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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왜 중용을 강조하는가 / 최일범
특집 | 중도의 철학, 양극화 극복의 길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최일범 cib424@naver.com

1. 시작하는 말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은 이렇다. 지금 극단적 대립과 갈등의 재생산으로 혼란한 한국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려면 ‘절제와 양보의 중도철학의 정신’이 필요하니 동 · 서양의 중도, 중용 철학을 통틀어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이 제안에 필자는 동의한다. 그러나 혹시 중도, 중용 철학을, 사회적 갈등이 극단화되는 특수한 상황에 직면한 당사자들이 상호 ‘절제와 양보’를 요구하는 특수한 처방쯤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노파심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중도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중도 정치를 표방하는 정치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중도 정치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듯하다. 대립 갈등하는 양극단을 피한 안전지대, 제3의 길쯤으로 중도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중도, 중용의 철학은, 사회적 대립의 특수한 상황을 피하는 일시적 묘방, 법술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근본적 반성과 성찰을 추구하는 거대하고 심오한 인문 정신이며 문화 혁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중도철학을 돌아본다는 것은, 결코 일시적 처방이 아니라, 근원적이고도 본질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21세기의 르네상스를 지향하는 것이다.

유교는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는(修己治人) 인문학적 도덕 정신이며 철학이자 정치학이요, 큰 틀에서는 종교다. 유교의 근원은 인간의 가치의식에 있다. 선(善)의 가치를 자각하고, 나와 사회를 선으로 인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이루는 것이 유교의 목표다. 대동사회의 모델은 우주요 천지다. 수없이 많고 다양한, 서로 대립하는 특성을 가진 생물들이 공존의 장을 이루는 천지를 인간 사회에 실현하려는 것이다. 유교는 천지의 위대한 덕(大德)을 말한다. 천지가 공존의 장이 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지의 위대한 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천지의 의인화요 상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한갓 허구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유교에는 “치중화(致中和) 만물육(萬物育)”이라는 말이 있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만물이 생육한다는 뜻이다. 중화의 덕을 이루면 인간이 천지의 조화로운 자연 생태에 참여하는 위대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말한 텍스트가 바로 《중용》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대립, 모순이다. 우주는 음양(陰陽)의 대립으로 운행하고, 인간은 남녀의 대립으로 생화(生化)한다. 주역의 원리는 상반상성(相反相成), 서로 대립하므로 서로 이룬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문제는 인간의 눈에 있다. 붓다는 생사의 대립과 고통 속에서 열반의 깨달음을 얻었다. 의상의 〈법성게〉는 “생사와 열반이 어울리고 있다.”고 노래하지 않은가? 공자의 인(仁)도 ‘너와 나’의 대립을 소통하는 원리다. 북송의 유학자 정명도(程明道)는 의학에서 마비를 불인(不仁)이라고 하는 데 착안해서 인(仁)을 혈맥 유통의 원리, 천인합일의 원리로 해석했다. 그가 장자(莊子)의 “독여천지정신상왕래(獨與天地精神相往來)”를 좋아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장자의 정신은 천지와 서로 왕래할 뿐 아니라, 만물이 서로 왕래한다. 《장자》 〈변무편((騈拇篇〉에 이런 말이 있다. “오리의 다리가 짧지만 이어주면 싫어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자르면 슬퍼한다. 그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말을 생긴 대로 살라는 운명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물의 외형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 내면의 본성을 주시하라는 뜻이다.

유, 불, 도 삼교의 중도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의(仁義), 열반(涅槃), 무위(無爲)는 본성을 깨닫지 않는 한 결코 발견할 수 없고, 각고의 노력으로 본성을 기르지 않는 한 결코 이룰 수 없다. 《중용》에서는 “남이 한 번 해서 이루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 해서 이루면 나는 천 번을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중도, 중용 정신의 핵심이 있다. 중도, 중용은 최상의 진리, 본체를 가리키고 또한 진리에 대한 인식 방법뿐 아니라 실천 원리도 가리킨다. 우리는 한국불교에서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성철 스님의 유명한 《백일법문》이라는 책은 중도를 중심으로 불교사상을 정리하고, 특히 선과 교를 일관하는 개념으로 중도를 천명하였다. 중도, 중용의 철학 정신을 사회적 대립의 특수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절제와 양보를 요구하는 일시적 방편으로 알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2. 중용의 뜻

중용(中庸)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유교의 기본 텍스트인 사서(四書) 중 《중용》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윤리적 개념으로서 본체(本體)와 덕(德) 또는 덕을 닦는 최상의 방법을 가리킨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중용》은 《대학》과 함께 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한 편이었는데,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 사서에 편입하였다. 일찍이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다” “중용은 지극한 덕(至德)”이라고 찬탄하였다. 주희는 《중용》을 “공자의 문하에서 전수한 심법(心法)”이라 하고, 중(中)은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음” 용(庸)은 “평상(平常)”으로 정의했다. 중용은 마음을 기대거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게 하는 심법이라는 뜻이다. 용(庸)을 평상으로 본 것은, 중의 심법을 내면의 명상 세계나 형이상적 원리를 궁리하는 데 머물지 말고, 생활의 도리를 위해 쓰라는 뜻이다.

명말청초의 유학자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중용》을 “성인이 하늘을 계승하여 만물을 다스린 법도에 따라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황극(皇極)을 건립하여 백성에게 삶의 표준을 내리게 한 것”이라고 하여 제왕지학으로 보았다. 그는 중(中)을 본체, 용(庸)은 작용의 체용론적 구조로 해석하였다. 즉 존재론적으로는 우주의 본체와 생화의 작용으로, 인식론적으로는 마음의 본체와 작용으로, 정치적으로는 군주의 황극(皇極)과 백성의 민극(民極)으로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용이 철학, 윤리, 정치 등 여러 범주에 걸쳐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중용의 방법과 인(仁)의 실천

공자는 중용을 ‘최상의 덕’으로 찬탄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덕의 의미와 작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고(志於道), 덕에 의거하고(據於德), 인에 의지하고(依於仁), 예에 노닌다(游於藝).”고 말하였다. ‘도(道)에 뜻을 둔다’는 말은, 역시 공자 자신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바와 같이, 인생에서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다. ‘덕(德)에 의거한다’는 말은, 도의 실현은 덕(德)에 의거한다는 뜻이다. 《중용》에는 다음과 같이 말이 있다. “도(道)가 실행되지 않음은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도가 실행되지 않는 이유는 중용의 덕을 이루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인(仁)에 의지한다’는 무슨 뜻인가? 덕(德)을 닦으려면 인(仁)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仁)을 실천하면 덕이 축적되어 마침내 최상의 덕인 중용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의 원리와 실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군자의 도(道) 네 가지 중에 구(丘, 공자의 이름)는 하나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 자녀에게 구하는 것으로 부모를 섬기지 못했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으로 군주를 섬기지 못했으며, 아우에게 구하는 것으로 형을 섬기지 못했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으로 먼저 베풀지 못했다.          

윗글은 소위 효제충신의 도를, 공자 자신은 하나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내용이다. 또한 도가 실행되지 못한 것이 중용의 덕을 닦지 못한 데 있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윗글에서 “자녀에게 기대하는 것으로 부모를 섬기지 못했다.”는 말에는 내가 자녀와 부모 사이에서 중용을 잃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엇에 근거하여 반성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중용》이라는 텍스트가 “하늘이 명한 것(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率性)을 도(道)라고 한다.”는 말로 시작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도(道)는 ‘성(性)을 따르는 것’이며, 도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성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性)’은 ‘하늘이 명(命)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면의 명상이나 기도, 또는 모종의 방법으로, 성에 부여된 하늘(天)의 명령이나 소리를 직관한 것인가? 공자가 한 것은, 자녀에게 효도를 기대한 만큼 부모에게 효도를 했는지 스스로 묻고, 내가 벗에게 구한 만큼 나는 벗에게 신뢰를 보였는지 반성한 것이 전부다.

여기에서 반성의 방법을 분석해보자. 공자가 자녀에게 효도를 기대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세속적 인정욕구일 수 있다. 그런데 자녀에게 향하던 인정욕구가 나의 부모에게 전환하는 순간 나의 부모에게도 이런 기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부모에게 얼마나 효도를 했는지 깊은 반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나의 마음에서 자녀와 부모가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 나의 인정욕구는 부모에 대한 공감으로 승화한다. 이것이 나를 중심으로 자녀와 부모의 “양 끝을 잡아(執其兩端)” 삼자 구조를 형성하여 인(仁)을 실현하는 중용의 독특한 방법이다. 이는 나와 타자의 양자 구조에서 인을 실현하는 방법과 다르다. 공자는 인을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를 오해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투사할 위험이 있다. 가령 더운 날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다른 직원은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내가 더운 것을 원치 않으니 남도 덥게 하지 말자고 판단하여 에어컨을 켰다고 하자. 나는 인을 실현한 것일까?

사실 그 직원은 감기로 냉기를 싫어하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해서 남도 싫어할 것으로 판단한 것은 무늬만 인(仁)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을 실현할 수 있는가? 나는 에어컨을 켜고 싶은 나의 에고(ego)를 마음 한편에 두고, 그 반대편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일하는 상대를 두어, 양단(兩端)을 형성할 때 비로소 평형을 찾아 인을 실현할 수 있다. 공자가 자녀의 효도를 기대하는 마음에는 에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부모를 향해 마음을 돌릴 때 부모에 대한 공감이 형성된다. 이렇게 삼자구조를 형성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하는 방법을 공자는 “양단(兩端)을 두드려 다한다.” 또는 “양단을 잡아 그 중(中)을 쓴다.”고 말하였다.

 

① 공자가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느냐? 아는 것이 없노라. ……내가 아는 것이 없어도 그 양단(兩端)을 두드려 다(竭)한다.”

② 공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위대한 지혜를 가졌구나. 순임금은 …… 양단(兩端)을 잡아 그 중(中)을 백성에게 쓰니 이로써 순임금이 되셨다.”

① ②에서 주의할 것은 중용이 두 개의 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양단을 두드린다’ ‘양단을 잡는다’의 단계, 두 번째는 ‘다(竭)한다’ ‘중(中)을 쓴다’의 단계다. 자녀에게 기대하는 마음 외에 부모를 생각한 것이 바로 첫째 단계다. 다음 부모를 공감하고 반성하여 진실(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두 번째 단계가 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사태를 관찰하는 이성을 주로 쓰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공감적 감성과 반성의 성찰을 쓴다. 유교에서는 이성적 관찰과 감성적 공감을 적절히 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맹자가 주로 감성적 공감을 중시했다면 순자는 이성적 관찰을 강조했다. 순자는 마음의 인지작용에 장(臧: 트라우마 같은 기억), 양(兩: 여러 가지를 동시에 인지하는 산만함), 동(動: 꿈이나 상상으로 혼란함)의 현상이 발생하여 올바른 인지와 사유를 방해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음을 ‘텅 비우고(虛)’ ‘몰입하며(壹)’ ‘고요하게(靜)’ 하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갓난아기가 위험에 빠지는 상황을 목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측은지심의 도덕 감정을 느낀다고 하여 성선(性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맹자가 도덕 감성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도덕 실천의 동력이 공감적 감성에 있다는 측면에서 감성을 강조했지만, 한편 합리적 사유도 중시했다.

맹자와 양 혜왕의 대화는 그 대표적인 예다. 맹자를 처음 보자마자 양 혜왕은 “저의 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맹자는 서로 이익을 경쟁하면 뺏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답한다. 인간의 심리는 부를 경쟁할수록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대립과 갈등을 재생산하게 되므로, 부와 이익이 아닌 의리와 도덕의 가치관을 요구하는 것이 맹자의 합리적 이성이다. 《중용》의 철학은 성(性)과 성(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맹자의 철학은 바로 중용을 계승한 것이다.

 

4. 중용의 진실성(誠)과 조화성(和)

공감 능력을 맹자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양지(良知)”라고 하였다. 양지는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깨닫는 가치의식을 가리킨다. 양지의 자율성을 이해하는 데 칸트의 정언명법은 유용하다. 칸트는 진정한 도덕 실천은 오직 보편적이고 선천적인 도덕률과 합치하는 자율 의지로 이루어진다고 하고, 이를 의지의 자율에 의한 정언명법이라고 하였다. 자율 의지로 도덕을 실천해야 진정한 도덕적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신(神)의 명령이나 율법으로 도덕 행위를 한다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가 중심이 되어 양단을 잡아 공감을 이루는 것은 도덕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이기적 자아로부터 벗어나 참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를 《중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됨을 이룬 자(誠者)는 노력하지 않아도 적중하며, 생각하지 않아도 깨달아서 자연스럽게 도와 합치하는 성인의 경지이다. 참됨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誠之者)는 선을 택해서 굳게 잡는 자로서(擇善固執), 널리 배우고(博學), 살펴 물으며(審問), 삼가 생각하고(愼思), 분명히 변별하고(明辨), 독실하게 행동한다(篤行). 배우면 반드시 능통하게 하고, 물으면 반드시 분명히 알고, 생각하면 반드시 깨닫고, 변별하면 반드시 분명하게 하고, 행동을 하면 반드시 돈독하게 해야 한다.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을 할 것이다.

이 말은 중용의 방법을 통해 인(仁)을 실천함으로써 참(誠)의 궁극적 경지로 나아가는 공부의 과정과 노력을 말하고 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적중하며…… 자연스럽게 도와 합치하는” 경지는 “참됨을 이룬 자(誠者)”로서 “성인(聖人)의 경지”를 나타낸다. 이는 “참됨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誠之者)”가 달성할 목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중용의 실현이 인의 실천으로 출발하지만, 그 과정에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넓은 공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을” 하는 각고의 노력이 수반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중용을 최상의 덕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용에 모든 덕을 하나로 중화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용》에는 “만물이 함께 살아도 서로 해치지 않고, 도(道)가 병행해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덕은 시냇물처럼 흐르지만 큰 덕은 만물을 두텁게 감싸 조화를 이루니 이것이 천지가 위대한 까닭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소덕(小德)과 대덕(大德)의 차이는 포용의 크기에 있다. 한 줄기 시냇물에는 몇 마리 작은 고기만 살 수 있으나 천지와 같은 대덕은 우주만물을 포용한다. 최상의 덕인 중용을 완성하려면 천지가 만물의 생명을 포용하고 생육하듯이 만물의 대립과 차별을 포용하는 대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대덕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맹자는, 공손추가 호연지기를 묻자 “그 기(氣)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정직함으로 잘 길러 해치지 않으면, 천지(天地) 사이에 꽉 차게 된다.”고 답한다. 맹자는 또한 호연지기는 의(義)와 도(道)를 배합한 기(氣)로서, 오랜 기간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축적되고 길러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호연지기를 기르면,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이 정직하다고 판단하는 일에는 비록 천만인이 앞을 막아도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중용의 조화성은 《논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공자는 자장(子張)이 인(仁)을 묻자 “공손하면(恭)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관용(寬)은 많은 사람을 얻게 하고, 신뢰(信)가 있으면 남들이 책임을 맡겨 주고, 민첩(敏)하면 공로가 있고, 은혜로우면(惠) 족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하여 공(恭), 관(寬), 신(信), 민(敏), 혜(惠)의 덕을 융합한 것이 인이라고 하였다. 한편 공자는 육언(六言) 육폐(六蔽)를 말하여 덕의 조화의 중요함을 말했는데, 그중의 하나는 “인(仁)만 좋아하고 배움(學)을 싫어하면 어리석게(愚) 되는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 자장과 대화에서 공자는 인(仁)을 공(恭), 관(寬), 신(信), 민(敏), 혜(惠)의 다섯 가지를 조화한 덕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 배움(學)이 결여되면 결국 어리석음을 면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용은 모든 덕을 조화하여 참됨(=진리)으로 이끄는 방법이요, 또한 그 최상의 덕의 실체이다. 그 궁극적인 경지는, 천지의 조화 속에서 만물이 각각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생육하듯이 대동(大同) 사회를 이루는 데 있다.

 

5. 중용의 자기실현과 인문정신

중용을 최상의 덕으로 인정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중용의 덕이 근원적으로 하늘이 부여한 본성에 근거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의 덕을 인생의 역정에서 수양공부를 통해 최고의 경지로 실현한다는 것이다. 먼저 인생의 역정에서 덕을 실현한 예를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말에서 보기로 한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수립하고, 마흔에 불혹의 경지에 이르고, 쉰에 천명을 알고, 예순에 이순(耳順)의 경지에 도달하고, 일흔에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공자 자신이 일생 동안 스스로 수양공부를 통해서 성취한 최고의 경지가 중용의 덕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최고의 경지는 이렇게 굳이 공자를 거론하지 않고도 요즘에 흔히 들을 수 있는 경영학의 자기실현(self realization 또는 self actualization)이니 자기수양(self cultivation), 자기계발(self improvement) 자기경영(managing oneself) 등도 유사한 개념이다. 또한 현대 심리학에서도 융의 분석심리학의 개성화(individuation),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매슬로(Abraham H. Maslow)의 욕구 단계(hierarchy of needs theory)에 나타난 최상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self actualiza-tion needs) 등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동양철학의 수양공부 경지가 현대에 이르러 서양의 심리학과 경영학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부활한 것이다. 맹자도 수양공부의 경지에 대해 말한 것이 있다.

호생불해(浩生不害)가 물었다. “악정자(樂正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선인(善人)이며, 신인(信人)이다.” “무엇을 선인(善人)이라 이르며, 무엇을 신인(信人)이라 합니까?” “가욕(可欲)을 선(善)이라 하고, 선(善)을 자기 몸에 소유함을 신(信)이라 하고, 충실(充實)함을 미(美)라 하고, 충실(充實)하여 광휘(光輝)함을 대(大)라 하고, 대(大)이면서 저절로 화(化)함을 성(聖)이라 하고, 성(聖)이면서 알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악정자(樂正子)는 두 가지의 중간이요, 네 가지의 아래이다.”

악정자는 맹자의 제자로 알려진 사람인데 호생불해라는 사람이 그의 공부 경지에 대해서 묻자 맹자가 “두 가지의 중간이요, 네 가지의 아래”라고 답한 것이다.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맹자가 공부의 경지를 선(善), 신(信), 미(美), 대(大), 성(聖), 신(神)의 여섯 단계로 구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경지인 신의 단계는 그 이전의 선(善), 신(信), 미(美), 대(大), 성(聖)을 모두 중화한 경지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중용의 덕이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이를 위해 먼저 덕(德)이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기로 한다. 덕에는 본래 ‘얻음(得)’의 뜻이 있어서, 덕과 득은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천생덕어여(天生德於予),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다”는 공자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중용》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공자의 “천생(天生), 하늘이 낳아 주었다”가 《중용》에서 “천명(天命), 하늘이 명령했다, 또는 부여했다”로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공자가 말한 “하늘이 준 덕”이 “하늘이 명령한 성(性)”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용》의 성(性)은 바로 맹자에 의해 선성(善性)으로 발전하게 된다. ‘덕(德)’이 ‘성(性)’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인격 수양공부 개념인 덕이 일종의 형이상학적 의미로 전화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공자(기원전 551~479)가 탄생하기 전, 기원전 578년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13년 조에 “민수천지지중이생(民受天地之中以生), 백성은 천지의 중(中)을 받아 태어난다.”고 하여 중(中)과 천생(天生)이 결합된 말이 이미 보인다. 따라서 공자와 《중용》의 중용사상은 그 이전부터 전래된 전통적 사유를 계승해서 인문정신으로 재탄생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문정신은 1949년 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에서 말한 ‘기축시대’ 문명과 관련되어 있다. 그 내용은 기원전 800~200년 사이에 고대 동아시아, 그리스, 인도, 이란 그리고 이스라엘 등지에서 인간에게 모종의 획기적인 정신적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인데, 야스퍼스는 그 변화를 “미토스(신화)에서 로고스(지성)로”라고 요약했다. 즉 기축시대 이전의 원시종교가 이 시기에 이르러 인문주의 정신으로 전변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유교의 기본 텍스트에는 이런 전변을 보여주는 내용이 적지 않게 들어 있다. 공자는 “사람이 도(道)를 실현하지 도가 사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다.”라고 말했고, 맹자는 “마음을 다하는 자가 성(性)을 알고, 성을 알면 하늘(天)을 안다.”라고 말했고, 《중용》에는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기축시대 이전이 인류가 하늘(天)이나 상제(上帝) 등 인격신에 의지해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시종교 시대였다면, 기축시대 이후 적어도 동아시아의 유교에서는 인간의 마음, 본성 등 주체가 결정 주체로 승화된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사유나 행위의 판단, 결정의 근원적이고 궁극적 근거가 인격신에서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본성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인도주의(人道主義), 인문주의(人文主義)가 서구 근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과 다른 것은, 서구 근대 휴머니즘이 종교와 단절된 인문주의인 것과 달리, 유교에서는 하늘(天)이 인간의 내면에 전입해서 본성으로 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교는 물론 불교의 철학적 특성으로서, 불교에서는 진제와 속제의 불이(眞俗不二)의 중도(中道)로 나타나고, 유교에서도 천도와 인도의 합일(天人合一)의 중용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즉 초월과 현실, 본체와 현상은 서로 유리된 이원적 구조가 아닌, 상호 원융 · 소통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양극단으로 대립하는 본체와 현상, 초월과 현실이 상호 원융 · 소통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중용, 중도의 내용 중 하나이다.

 

6. 중도(中道)의 오해와 진실

   중도는 드러난 현상에서 양적 중간을 가리키는가? 널리 알려진 솔로몬의 재판을 예로 들어보자. 두 여인이 한 아이에 대해 서로 친권을 주장하여 솔로몬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당시에 유전자 감식 같은 과학적 해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는 두 여인을 바라보던 솔로몬은 마침내 아이를 나누어 절반씩 가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한 여인은 슬피 울면서 자신의 친권을 포기했고, 다른 여인은 그 판결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솔로몬은 친권을 포기한 여인을 친모로 판정하고 아이를 돌려주었다.

중도가 양적인 중간을 가리킨다면 솔로몬의 첫 번째 판결이 중도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솔로몬은 두 여인에게 각자 절반씩 양보하고 절제하여 아이를 나눌 것을 요구했다. 이에 비하면 친모를 찾은 두 번째 판결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중도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양보도 절제도 없이 한 여인이 아이를 온전히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판결이 옳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와 유사한 예를 맹자도 말하였다. 유명한 “자막집중(子莫執中, 자막이라는 사람의 중도 잡기)”이라는 스토리다. 맹자의 스토리는 양주(楊朱)와 묵자(墨子)의 대립으로 시작한다. 양주는 극단적 위아주의자(爲我主義者)로서 자신이 터럭 하나를 뽑으면 세상이 평화를 찾는다 해도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묵자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자신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서 없애는 고통도 감내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자막(子莫)이라는 자가 나서서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찾자고 외쳤는데, 맹자는 그의 중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집중이라는 말은 중도에 가까운 것 같으나, 중간을 잡기만 하고 권(權)이 없는 것은 한편에 치우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권(權)이란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는 도(道)를 말한다. 맹자는 권도(權道)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를 들었다. 고대 사회는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것을 비윤리적 행위로 여겼다. 하물며 형으로서 제수의 손을 잡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순우곤이라는 사람이, 제수가 물에 떠내려가 생명을 잃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자, 맹자는 말했다. “손을 잡지 않는 것은 예(禮)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은 권(權)이다. 당연히 권도를 행해야 한다.” 이 내용을 보고 북송의 유학자 정자(程子)는 이렇게 말했다.

중자(中字)가 가장 알기 어려우니, 마음으로 통달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한 대청에는 대청 중앙이 중(中)이 되지만, 집 전체로 보면 대청이 아니라 당(堂)이 중(中)이 되며, 한 나라를 보면 당(堂)이 아니라 나라의 한 가운데가 중(中)이 되니, 이러한 유(類)를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중(中)은 잡을 수가 없으니, 이것을 안다면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모두 자연(自然)의 중(中)이 있어서 안배(安排)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니, 안배(安排)한다면 중(中)이 못 된다.

중도에 대한 높은 지혜를 조선의 명유 율곡 이이(1536~1584)의 말에서도 볼 수 있다.

때를 따라 중을 얻는 것(隨時得中)을 권(權)이라 하고, 일에 처해서 마땅함에 합하는 것(處事合宜)을 의(義)라고 한다. 그런데 옳음과 그름(是非)은 병립할 수 없고, 이익과 손해(利害)도 공존할 수 없다. 한갓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것에 급급하여 옳고 그름을 돌아보지 않으면 일 처리가 의로움에 어긋나고, 오직 시비만 생각하고 이익과 손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변화에 대응하는 권(權)에 어긋난다. ……따라서 중을 얻고 마땅함에 합하면(得中合宜) 옳음과 이익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율곡은 현실의 모순 대립이 발생하는 이유를 시비(是非)와 이해(利害)에서 찾는다. 즉 일에는 반드시 옳음(是)과 그름(非)이 있고, 동시에 이익과 손해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율곡은 일 처리의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하나는 때를 따라 중을 얻을 것(隨時得中)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함을 살필 것이다. 때를 따라 중을 얻으면 손해를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고, 마땅함을 살피면 정의와 불의를 변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율곡은 일을 처리하는 기준으로 시비와 이해가 모두 고려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세속적 가치인 이익과 손해를 도외시해도 안 되고, 또한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어 정의를 저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율곡이 선택한 최선의 길은 득중합의(得中合宜)이다. 즉 손실을 최소화(또는 이익을 극대화)하면서도 정의에 맞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 율곡의 말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권도에는 정해진 규약이 없고 중도를 얻는 것이 귀하며, 의로움에는 항상된 제도가 없고 마땅함과 합함이 귀하다. 중도를 얻고 마땅함에 합하면 옳음과 이익이 그 속에 있다.

그런데 중용의 원칙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지만, 현실적으로 수시(隨時) 즉 때를 따른다는 것도 쉽지 않고, 합의(合宜) 즉 정의에 합치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율곡 자신도 “진실로 때에 맞게 처리하는 데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율곡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로 국가에 편리하고 국민에 이익이 된다면 모두 해야 할 일이요,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안정되게 보호할 수 없는 것이라면 모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苟可以便於國。利於民。則皆可爲之事也).

앞에서 필자는 중용 실현의 근본은 자기성찰, 자기완성, 참(誠)의 각성에 있다고 하였다. 율곡 역시 국가와 국민을 안정되게 보호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정치학에서 말하는 국가주의(nationalism)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운 이기적 욕구를 극복하여 공심(公心)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유교의 중용(中庸)은 참다운 자아를 이루고 참다운 사회를 수립하며, 나아가 참다운 세계를 이루는 데 그 의미와 목적이 있는 철학이다. 또한 중(中)은 올바른 인식과 실천 방법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중용이 제시됨으로써 유교의 도(道)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원리와 실천의 양면에서 제시된 것이다. 여기에 유교에서 중용을 중시하는 이유가 있다. ■

 

최일범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유학과, 동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박사). 성균관대 유학대학 학장 및 유교문화연구소장, 도교문화학회 회장 역임. 주요 논저로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사상에 관한 연구〉(박사학위 논문) 등의 논문과 《한국의 윤리사상》 《중국 윤리사상》 등의 저서와 《정좌수행의 이론과 실제》 등의 역서가 있다. 현재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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