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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중용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 장영란
특집 | 중도의 철학, 양극화 극복의 길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장영란 phileidos@gmail.com

1. 누가 지금 중용을 논하는가

서양철학사에서 망각의 늪에 빠져 지금까지 아무런 형체도 드러내지 못했던 불운한 개념이 있다면 바로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현대 철학에서는 아무도 중용을 학문적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만약 있다면 서양 고대 철학에서 중용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정도라 할 수 있다. 사실 현대 철학의 수많은 철학적 개념들이 서양 고대 철학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의 핵심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고대 철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중용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서양에서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용에 대해 언급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하에서 언급될 뿐이다. 또한 근대에 칸트가 언급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철학적으로 독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누가 지금 중용을 논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서양에서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양에서 중용 철학이 학문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을까? 일차적으로는 ‘중용’ 개념이 너무 애매하고 모호하기 때문이라는 비판과 연관된다. 그것은 ‘중용’ 개념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라 할 것이다. 사실 서양철학에서 중용 개념을 말할 때면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하지만 정작 아리스토텔레스조차 학문적으로 다루는 부분도 매우 적은 편이다.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중용은 본성적으로 보편화하기보다는 개별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체계화되기 어렵다. 특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서 중용 개념은 매우 단편적으로 다뤄지거나 철학적 용어로 완성되지 못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철학적 용어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중심으로 이전의 중용 개념의 기원을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스 신화로부터 철학으로 넘어가면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중용 철학은 삶의 주요 원리였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중용 개념이 본격적으로 어떻게 정의되고 설명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는 전체 주제를 논의하면서 중용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중용 철학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는 ‘유가’의 중용 개념이 친숙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비교하고자 한다. 나는 특히 형이상학적 관점, 윤리적 관점, 인식론적 관점 등 세 가지 비교 기준을 제시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중용 개념은 고대인들의 삶 속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중용’은 인간의 중요한 삶의 척도이자 기준으로 드러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중용의 덕을 가르치고 있다. 가령 다이달로스가 크레테의 미노스 왕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새의 깃털로 만든 날개를 아들 이카로스(Ikaros)에게 달아주면서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고 하는 것도 중용적 사고의 한 방식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항상 인간에게 경계하도록 한 것은 ‘오만(hybr-is)’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지나칠 때 발생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적절하지 않은 지나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가령 코린토스의 시시포스는 인간의 한계상황이라 말하는 죽음을 피하려 했다. 전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의 신이 왔을 때 술에 취하게 만들어 결박시켜버려 아무도 데려가지 못하게 하였다. 지상에서 죽는 사람이 없어지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하데스로 잡아가게 했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다시 죽은 자들 세계의 왕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속이고 지상으로 돌아온다. 비록 시시포스가 지상에서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신화는 시시포스가 타르타로스에서 언덕 위로 힘들게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다시 굴러 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는, 결코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일관되게 ‘지나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를 ‘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형상화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바로 신들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인간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못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인간이 추론하거나 예측한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가능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신이 되려 할 때 파멸로 치닫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들이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사례를 수없이 보여준다.

심지어 영웅들조차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영웅들은 특히 다양한 모험을 통해 보통 사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오만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사실을 간파했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 신화 속의 영웅들이 고난을 극복한 후 명성을 누리며 살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대부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스 신화는 동일한 주제를 다르게 다룬 사례들을 반복적으로 변주해낸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며 원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중용은 동서양 모두에서 일종의 삶의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서양에서 중용은 수학이나 기하학 등과 같은 영역에서 사용되다가 점차 철학에 편입되어 산발적으로 논의되다가 플라톤에게서 개념화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학문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범위를 이전 철학자들보다 축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대인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동양에서 《중용》은 사서(四書) 중 한 권으로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지며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평가된다.

 

2. 중용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철학에서 중용 개념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주요 개념들 중의 하나로 생각되었던 ‘중용’ 개념은 역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나타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철학적 개념으로 확립했지만 제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중용 개념을 포괄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 이외에서 중용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기보다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다.

중용은 그리스어로 ‘중(中)’을 의미하는 메손(meson)이나 메소테스(mesotes)를 가리키거나 ‘적도’를 의미하는 메트론(metron)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중용이라는 삶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격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와 ‘너무 지나치지 말라’는 상호 연관적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면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무엇이 적절한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인식론의 기초이며 윤리학의 원리이고 정치학의 전제가 된다.

사실 ‘너무 지나치지 말라’는 어떤 기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가 않다. 너무 지나치지 않은 것은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적절한’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적절한’ 상태라는 표현이야말로 가장 애매하고 모호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적절한 것은 고정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적절한 것’은 적도(適度) 또는 중용(中庸)이라 불렸다.

서구에서는 중용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적인 편이다. 하지만 플라톤도 이미 중용과 관련된 측정술(met-rike)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플라톤의 측정술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수적으로 헤아려 재는 측정술이며, 다른 것은 적도(metrion)와 관련된 측정술이다. 여기서 적도는 좋음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플라톤은 ‘적도가 최선이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보다 구체적으로 적도를 찾기 위한 방법론으로 측정술을 제시한다. 적도와 관련된 측정술은 ‘극단을 피하고 중간을 향한 모든 것’과 관련된다. 플라톤의 적도와 측정술에 대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사상에 분명히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에 훨씬 친숙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가운데 ‘중용’을 말하고 있다. 행복은 ‘덕(arete)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편이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일반적인 행복 개념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더욱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매우 독특해 보이지만 일반적인 생각과 유사한 점도 없지 않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것을 추구해야 하는데도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사람은 각자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이란 영혼의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크게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구분된다.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 ‘지성의 덕’이며, 비이성적인 부분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이 ‘성품의 덕’이다. 우리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등과 같은 지성의 덕과 성품의 덕을 훌륭하게 발휘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중용은 도대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가? 중용은 바로 ‘성품의 덕’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지성의 덕에는 적절한 것이 없다. 지성은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품의 덕은 인간의 감정과 행위 등과 관련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라 정의한다. 중용은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과 ‘우리와 관련된 중간’으로 구분된다.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은 각각의 끝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며 동일하다. 반면 우리와 관련된 중간은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은 산술적 중간(arithmetical mean)이라 불리며, ‘우리와 관련된 중간’은 일종의 윤리적 중간(ethical mean)이라 불린다. 산술적 중간이란 어떤 사물 또는 대상의 중간, 즉 원지름이나 대각선의 중간이 양 끝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이며 일정한 방식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중간, ‘우리와 관련된 중간’의 경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들이 매번 다르고 항상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방식으로 구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실질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윤리적 중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추구하고 이것을 선택하는데, 이때 중간은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이다.

사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중간’이라 표현하는 말을 국내에서는 일상적인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 ‘중용(中庸)’으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은 비교적 분명하게 정의되고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현실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윤리학의 주제들 중에서 ‘중용’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중용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중용 원리를 예상외로 제한적 의미에서 사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중용을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기준이나 척도를 제시하기를 기대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 몇 가지 성품들을 설명하는 데 추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메소테스(mesotes)를 한자어로 중용(中庸)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지만, 양자는 언어적으로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어의 경우에 ‘중용’에서 ‘중’은 단지 중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용’을 의미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도 초기에는 ‘중’만 단독으로 사용되다가 ‘용’과 조합되어 ‘중용’이 처음으로 사용되는 곳은 《논어》이다.

‘중(中)’은 이미 동아시아 사상에서 철학적 사유의 기초가 되고 있다. 유가에서는 문헌상으로 중용 개념의 기원을 《주역》 《서경》 《논어》 《중용》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중용》에서 체계적인 철학적 개념으로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은 하늘과 인간이 따라야 하는 근본적인 원리로 생각되고 있다. 《중용장구》 서문에서 정자(程子)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中)은 천하의 정도(正道)이고, 용(庸)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定理)이다.”라고 해석했다. 주희는 중용에 대해 “중(中)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것을 이르고 용(庸)은 평상(平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은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사실 《중용》에서 설명하는 ‘중’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하는 중의 개념과 유사하다. 그것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가의 중용(中庸) 개념에서 중(中) 개념 외에도 ‘용(庸)’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가에서는 ‘용’에 대해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중용’과 관련하여 훨씬 세밀한 설명과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용(庸)은 ‘쓰임(用)’을 의미하며 ‘반복’을 통한 ‘지속’의 의미를 갖는다. 정자(程子)는 ‘용’을 바뀌지 않는 것(不易)이라 말한다. 그것은 변함없이 항상 중을 항상 견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행동강령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중’을 변함없이 행해야 한다는 일종의 윤리적 훈련이나 실천의 측면을 강화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희는 《중용장구》 첫 구절에서 용을 ‘평상(平常)’이라 설명하여 당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 많은 유가 학자들에게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중용 개념과 관련하여 ‘중’ 개념은 유가 학자들 간에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용’ 자의 의미는 명확한 해석이 없다고 한다. 그는 주희의 ‘중(中)’에 대한 해석은 수용하나, ‘용(庸)’에 대한 해석은 거부한다(〈中庸自箴〉 1:8). 정약용은 주희가 ‘용’을 평상, 즉 일상(日常) 혹은 보통(普通)이란 의미로 새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중용은 최고의 덕[至德]인데, 주희는 그것을 범인(凡人)의 도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은 유교의 중용 개념과 매우 유사한 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 개념을 사용할 때 실제로 한자어의 ‘중’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엄밀히 유가에서 논란이 되는 ‘용’에 대한 개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비록 그리스어에는 ‘중’의 의미밖에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는 ‘용’에 해당하는 내용을 주요 속성으로 삼고 있다. ‘용’이 쓰임의 반복과 지속을 통해 항상성을 가지는 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습관에 의해 획득되는 성품의 상태와 유사하다.

인간의 행복은 영혼의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데 있다. 덕은 본성적으로 생기거나 또는 본성에 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습관을 통해 완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EN 1103b) 우리가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정의롭게 되는 것이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용감하게 되고, 덕을 획득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행위를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과 관련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영혼을 훈련하여 습관화하지 않으면 중용을 취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유가의 중용 개념 정의처럼 습관화와 훈련을 통해 중용의 일정한 상태에 도달하여 일시적이거나 순간적이지 않고 ‘변함이 없어야(不易)’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메소테스(mesotes)는 유가와 달리 중용의 ‘용’에 해당하는 단어를 포함하지 않지만, 가장 기본적인 특성으로 일정한 ‘상태(hexis)’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맥락에서 중용이라는 번역어는 유가와 주요 개념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가의 중용 개념에 대한 해석들도 ‘중’이라는 작용 방식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이어서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 및 강조하기 위해 ‘용’이 결합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대 철학에서 중용 개념은 ‘중’이라는 인식의 원리와 ‘용’이라는 실천의 원리가 결합되어, 철학적인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중’과 ‘용’이라는 두 가지 독립적인 용어들이 결합되어 철학적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해준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중이라는 용어 외에 용에 해당하는 개념이 명칭 자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을 실천하는 철학적 원리로서 독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서양 모두 인식의 원리로서 ‘중’ 개념을 정의하면서 ‘중’의 종류를 구분하고 ‘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며, 실천화의 원리로서 ‘용’을 언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유가에서는 ‘중’의 개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이지만, ‘용’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어 보인다. 서양의 그리스 철학에서는 ‘중’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 자체도 달라진다.

 

3. 중용 개념들은 서로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가?

서구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철학자들은 ‘중’이라는 용어를 독자적인 철학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특성이 없는 일상적인 용어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 이전의 서사시, 서정시, 비극 등에 나타나는 주요 철학 개념의 기원들을 검토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가의 중용 개념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유가 철학에서 중용 개념은 매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차이점과 유사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다음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비교하고자 한다. 그것은 중용 개념의 적용 범위를 통해 보여주는 형이상학적 관점과, 그것이 적용되는 단초로서 감정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과 그것의 실천 가능성을 보여주는 윤리학적 관점이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는 양자 간의 차이점을 볼 수 있으며, 윤리학의 관점과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양자 간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1) 형이상학적 관점의 중용

먼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유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 적용 범위를 검토해보자. 유가의 중용 개념이 어려운 일차적인 이유는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된다. 물론 궁극적으로 유가나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중용 개념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천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중용 개념을 인간의 행위에 적용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다. 그렇지만 유가는 그것을 단지 인간에만 국한해서 사용하지 않고 전 우주적 차원에서 적용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다. 유가의 《중용》 첫 구절은 형이상학적 논의로 시작한다.

하늘의 명(天命)을 일러 성(性)이라고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일러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일러 교(敎)라고 한다. (《中庸》 1)

만일 중용을 막연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행동 준칙이라 생각했다면 당황스러운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유가의 《중용》은 단숨에 하늘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철학적인 핵심 논의들을 일갈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중용은 우주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인간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간의 행복에 대한 논의로 시작된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인간 영혼의 고유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능력은 이성적인 측면과 비이성적인 측면으로 나뉘며, 전자의 탁월성을 지적 탁월성이라 하고 후자의 탁월성은 성격적 탁월성이라고 한다. 중용은 성격적 탁월성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은 아무리 확대한다고 해도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의 중용 개념이 하늘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는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유가에서 하늘과 인간과 만물은 상호 연관적이다. 하늘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으면 인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만물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하늘과 땅을 생육할 수 있다.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만이 그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그 본성을 실현해야 인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실현해야 만물의 본성을 실현시킬 수 있고, 만물의 본성을 충분히 실현시켜야 하늘과 땅이 자라게 된다. 하늘과 땅이 자라는 것을 도울 수 있으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참여할 수 있다. (《中庸》 23)

하늘과 땅, 인간과 사물은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본성을 실현해야 하늘과 땅을 자라나게(育) 할 수 있다. 이것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할 수 있다. 유가는 하늘로부터 인간을 통해 사물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고유한 본성을 발휘할 때 모든 것이 자라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지극히 정성스럽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때 사물도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천지만물이 자라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 또는 실현할 수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천지만물을 생육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근본적으로 유가는 중용 개념의 적용을 우주로 확장해서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국한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초기 철학자들은 중용 개념을 상당히 포괄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적도(metron), 조화(harmonia), 비율(logos) 등을 ‘중’과 관련된 철학적 용어로 확립했다. 피타고라스학파에 따르면 조화는 기본적으로 대립적인 것들로부터 나온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조화’이다. 우주도 수적 비율에 의해 조화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나아가 플라톤도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생성론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주의 아름답고 좋은 상태는 질서와 균형 및 적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의 모든 좋은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결코 불균형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간(meson)에 대해 윤리학 이외에 《동물 부분론》이나 《동물 운동론》 및 《생성소멸론》과 같은 자연과학적인 작품 속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말한 ‘적도와 관련된 중용’이 아니라 ‘대상에 있어서의 중용’과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부분론》에서 적도(metrion)와 중용(meson)을 가지기 위해 대립자를 필요로 한다. 중용은 실체와 적절한 비율을 가지며 양극단의 어느 쪽도 가지지 않는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전의 철학자들의 중 개념을 특정한 영역에만 국한시켜 논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 사상에서 중 개념은 전문적 철학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일상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윤리학 이외에 다양한 작품에서 이전 철학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조화, 균형, 비율(proposition) 등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우주론적 차원까지 확장되어 있지는 않으며 고유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도 않다.

 

2) 윤리적 관점의 중용

다음으로 중용 개념의 윤리적 기초로서 감정에 대한 유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 개념을 인간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제한하여 설명한다. 근본적으로 행복은 영혼의 탁월한 활동으로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크게 비이성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성품의 덕과 지성의 덕을 구분하였다. 특히 성품의 덕을 설명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원리를 도입한다.

나는 성품의 덕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감정들과 행위들과 관련하며, 이것들 안에 지나침과 모자람, 그리고 중간이 있기 때문이다. (EN. 1106b)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 개념을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과 관련된 성품의 덕에 제한하여 논하기 때문에 지성의 덕과는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성격의 덕은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본성에 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그것을 본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습관을 통해 완성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다양한 성품의 덕을 사례로 개별적인 중용들을 설명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유가에서도 인간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중용을 말할 때는 ‘중화(中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중화는 매우 독특하게 정의된다.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喜怒哀樂)의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中)이고, 그것이 [이미] 일어나서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천하의 어디에도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거기서 길러진다. (《中庸》 1.4)

중은 아직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未發)이다. 그것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는 본성적인 ‘성품(性)’의 상태를 가리킨다. 중은 감정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주희는 희로애락이 ‘정(情)’이나,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성(性)’이고, 치우치고 기울어짐이 없어서 ‘중(中)’이며, 그것이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이 감정의 올바름이며, 어긋남이 없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성품의 덕이고 화(harmony)는 감정의 덕이다. 여기서 중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체가 아직 아무것도 작용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공부(戒懼工夫)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일어날 때(己發)가 바로 윤리적 주체가 개입할 결정적인 순간이다. 유가는 그것이 모두 절도에 맞게 일어나는 것(其發而中節)이 ‘화(和)’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화는 어떤 감정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라도 적절하게 일어나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성품의 덕인 중용은 무정념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도 고통도 없는 상태로 중용이 추구하는 목표는 아니다. 인간의 비이성적 부분과 관련된 성품의 덕은 본성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인 한 즐거움과 고통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어렸을 때부터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괴로워해야 할 것에 고통을 느끼도록 길러져야 한다고 말한다. 덕은 즐거움도 고통도 없는 무정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고 회피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그래서는 안 되는지, 언제 그래야 하는지, 또는 그 밖의 것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단순한 의미의 무정념이 아니며 적절하고 올바르게 감정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중용으로서 성품의 덕은 지성의 덕과 함께 인간 삶의 목적으로서의 행복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유가는 중화를 훨씬 넓은 의미로 확산시켜 사용한다. 중은 하늘이 명령한 성품(性)이며 이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니 천하의 큰 근본(大本)이라 할 수 있고, 화는 성품을 따르는 것으로 모든 것에 통하니 도(達道)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화는 천하의 근본을 세우고 천하에 통하는 도를 실행하는 것이다. 나아가 유가는 “중화를 지극히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질 것(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 영혼의 비합리적인 부분의 탁월성으로서 중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

 

3) 인식론적 관점의 중용

마지막으로 중용 개념의 인식론적 기초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적중(的中, stochastike)과 유가의 ‘시중(時中)’과 연관하여 분석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성품의 덕에 관련되었으며 여기에 지나침과 모자람 및 중간이 있다. 우리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에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감정을 가질 수 있으며 행위를 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분노하거나 욕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중용은 두 악덕, 즉 지나침에 따른 악덕과 모자람에 따른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EN 1107a) 본성적으로 나쁜 것에는 중용이 적용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심술이나 파렴치 및 시기 등과 같은 감정들이나 간통, 절도, 살인 등과 같은 행위들에는 중용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들이기 때문이다.

중(中)은 적절함이나 시중(時中)의 의미로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지키는 것과 관련하여 ‘적중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적중술’에 대해 말할 때는 단지 성품의 덕뿐만 아니라 지성의 덕도 함께 말한다. 덕은 중간적인 것을 적중하려는 한에서 일종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EN 1106b)

모든 상황에서 적절한 감정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이 훈련하지 않으면 도달하기 힘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의 덕을 “중간적인 것을 겨냥하는 한 일종의 중용”(EN 1106b)이라 한다. 그렇지만 가장 적절한 감정이나 행동을 하기 위해서 단지 성품의 덕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지성의 덕인 실천적 지혜도 필요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적으로 잘 숙고하는 사람은 인간적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것을 헤아림에 따라 적중시키는 사람이다”(EN 1141b)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관련하여 성품이든 지성이든 ‘겨냥’ 또는 ‘적중’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을 하는 것은 화살을 쏘아 과녁에 ‘적중’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이나 행위에서 중간을 겨냥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람에게, 마땅한 만큼, 마땅한 때에, 마땅한 목적을 위해, 그리고 마땅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런 일을 잘 하는 것은 드물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며 고귀한 일이다. (EN 1109a)

중용이란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만 인식하거나 실천하기 어렵다. 모든 것에서 중용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깨닫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넓게 작용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늘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으며 우리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늘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중용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용이란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누가 주체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주체와 연관된 객체와의 관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이 중용인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고 어떻게 중용을 실천할지도 쉽지 않다. 공자는 중용이 지극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오랜 훈련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서양에서 중용 개념이 더 이상 논의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중용을 적용하는 문제만 남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미 윤리학에서 학문적으로 ‘중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는 끝났다. 실제로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중용을 지키며 살 수 있는지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훈련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시도들이 엄청나게 휘몰아치는 정보의 바다에서 무력화되다 보니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강한 주장을 모방하여 대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더욱이 모든 정보를 선택하는 객관적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주장들을 찾아 쌓아두고 문을 닫고 걸어버리는 경향이 강해진다. 현대사회는 냉전시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전체주의적 특성을 보이며 극단화되고 있다.

중용사상은 단지 중도적인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 적절한 것은 바로 가장 올바른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이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개인이나 국가공동체 모두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다. ■

 

장영란
한국외국어대학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한국외국어대학 철학과 박사. 주요 저서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호모 페스티부스: 영원한 삶의 축제, 놀이와 예술과 여가로서의 삶》 《영혼의 역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 《플라톤의 국가, 정의를 꿈꾸다》 《플라톤의 교육: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 《죽음과 아름다움의 신화와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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