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이 글은 필자의 논문인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인간 이해의 비교연구: 쇼펜하우어와 원효의 비교연구를 토대로〉(《현대 유럽 철학연구》 32권, 2013.10)를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1. 쇼펜하우어와 불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서양 철학자들 중에서 불교를 가장 긍정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사상과 불교가 동일한 내용을 갖는 것으로 본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이와 함께 그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인 길을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에서 찾고 있으며, 이러한 금욕주의는 욕망을 근절하려는 욕망조차도 버리는 것에서 완성된다고 보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이 불교의 사상과 동일하다고 보았으며, 자신이 말하는 ‘모든 종류의 욕망을 극복한 상태’가 바로 불교가 말하는 열반이라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때로는 자신을 불교도로 자칭하기까지 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자신의 사상과 불교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확신하면서 자신이 설파하려고 했던 사상이 이미 동양에서 2,500여 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장차 인도불교에 대한 문헌이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 인도불교에 대한 서양인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쇼펜하우어는 심지어 자신이 도달한 철학적인 결론이 진리라면 불교를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종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평가는 인도와 인도의 전통사상에 대해서 헤겔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양 철학자들이 내리고 있는 부정적인 평가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헤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도에는 참된 종교도 윤리도 법도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에 대한 헤겔의 부정적인 평가는 그 당시 서양인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던 동양에 대한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 20세기 이전의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들 중에서 불교를 높이 평가한 사람은 쇼펜하우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높은 평가는 서양철학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으며,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대한 서양인들의 시각을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서 높아지면서 인도철학과 불교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니체와 같은 사상가가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불교를 그리스도교보다도 더 우월한 종교로 보게 되었던 것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2.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주지하듯이 불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 즉 고해(苦海)와 같다고 본다. 쇼펜하우어도 그의 나이 17세 때 인생을 고통에 가득 찬 것으로 보게 되었다. 성공한 상인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상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정작 그는 상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장차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상인이 되는 과정을 밟으면 유럽 여행을 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유럽 여행을 하고 싶었던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행하면서 유럽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한 일들은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프랑스 툴롱(Toulon)에서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6,000여 명의 흑인 노예를 감금해 놓은 곳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곳이 단테가 묘사하고 있는 지옥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불행한 사실들을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삶의 본질은 고통이란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된 것을 부처가 젊은 나이에 병든 자와 노인 그리고 죽은 사람을 보고서 삶의 본질을 고통으로 통찰하게 된 것과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삶을 고통이라고 보게 되면서 자비롭고 선한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의 원인과 그 극복 방안을 탐구하는 것을 필생의 철학적 과제로 삼게 되었다. 심지어 쇼펜하우어는 세상의 고통을 보면서 이러한 고통의 원인과 그 극복방안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진정한 모든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출발점을 경이라고 보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이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에 대한 경이라고 본 것이다. 23세 때 쇼펜하우어는 철학자가 되려는 자신의 결심을 다음과 같은 말로 피력했다.

“삶은 추악한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숙고하려는 것으로 내 생애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삶의 추악함에 대한 이러한 숙고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대표작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이다. 쇼펜하우어는 26세부터 4년 동안 이 책을 쓰는 데 몰두했으며 이 책을 1819년에 발간했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 대해서 “낡아빠진 관념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사상을 담은 책으로서 지극히 성공적이며 수미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고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매우 아름답게 쓰였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이 책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출간된 지 16년이 지난 뒤 대부분이 휴지 값으로 팔렸다.

그러나 63세라는 늦은 나이에 발간한 《여록(余錄)과 보유(補遺)(Parerga und Paralipomena)》라는 에세이집이 영국에서 주목을 받게 되면서 쇼펜하우어는 독일에서도 유명해졌다. 이렇게 유명해지면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다루는 모든 신문기사를 찾아서 탐독했다. 쇼펜하우어는 세기의 철학자가 되었고 염세주의자였던 그는 만년에는 거의 낙천주의자처럼 보일 정도로 자신의 삶에 만족스러워했다. 1860년에 아침상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3.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사상

1)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

서양철학에서 인간은 흔히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이전에 욕망의 존재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우리는 흔히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 사랑하는 이성(異性)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욕망,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 재미에 대한 욕망 등에 사로잡혀 있다. 이성은 이러한 욕망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주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용되는 노예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성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나 신학처럼 이성에만 의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학문도 결국은 욕망의 산물이라고 본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인간을 구원해줄 신이나 불멸의 영혼 그리고 죽어서 갈 천국과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그러고서는 거꾸로 생각한다. 신이나 천국이 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에게 구원을 빌고 천국에 가기를 기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욕구할 이유를 찾아냈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이유를 찾아낸다. 우리는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철학이나 신학을 만들어낸다.”

 

2) 표상으로서의 세계

우리가 살고 있고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신체를 갖는 개체로서 나타난다. 이 세계는 우리와 같은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개체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실재 자체라고 생각하면서 이 세계 안에서 겪는 고통스러운 일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기쁜 일 때문에 좋아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세계는 실재 자체가 아니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을 인식 형식으로 갖는 우리의 지성에 의해서 표상된 세계, 즉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 보이는 현상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우리는 흔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우리의 인식형식이 아니라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우리의 감각기관들에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기관들에 나타나는 것들은 감각 자료들일 뿐이지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인과관계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시각에는 명암이나 색이, 청각에는 소리가, 코에는 냄새가, 혀에는 맛이, 촉각에는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느낌이 나타날 뿐이지, 사물들이나 사건들 사이의 시간적 · 공간적 관계와 인과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앞에 일어났는지 뒤에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사물이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을 야기한 원인인지 아닌지는 감각기관들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은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 형식들이고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하고 있지만, 이 말은 우리가 지각하고 사는 세계는 실재 자체가 아니라 ‘나’에 의해서 표상된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란 인식하는 주관인 지성을 가리킨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인식론은 칸트의 인식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3) 의지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표상하는 세계인 현상계의 이면에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물자체(物自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물자체를 쇼펜하우어는 의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시간과 공간상에 나타나는 개별적인 의지가 아니라 이것들의 근저에 있는 우주적인 통일적 의지다. 현상계의 모든 현상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뿐 아니라 모든 것이 욕망의 존재다. 인간과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현저하게 보이는 현상이지만 모든 개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서로 투쟁한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쇼펜하우어는 개체들의 근원인 궁극적인 실재도 개체들과 유사하게 맹목적인 욕망이란 성격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주적 의지는 무한하면서도 분해 불가능한 통일자다. 따라서 그것이 각 개체에 나타날 때도 조금씩 나뉘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각 개체의 욕망도 우주적 의지와 마찬가지로 무한하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욕망이 끝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자연현상에서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력은 끊임없이 아래로 끌어당기려 하며, 고체는 자신의 화학적 힘의 해방을 위해서 용해되거나 분해되어 액체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액체는 끊임없이 기체가 되려고 한다. 식물 역시 씨앗에서 시작하여 보다 높은 형태를 통과하면서 다시 씨앗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애쓰며 이를 무한히 반복한다.

그런데 욕망은 결국 결핍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이 한이 없다는 것은 결핍감이 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한없는 결핍감에 시달리며 그러한 결핍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개체들의 삶이란 한없는 결핍감과 무한한 노고의 연속이다. 이렇게 모든 개체가 한없는 결핍감에 사로잡혀 욕망에 쫓기면서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는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상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이 말은 ‘이 세계는 완전하고 자애로운 신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개체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투쟁하는 현상계를 보면 우리는 그러한 현상계의 근저에 있는 우주적 의지 자체도 자체 내에서 불만과 갈등 그리고 고통에 시달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우주적 의지가 현상계에 자신을 나타낼 때도 그것은 개체들 사이의 투쟁과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근원적인 의지는 유일한 일자이기에 현상계의 무수한 개체들이 서로 투쟁하더라도 현상계에는 일정한 통일성과 조화가 존재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결국 세계의 근원인 우주적인 의지마저도 자체적인 갈등과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는 것으로 귀착된다. 우주의 근원을 이렇게 내적인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우주의 근원을 자애로운 인격신으로 보는 기독교의 사상과 철저하게 대립된다.

      

4)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현상계의 근원인 우주적인 의지가 맹목적인 욕망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으로 알려진 이성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의지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를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성은 의지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이성을 통해서 의지를 통제하고 더 나아가 의지를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점에 쇼펜하우어 철학의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동안 이성은 의지의 노예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이성이 의지를 압도하고 부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성이 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들로서 심미적 관조와 금욕주의적인 의지 부정을 들고 있다.

격정이나 근심으로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게 되면서 마음이 밝아지고 평온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획득하려 했지만 주어지지 않았던 안식과 평안이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심미적 관조 상태에서 우리에게 갑자기 저절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미적 관조 상태에서 사물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무심(無心)하게 사물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사물들 자신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심미적 관조 상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물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드러내도록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을 아름다운 것으로 관조하는 상태에서 개체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식주관으로 높아지게 된다. 순수한 인식주관으로 존재할 때 우리가 왕인지 거지인지 죄수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죄수도 쇠창살을 통해 석양을 보면서 자신의 현재 처지를 잊어버리고 석양의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다. 순수한 심미적 관조 상태에서 우리는 ‘밝고 영원한 세계의 눈’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세계 속에서 개체로 살고 있고 개체로서의 자신의 생존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욕망과 고민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맹목적인 의지라는 철삿줄에 의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형 같은 존재다. 의지는 보통 이성보다는 항상 더 강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심미적 관조 상태를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심미적 관조 상태는 우리가 의지의 노예로 존재하는 상태로부터 극히 일시적인 해방만을 가져다준다고 말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의 지속적인 해방은 의지의 부정, 즉 불교가 말하는 열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심미적 관조 상태는 열반의 전(前) 단계라 할 수 있다.

의지를 부정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으로 쇼펜하우어는 금욕주의적인 고행을 들고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생에의 의지는 주로 자기보존을 향한 욕망과 종족번식을 향한 욕망 그리고 이기심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기보존의 욕망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식욕을 억제하는 소박한 식사와 종족번식 욕망을 억제하는 정결(貞潔) 그리고 이기심의 표현인 탐욕을 억제하는 청빈(淸貧)이 금욕주의적인 고행의 3대 요건이 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엄수하는 자가 성자(聖者)라고 불린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그것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가 바로 진정한 자유라고 본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금욕주의적인 의지부정도 결국 의도적인 목적을 통해서 추구되기 때문에 금욕주의를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갑작스러운 은빛 섬광’처럼 예기치 않게 발생한다. 그것은 그러한 금욕주의적 의지마저도 사라질 때 흡사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닥쳐온다. 그것은  이렇게 의지가 온전히 사라진 상태가 우리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주어지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은총이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의 의도나 계획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교에서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으려는 욕망조차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으려는 욕망조차도 하나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욕망을 버리고 마음이 정적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1)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유사성4.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비교

쇼펜하우어와 불교 사이의 유사점들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쇼펜하우어와 불교는 세계를 설명할 때 경험과 관찰에 입각하고 있으며 인격신과 같은 신화적인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있다.

둘째로, 불교와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을 인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서 찾고 있다. 양자는 그러한 원인을 영구불변한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미망에서 찾는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미망을 무명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쇼펜하우어는 개별화의 원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양자는 이러한 미망에서 비롯되는 자아에 대한 집착과 함께 갖가지 이기적인 욕망이 생기며, 이러한 욕망들은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기에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이기적인 욕망을 갈애라고 부르고 있으며, 쇼펜하우어는 생을 향한 의지라고 부르고 있다. 불교가 갈애가 자유롭고 고정불변의 자아라는 허구적인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다고 보는 것처럼, 쇼펜하우어 역시 이기적인 의지는 ‘물자체의 차원에서는 자신이 모든 것과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개별화의 원리라는 미망의 베일에 사로잡혀 자신을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개별적인 자아로 보는 망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셋째로, 불교와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길도 영구불변한 개별적인 실체가 있다고 믿는 미망에서 벗어나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하는 것에서 찾고 있다. 불교는 우리에게 무명에서 깨어나 갈애를 종식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쇼펜하우어는 개별화의 원리라는 미망의 베일을 꿰뚫어 봄으로써 만물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생을 향한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의지를 부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넷째로, 불교와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면서도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양자는 염세주의에서 출발하면서도 우리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확신을 갖고 있다.

쇼펜하우어와 불교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과 같은 유사점들로 인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과 불교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상을 설파한다고 보았을 것이며, 쇼펜하우어와 불교를 비교하는 많은 연구자 역시 쇼펜하우어와 불교를 근본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쇼펜하우어와 불교 사이에는 이러한 유사점 이외에 넘어설 수 없는 차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2)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차이

(1) 형이상학에서의 차이

불교는 쇼펜하우어가 상정하는 영원불변한 일자로서의 물자체와 생성 소멸하는 무수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현상계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교는 생성 소멸하는 세계 이면에 생성 소멸하지 않는 근원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성 소멸하는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진 현상계의 근저에 불변적인 일자로서의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지만, 불교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려는 것 자체가 자아에 대한 집착이 나타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본다.

쇼펜하우어는 개체로서의 우리는 사멸해도 물자체로서의 의지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죽음 후에도 존속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서 고안된 환상이라고 볼 것이다. 불교는 생성 소멸하는 세계를 쇼펜하우어처럼 참된 실재를 가리는 환상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실재로 본다. 따라서 불교는 무상한 현실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무상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원한 실체로서의 물자체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문제라고 본다.

 (2) 인과관계에 대한 견해의 차이

쇼펜하우어의 인과 개념과 불교의 연기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차이는 불교에서는 연기의 세계가 항상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도달한 깨달음의 단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는 데 존재한다.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마음에 연기의 세계는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과의 세계, 즉 연기의 세계가 그것에 대해서 인간이 취하는 태도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인과의 세계는 쇼펜하우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진 허망한 세계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계가 이렇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직 자기에 대한 집착과 부와 명예와 같은 세간적인 가치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뿐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집착에서 온전히 벗어날 때 인과의 세계, 즉 연기의 세계는 허망한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화엄세계(華嚴世界)로 나타난다.

(3) 고통의 궁극적 원인에 대한 파악의 차이

쇼펜하우어는 개별화의 원리를 실재를 가리는 미망의 베일로 보면서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에 사로잡혀 개별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서 현상계의 모든 고통이 비롯된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의 모든 고통은 궁극적으로는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자기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원인을 이중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개별적 자아를 환상으로 보며 모든 고통은 그러한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고통도 환상으로 본다. 인간의 마음은 환상에 불과한 개별적 자아를 만드는 것과 함께 고통의 환상들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괴로워한다. 이렇게 의지 자체가 아니라 무명을 고통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의지는 쇼펜하우어에서와 달리 종속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불교에서 의지는 행(行)이라고 지칭되고 있으며 이는 오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이러한 의지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무명에서 생긴다고 본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무명에서 벗어나면 그러한 의지도 사라진다고 본다.   

(4) 고행에 대한 입장의 차이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주창하는 고행 내지 금욕과 불교의 수행법이 동일하다고 보지만, 불교는 욕망과 의지를 근절하려는 고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금욕과 방일(放逸) 사이의 중도를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의지의 근절이 아니라 의지의 정화를 추구한다. 즉 그것은 모든 생각과 행위가 중단된 무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과 말을 모든 집착이 사라진 마음의 상태로부터 내는 것을 지향한다. 불교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는 열반의 세계도 생성 소멸의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생성 소멸의 세계가 정화된 것이라고 보며, 열반의 세계와 윤회의 세계는 동일하다고 본다.

또한 쇼펜하우어가 신체를 물자체로서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면서 신체와 신체에 결부된 욕망인 식욕이나 성욕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신체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함으로써 신체를 청정하게 만들 것을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이기주의적인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신체,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육근(六根)도 함께 청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로 ‘청송학술상’ 《니체와 불교》로 ‘원효학술상’ 《내재적 목적론》으로 운제철학상 등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위의 책들 외에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니체와 하이데거》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는 《아침놀》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 《상징형식의 철학 I, II》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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