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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법과 출세간법 / 연기영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연기영 동국대 법대 명예교수

고시공부 접고 불교철학에 심취하다

대학 시절 나는 판 · 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불철주야 고시공부에 매달려 사회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런데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초헌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헌법 정지, 정치와 정당 활동을 일절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유신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민주국가의 기본원리인 권력분립의 원칙을 무시하고 3권 통합을 골자로 한 유신헌법이 공포된 것이다. 언론 보도를 사전 검열하고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대학의 문은 폐쇄되고 말았다.

독재체제의 시녀가 되는 법조인이 되어서 무엇하나? 이런 회의가 깊어져 결국 나는 고시공부를 접고 말았다. 동서양의 철학 관련 서적을 싸들고 절에 들어가 열심히 읽었다. 그 당시 나와 있던 ‘세계의 대사상 전집’을 몇 번이고 줄을 쳐가면서 독파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의 그리스-로마 고전들도 재미있었으나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헤겔, 칸트, 니체, 하이데거 등 독일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으며 지적 호기심이 솟아오르자, 드디어 막스 베버(Max Weber)의 법사회학,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경제와 사회 등에 몰입하면서 나의 롤 모델을 찾은 듯 뿌듯했다. 베버는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도 경제학, 역사, 철학, 신학 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잠시 베를린대학의 상법 및 로마법 강의를 담당한 후에 하이델베르크대학의 농업경제학 교수가 된 후에는 경제학, 사회학, 행정학 등 사회과학의 새로운 이론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유교 등 동양 종교를 섭렵하여 비교종교학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대학 시절 내내 대학생을 비롯한 국민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어 대학 문이 자주 닫히곤 했지만, 강의실이 열릴 때면 법학보다 문학, 철학, 불교학의 명강의를 자주 청강하곤 했다. 결국 법학과 졸업과 동시에 불교학과에 학사 편입하였다. 그때 서울 안암동의 기원학사에서 생활하면서 주말이면 당시 개운사 주지였던 월주 큰스님을 친견하고 오계를 받았다. 월주 스님은 나에게 ‘법해(法海)’라는 법명도 주셨다. 그런데 1975년 12월 불교학과에서 학기말시험을 마친 후 갑자기 군대에 소집되어 철원의 철책부대 최전방에서 1978년 6월까지 3년간 군 복무를 마쳤다. 9월에 불교학과에 복학할 생각을 하고 오랜만에 남산 캠퍼스에 올라갔다. 법대 은사이신 고 한상범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만 조교로 꼭 잡혀서 법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다시 법학연구의 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독일 유학 시절이나 법학 교수 시절에도 늘 마음 한구석에는 불교학을 연구해서 불교법철학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작심삼일! 세월은 바람같이 살같이 지나갔고 아쉬움을 안고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조화를 위해 고뇌하다

지나온 인생의 뒤안길을 되돌아보니 무상함을 느낀다. 엄동설한 부모님의 백일기도로 이 세상에 태어난 나는 불교가 모태신앙이었고, 지금까지 살면서 어려움이 닥친 고비마다 고통을 견디며 고뇌를 다스리는 데 시금석이 되었다. 가야산, 설악산, 영축산 등을 오르내릴 때 새로운 정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대덕 큰스님들의 법문은 나의 삶과 학문에 원동력이 되었다. 세속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출세간법(다르마, 불교의 진리)의 사상을 접합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보았다. 사회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한국교수불자연합회를 비롯하여 여러 불교사회단체를 창립하여 불교사회정의를 실천하는 데 작은 힘을 보태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세간법의 해석과 적용에서 불교사상이나 불교 법철학의 방법론을 도입할 수는 없는가? 이런 질문이 뇌리에 스칠 때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며 형법과 법철학의 권위자였던 황산덕 박사의 법철학 논저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가르치던 법학개론 첫 시간에는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수업을 시작했다.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 의사가 인간의 치료해 주듯이 법률가는 사회 질병을 고쳐주는 사회적 의사이다. 법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최종목적은 법 없는 세상을 건설하려는 데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인간에게 질병이 끝없이 발생하듯이 사회에도 늘 범죄와 분쟁이 늘어난다. 결국 인간과 사회에 병을 예방하고 줄여서 이상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상보다는 너와 나,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이라는 불이(不二), 동체대비, 중도화합 등 연기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류에게 지혜와 복덕은 주는 불교사상이 법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사상이 아닐까? 불교는 몸과 마음과 뜻으로 짓는 모든 병을 예방해 주는 특효약이 아닌가? 인간과 사회의 모든 병을 법학의 학설에는 일원론과 이원론이 자주 등장하는데 나는 가급적 일원론, 통일론, 절충설에 찬성하고 있다.

정년퇴임을 하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 여전히 법과대학과 로스쿨에서는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서양 법철학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주류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최근에 한두 분의 법학자가 불교 경전을 열람하며 법철학적 연구를 하는 학문적 성과가 발표되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불교사상에 바탕을 둔 법철학,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관계, 불교가 동양(한국)의 법문화에 미친 영향, 불성과 우주의 조화를 이루는 자연법과 실정법 등의 논제에 해답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 막스 베버처럼 학문적 업적을 남겨야 하겠다는 젊은 날의 내 인생 목표의 십 분의 일도 달성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yeunky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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