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던 지난해 12월 28일, 많은 고승을 배출한 총림의 방장 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려운 처지에서도 티베트의 국가와 불교계를 이끌면서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는 달라이 라마가 “불교의 학문적 중심지였던 날란다의 마지막을 계승한 불교는 한국불교이다.”라고 말씀하였고 이에 대하여 학술회의가 필요하겠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여러 자료를 모아서 한국불교사를 바로잡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필자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큰 주제였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학술서와 월간지와 계간지를 출판하는 세 곳 출판사에 새해 인사를 대신하여 이를 전하고 이에 관심을 가지고 대비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냈다.

실시간으로 청중과 문답식으로 영상과 함께 전달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시대이다. 인쇄출판으로 유지하는 세 곳에서 불교의 언론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면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희생정신이 아니고는 전통의 방법을 지키기 어려운 일면도 예상되었다. 세 곳의 반응은 차이가 있었다. 한 곳은 이미 상황을 감지하면서 대비하였고 여러 차례 이에 관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준비를 숨기고 때가 무르익으면 터트릴 예정이라고 말하였다. 다른 한 곳은 중요하다고 동감하지만 이에 대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다만 지금까지 논의가 있었던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를 풀어나갈 방향까지 필자에게 제시하였다.

마지막 한 곳은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요지는 물론 이에 대한 중요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전혀 다른 의견을 답신으로 보내왔다. 요점을 추려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우리 언론사가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언론사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담아낼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다면 어떤 사상이나 학문의 적통을 주장하려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도 정법은 중요인물의 주먹(師拳)에 있지 않고 실천하는 인물에게 전승된다고 했다. 달라이 라마든 또 무엇이 됐든 우리가 적통임을 주장하려면 그 실천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 의견이 가장 까칠했지만, 오히려 새겨들을 만한 옳은 말씀이다. 학문과 실천은 다르고, 종교는 시대의 변화에 대처한 처방을 내린 교조를 받드는 집단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였기 때문에 계승되었다는 해석이다. 불교는 2,600년에 가까운 오랜 기간 교조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변화를 대비하면서 지속하였다. 다만 전달자인 필자는 연구하는 개인이고 실천하는 집단을 이끄는 고승도 언론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의견이 모여 집단의 여론을 형성하고 실천의 방향이 결정된다. 국가의 운영에도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여론을 수렴하여 헌법도 손질하듯이 불교에서도 신도의 수효가 줄고 관심이 줄어들면 종파별로 종헌을 돌아본다. 사원의 규모와 신도로 보아 현재 여러 종파의 맏형 격인 조계종의 종헌에 대해서 달라이 라마와 총림의 방장은 자기 분야만 관심을 가진 나 같은 좁은 시야의 연구자와는 다르다.

라마와 방장은 많은 여론을 듣고 판단하여 말씀하므로 이분들의 의견은 파급력이 크다. 부처님도 손이 있고 오늘날 고승도 손이 있지만, 주먹 권(拳)이란 글자는 힘을 주어 폭력을 동반할 때에만 쓰는 단어이고 보통 힘을 뺀 상태에서 수인으로 합장하면서 경청한다. 달라이 라마나 총림 방장의 말씀은 조계종의 헌법인 종헌과도 관련될 수 있다. 조계종의 종헌에 대해서 허위의식이나 사권(師拳)의 사용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방장이나 총림의 말씀은 나 같은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 여론을 종합한 지혜와 확신이 보장된 실천의 방향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계종 종헌과도 관련된 계승자인 법통에 대하여 쓴 논문이 있다. 기존의 종헌이나 불교의 통설과는 달라서 위험을 무릅쓰고 부득이 썼지만, 당시 조계종 종정이 서술한 법맥이나 조계종 종헌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연구자는 개인의 의견이지만 달라이 라마와 총림 방장의 의견은 그분들이 들었던 최근 종합된 새로운 여론일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나의 의견이란 개인이 연구한 결과이지만 오랜 기간 연구한 모든 분의 견해는 달랐고, 이후에 같은 견해를 따르는 분들도 많아졌지만 그보다 전에는 눈을 씻고도 나의 견해는 찾기가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학문을 우리가 연구해서 세계로 알리기 시작한 시기는 아주 늦다. 신학문이라는 서양의 방법론과 성과를 일본을 거쳐 들었고 이를 진리라고 간주하였다. 우리의 불교에 대해서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14세기 전반에 날란다에서 공부한 디야나바드라(지공 화상)에 대해서 대학원까지도 듣지도 읽지도 못했다. 학위를 받고도 10년 후 1991년에야 그에 대하여 어느 대학 연구소에서 발표했다. 발표가 끝난 후에 아무도 질문이 없이 5분 정도 조용하게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나에게 5분의 침묵은 참으로 지루하였고, 지금의 나만큼 나이가 많고 그 대학을 대표하는 불교학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간주되던 일본 유학 경력의 명예교수가 겨우 침묵을 깼다.

모기만 한 소리로 “그분 혹시 가상의 인물이 아니오?”라고 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따뜻한 남방 지역의 동굴에서 6개월간 참선을 끝내고 다리가 굳어서 제대로 서지 못하고 외치는 수도자의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수많은 자료에서 읽은 대로 그의 출생과 수학, 그리고 그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얼굴 피부는 검고 눈썹이 짙고 빛났으며 날란다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랑카(지금의 스리랑카)의 시기리아에서 사만비제 아라한에게 득도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그에게 동방으로 가서 교화하라는 스승의 부탁을 실천하였고, 고려를 찾아서 회암사에 날란다를 재현하라고 고려 출신의 수제자에게 부탁하였다. 그가 입적한 다음에 수제자는 이를 실현하였고 그에 대한 탑비까지 세웠다고 증거를 들어서 후일담까지 말하였다.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는 발음을 한자로 적으면 제납박타존자(提納薄拖尊者)이고, 의미로는 지공(指空)이다. 그가 입적한 다음 15년이 지나 이색이 지은 비문은 행록을 그대로 옮긴 부분이 많다. 행록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13세기 전반의 인도와 몽골제국에 대한 여러 민족과 민속과 종교와 유적에 대한 기록이 많아서 연구 가치가 높다. 역사가 짧지만 문화의 중심지로 자료가 모인 미국에서 풍부한 문헌을 이용하여 9년 만에 출간한 책을 들고 중국의 서남부에 있던 쿤밍에서 윈난성(雲南省) 사회과학원과 개최한 학술회의에 참석하였다. 윈난성은 지공이 교화를 폈던 지역이고 이를 기념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이 한국의 원로학자라는 분의 질문과 비교되어 입맛이 썼다. 이미 그곳에서 2년간 지공 선사에 대한 연구발표를 거쳐 학술지를 간행하였고 발표자를 엄선하여 국제학술회의를 준비하였다.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준비도 부족했지만 그나마 당시 조계종총무원 태공월주 원장을 대신하여 한국 대표로 총무원 포교원장 성타 원로의원이 참석하였다. 한국에서 발표 준비는 10년간 연구하여 간행한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지공선현》이란 나의 책은 인쇄 잉크가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를 가지고 가지 않았으면 그곳의 학자들은 한국의 학문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였을까 상상하기도 끔찍하였다.

이후에도 국내에서는 물론 2006년 인도 델리대학, 2011년 몽골 독립 100주년 기념 500인 국제학술회의, 2017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유라시아국립대학 등지에서 날란다와 지공, 지공과 회암사, 회암사와 기황후릉과의 관계 등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우리나라는 지공을 연구할 직접 문헌과 유적이 어느 나라보다 가장 많고 그를 보호하고 지원하였던 기황후에 대한 유적과 문헌에 대해서도 이제 제대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고 국내외에 알리고 싶었다.

heohskr@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