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의 불교와 도시

불교 수행에서 자아의식의 경계를 허물고 한층 더 확장된 자아로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이와 더불어 무상(無常), 무이(無二), 무애(無碍)의 세 개념은 붓다 가르침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계 허물기’와 ‘무(無)’의 개념을 통하여 도시과학 분야인 건축 · 도시 · 조경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도시과학의 발전 방향을 엿볼 수 있다. 도시가 성숙해가는 과정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

붓다께서 열반하시고 약 100년 후 제2차 결집과정에서 제자들의 의견 차이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게 된다. 붓다의 생존 시 말씀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상좌부를 문자주의(보수주의)로 본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되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융통성 있게 해석해야 한다는 대중부는 적응주의(진보주의) 입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보수적/진보적 입장의 대립은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보다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이라 하겠다.

팔만사천 법문은 일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붓다 생존 시 가르침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거듭하며, 무량한 법문의 바다가 성립된 것이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후 입적에 이르는 45년 동안 무상(無上)의 진리를 설하셨고, 불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제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더하면서 한층 진화된 법문이 시도되고, 이에 더하여 붓다의 신격화 작업도 병행되면서 해석의 경계를 확장해 나갔다. 즉 상좌부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부로, 《반야경》에서는 초기불교의 경계를 허물고 공(空) 혹은 무경계로 영역을 넓히고, 《법화경》에서는 성문, 연각, 보살을 넘어 일불승(一佛乘)의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화엄경》에서는 중중무진연기까지 경계를 넓혀나갔다.

불교 교리의 심층적 발전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복잡한 사회구조와 다양한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거창한 깨달음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 등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붓다의 가르침은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들어가는 문은 무궁무진하여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필요성에 적합한 문을 더 활짝 열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에 적합한 불교의 문은 어느 문일까?

최근 우리 사회는 정치인들의 ‘내로남불’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는 보수/진보 간의 극한 대립과 국론 분열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를 대한민국 사회의 진화과정에서 초래되는 단순한 성장통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인지, 이 시점에서 불교인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붓다의 어떤 가르침이 현 시대성에 부합하는지, 어떤 경계를 허물어야 하는지,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상(無常)이라는 붓다의 가르침과 더불어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여, 지금 나의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는 폭넓은 생각을 한다면, 보수/진보 모두 극한 대립으로 가지 않고 원효 스님의 가르침대로 화쟁회통(和諍會通)과 일심(一心)으로 회귀하는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된다. 무상을 받아들이면 하심(下心)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는 자연스레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 교리 발전에서 경계 만들기와 경계 허물기 과정은 도시 발달 과정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인간 정주환경의 경계는 개인 주거→마을/도시→국가→세계/지구→우주로 확장되어왔다. 원시시대 정주환경의 경계는 개인 주거 혹은 부족의 집단주거지였으며, 이 경계는 더 큰 모듬살이인 마을과 도시로, 도시는 더 큰 국가로 발전되었고, 최근에는 국가연합인 UN, 그리고 EU로까지 확대되어 국가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지구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앞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달, 화성 등 우주탐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인간 정주환경이 우주로 확장되어 ‘우주촌’이라는 말이 등장할 날이 올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 허물기는 우리 인식의 확장과 더불어 인간 정주환경의 확장에서 필연적 과정이다.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현대 도시들은 지금까지 만들어온 도시의 경계를 허무는 경쟁을 하고 있다. 20세기까지는 경계를 넓히는 일에 몰두해왔으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그동안 만들어진 도시의 불합리한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차원의 경계를 세우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연과 도시의 이분법으로부터, 도시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대규모 녹지구축을 통하여 자연과 도시가 하나로 되고 도시가 자연생태계 일부분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친환경 도시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도시와 농촌의 구분으로부터 도농 통합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추구함과 더불어, 차량 등 기계가 아닌 보행자 중심의 친인간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 도시들은 공간적 경계 허물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경계 허물기를 추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개발과 성장 과정에서 낙오된 소외계층의 발생으로 양극화를 초래하였는데, 복지에 대한 인식 증대와 함께 양극화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포용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서울도 개발과 빠른 성장의 과정에서 수많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를 만들어왔는데, 이들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대로 무상(無常)하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들 경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고 있음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여야 서울은 진정한 세계 일등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이러한 경계 허물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전시성 생색내기 행정, 경제 논리에 치우친 개발 행태, 그리고 일부 시민들의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시민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주민, 전문가, 행정가 등 사회구성원 모두가 뜻을 모아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힘을 모아 흔들림 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계 허물기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의식의 경계를 허물고 더욱 확장된 자아 즉 개인에서부터 인류, 생명체, 지구, 우주로 나아감으로써 폭넓은 보살의 삶을 즐길 수 있듯이, 우리의 도시들도 그동안의 개발시대에 만들어진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 허물기를 통해 더욱 자유롭고 행복한 무애(無碍)의 도시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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