인 2위도 자살이다. 성별 자살률은 남성이 10만 명당 34.9명, 여성은 13.8명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2.5배 더 높았다. 교육 정도별 자살 사망자 비율은 고졸이 37.4%, 대졸이 21.6%, 중졸 13.3%였다. 직업별 자살 현황은 ‘학생, 가사, 무직’이 53.8%, ‘서비스 및 판매’가 10.5%였다. 자살 동기는 ‘정신적 · 정신과적 문제’가 31.7%로 가장 높았고, ‘경제생활 문제’ 25%, ‘육체적 질병’ 20.6%, ‘가정문제’ 8.9%, ‘직장문제’ 3.9% 순이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서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정신적 · 정신과적 문제의 비율이 가장 높고 2013년 이후 경제생활 문제의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적 · 정신과적 문제의 배경을 밝히고 있지는 않다. 정신적 문제는 쉽게 말해 정신질환을 의미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울증이 있다. 사실 자살과 우울증은 연관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위의 직업별 자살 현황에서 자살 의도가 높았던 층은 학생, 가사, 무직이었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일반인보다 자살 생각 경험률이 4배 이상 높았다는 점, 그리고 소득수준이 하위권인 경우 상위권보다 자살 생각 비율이 3.2배 높았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 중 하나는 경제적 이유이다. 또한 자살 동기 3위인 질병은 치료를 수반하고 치료는 경제적 사정을 반영한다. 주관적인 추측을 토대로 보면 정신적 문제, 경제생활 문제, 육체적 질병 등 1위부터 3위까지의 자살 동기 모두에 경제문제가 포함될 가능성이 많다.

현대사회에서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무엇일까? 돈이다. 현대사회는 자본과 물질 중심사회이다. TV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아파트, 고급승용차,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우아하게 업무를 보는 주인공 등 경제적 부와 관련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화면 밖에서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거나 갑질하는 고객을 응대한 뒤 지친 몸을 누이고, 혹은 고시원 쪽방에서 라면을 먹으며 그런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드라마의 장면들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 인터넷, TV, SNS 등 거의 모든 매체에서는 돈을 미화시키며 물질 중심사회를 건설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연봉, 거주지의 기준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의 목숨을, 혹은 가족의 목숨까지 강제로 종료시켜버리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자살문제 배경에는 경제적 부, 물질중심주의가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에는 여러 가지 자살 사례가 등장한다. 당시의 자살도 경제적인 이유가 원인이었을까? 물론 교단 내 구성원들은 이미 물질적 욕망을 던지고 깨달음을 구하러 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현시대 사람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초기경전의 자살 관련 사례를 살피는 것은 자살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알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2. 인간은 왜 자살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이며 청소년과 청년(10대~30대) 사망원인 1위도 자살이다. 청소년 자살 동기는 ‘학업 스트레스’ ‘가족 경제상태’ ‘거주 상태’ 등이며 타 연령대의 자살 동기는 ‘정신과적 문제’ ‘경제생활 문제’ ‘질병’ 등이었다. 정신과적 문제는 대표적인 정신질환인 우울증을 뜻한다. 국내 자살자들의 약 70%가 자살 당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우울증은 지각, 판단, 기억, 사고에서 대인관계와 일상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 마음 상태로 무기력, 슬픔, 상실감, 열등감, 무가치감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정신장애이다.

앞에서 살펴본 자료에 따르면 경제문제 역시 자살의 주요한 동기이자 배경의 하나이다. 실제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45세~55세의 연령층에서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고 1995년부터 2014년까지 남성 자살률이 여성보다 높게 나타났다. 남녀 간 자살률 차이는 1998년(16.2명), 2004년(17.5명), 2011년(23.2명)으로 그 폭이 특히 컸다. 이는 경제활동을 책임지던 남성이 IMF 사태로 인해 타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물론 경제문제가 자살의 모든 동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을 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자살은 개인적 문제이긴 하지만 특정 시점에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은 사회적 요인이 자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자살 연구의 선구자인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의 요인을 비사회적 요인과 사회적 원인 2가지로 구분한다. 비사회적 요인으로 정신질환, 유전, 모방, 기후가 있고, 정신질환의 예로는 조증, 우울증, 강박증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회적 원인에는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17) 아노미성 자살18)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노미성 자살은 국내 자살률 증가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노미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공통가치나 규범의 기준이 무너져 혼돈에 빠진 상태를 뜻한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경쟁구조 심화, 양극화, 고령화, 이혼율 증가, 출산율 저하, 혼인 연령 상승 등 급격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살률이 급증했다. 만약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면 질서가 흔들리고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살률도 증가한다.

인간은 정신적 측면의 지위를 중시하는데 만약 경제위기로 인해 사회적 계급이 하락하면 욕구를 줄이고 자신이 누리던 것을 절제해야 한다. 지위가 갑작스럽게 하락한 이들은 새롭게 변한 상황의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새로워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며, 또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미래를 떠올려도 막막하다. 그래서 어떠한 노력을 시도하기도 전에 초라하게 쪼그라들어버린 삶을 포기한다. 많은 연구에서 경제적 불안정이 자살 가능성을 높인다고 주장하지만, 뒤르켐은 불황기, 호황기를 떠나서 한 사회의 경제 상황이 급변하면 자살률이 상승한다고 말한다. 호황으로 인한 급격한 부의 증가는 계급의 이동을 야기하며 상위권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낙오된다. 그리고 부의 증가로 인해 절제되던 욕망은 한계를 넘어 통제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아노미 상태를 부추기고 자살률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국내의 연구에서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과 경제 규모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나 자살률은 낮아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득의 증가가 골고루 반영되지 않고 양극화되면서 상대적 빈곤감이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렇듯 자살의 동기에는 개인적 측면에서는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 사회적 측면에서는 경제적 불황 또는 호황 같은 급격한 변화가 있다.

그러나 자살의 동기를 정신장애, 경제문제 등으로만 명확하게 단정하기는 힘들다. 자살은 성격, 기질, 가정환경, 몸과 마음의 상처 등의 개인적 측면과 경제, 정치, 문화 등 사회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가 어느 순간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특정한 자살 원인이나 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한 가지 원인으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며 누군가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는 많은 요인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3. 불교 경전에 나타난 자살 사례

그렇다면 불교는 자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붓다 재세 시의 사건과 사실들을 기록한 초기경전에는 대략 68건의 자살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유형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자살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체의 혐오에 의한 경우: 60건(웨살리의 비구들 60명)

자살 사례에 대한 언급은 대승불교 문헌에도 있으나 초기경전의 사례들은 매우 사실적이다. 따라서 선행연구에도 이미 그에 관한 논의들이 있다. 먼저 살펴볼 사례는 비구들의 집단자살 사례이다. 어느 날 붓다는 웨살리 숲에서 부정(不淨, asubhā)에 대한 수행을 강조하며 그 방법을 설명한 뒤, 한동안 홀로 수행할 것이니 탁발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제외하고 자신을 찾지 말라고 하셨다. 보름 뒤 붓다가 수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많은 비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붓다는 아난다를 불러, “아난다여, 왜 비구 승가가 줄어들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아난다는 세존께서 부정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수행에 들어가신 뒤 부정관 수행을 닦은 비구들이 하루에 10명, 다음날 20명, 그다음 날에는 30명이 칼로 자결했다고 말했다. 물론 경에서 말한 수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경에 따르면 3일간 무려 60명이 자살한 것이다. 부정관은 인체의 장기 및 구성물질(피, 땀, 털, 배설물 등)과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관하며 욕망을 제어하는 수행이다. 부정관에 몰두한 비구들은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혐오했고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이에 아난다는 붓다에게 다른 방법을 설해 달라고 했고, 붓다는 웨살리에 머무르는 비구들을 소집해 들숨 날숨의 수행(anapanasati)을 설했다.

2) 병고에 의한 경우: 3건(왁깔리, 앗사지, 찬나)

비구 왁깔리(Vakkali)의 경우, 그는 당시 큰 병에 걸려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붓다가 왁깔리를 방문해 차도가 있냐고 묻자, 왁깔리는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며 병세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답했다. 붓다가 그에게 후회하거나 자책할 일이 있냐고 묻자, 왁깔리는 후회할 일은 없지만 이제 붓다를 친견하러 갈 힘이 없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는 “썩어 없어질 이 몸을 봐서 무엇하겠는가.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고 말하며 육신과 자아의 무상함을 설했다. 붓다가 돌아간 후 왁깔리는 비구들에게 자신을 한적한 곳으로 옮겨 달라 청했고,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옮겨졌다. 하루가 지나고 붓다는 비구들에게 “왁깔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죄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죄짓는 자로 임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비구들은 왁깔리를 만나 붓다의 말을 전했고 왁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육신의 무상함에 의문이 없으며 무상함은 괴로움이라는 진리에 의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욕구나 탐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에도 의심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붓다에게 전해주길 부탁했다. 비구들이 붓다에게 말을 전하러 가자 왁깔리는 칼로 자결했다. 얼마 후 붓다는 왁깔리의 시신을 보며 “비구들이여, 왁깔리는 어떤 의심도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앗사지의 경우도 비슷하다.

다음으로 찬나(Channa)의 사례가 있다. 그도 왁깔리처럼 큰 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병문안을 온 사리뿟따가 차도가 있냐고 묻자, “사리뿟따여, 참으로 힘듭니다. 마치 힘센 사람이 칼로 머리를 치고, 가죽끈으로 제 머리를 힘껏 동여매듯이 너무나 아픕니다. 백정이 제 배를 도려내듯 배가 아프고 불구덩이 위에서 사람을 태우듯 몸에는 극심한 열이 끓어오릅니다. 저는 자결하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리뿟따는 그를 만류하며 좋은 약을 구해올 것이고 간병인이 되어주겠다 말했다. 그러나 찬나는 긴 세월 동안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따랐으니 칼을 사용해도 자신은 비난받지 않을 것임을 알아달라고 간청했다. 사리뿟따는 찬나에게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나의 것이고 나라는 자아로 관하는가 묻자, 찬나는 그 여섯 가지는 나의 것이 아니며 자아가 아니라고 답한다. 사리뿟따는 찬나에게 “욕망이 없는 자는 동요가 없고 고요함이 있다. 죽고 다시 태어남도 없다. 이것이 세존의 가르침임을 마음에 새기시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찬나는 그가 떠나자 칼로 자결했다.

3)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경우: 2건(고디까, 부루나)

다음으로 고디까(Godhika)의 사례가 있다. 고디까는 평소 방일하지 않고 근면히 수행해 해탈에 도달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해탈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수행해서 해탈에 도달했으나 다시 멀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일곱 번째 해탈에 도달했을 때 ‘여섯 번이나 나는 해탈에서 멀어져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나는 칼로 자결을 하리라’고 마음먹었고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고 말았다. 고디까의 죽음 후 붓다는 ‘고디까는 항상 선을 닦고 선정을 기뻐했으며 목숨에도 집착하지 않고 밤낮으로 정진했다.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뿌리 뽑은 뒤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라고 말했다.

부루나의 경우, 그는 어느 날 붓다에게 수나빠란따(Sunāparanta)로 가서 머문다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는 “부루나여,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거칠다. 그 사람들이 그대에게 욕설하거나, 손찌검하거나, 흙덩이를 던지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칼로 베거나, 칼로 목숨을 빼앗거나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부루나는 “욕설을 하면 손찌검을 하지 않아 고맙고, 흙덩이를 던지면 몽둥이로 때리지 않아 고맙고, 칼로 베면 목숨을 빼앗지 않아 고맙고,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세존의 제자들 중 일부는 부정관을 행하다 칼로 자결을 했는데 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여길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붓다는 부루나가 인내력과 고요함을 구족했다고 찬탄하며 수나빠란따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부루나는 수나빠란따 지역에 머물면서 안거 동안 오백 명의 남녀 신도를 얻었고 이후 열반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부루나(Puṇṇa)의 경우 사실, 경에는 명확한 자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으로는 자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일종의 ‘순교’에 해당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붓다의 우려에서 보면 수나빠란따는 위험한 지역이었으나 부루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법을 위해 떠났으며 또한, 이후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4) 노환에 의한 경우: 3건(사리불, 목건련, 마하빠자빠띠)

한역 초기경전에도 아라한의 자살 사례가 있다. 붓다의 상수제자인 사리불(Sāriputta)과 목건련(Moggallāna), 붓다의 양모인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i)의 자살 사례 등이 있다. 먼저 사리불의 사례를 보자. 어느 날 목건련이 이교도의 공격을 받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다친 몸을 이끌고 사리불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리불은 “그대는 신통이 제일인데 왜 그 일을 미리 피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목건련은 “내가 본래 지은 죄업이 무거우니 과보를 받기 위해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목건련은 “중생의 몸은 그 수명이 매우 짧고 또한 세존께서도 머지않아 열반에 들 것이니 하직 인사를 하고 자신도 열반에 들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리불은 목건련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붓다를 찾아가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멸도에 들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붓다는 잠시 침묵한 뒤에 그런 마음을 낸 연유를 묻자, 사리불은 목건련의 말을 붓다에게 전하면서, “저는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세존께서는 제가 멸도에 드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결국 붓다는 이를 허락했고 사리불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열반에 들어갔다. 목건련은 사리불이 멸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붓다를 찾아가 “사리불은 이제 멸도하였습니다. 저도 지금 세존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멸도에 들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이에 목건련은 두 번, 세 번 간청했으나 붓다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목건련은 붓다께 예를 올리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한동안 교화 활동을 했으나 다시 중병을 얻었다. 이때 목건련은 맨땅에 자리를 펴고 선정에 들어가 멸도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마하빠자빠띠는 붓다의 생모인 마야의 죽음 후 붓다를 양육한 사람이며 교단 최초의 비구니이기도 하다. 어느 날 마하빠자빠띠는 붓다의 제자들로부터 붓다가 몇 달이 지나기 전에 멸도에 들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후 그녀는 붓다를 찾아가 “저는 세존께서 몇 달이 지나기 전에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하실 것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세존이 멸도하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제가 먼저 멸도하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라고 했다. 붓다는 침묵을 지켰다. 마하빠자빠띠는 붓다에게 예를 올리고 돌아가 비구니들에게 “나는 지금 열반의 세계에 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얼마 뒤 열반에 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라고 말하고는 멸도에 들었다.

사리불, 목건련, 마하빠자빠띠의 자살 동기는 모두 붓다의 입멸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 세 명의 경우는 일종의 문학적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붓다의 입멸은 그만큼 교단에서 매우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라한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생사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덧붙여 당시 마하빠자빠띠의 나이는 120세였고, 사리불과 목건련도 84세로 붓다보다 세납이 많았으며 몇몇 경전과 주석서에서도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수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켰다기보다는 일종의 노환으로 인해 입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4. 자살에 대한 불교의 입장

그러면 이상의 사례에 대한 붓다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명은 자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1) 교리적으로 불용: 웨살리 비구들

자살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기본교리인 불살생계와 부합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자살 동기는 대부분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회피이다. 자살은 물론 생명에 대한 자신만의 고유권한이긴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의 사후에 정신적 · 물질적인 뒷감당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살은 다른 이를 자극해 또 다른 자살을 야기하는 이기적인 동기를 유발하는 행위이다. 붓다 당시 교단에서는 안거를 행했는데 안거의 이유 중 하나는 우기 동안 작은 생물의 살생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불교는 인간, 동물, 곤충까지도 죽이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종교이며 자살은 당연히 살생의 범주에 포함된다. 따라서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상윳따 니까야의 집단자살 사례를 다시 보면, 웨살리 비구들은 부정관을 행하며 일부가 자살했다. 이를 본 다른 비구들도 그 영향을 받아 며칠간 수십 명이 자살했다. 부정관은 인체를 구성하는 장기, 체액 등을 관하고, 시체가 부패해가는 모습을 관하는 것으로 본래 목적이 육신의 욕망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은 부정관의 본래 취지를 망각하고 육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에만 사로잡혀 자살을 택했다. 그들은 왁깔리, 고디까, 찬나의 경우처럼 아라한이 아니었으며, 붓다 또한 자살한 이들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는 언급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의 자살 동기는 일종의 심리적 혐오증으로, 현 사회의 ‘정신과적 문제’로 인한 자살의 동기와 유사하며 율법을 어긴 경우이다. 붓다가 이들의 자살을 동의하지 않고 다른 수행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은 염세적 관념으로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 불가피한 경우 안락사를 허용: 왁깔리, 앗사지, 찬나

왁깔리, 앗사지, 찬나의 자살 동기는 병으로 인한 지독한 고통,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기 힘든 조건 때문이었다. 특히 찬나는, ‘가죽끈으로 머리를 동여매듯이, 백정이 배를 도려내는 듯이, 불구덩이 위에 올려진 듯이 아프다’는 등 통증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질병과 통증은 현 사회의 자살 동기에도 포함된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자살한 사람의 약 70%가 1회 이상 급성 질환을 겪은 적이 있으며, 죽을 당시 대부분 만성 질병을 갖고 있었고, 90% 이상이 질병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통증은 우울증 유발과 자살 의도에 영향을 주며 통증과 자살 의도는 정적 상관관계를 보였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유사하지만, 자살자 간 차이는 있다. 다시 말해, 왁깔리와 찬나는 붓다와 상수제자들에 의해 인정받은 아라한이었다. 왁깔리는 그가 자살하기 직전, “세존이시여, 저는 육신의 무상함, 무상함은 괴로움이라는 진리에 의문이 없으며 나에게 탐욕이 없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아라한의 경지에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들의 죽음 후 붓다는 ‘그들은 어떤 의심도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인정했다. 붓다가 그들의 자살을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아라한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의 자율적인 판단으로 자살을 택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부분은 마치 붓다가 자살을 인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전에서도 붓다가 자살을 권유하는 대목은 찾을 수 없다. 붓다가 자살한 아라한을 비난하지 않고 그 선택을 존중한 것은 자살을 찬성했다기보다 자비로 그들을 감싼 것이다. 그들은 이미 지독한 통증과 함께 자기의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그들은 죽음은 자살이 아닌 안락사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위 세 아라한의 사례는 안락사와 관련된 광범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경의 내용을 보면 마치 붓다가 자살을 방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당시 상황은 현재처럼 의학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락사의 정의에 따르면 세 아라한의 경우는, 물론 죽음의 방법이 현 사회의 기준과 달랐지만, ‘자의적(vouuntary) 적극적 안락사’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며 필자 또한 추후 안락사와 불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3) 종교적 신념에 따른 행위를 비난하지 않음: 고디까, 부루나

고디까의 자살 동기는 일종의 신념에 따른 행위였다. 고디까는 많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정진해 해탈에 이르렀으나 삼매에서 깨어나면 멀어졌다. 하지만 다시 근면히 수행해 해탈했지만, 또다시 멀어졌다.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다가 다시 일곱 번째 깨달음에 이르자 자살했다. 이때 악마 마라는 붓다에게 다가가 “세존이시여, 명성이 자자하신 분의 제자가 어찌 자살을 합니까?”라고 하자 붓다는 “현자들은 삶에 연연하지 않고 때로는 그 같은 행위를 한다. 고디까는 이미 욕망의 뿌리를 뽑아내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라고 하며 고디까를 아라한으로 인정했고,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붓다는 그가 평소 근면히 수행하며 해탈을 성취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자살 동기는 순수한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라 본다.

그리고 부루나의 경우, 경전에는 그가 자살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법을 전하러 가고자 했던 수나빠란따는 폭력과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던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다. 이는 부루나가 붓다에게 그곳으로 전법하러 가겠다고 하자 붓다는 그를 걱정하며 “그 지역 사람들은 매우 거칠다. 그대에게 욕설을 하거나, 몽둥이나 칼로 해를 가하거나, 심지어 죽이면 어찌하겠는가?”라고 질문하며 우려를 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루나는 자신이 해를 입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해도 모두 감당해낼 것임을 붓다에게 알리고는 끝내 수나빠란따로 갔다. 앞서 말했듯이 수나빠란따로 간 부루나는 약 천 명을 교화시키고 교단을 만들었으나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없다. 간단히 그 지역에서 열반에 들었다고만 언급된다. 붓다와의 대화로 추정컨대 부루나는 전법을 위해 순교했을 가능성이 있다. 붓다는 부루나가 그렇게 될 가능성을 알았기 때문에 심히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의 결심과 선택을 받아들였다.

 

5. 자살,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글에서 필자는 불교의 관점에서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자살이 살인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자살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이다. 그리고 국내 통계자료에서 자살은 ‘고의적 자해’로 표기되는데, 이는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신체를)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다. 이를 종합하면 자살에는 ‘의도성’ ‘살해’가 포함되며, 넓은 의미의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자살은 다른 종류의 살인이다. 불교에서는 계행을 강조하는데 여러 계행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불살생(不殺生)이며, 어떤 종류도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경전에서는 “만일 비구가 고의로 남의 목숨을 끊거나, 남에게 칼을 주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고 하거나, 혹은 이런 마음으로 죽음을 찬탄하며 빨리 죽기를 권장하면 이 비구는 바라이이니 교단을 떠나야 한다.”라고 한다. 이는 직접적인 살해가 아니더라도 죽음을 유도하는 행위까지 살인과 동일한 죄로 규정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교에서 자살은 용인되지 않고, 자살도 살인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며, 국내외의 많은 학자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두 번째로 자살이 고통을 소멸시킨 행위가 아니며, 죽음 후 당사자의 행위는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업의 과보는 사라지지 않고 부과되어 이어진다. 경에서는 “네 가지 행위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첫째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검은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있다. 악의에 찬 몸의 행위, 악의에 찬 말, 악의에 찬 마음의 행위를 지으면 고통스러운 세상에 태어나 고통스러운 감각적 접촉을 겪는다.”라고 말하며 업(행위)의 연속성과 부과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살의 업은 본인만의 것으로 간직되어 흘러가지 않고 다른 업을 생산할 수도 있다. 인연법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뭇 생명이 같은 공간에 함께 얽혀 공존하는 것이다. 공연음란죄는 타인에게 직접 행하는 성범죄와는 달리 스스로 노출된 장소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죄이며 1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금에 처할 수도 있다. 자살 또한 스스로에게 가한 행위이지만 누군가에게 직접 목격되고 매체를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목격되고 영향을 미친다. 이는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추가적인 업력을 형성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살이 바른 생각과 판단에서 결론 내려진 행위 즉, 정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에서는 “생명을 죽이는 원인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어리석음과 성냄이 자살 및 살해 행위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사실상 많은 경우 자살은 충동적이다. 충동적이란 말은 한 행위가 합리적인 사고 없이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자살 전문가 토머스 조이너(Thomas Joiner)가 금문교 자살 투신 생존자와 가진 인터뷰를 보면, 한 생존자는 “난간에서 뛰어내린 순간, 내게 있던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으며, 다른 생존자는 “뛰어내리자마자 바로 든 생각은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였다. 그리고 떨어지는 동안 정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조이너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후회’였다고 말하며 “투신한 순간부터 수면에 닿기까지는 4초 정도 걸린다. 그러나 그 4초 동안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했다.

또한 경에서는 “중생들은 가족, 재물, 건강의 잃어버림으로 죽은 뒤에 괴롭고, 비참한 지옥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중생들은 계의 상실, 바른 견해의 상실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 괴로운 곳, 불행한 곳, 비참한 지옥에 태어납니다.”55)라고 말한다. 자살은 바른 견해의 상실로 인한 행위이며 죽음 이후에는 업으로 과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의 자살 현황과 자살 동기, 그리고 경전의 자살 사례와 자살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살 예방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자살 예방은 시기적으로 자살 말기자(자살 위험군)를 위한 방법과 초 · 중 · 고의 학교 교육을 통해 미리 실시하는 자살 예방 방법 등이 있다. 또한 자살 예방은 정책적 측면(정부), 교육프로그램 구성(민간) 등 다방면에서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향후 불교의 이론과 실천방법을 토대로 자살 예방 방법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점은 정부나 학자들에게만 자살 예방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자살은 몸과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이 그 고통을 홀로 감내하며 가족이나 주변인과 잘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물론 우리 자신도 고되고 힘들지만, 주변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말 한마디, 따듯한 눈빛, 작은 관심이라도 건네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

 

문현공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한국학센터 객원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 죽음관의 현대 죽음학적 연구〉 〈초기불교 사념(死念, maranasati) 수행법을 적용한 죽음교육프로그램 연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