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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큰법당과 불천회관(佛泉會館) / 신용철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 운허사상연구소장

조계종 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는 규모가 크거나 깊은 산속은 아니지만, ‘수도권의 폐’라는 광릉 숲속의 유서 깊은 도량이다. 특히 조선왕조 제7대 세조의 광릉 원찰로서 수목원과 함께 왕릉 및 불교문화가 잘 어우러진 명승지로서 자연을 찾는 도시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나지막한 언덕 위의 봉선사를 향해 바라보는 일주문의 ‘운악산 봉선사’란 현판은 운허(耘虛, 1892~1980) 스님 노년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입구의 오른쪽에는 이 절의 역사를 담은 비석과 부도군이 자리하고, 왼쪽 작은 냇물 건너 잘 가꾸어진 연못의 연꽃이 불교의 향기를 풍겨준다. 특히 그 주변의 밀림이 된 소나무와 전나무 등의 숲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신선하고 정겹다.

경내의 오르막길을 가로막는 2층의 건물이 설법전인 청풍루(淸風樓)이다. 작은 문을 들어서며 계단 위의 본당인 큰법당 앞의 광장에 이른다. ‘큰법당’이란 편액에 찾는 사람들은 놀란다. 우리나라 사찰의 본당이 대웅전이나 대적광전 또는 대웅보전 등 거의 한자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봉선사 큰 법당의 기둥의 글씨[柱聯]도 한자가 아닌 우리말로,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해”로 번역되었으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그저 보는 주련들에 비하여 쉽게 이해된다. 6 · 25 전란으로 소실된 봉선사를 1970년 복원할 때, ‘쉬운 우리말을 두고 법당의 편액을 왜 어려운 한자로 써야 하느냐?’는 운허 스님의 말씀으로 운봉 금인석(琴仁錫)이 쓴 아름답고 시원한 한글 편액이다.

‘어려운 한자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부처님의 귀한 말씀을 중생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한자의 벽을 헐어야 한다.’는 훌륭한 의지로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팔만대장경을 우리 글로 번역하는 대사업을 시작, 주도한 운허 스님의 불교뿐 아니라 민족문화에 대한 역사적 사명감과 충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계단 아래 맞은편의 설법전 즉 청풍루는 설법과 중요한 행사를 하는 건물인데. 우측 문을 나서며 남측의 건물 측면을 올려다보면 추녀 아래 ‘불천회관(佛泉會館)’이란 편액이 보인다. 그 크기나 또는 명칭으로 보아 특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하지는 못한 글이다. 그러나 그에 얽힌 비화(秘話)는 암울하던 일제 강점기의 항일독립운동사와 관계되어 매우 흥미롭고 비장하다. 이는 1921년부터 1980년 입적까지 60년간 봉선사에 머문 운허 큰스님의 평생 활동과 관계된다.

속명이 이학수(李學洙)로서 만주의 독립운동 시기 이시열(李時說)로 이름을 바꾼 스님은 3 · 1운동 후, 입국했다가 왜경에 쫓겨 강원도의 봉일사(鳳逸寺)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광릉 봉선사에서 월초(月初, 1858~1934) 스님의 보호를 받으며 불도에 정진하여 한국 최초의 《불교사전》을 간행하고 폭넓은 강학(講學)으로 스님과 중생을 교학했다. 특히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을 개설하여 팔만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한국 근대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의 만주 독립운동 시기, 어느 동지가 이시열에게 “동지는 일당 천(千)의 대장부이오.”라고 하자, 이에 대해 이시열은 “천으로는 안 되지, 적어도 억(億)은 돼야지!”라고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 후 이시열은 “천 명이 아닌 일억 명인 억불천(億不千)” 동지로 불려 이를 호(號)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그가 불문에 귀의하고, 1945년 해방이 되어 만주에서 결성 가입했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몇 명의 동지와 함께 봉선사 뒷산에서, “우리가 외국 땅에서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하늘에 알리며 결성한 이 혁명당은 이제 우리가 나라를 찾아 독립하게 되어 해체함을 다시 고합니다.”라는 제문을 읽으며 술을 뿌리고 나누어 마시며 해체하였다. 이때 동지들은 스님에게 말했다.

“이제 일제와 싸울 필요가 없으니, 불천의 호를 바꿔야겠소. 발음은 그대로 두고 의미를 달리하는 불(佛)과 샘 ‘천(泉)’ 자로 ‘불천(佛泉)’이 좋지 않겠소?”

그래서 스님은 다시 ‘불천’이란 호를 더하게 되었다. 이러한 숨겨진 비화를 운허 스님의 수제자로서 팔만대장경 역경 사업을 계승해서 완성한 현 봉선사의 조실 월운(月雲) 스님이 청풍루를 지을 때 남측 벽에 편액으로 단 것이다.

그러므로 단 4글자의 이 ‘불천회관’의 역사는 운허 스님 개인의 생애이지만, 암울하던 일제 강점기의 한국 근대사에서 항일독립운동과 함께 호국불교의 빛나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 후 봉선사의 출판사 이름도 불천이라 하고, 1946년 운허 스님이 봉선사를 중심으로 주도하여 설립한 광동학원에 학생 기숙사의 명칭을 ‘불천학사(佛泉學舍)’라고 한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실용화는 세조에 이르러 ‘간경도감(刊經都監)’의 설치나 농업과 병사에 관한 책들이 한글로 쓰여 크게 진전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가 팔만대장경 번역을 주도하게 된 것은 역사의 인연이 아닐까?

그러므로 봉선사의 큰법당과 청풍루 편액인 ‘불천회관’은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 및 불경번역에 평생을 바친 운허 스님의 나라 사랑과 불교 생애를 상징하는 뜻깊은 역사이다.

yongchsh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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