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중도의 철학, 양극화 극복의 길

1. 붓다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붓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 답이 맛지마 니까야 18. 《꿀덩어리경(Madhupiṇḑika-sutta)》에 있다.

단다빠니 싹까는 세존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공손한 인사말을 나눈 후에 지팡이를 짚고 한쪽에 서서 세존께 말씀드렸다. 

“사문(沙門)은 어떤 교리를 가지고,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존자여, 나는 천신(天神)과 마라(Māra)와 브라만(Brahman; 梵天)을 포함하는 세간(世間) 가운데서, 그리고 사문과 바라문과 왕과 사람들을 포함하는 인간 가운데서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세간에 머무는 교리를 가지고,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의혹이 없고, 회한이 없고, 유(有)와 무(無)에 대한 갈애[愛]가 없는 바라문은 개념[想]에 사로잡히지 않는다’1)고 가르치는 사람이오. 존자여, 나는 이와 같은 교리를 가지고, 이와 같이 가르치는 사람이오.”

이렇게 말씀하시자, 단다빠니 싹까는 머리를 가로젓고 혀를 차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을 찡그리며 지팡이를 짚고 떠났다.

붓다의 답변에 혀를 차면서 실망하고 떠나가는 단다빠니 싹까처럼, 인간을 초월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운 말씀이지만, 붓다는 분명히 이 경에서 불교의 목적은 모든 다툼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바라문은 의혹이 없고, 회한이 없고, 유(有)와 무(無)에 대한 갈애[愛]가 없어서 개념[想]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라는 말씀이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투쟁은 개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며,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다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말씀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의 부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 말씀의 의미를 묻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비구여, 왜냐하면, 허상(虛像)[戱論]과 개념[想]과 정의(定意)가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만약 즐기지 않게 되고, 단언(斷言)하지 않게 되고, 고집하지 않게 되면, 이것이 탐(貪)하는 성향[貪睡眠]의 끝이며, 화나는 성향[瞋睡眠]의 끝이며, 사견(邪見)을 일으키는 성향[見睡眠]의 끝이며, 의심하는 성향[疑睡眠]의 끝이며, 자만(自慢)하는 성향[慢睡眠]의 끝이며, 존재를 탐(貪)하는 성향[有貪睡眠]의 끝이며, 무명(無明)에 이끌리는 성향[無明睡眠]의 끝이며,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들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고, 언쟁하고, 험담하고, 거짓말하는 일의 끝이다. 여기에서 이들 사악(邪惡)하고 불선(不善)한 법들은 남김없이 사라진다. 

모든 논쟁과 투쟁은 허상(虛像)과 개념[想]과 정의(定意)가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혹 떼러 갔다 혹 붙여 온다.’라는 속담처럼, 답변을 듣고 보니 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말씀을 들은 당시의 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처소로 돌아가신 후에, 비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를 찾아가서 이 말씀의 의미를 묻는다. 

마하깟짜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자들이여, 세존께서 간단하게 하신 말씀의 의미를 나는 이와 같이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존자들이여, 보는 주관[眼]과 보이는 형색[色]들을 의지하여 시각분별[眼識]이 생깁니다. 셋의 만남이 접촉[觸]입니다. 접촉[觸]을 의지하여 느낌[受]이 있으며, 느낀 것을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개념적으로 인식한 것을 추론(推論)하고, 추론한 것을 허상화(虛像化)하며, 허상화하기 때문에 과거, 미래, 현재의 보는 주관[眼]으로 분별하는 형색[色]들에 대한 허상[戱論]과 개념[想]과 정의(定意)가 사람을 공격합니다. 

듣는 주관[耳]과 소리[聲]들, 냄새 맡는 주관[鼻]과 냄새[香]들, 맛보는 주관[舌]과 맛[味]들, 만지는 주관[身]과 촉감[觸]들, 마음[意]과 지각되는 대상[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자들이여, 실로 보는 주관[眼]이 있고, 보이는 형색[色]들이 있고, 시각분별[眼識]이 있을 때 접촉이라는 말[觸假名]을 하게 되고, 접촉이라는 말[觸假名]이 있을 때 느낌이라는 말[受假名]을 하게 되고, 느낌이라는 말[受假名]이 있을 때 개념이라는 말[想假名]을 하게 되고, 개념이라는 말[想假名]이 있을 때 추론(推論)이라는 말[尋假名]을 하게 되고, 추론이라는 말[尋假名]이 있을 때 허상[戱論]과 개념[想]과 정의와 공격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듣는 주관[耳]과 소리[聲]들, 냄새 맡는 주관[鼻]과 냄새[香]들, 맛보는 주관[舌]과 맛[味]들, 만지는 주관[身]과 촉감[觸]들, 마음[意]과 지각되는 대상[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자들이여, 실로 보는 주관[眼]이 없고, 보이는 형색[色]들이 없고, 시각분별[眼識]이 없을 때는 접촉[觸]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접촉[觸]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느낌[受]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느낌[受]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개념[想]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고, 개념[想]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추론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고, 추론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허상[戱論]과 개념[想]과 정의(定意)와 공격(攻擊)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듣는 주관[耳]과 소리[聲]들, 냄새 맡는 주관[鼻]과 냄새[香]들, 맛보는 주관[舌]과 맛[味]들, 만지는 주관[身]과 촉감[觸]들, 마음[意]과 지각되는 대상[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자들이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하신 말씀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하깟짜나 존자의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어렵다. 이 경에서 말하는 붓다가 가르친 다투지 않고 사는 길은 적당한 양보나 타협이나 중용(中庸)이 아니다. 아무튼, 붓다는 우리에게 다툼의 근본을 알아서 모든 투쟁과 논쟁의 뿌리를 뽑는 길을 가르쳤다. 

 

2. 사람들은 왜 다투는가

필자가 ‘허상[戱論]과 개념[想]과 정의’로 번역한 빨리(Pāli)어 원문은 ‘papañca’ ‘saññā’ ‘saṅkhā’이다. 한역(漢譯)에서 ‘papañca’는 ‘희론, 허위, 망상’으로, ‘saññā’는 ‘상(想)’으로, ‘saṅkhā’는 ‘수(數)’로 번역된다. 호너(I.B. Horner)는 이 부분을 ‘the number of obsessions and perceptions’로 번역한다. 그는 ‘saṅkhā’를 ‘number’로, ‘saññā’를 ‘perceptions’로, ‘papañca’를 ‘obsessions’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다. 그는 이 부분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축어적으로 번역한 것 같다. 여기에서 ‘saṅkhā’는 ‘수(數: number)’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定意: definition), 명명(命名: denomination)’을 의미한다. 그리고 ‘saññā’는 ‘지각(知覺: perceptions)’이 아니라 개념(槪念)을 의미한다. 한편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론(中論)》에서 ‘papañca(산스끄리뜨 prapañca)’를 희론(戱論)으로 번역함으로써 집착(執著: obsessions)’이 아니라 ‘환상(幻像: illusion)이나 허상’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붓다는 중생들이 지각 활동을 통해서 얻은 내용으로 의미를 규정하여 개념(saññā)을 만들고, 그 개념으로 허망한 이론[戱論]이나 허상을 만들어 서로 다툰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구들에게 마하깟짜나 존자는 허상[戱論]과 개념[想]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마하깟짜나 존자의 설명은 서양철학의 논리학에서 개념의 성립을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서양철학에 의하면, 개념은 경험을 통해 얻은 여러 표상을 비교하여 그 표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속성을 추상한 후에, 그것을 총괄하여 언어라는 기호를 붙이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개념의 성립은 (1)표상(表象), (2)비교(比較), (3)추상(抽象), (4)총괄(總括), (5)명명(命名)의 과정을 밟아 완성된다. 

서양철학에서는 우리가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개념을 객관적 실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지만, 불교에서는 지각을 통해 발생한 느낌[受: vedanā]의 실재화(實在化)로 본다. 예를 들면, 서양철학에서는 책상이라는 개념을 모든 책상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성질을 총괄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지만, 불교에서는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을 실재화하여 책상이라고 부를 뿐, 책상의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책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의 느낌에 근거하여 정의된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불교에 의하면, 책상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정의하여 만든 개념[想]에 의해 나타난 허상이다. 붓다는 사람들이 이러한 개념과 허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서로 다툰다고 가르쳤다.

모든 다툼은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의 모순 대립이다. 붓다는 상윳따 니까야 12.15. 《깟짜야나곳따경(Kaccāyanagotta-sutta)》에서 정견(正見)이 무엇인지를 묻는 깟짜야나곳따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깟짜야나여, 이 세간은 대체로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원성(二元性)에 의존하고 있다. 깟짜야나여, 그렇지만 세간의 집(集)을 바른 통찰지(通察智)로 있는 그대로 보면 세간에 대하여 ‘없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 깟짜야나여, 그리고 세간의 멸(滅)을 바른 통찰지로 있는 그대로 보면 세간에 대하여 ‘있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 

깟짜야나여, 이 세간은 대체로 방편의 취착(取著)이며, 집착에 의한 속박이다. 방편의 취착과 마음의 입장과 집착하는 잠재적 경향에 다가가지 않고, (방편을) 취하지 않고, (입장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은 괴로움일 뿐이고, 사라지고 있는 것은 괴로움일 뿐이다.’라고 불안해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그에 관해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올바른 지식이 그에게 생긴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깟짜야나여, ‘일체(一切)는 있다.’라고 보는 것은 한쪽의 견해이고, ‘일체는 없다.’라고 보는 것은 다른 한쪽의 견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양쪽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간에서 법(法)을 보여준다. 무명(無明)에 의존하여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行]들이 있고, …… 이같이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苦蘊]의 집(集)이 있다. 그렇지만, 무명(無明)이 남김없이 멸(滅)하면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行]들이 멸하고, …… 이같이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苦蘊]의 멸(滅)이 있다.

세상에 다툼이 그치지 않는 것은 ‘있음[有]’과 ‘없음[無]’을 절대적 모순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있는 것[有]’과 ‘없는 것[無]’으로 나누어서 이해한다. 즉 이 세상을 유(有)와 무(無)의 대립상태로 이해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형이상학적 물음은 모순된 명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답으로 선택할 것을 강조한다. “신은 있는가,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있다’고 대답하면 유신론(有神論)이고, ‘없다’고 대답하면 무신론(無神論)이다. 이때 유신론과 무신론이 다투게 된다. “마음은 있는가,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있다’고 대답하면 유심론(有心論)이고, ‘없다’고 대답하면 유물론이다. 우리의 모든 다툼의 근저에는 이렇게 유와 무의 모순 대립이 있다.     

 

3. 중도는 다투지 않는 길이다

붓다가 깨달은 모든 투쟁과 고통의 뿌리는 유(有)와 무(無)의 모순 대립이다. 붓다는 상윳따 니까야 22.94. 《꽃경(Puppham-sutta)》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다. 세간이 나와 다툴 뿐이다. 비구들이여, 법(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세간에서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없다’라고 동의한 것은 나도 ‘없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동의한 것은 나도 ‘있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무엇이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없다’라고 동의하고, 나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지속하고, 견고하고, 상주(常住)하고, 변괴(變壞)하지 않는 몸의 형색[色]은 없다.’라고 동의하고, 나도 역시 ‘없다’라고 말한다.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行]들, 분별하는 마음[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없다’라고 동의하고, 나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무엇이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동의하고, 나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지속하지 않고[無常], 괴롭고, 변괴하는 몸의 형색[色]은 있다.’라고 동의하고, 나도 역시 ‘있다’라고 말한다.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行]들, 분별하는 마음[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간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동의하고, 나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세간에는 세간의 법(法)이 있다. 여래는 그것을 깨닫고 이해한다. 깨닫고 이해한 후에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施設)하고, 보급하고, 드러내고, 설명하고,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깨닫고 이해하여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보급하고, 드러내고, 설명하고, 천명하는, 세간에 있는 세간의 법은 어떤 것인가? 비구들이여, 몸의 형색[色], 느끼는 마음[受], 생각하는 마음[想], 유위를 조작하는 행위[行]들, 분별하는 마음[識]이 세간에 있는 세간의 법이다. 여래는 그것을 깨닫고 이해하여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보급하고, 드러내고, 설명하고,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이같이 보여주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보급하고, 드러내고, 설명하고, 천명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눈먼 장님과도 같은 범부를 내가 어찌하겠는가? 

이 경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은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다툰다. 붓다는 유무(有無)의 모순 대립이 연기한 법(法)의 집(集)과 멸(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있음’과 ‘없음’은 모순이다. ‘있음’은 ‘없음’일 수 없고, ‘없음’은 ‘있음’일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는 까닭은 우리가 개념으로 인식한 사물을 객관적인 실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책상을 인식하면, 우리가 인식한 책상이 외부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책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외부에 책상이라는 실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책상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책상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은 책상을 인식할 수 없다. 만약에 책상이라는 개념은 없고 식탁이라는 개념만 있는 사람이 책상을 본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책상으로 인식한 것을 식탁으로 인식할 것이다. 

우리의 ‘있다’는 판단이나 ‘없다’는 판단은 외부의 실재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데 개념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 무명(無明)이며 사견(邪見)이다. 붓다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모순된 견해에서 벗어나도록 연기를 가르쳤으며, 이것이 중도(中道)다. 

이 경에서 붓다가 말하는 세간의 법은 오온(五蘊)이다. 오온에 대하여 잡아함 《306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법(法)이 있나니 안(眼)과 색(色)이 두 법이다.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들 셋[三事]의 화합이 촉(觸)이다. 촉(觸)에서 수(受), 상(想), 사(思)가 함께 생긴다. 이것이 네 가지 무색음[四無色陰]이다. 안(眼)과 색(色) 그리고 이들 법을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들 법에서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인간계라는 생각, 어린이라는 생각 등을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내가 귀로 소리를 듣고, 내가 마음으로 법을 인식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이 존자는 이름은 이러하고 성은 이러한데,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개념[想]이며, 기억[誌]이며, 언설이다. 이 모든 법은 모두 무상한 유위(有爲)로서 의도와 염원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이 경에서는 촉(觸)에서 오온(五蘊)의 수(受), 상(想), 행(行)이 발생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할 때, 그 대상에 대한 의식이 발생하며, 그 의식이 발생할 때, 자아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을 접촉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데, 촉은 이렇게 자아[眼]와 대상[色] 의식[眼識] 셋이 만났을 때 지각표상(知覺表象)을 외부의 실재라고 느끼는 의식이다. 이렇게 지각표상을 외부의 실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감정[受]과 사유작용[想]과 의지작용[思]이 발생한다는 것을 위의 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붓다에 의하면, 우리가 세계와 자아를 이루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蘊)은 십이입처(十二入處)에서 우리의 의도와 염원을 인연으로 연기한 것으로서 개념이며, 언설이며, 무상한 유위(有爲)다. 모든 개념은 객관적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염원으로 만들어진 유위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에 상응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개념을 조작하고, 개념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판단이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착각에서 이야기하는 ‘자아’와 ‘세계’는 자신들이 욕구로 집착하는 허망한 개념일 뿐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객관적 실재로 알고 있는 개념의 대상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경험한 내용들이 욕구에 의해 취해진 것임을 자각함으로써 허망한 사견(邪見)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순 대립하는 사견에서 벗어나 연기를 통찰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다투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붓다의 중도이다.

 

4. 중도(中道)와 무기(無記)

붓다는 모순 대립하는 명제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명제[無記; avyākata]’로 규정한다. 붓다는 이들 모순 대립하는 견해를 떠나서 중도(中道)에서 설법하며, 그 내용은 연기법으로서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생사(生死)가 연기하는 유전연기(流轉緣起)와 무명이 멸(滅)하면 생사(生死)가 멸하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이다. 

중도는 모순 대립을 벗어난 길이다. 모순은 실체 중심의 사고방식, 즉 형식논리학에 기인한다. 형식논리학은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을 사고의 기본원리로 한다. 동일률은 ‘A는 A다’라는 명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모든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는 것을 인정하고, 복잡한 것의 통일을 인정하고, 유동(流動)하는 것에서 부동(不動)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성립된다. 즉 동일률은 본질의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는 원리이다. 실체란 바로 불변하는 자기동일성을 지닌 본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일률은 불변의 실체를 인정해야만 성립한다. 모순율은 ‘A는 A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동일률의 반면(反面)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배중률은 두 개의 모순된 판단 가운데 제3의 판단을 용납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즉 중간을 배제하고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원리이다. 모순 명제의 대립은 이러한 논리학의 기본 원리, 특히 배중률에 기인한다.

붓다가 무기로 규정한 문제들은 모두 이러한 세 가지 원리에 의해 양자택일적으로 대립하는 모순 명제들이다. 이들 모순 명제 사이에 중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붓다가 이들 모순 명제를 무기로 규정하고 천명한 중도는 모순 명제 사이의 중간이 아니다. 모순 명제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불변의 실체가 실재해야 한다. 그러나 붓다는 모든 것은 연기하므로 무상하고 무아이며 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붓다의 중도는 모순 명제의 중간이 아니라 모순 대립을 벗어난 새로운 입장이다. 중도는 실체 중심의 사고방식, 즉 형식논리학과의 결별을 의미하며, 연기법이라고 하는 상호적 인과관계에 의한 관계 중심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잡아함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세간은 두 가지에 의지하고 있나니, 유(有)에 의지하거나 무(無)에 의지한다. …… 세간의 집(集)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보면 세간이 없다[無]는 견해는 있지 않을 것이고, 세간의 멸(滅)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보면, 세간이 있다[有]는 견해는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모순 대립[二邊]을 떠나 중도(中道)에서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無明)을 의지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순대고취(純大苦聚)가 집(集)하며, 무명(無明)이 멸하면 행(行)이 멸하고, 내지 순대고취(純大苦聚)가 멸한다.

세간의 집(集)은 유전연기(流轉緣起)를 의미하고, 세간의 멸(滅)은 환멸연기(還滅緣起)를 의미한다.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다. 따라서 유전문(流轉門)에서 보면 세간은 없지 않다[非無]. 그러나 무명이 멸하면 세간도 멸한다. 따라서 환멸문(還滅門)에서 보면 세간은 있지 않다[非有]. 이것이 유무의 모순 대립을 벗어난 중도다. 용수가 《중론(中論)》의 〈관사제품(觀四諦品)〉에서 “모든 붓다는 이제(二諦)에 의지하여 중생들을 위해서 설법한다.”라고 한 것은 이렇게 유전문(流轉門, 俗諦)과 환멸문(還滅門, 眞諦)에 의지하여 중도를 설한다는 의미이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회는 갖가지 사상과 종교가 대립하면서 투쟁하고 있었다. 붓다는 인간의 모든 다툼은 인간이 만든 개념과 허상의 모순 대립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붓다는 허상에 의해 발생하는 논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가르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아함(中阿含)의 《전유경(箭喩經)》(M.N. 63. Cūḷa-Māluṅkya-sutta)에서 붓다는 모순 대립하는 명제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 붓다의 이러한 침묵, 즉 무기(無記)는 확고하고 일관된 것이며, 이러한 침묵은 중도에서 행해진 것이다. 

말륭까뿟따여,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범행(梵行)을 영위하는 삶은 결코 있을 수 없다. …… 말륭까뿟따여,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실로 여기에 태어남(生)이 있고, 늙음(老)이 있고, 죽음(死)과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불안 등이 있다. 나는 현법(現法)에서 그것들을 없애는 것에 대하여 알려준다. …… 그러므로 말륭까뿟따여, 나는 설명해서는 안 될 것은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해야 할 것은 설명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말륭까뿟따여, 나는 왜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말륭까뿟따여, 그것은 실로 의(義: attha)와 관련이 없고, 범행(梵行)의 근본이 아니며, 염리(厭離)로 이끌지 않고, 이욕(離欲)으로 이끌지 않고, 멸(滅)로 이끌지 않고, 적정(寂靜)으로 이끌지 않고, 수승한 지혜로 이끌지 않고, 정각(正覺)으로 이끌지 않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 경에서 붓다는 자신이 침묵한 이유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우선 붓다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있다고 단언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노사(老死)의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이며, 붓다가 이야기하는 무명은 바로 이런 견해들이다. 붓다는 이런 견해를 고집하는 말륭까뿟따를 독화살에 맞은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독화살은 말륭까뿟따가 집착하고 있는 사견(邪見)이다. 사견에 의해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사견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이 독화살을 뽑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이 경은 지적한다.

붓다의 입장은 그가 제시한 무기(無記)의 이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붓다가 제시한 이유를 정리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이 견해들이 의(義: attha)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수승한 지혜와 정각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범행(梵行)의 근본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들 문제를 단순히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논의로 보지 않고, 생사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붓다는 생사의 원인을 무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무명이란 진실에 대한 무지이다. 즉 도리에 맞지 않는 생각, 무의미한 생각, 사물이나 대상에 관한 그릇된 견해가 무명이다. 붓다가 이들 견해에 대하여, 그런 견해가 있을 때 생사의 괴로움이 있다고 단언하고,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 이유로 “의(義: attha)와 관련이 없다.”라고 했다. 이것은 이들 견해가 ‘도리에 맞지 않는, 무의미한,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그릇된 견해’ 즉, 무명이라는 의미이다. 이들 견해는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수승한 지혜와 바른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 붓다가 침묵한 첫째 이유이다.

붓다는 ‘의(義: attha)와 관련이 있는’ 설명으로 사성제(四聖諦)를 이야기한다. 사성제를 구성하는 이론은 연기설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사물로 인식되는 모든 대상을 연기로 설명한다. 붓다에게 세계는 연기한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세계에 대하여 그것을 시간과 공간 속에 실재하는 사물로 이해하는 모든 실재론적 견해를 거부한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는 브라만(Brahman)을 창조신으로 생각한 바라문교(Brahmanism)와 정통 바라문교를 부정하고 나타난 사문(沙門: Śrāmaṇa)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바라문교에 의하면 이 세계는 브라만이 전변(轉變)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실재는 브라만이며, 인간의 참된 자아는 브라만과 동일한 실재인 아뜨만(Ātman)이다. 사문(沙門)들은 이러한 브라만과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한다. 사문들에 의하면 이 세계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아뜨만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들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한 상태다. 인간의 의식은 영혼의 활동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대립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장아함경의 《청정경(淸淨經)》과 이에 상응하는 디가 니까야 29. 《빠싸디카 숫따(Pāsād-ika-Sutta)》에 나타난다. ‘세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육신과 생명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투고 있던 당시 사상들에 대하여, 붓다는 이들 견해는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本生本見, 未見未生: pubb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apar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로서 모두가 사견이며 희론(戱論)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무기의 입장을 취한다고 이야기한다. 붓다에 의하면 자아와 세계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를 거론하는 것, 영혼과 육신은 동일한 것인가, 별개의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열반을 성취한 여래는 영원히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거론하는 것, 자아의 본질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인가, 다른 것이 만든 것인가를 거론하는 것 등은 모두가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계되는 논의로서 사견이다.

붓다는 왜 사물의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는 모두가 사견이라고 비판하는 것일까? 디가 니까야 29. 《빠싸디카 숫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들이 “이것은 실로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떤 중생들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쭌다여,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설명에서 나와 동등한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나보다 더 뛰어날 수 있겠는가? 그 문제에 대한 나의 설명은 뛰어난 설명으로서, 내가 그들보다 훌륭하다.

쭌다여, 이 미래와 관련된 견해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설명해야 할 것은 설명했다. 그러나 설명해서는 안 될 것을 내가 어떻게 그대들에게 설명하겠는가?

쭌다여, 나는 이들 과거와 관련된 견해들을, 그리고 미래와 관련된 견해들을 끊어버리고 초월하도록 사념처(四念處)를 시설하여 가르쳤다. 사념처란 어떤 것인가? 쭌다여, 비구는 몸(身)을 관찰하며 몸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하고 알아차려 세간에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한다. 감정(受)을 관찰하며 감정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하고 알아차려, 세간에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한다. 마음(心)을 관찰하며 마음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하고 알아차려, 세간에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한다. 법(法)을 관찰하며 법(法)에 머물면서, 열심히 주의집중하고 알아차려, 세간에서 탐욕과 불만을 제거해야 한다. 쭌다여, 나는 이들 과거와 관련된 견해들을, 그리고 미래와 관련된 견해들을 끊어버리고, 초월하도록 사념처를 시설하여 가르쳤다.

이 경에서 붓다는 이들 견해를 분석하여, 이 견해들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독단적이며,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견(邪見)을 없애는 방법으로 사념처 수행을 권하고 있다. 

붓다는 잡아함경에서 허망한 개념을 실체화하여 대립하는 견해들은 결코 수행과 윤리적인 삶[梵行]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생명[命]은 육신[身]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생명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 주장의 의미는 한가지인데 갖가지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생명이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범행(梵行)이 있을 수 없으며, 생명과 육신이 다르다고 해도 범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모순 대립[二邊]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중도(中道)로 향할지니,…… 소위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            

붓다는 평행선을 그으며 모순 대립하는 견해는 어떤 것도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중도 즉, 연기법에 의지할 때 윤리적 실천의 근거가 드러난다고 이야기한다. 

붓다의 무기(無記)와 중도는 이러한 판단의 표현이다. 모순 대립하는 사상은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수승한 지혜와 바른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붓다는 모순을 벗어난 중도로서 연기를 설하기 위해 무기를 선언하신 것이다. 

    

5. 맺는말

불교는 중도를 가르친다. 불교에서는 왜 중도를 가르치는가? 붓다는 모든 다툼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찾았고, 그 길을 찾아 가르쳤으며, 중도는 붓다가 깨달은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불교는 평화로운 삶을 가르치는 종교이고, 평화로운 삶은 중도의 실천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중도를 가르친다.

붓다가 깨달은 중도는 중용(中庸)이나 상대적인 양자 사이의 중간이 아니다. 붓다는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는 모든 모순 대립이 연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고, 모순 대립하는 견해 가운데 어느 견해도 취하지 않고 버리는 길을 중도(中道)라고 불렀으며, 그 길에서 연기를 깨달아서 모든 대립과 투쟁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전남대학교 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졸업(불교학 석사 · 박사). 전남대 철학과 교수 재직.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불교란 무엇인가》 외 다수와, 역서로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과 《정선 디가 니까야》 등 다수.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