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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기억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31호] 2008년 04월 12일 (토)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2년 전 외대 철학과 학생들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을 도보로 넘었었다. 비자를 받고 통과세를 지불하는 등의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다.

캄보디아 국경을 긴장 반 들뜸 반으로 통과하고 있는데 옆에서는 캄보디아의 일용노동자 행렬이 줄을 이어 태국의 국경도시 아란(Aran)으로 들어오기 위해 약식 통과 절차를 따르고 있었다. 국경지대에서 잠깐 스쳤을 뿐인 그들이다. 그런데 지금 나의 기억 속엔 세계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 대한 것보다 그들의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요즘도 가끔 뇌리에 되살아난다. 그 이유가 뭘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들이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아마 내가 여행가이드의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둑새벽부터 서너 시간을 걸려 태국 땅으로 몰려오는 것은 아란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1달러를 벌어가기 위해서랍니다.”

1달러를 벌어가기 위해 늘어선 행렬 중에는 초등학생 나이의 애들도 족히 삼 할은 돼 보였다. 그날 일거리가 있어 1달러라도 버는 아이는 더없는 행운이란다. 하지만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가 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그날 빈손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다음 날 더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설 것이란다. 아니 국경 폐쇄 시간에 자국으로 잠시 넘어갔다가 그곳에서 노숙하듯 눈을 붙이고 다음날 바리케이트를 개방하는 시간에 맞추어 태국을 넘어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정도로 이들이 1달러를 손에 만져보기가 힘들단다.

결국 1달러는 이들에게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줄서기는 곧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고, 국경 경비원들도 ‘제대로 줄을 서라’고 외쳐댔다. 줄서기는 이들에게 곧 무언의 사투(死鬪)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1달러는 용돈 수준이 아니라 온 가족의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서너 시간을 일하러 갔다 다시 서너 시간을 걸려 빈손으로 돌아 온 가장을 한 번 상상해보라.

안쓰러운 것은 그들의 일상이 늘 그렇게 반복된다는 현실이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말란다. 쳐다보면 달려들어 구걸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대열이 깨지는 소란이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되도록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란다. 가이드의 설명에 우리는 긴장했고, 아무 표정없이 그들을 훔쳐볼 뿐이었다.

삶의 무게가 그들에게서 생기를 빼앗아 간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우리를 쳐다볼 힘도 없는 듯했다. 그중엔 오늘 1달러를 벌기 위해 아마 어제 집에 못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1달러를 벌기 위해 대체 몇 끼를 굶은 것인가?

이렇듯 아란과 포이펫은 단지 태국과 캄보디아의 지리적 국경선에 그치지 않았다. 마치 천국과 지옥이 국경선을 경계로 나뉘는 느낌이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채 깡마르고 헐벗은 그들의 모습과 희멀건 채로 울긋불긋 폼을 낸 우리 일행의 상반된 모습?

대열을 지키기 위해 나의 두 다리는 그저 앞서가는 학생들을 따르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은 계속 그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들이 나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 나의 시선이 향한 곳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회색의 줄’ 하나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나의 뇌는 잠시 활동을 멈추었다.

우리 일행이 이들 행렬과 멀찍이 떨어져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을 때 그들은 이미 우리와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우리와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단지 그저 비켜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이 내 머리 속에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1달러의 가치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을 너무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1달러, 이것으로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편도 교통비나 자판기 커피 두어 잔? 이름 하여, 금세기를 ‘소비사회’라 하는 판에 이렇게 지구촌 한쪽에선 하루를 단 돈 천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정확히는 10억이 넘는다는 보고다. 이들에게 ‘디저트’며 ‘여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연명(延命)할 뿐이다.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요즘 우리의 매스컴에서 많이 ‘광고되고 있는’ H식 Y식 살빼기 비법은 사치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먹을 것도 넉넉지 않은 그들에게 이런 TV 광고를 볼 기회가 주어질 리 없지만 말이다.
요는 물질적 풍요, 경제의 양적 팽창은 모두 소수에게로 그 이득이 돌아가고 다수는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린다는 사실이다. <세계화의 덫>이란 책에서도 이미 보고하고 있듯, 20%의 사람들이 세계 전체 부의 80%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과장된 수치가 아니다. 10억 정도가 하루 1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피난민 수용소 천막 아래서 죽어가는 아이들은 또 얼마인가?

이들과 비교할 때 우리 사회는 꽤 안정세라 할 수 있다. 30-40년 전과 비교할 때 물질적·경제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편이다. 벌써 웰빙을 외치는 사회로 진입했다. 그런가 하면 이제 먹거리를 미국식, 유럽식에서 시골·농촌식, 옛날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들 호들갑까지 떨고 있다.

날씬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란다. 아니 배나 엉덩이에 찬 기름덩어리, 포화지방이나 트랜스지방을 제거하여 섹시한 몸매를 유지하고 성인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란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땀 흘려 일하는 직업은 천시하고 편하게 많이 버는 직업이 선호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고 운동을 즐기며 소일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부쩍 늘었다.

다 좋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지수다. 우리는 과거 헐벗고 못살던 때보다, 현재 일 달러로 살아가는 캄보디아의 일용노동자들보다 더 행복한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가?

무한 욕망 때문 아닐까. 돈에 의해 무력화된 윤리의식과 양심 그리고 양식의 부재가 원인이다. 극단화된 개인이기주의가 문제다. 타인, 사회 일반의 이익은 전혀 염두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회적 풍토는 언젠가 가족은 물론 국가까지도 버리는 운명을 맞을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라는 책에서 이미 경고한 바 있듯, 금세기처럼 한 사회가 분열된 적이 있는가? 힘들어 못살겠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이렇게 높은 적이 있는가?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치형태로, 자유 시장 경제를 유일하게 생명력 있는 경제 체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이는 플라톤의 입을 빌려 말하면 ‘사기’다. 그의 눈에는 가장 타락한 세계, 가장 비인도적인 세상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굳이 부처님 말씀을 빌어서 확인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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