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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의 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홍창성
특집 | 중도의 철학, 양극화 극복의 길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홍창성 cshongmnstate@hotmail.com

최근 우리나라의 극심한 정치 경제적 갈등 상황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다. 밖으로 주변 4강의 압박 속에 고립무원인 국제정세도 걱정이지만, 안으로는 좌(左)와 우(右)라는 낡은 이념의 상(相)에 사로잡혀 서로 반목하는 갈등이 도를 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양극단을 피하고 적절한 중도를 취하라는 붓다의 가르침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 글은 중도의 철학이 우리 현실문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목표로 한다. 나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라’는 도덕명령을 우리를 중도로 이끄는 구체적인 기준으로 제안한다.

 

1. 말 앞에 마차를 놓지 말라

미국 바이블 벨트의 북단 미네소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에세이 과제물에 “나는 기독교인이니까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식으로 글을 쓰곤 한다. 나로서는 합리적인 미국 학생들이 이렇게 논리적으로 오류인 주장을 편다는 점이 언제나 놀랍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으니까 기독교인이지, 기독교인이어서 신과 영혼을 믿는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설명해 준다. 서양에는 “말 앞에 마차를 놓지 말라!”는 속담이 있는데, 믿음(말)이 자신의 종교(수레)를 이끌어야지 종교(수레)가 믿음(말)을 이끈다는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정치 문제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게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성향을 먼저 좌파나 우파로 고정시켜 놓고 특정한 사항에 대해 찬반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철수는 자신이 좌파이기 때문에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에 찬성해야 하고, 영희는 우파이기 때문에 경제에 대한 정부 간섭을 반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외교 문제에 대해서도 좌파는 반미, 반일이어야 하고 우파는 친미, 친일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미리 결정해 놓고 구체적인 경제나 외교 정책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는 방식은 위에서 기독교인이니까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 앞에 마차가 놓인 셈이다.

이치에 맞는 방법은 특정 사항들에 대한 우리의 독립된 판단 여럿을 근거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놔두는 것이겠다. 최저임금 인상과 반미, 반일에 모두 찬성할 수도 있지만, 친미, 친일이면서 최저임금 인상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한 판단이 많이 모인 다음에 이것들을 검토해 본다면, 자신이 보이는 성향이 확률적으로 좀 더 진보인지 아니면 보수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정치적 성향이 변하지 않는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나는 스스로를 좌나 우로 고정시켜 놓고 거기에 집착하는 데서 스스로와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온갖 번뇌가 비롯된다고 본다. 좌나 우도 상(相)이다. 특히 위험한 상이다. 불자들이라면 마땅히 떨쳐버려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종교나 정치 이념에 쉽게 이끌리곤 한다. 이들이 각각 사후(死後) 천국에서의 영생과 이상(理想) 사회에서의 행복 같은 황홀한 선물을 약속하다 보니 유혹당하기 일쑤다. 게다가 이 둘은 마치 모든 문제에 완벽한 해결책을 가진 듯 보이는 이론으로 뒷받침되고 있어서 그 허점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많은 이가 좌나 우의 이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황홀한 약속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극단으로 몰고 가기 십상이다. 그리고 한 극단은 다른 극단과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문제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연초에 서울시가 올해 안에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인상하겠다고 예고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 같은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의 상을 가진 이들은 보통 ‘공공요금은 최저수준으로 묶어 놓아 서민들의 생활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반대할 것이고, 자유주의 상을 가진 다른 이들은 ‘대중교통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 적자운영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며 찬성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대중교통비 인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이롭거나 해로운가를 차분히 따지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이념’의 상에 맞추어 속성으로 재단하곤 한다. 시쳇말로, 이념이라는 극히 추상적인 상으로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도매금에 처리해 버린다. 너무 쉽고 빠르게 결정하고는 곧 너무 쉽게 서로 갈등하고 반목한다. 내게는 이것이 말 앞에 마차를 세우고는 서로 잘못이라고 다투는 어리석음으로밖에 안 보인다.

 

2. 집착과 게으름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불자들마저 가장 위험한 상인 정치이념에 집착해 극단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한다. 붓다의 중도의 가르침을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이 특정한 이념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왜 우리는 중도를 곧잘 벗어나 고뇌를 불러오는 이념의 상에 집착하여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게 될까?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면, 완전무결해서 변할 필요가 없었던 정치이념은 역사상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곧 깨닫게 된다. 고정불변의 이상적 사회구조가 존재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현재 붙잡고 있는 이념이 마치 영구불변의 진리요, 우리 사회를 이상향으로 만들어줄 신비로운 보배인 것처럼 집착한다. 왜 그럴까?

모든 이념은 근본적으로 극단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서 대단히 위험하고 중독성이 강하다. 나는 우리가 이런 나쁜 상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가 일종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종교 같은 거대담론은 아무나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도 스스로 근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주제들이다. 어느 누구나 그럴듯한 의견이 있고 또 그렇게 자신의 말에 취해 그 상에 머무르며 그것을 즐기곤 한다. 이렇게 쉽고 저렴하게 정서적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분야도 드물다. 지적(知的)으로 부지런히 이런 주제를 비판하고 분석해야 그 상(相)이 가진 문제점을 볼 수 있는데,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게으르고 또 그 값싼 만족감을 포기할 의향이 별로 없다. 나는 우리의 많은 갈등과 번뇌가 이런 게으름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상을 떨쳐버려야 하는 이유는 그런 상이 생겨나는 근원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5천만 명 이상이 사는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경제나 외교 문제가 단순한 흑백논리로 판단되고 처리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호흡을 한 차례만 가다듬고 생각해도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도 정치가들은 마치 흑백이 분명한 듯 말하고 행동하며,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도록 좌나 우, 또는 진보나 보수의 상을 계속해서 주입시킨다. 그들은 왜 사람을 이토록 상에 집착하게 만들까?

1980년대 한국은 외국의 인종 문제만큼 심각한 지역갈등을 겪었다. 모두가 망국적 지역감정을 개탄했지만, 나는 지역갈등으로 득을 보는 사람들은 없을까 궁금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지역감정 덕에 자기네 정당을 지지하는 고정표를 확보하여 공천 장사로 이득을 보던 정당 지도자들이었다. 겉으로는 지역감정을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서로 실속을 챙겼다. 현재 국민을 ‘좌와 우’라는 상에 집착하게 만들어 편을 갈라 갈등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또한 이런 문제로 득을 보는 집단일 것이다. 갈등으로 고생은 국민이 하고 이득은 정치집단이 챙긴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의 사제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네 신도들에게 각각 어처구니없는 상을 주입해 수천 년 동안 서로 증오하고 피를 흘리게 했다. 보통 사람들이 그 상에 집착해 서로를 해치는 동안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과 결탁한 사람들은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불자들은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씌우는 상에 집착해 이 세상에 고뇌와 갈등을 더 불러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념이라는 상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지적(知的)으로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극단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적절한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로서의 원리를 찾는 일이다.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중도철학이 근본적으로 옳지만,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극단을 피해야 하고 또 피한 다음에는 정확히 중도의 어디를 취해야 옳으냐는 상세한 지침까지 제시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길잡이로서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먼저 중도의 성격에 대해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3. 중도란 적절함이다

사회적으로 갈등이 심한 시기에 불교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해결책이 붓다의 중도론인데,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중도철학은 결코 대립하는 사람들이 서로 편리를 위해 어중간하게 타협하라는 속된 가르침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오히려 우리가 양극단을 피하면서 주어진 경우마다 ‘가장 적절한 지점’을 찾아 그곳을 문제 해결을 위한 행위의 거점으로 삼으라는 지침이다. ‘중도’라는 말 자체가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 주지 못해 다소 아쉽다.

서양에도 불교의 진리는 중도의 가르침으로 소개되어 왔다. 서양의 불교 개론서는 붓다가 지나친 안락을 피해야 함은 물론 그 반대쪽 극단인 고행도 피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며 이를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수행법으로서의 중도만 말할 뿐, 진리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중도의 성격까지 보여주지는 못한다. 주지하듯이 불교는 ‘중도’의 개념으로, 사물이 아뜨만이나 브라만처럼 실체로서 상주하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그 반대 극단으로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멸의 상태에 있지도 않다는 내용을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모든 존재자가 연기로 생멸하다 보니 상주와 단멸의 중간 상태라고 할 수 있을 현상[幻]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도만이 존재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붓다의 중도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비교하여 논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은 존재자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까지 적용할 수는 없고 단지 우리의 도덕 행위와 관련해 덕(德)의 성격을 논하면서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절제하며 사는 덕은 방탕함과 구두쇠질 두 극단의 가운데 있다. 돈을 너무 많이 쓰면 안 되지만 그 반대로 쓸 일에도 안 쓰며 사는 것은 현명하거나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용기라는 덕은 지나친 극단으로서의 악(惡)인 만용과 그 반대로 결핍된 극단으로서의 악인 비겁함을 피하는 가운데 놓여 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가 양극단의 산술적 평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하는 빌 게이츠가 자선단체에 매년 10억 달러를 보내고 가장 적게 내는 사람이 한 푼도 안 낸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이 모두 매년 5억 달러씩 기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자 수입과 지출을 고려하며 적절한 수준에서 기부해야 덕이다. 절제하며 사는 덕과 또 전장에서의 용맹함도 사람에 따라 또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리 정해질 수밖에 없다. 천편일률적으로가 아니라 사람과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행위하는 것이 중도를 따르는 일이다.

팔정도로 대표되는 불교의 중도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정언(正言)은 거친 말이나 그 반대의 사탕발림 말도 피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실은 상대와 경우에 따라 말을 적절히 조절하여 쓰라는 가르침이다. 전장에서의 군인들끼리는 직설적 언어가 좋겠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부드러운 말씨가 적절하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경우와 상황에 따라 다소 다른 종류의 말을 사용해야 옳을 것이다. 정정진(正精進)과 정정(正定)에 대해서는 경전에 전해지는 악기의 비유가 그 가르침의 정수를 보여준다. 악기의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게 되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줄의 장력은 그 중간에서 적절히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중간이 반드시 산술적 평균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줄마다 내야 하는 음정이 다르기 때문에 그 주어진 역할에 따라 줄마다 다소 다른 장력이 중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도 수행자에 따라, 그리고 같은 수행자라도 수행단계와 상황에 따라 달리 수행해야 옳다. 나머지 다섯 정도(正道)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삶과 세계가 상대적으로 단순했던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당시 중도의 각론으로 제시된 팔정도가 아무런 재해석이나 보충적 지침 없이 현대인의 삶과 세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그 오랜 옛날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제시되었던 여덟 갈래의 길로 과연 이 복잡하고 격변하는 시대의 삶을 나누어 설명하고 바른길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교수가 더 좋은 수업을 위해 강의실의 강의와 인터넷을 이용한 교수법을 어떻게 적절히 조합하는 편이 좋을까를 고민한다면, 팔정도의 어느 가르침(들)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또,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공무원이라면 어떤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팔정도와 중도의 가르침에 맞을까? 한편, 여윳돈이 있다면 내 주위의 불우한 이웃과 아프리카 오지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쪽에 먼저 기부해야 더 좋은 기부일까? ……

이런 문제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매일 직면하고 있는 고민거리들이다. 수천 년 전 제시된 팔정도가 이 모든 복잡하고 다양한 경우에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기준을 쉽고 효과적으로 제공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체적인 길잡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수없이 많고 다양한 삶의 장면마다 각각 다른 길잡이를 새로 도입한다면, 이 또한 적합한 길잡이를 선택하고 따라 하기가 번거롭고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잡하지 않아 따르기 쉬우면서도 우리 삶의 다양한 장면들에서 우리를 중도의 길로 향하고 이끌어줄 수 있는 어떤 행위의 원리이겠다. 특히 개인의 삶이 사회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 없이는 불가능한 오늘날에는, 스스로의 공부와 수행의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사회와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적절하고 올바른 행위로 이끌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지금부터 이 기준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4. 깨달음 산출 원리와 중도

나는 ‘깨달음 산출 원리’를 중도를 찾는 구체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기준으로 제안해 왔다. 이 원리는 우리가 불자로서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고찰해 보면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모든 불자가 가지는 최고의 서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의문의 여지 없이 깨달음이 불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불교는 원천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고 철학이다. 그리고 불자들은 깨달음을 통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열반의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순간 행위하며 산다. 그래서 각각의 행위를 규제하고 인도해줄 어떤 원리가 필요한데, 불자들은 그 원리를 깨달음 획득이라는 궁극의 서원과 연관 지어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행위와 사건의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건이나 행위가 깨달음을 산출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느냐 아니면 (얼마나) 역행하느냐일 것이다. 다음이 내가 제안해 온 ‘깨달음 산출 원리’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 산출에 기여한다.) ↔ (그것이 좋다/옳다.)

(어떤 사건 또는 행위가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 (그것이 나쁘다/그르다.)

 

나는 불자들이 이 원리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본다. 그러면 우리가 이 깨달음 산출 원리에 따라 어떻게 중도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과음이나 과식은 건강을 해치고 정신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에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그래서 나쁘다. 따라서 이런 행위는 삼가야 한다.

참선수행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도와주어 깨달음 산출에 기여한다. 그래서 좋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참선에 임해야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하루에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해 주어 깨달음을 향한 길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좋다. 따라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사용하는 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때문에 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른말 쓰기는 깨달음에 기여한다. 그래서 좋다. 따라서 말을 바르게 써야 한다.

교수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얻는 진리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여러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 그래서 교수는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이 밖에도 깨달음 산출 원리가 우리를 중도에 맞는 적절한 행위로 인도해주는 예는 원칙적으로 무한히 많다. 나는 이와 같이 붓다의 중도의 가르침이 깨달음 산출의 원리를 통해 우리를 구체적으로 가장 적절한 행위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자들의 모든 행위의 기준으로 제시된 이 원리가 중도를 찾는 구체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붓다가 제시한 팔정도 하나하나도 물론 이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깨달음 산출 원리는 2,500여 년 전 단순했던 사회에 맞게 제시되었던 팔정도가 포함하지 못하는 우리의 복잡한 삶에도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서 좋다.

 

5.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중도 원리

중도는 우리가 경우마다 적절하게 행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고, 나는 깨달음 산출 원리를 중도를 찾는 기준으로 제안했다. 그런데 위 4절에서는 깨달음 산출 원리를 주로 개인이 그의 중도의 행위를 찾는 방법으로 보여주며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예를 몇 들기도 했다. 논의의 전개에서 이런 순서를 따른 이유는 실은 팔정도의 가르침 하나하나도 기본적으로 개인의 관점에서 중도를 찾아 스스로를 이롭게 하여 깨달음과 열반으로 향해 가라는 취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어(正語), 정명(正命), 정업(正業)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자신의 행위가 그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중도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이것들도 주로 중도를 찾은 개인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의 가르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며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다른 모든 유정물 및 무정물과 연결되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굳이 화엄의 법계연기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중생계의 모든 구성원과 어우러져 그 의미가 생겨난다는 점은 분명하겠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나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행해지는 모든 행위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중생의 깨달음에 얼마나 기여 또는 역행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또 가치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겠다.

 

모든 중생은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원한다.

불자는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면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불자는 중생이 스스로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그들의 고뇌를 제거해 주는 깨달음과 열반이 실제로 그들 행위의 궁극적 목표로 된다고 이해한다.

중생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표로서의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 모든 중생에게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깨달음 산출 원리는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중생은 다른 모든 중생과 연결되어 존재하고 행위한다. 따라서,

불자는 모든 중생의 깨달음과 열반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 좋고 옳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여야 한다.

 

개인에게 중도의 행위를 찾아 주는 길잡이로 출발한 깨달음 산출의 원리가 법계연기론에 익숙한 불자들에게는 개인의 사회적 존재자로서의 특성을 부각시켜주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로 다가오게 된다.

서양 도덕철학을 이루는 두 근간이 법칙주의와 공리주의인데, 내가 제시하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라!’는 도덕명령은 이 두 전통의 요구사항을 모두 충족한다. 칸트로 대표되는 법칙주의는 모든 도덕법칙은 반드시 보편화가 가능해야 하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제안은 모든 중생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행위의 원리이고 또 이 원리는 모든 중생이 깨달음과 열반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며 법칙주의의 요건을 만족시킨다. 한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실현을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공리주의와 나의 원리가 기본 정신을 공유한다는 점은 자명하다고 본다. 다만 ‘행복’이라는 상을 설정하는 서구의 공리주의와는 달리 내 원리는 ‘깨달음으로 모든 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야 열반’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 절에서 더 논의하겠다.

이제 사회적 존재자로서 우리의 특성을 고려하며 다시 제안된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적용되는 예를 몇 개 살펴보기로 한다.

이웃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면 그들에게 재난구조팀과 구호품을 보내주어야 한다. 그들이 빨리 회복하게 되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SNS에서 남들에게 악성 댓글을 다는 것은 그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초래해 그들의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나쁜 댓글을 다는 사람 스스로도 비뚤어진 심성을 기르게 되어 그가 깨달음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나쁘다. 따라서 악성 댓글을 달면 안 된다.

돈 많고 힘 있는 집안 자제들에게만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열려 있는 체제는 많은 젊은이에게 좌절감을 주어 그들의 깨달음 산출에 역행한다. 이런 체제는 옳지 않다. 따라서 이런 체제를 고쳐야 한다.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은 적군이라도 치료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상 회복이 그들이 고통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는 길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군도 치료해주어야 한다.

아픈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리고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의료서비스를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예를 통해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우리의 사회적 삶의 모든 국면에 무리 없이 적용됨을 보여줄 수 있다.

중도를 찾는 구체적 지침으로 제시된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는 4절에서 논의된 깨달음 산출 원리를 자연스럽게 포함한다. 모두가 사회 안에서 다른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된 삶을 사는 오늘날, 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 전체와의 맥락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모든 것이 중생계 전체와 연결되어 생멸하고 있는데, 법계로부터 고립되어 한 개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깨달음 산출의 원리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비록 내가 논리 전개의 흐름을 위해 4절과 5절에서 깨달음 산출 원리와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를 각각 따로 논의했지만, 이 둘은 후자의 원리 하나로 통일된다.

이제 이 절에서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겠다. 나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라!’는 도덕명령이 불자들이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고 또 적용해야 하는 행위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고대인들의 단순했던 삶을 위해 제시된 팔정도만으로는 더 이상 80억 명이나 되는 현대인의 복잡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많은 구체적 경우들 하나하나에 각각 새로운 길잡이를 찾아주는 한없이 긴 매뉴얼을 만들어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자들에게 하나의 선명한 원리를 제시해 모든 행위를 위한 단순명료한 길잡이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위의 ‘최대다수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 원리는 공리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이 원리(와 도덕명령)를 얼마나 잘 따르는가에 대한 양화가능성(quantifiability)조차도 상상해봄 직하다. 양화 가능한 것들은 양적으로 계산하고 쉽게 다룰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더 적합하다.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는 논리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팔정도를 포함하며 동시에 필연적으로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현대인의 복잡한 삶에서 각각의 경우마다 올바른 길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이끌어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원리가 불자들을 가장 적절하고 옳은 행위로 이끄는 원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적절하고 옳은 길을 찾아주는 원리가 바로 중도를 따르게 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 원리가 바로 중도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의 중도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직업을 갖고, 정진하고, 마음을 챙기고, 선정에 들며, 또 그 밖의 모든 행위에 임해야 할 것이다.

 

6. 중도와 깨달음

가장 바른 행위를 찾는 중도의 길은 깨달음과 열반 산출을 위해 가장 적절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걷게 된다. 우리가 중도를 택하여 삶에 주어진 고뇌로부터 벗어나려는 이유가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려는 근본적인 서원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중도의 길이 깨달음과 열반의 길과 일치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논의를 시작할 때 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극단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이념의 상들을 여의고 중도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련의 논의를 통해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 산출 원리’를 중도를 찾는 구체적인 척도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념이라는 상에 대한 집착을 여의기 위한 방법으로 내놓은 이 원리가 엉뚱하게 우리가 집착해야 할 또 하나의 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든 상을 여의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나 스스로 논파한 셈이 아닐까?

‘깨달음’과 ‘열반’도 개념으로 포착되는 말들이어서 우리에게 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상조차 여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깨달음과 열반이 상으로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상이어서, 굳이 상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이라면 어떤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집착할 수도 있는 것일 텐데, 깨달음과 열반은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영어에서 ‘nothing’이나 ‘nobody’는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들로서 일종의 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개념들이지만, 이것들은 실은 ‘아무것도 없다’와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서 붙잡고 집착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개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들은 그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농담이 아니라면, 어떻게 nobody나 nothing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열반(nirvana)’이라는 말도 무엇이 존재하는 상태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번뇌의 불길이 꺼짐’을 의미한다. 즉 ‘아무 고뇌가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부정적(否定的)인 상태를 의미하는 ‘상’에는 우리가 붙잡고 집착할 아무런 구체적인 대상이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없다’는 개념 안에 어떻게 무엇이 있어서 그것에 얽매일 수 있겠는가?

‘깨달았다’는 말은 원래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이해했다는 의미였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집착할 대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르치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는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로 대표된다. 무아는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아무런 실체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으로, 진정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가르침으로는 집착할 (참된) 나도, 집착되는 대상으로서의 (참된)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무엇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무아’라는 가르침 자체에 집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마치 ‘nobody’나 ‘nothing’에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명치 못하다.

한편 연기의 가르침 또한 집착의 대상을 주지 않는다. 연기란 사물이 조건에 의존해 생성 · 지속 · 소멸한다는 통찰로서, 대승에서는 연기를 공(空)의 가르침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조건에 의존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해 주는 자성(自性)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도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가 아니고 또 자성을 결여하기 때문에 만물이 공하다고 표현된다. 그래서 연기가 곧 공이라는 것인데, 붙잡을 실체와 자성이 모두 없는데 도대체 무엇에 집착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연기를 깨닫는다고 해서 무엇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는다. 혹자는 또 ‘공’이라는 개념 자체에 집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마치 ‘nobody’나 ‘nothing’에 집착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을 뿐이다.

나는 이 글에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우리를 극단으로 내몰아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이념의 상을 여의고 불자들이 선택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위의 기준을 찾기 위해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 산출 원리를 제시했다. 깨달음과 열반은 붙잡고 집착할 상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이 원리가 또 하나의 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글의 논의를 마친다.6)7) ■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다. 주요 저서로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생명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는가》(유선경 교수와 공저)가 있다. Buddhism for Thinkers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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