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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도철학을 말해야 하는가 / 신상환
특집 | 중도의 철학, 양극화 극복의 길
[81호] 2020년 03월 01일 (일) 신상환 patiensky@gmail.com

들어가며

 

게송 하나

연기(緣起)인 그것
바로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에 의지하여[緣] 시설(施設)된 것[=假名]
그 자체가 바로 중도(中道)이다.

— 졸역, 용수 《중론》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362. (24-18)]번 게송 

 

장면 1

“부처님은 무슨 화두를 드셨습니까?”

간화선이 제일의 수행방법이라는 간화선 제일주의를 비판할 때 종종 등장하는 질문이다. 물론 부처님께서 화두를 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한국 스님들과 티베트 스님의 대담 중에 ‘간화선’이 단박에 깨칠 수 있다는 한 한국 스님의 주장에 두 귀를 쫑긋하며 듣던 티베트 스님의 “그럼, 여기 계신 한국 스님들이 모두 깨달으신 분들인가요?”라는 질문에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더라는 장면은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다.

 

장면 2

“이번 명상 모임에서는 먹을 게 너무 많아서 좋았습니다.”

어떤 명상 프로그램에 참석한 후, ‘나누기’라는 후기 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좋았다, 인상적이었다, 다음에 또 참석하겠다.’라는 상호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다 ‘먹을 게 많아서 좋았다’라는 인상평마저 나왔다. 서로 함께한 시간을 비롯해 자기 삶의 여법함, 즉 계율에 따른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반성이라는 기본 축이 배제된 가운데 나온 결론은 ‘먹어야 산다’라는 절대 명제였고 ‘잘 먹어서 좋았다’였다. 지켜야 할 목표가 없으니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나누기’였다.

‘게송 하나’는 중관학자들에게 익숙한 《중론》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362. (24-18)]의 게송이다. 그리고 ‘장면 1, 2’는 비대칭적인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가리키는 지점, 그 어디 즈음엔가 ‘오늘, 왜 중도철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의 답이 숨어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답을 찾는 작업이 대칭적인 것이라면 문제는 훨씬 쉽게 풀린다. 중관학파의 견해에서 보자면, A에 대한 부정인 ‘~A’와 쌍을 만들어 ‘A and ~A’라는 대립항을 상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논의는 오직 ‘언어의 추상화’를 다루는 논리적 부분에서나 조그만 효과가 있을 뿐이다.

이 ‘숨어 있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비대칭적인 파편들의 숲을 한 걸음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 그침 없이 변화하는 세계, 즉 연기실상의 세계는 다양한 담론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이론만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이 세계를 극도의 추상화 작업을 통해 개념, 정의 등으로 다루는 것이 논리로 이루어진 이론이다. 이것은 “연기인 바로 그것을 공성”이라는 게송 1, 2행의 언급이나 ‘총체성(tot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불법의 근간이 되는 연기법을 먼저 상정하고 논의를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서구 철학의 ‘총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할지는 선택사항이지만, 비대칭적 층위들이 쌓여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은 같다. 그리고 필자는 후자에 대한 어떤 깊이 있는 논의를 끌고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인정하며 전자의 관점에서만 이 주제를 다룰 예정이다.

이것은 먼저 여러 층위를 이루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문제를 불교의 교학 체계 핵심인 중도(中道)의 의미와 이 관점을 통해서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이라는 시간의 문제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苦)가 언제나 현재적이듯, 이 ‘오늘’도 언제나 현재적이다. 이것은 ‘시대의 아들’인 우리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로, 붓다의 법에 따라 살겠다는 서원의 대상인 불법을 가르쳐주신 붓다 또한 시대의 아들이었다. 이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고자 하는 자세는 언제나 유효하다. 그렇지만 시대의 ‘축적’을 통해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면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문제’는 보는 자의 관점에 따라 무수한 변주를 울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교실에 놓인 책상과 의자라는 대상을 살펴보자. 초등학교 입학 때 낯설게, 그리고 크게 느껴졌던 그 책상과 의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고정된 대상도 인식 주체의 변화에 따라 달리 느껴진다. 변화하는 인식 대상을 변화하는 인식 주체가 논해야 하는 문제를 인정하고 ‘오늘’이라는 특정한 시간 속에서 ‘중도철학’을 논할 때, 전통적 교의의 현재화라는 방법은 조그만 합의점을 제공해 준다.

 

고통에서 벗어남!

붓다의 가르침인 불법은 기본적으로 출세간을 지향한다. 이것이 세간의 일에 대한 무관심이나 회의(懷疑)를 뜻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마치 탈속적인 그 무엇으로 오해한다. 그러므로 ‘중도철학’을 다루는 이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적확한 진단을 요구한다. 이 진단이 ‘중도철학’이라는 하나의 창을 통해서 얼마나 선명하게 드러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불교의 교학적 측면에서 중도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명징하게 밝히고, 이 관점에 따른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갈등과 치유의 문제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 글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계종 화쟁위원장인 도법 스님과 서너 차례 불교의 교학과 중도의 실천에 대한 문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발견된 첫 상이점은 ‘화쟁(和爭)’이라는 이름 아래 중도의 실천을 강조할지라도 ‘어떤 중도’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다른 이해였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들지 않으셨던 화두’ 대신에 ‘대승적 실천’을 위해 온몸으로 부대끼며 ‘8할의 비난’을 들어야 하는 노스님과의 대화에서 발견된 문제인지라, 먼저 중도의 의미부터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불교적 중도란 무엇인가?

 

비유로 들자면, 중관사상은 수학에서의 양만 표시하는 스칼라(scalar)가 아닌 운동성을 포함한 벡터(vector)다. 달리 말해서, 만약 어떤 이가 자성을 가진 실체(svabhāva)를 인정한다면, 용수는 상호 연관성(pratītya), 원인(hetu), 조건(pratyaya) 등을 통해 이를 비판한다.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자성이 없는 비실체(asvabhāva)를 주장한다면, 만약 실체가 없다면 어떻게 비실체를 말할 수 있느냐고 비판하는 것이 그 오의이다. ……양자 사이에서의 타협을 뜻하는 중도가 아닌 양자, 즉 상견론자(실유론자)와 단견론자(회의주의 · 무신론자 · 쾌락주의 등)들을 모두 맹렬하게 공격하던 중관파의 시조 용수와 그의 정신적인 아들 아리아데바 그리고 여타 중관파 스승들의 치열한 삶과 죽음은 이 점에서 기계적 발상에서의 타협의 중도가 아닌 중도를 이끌기 위한 치열한 비판 의식과 실천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라 하겠다.

— 졸저 《용수의 사유》 pp.126-127

 

무엇보다 먼저 불교적 중도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닌,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어떤 절충을 뜻하는 정치적 중앙파와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즉, 불교적 중도는 정량적(正量的)이 아닌 정향적(正向的)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가운데의 길’이 아니라 ‘양극단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관논리는 흑과 백의 양극단을 비판하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논리적 사유(思惟)를 비판하는 논리가 바로 중관논리인 것이다.

— 김성철 《역설과 중관논리》 pp.7-8

 

한국의 중관학자라면 모두 상석을 양보하는 김성철도 ‘양극단에 대한 비판’이 곧 중관논리임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의 ‘역설의 논리’나 ‘사실 위배의 오류’ 등을 통한 《중론》 해석보다 더욱 깊숙이 들어가 이제론(二諦論)에 입각하여 연기실상의 세계를 언설로 표현하는 순간 반영을 이루는 개념 · 정의 등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점을 지적하지만, 즉 언어 자체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지만, 이 비판 정신만은 깊게 공유한다.

‘위치, 속도, 힘 등과 같이 크기와 방향성을 갖는 물리량’인 벡터와 같은 중도를 상정하면, 불교적 실천은 어느 쪽도 아닌 중도를 ‘향한(toward)’ 실천행만 남게 된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실천행으로써 중도는 붓다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들고 있는 양날이 날카로운 취모리검(吹毛利劍)처럼, 번뇌의 인과를 알고 그것을 끊는 날 서린 비판 의식과 함께한다. 바로 이것이 양견(兩見), 또는 양극단(兩極端)에 대한 비판을 뜻하는 중도의 개념으로 그 첫 번째는 단견론자(회의주의 · 무신론자 · 쾌락주의 등)에 대한 비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열반이) 없다는 견해에서는

업(業)의 과보가 없다고 합니다.

복덕도 없다고 (하니) 악취(惡趣)에 빠집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이 악견(惡見=邪見)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졸역, 용수 《보행왕정론》 〈제1 선취안락품(善趣安樂品)〉

[43. (1-43)]번 게송

 

달라이 라마의 대중 강연용으로 종종 사용하는 《보만론(寶鬘論)》에는 불법에 대한 ‘믿음과 지혜’를 강조한 후, 먼저 단견을 논파하고 있다. 이것은 인도 문화의 근간인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는다[자업자득].’라는 까르마(karma), 즉 업(業)이 죽음이라는 시간의 축을 관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죽으면 다 끝난다.’라는 자세로 한생의 덧없음에 고개를 숙이는 회의주의와 이 한생만이라도 제대로 놀아보려는 쾌락주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리고 이 ‘죽음’을 관통해야만 업의 이론은 의미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윤회의 이론적 배경이다. 이 점에서 ‘자업자득은 믿지만 윤회는 믿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죽으면 다 끝나는’ 단견론적 견해로 업의 이론에 대한 왜곡일 뿐이다. ‘죽어봐서’ 윤회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론적 배경 속에서 업과 윤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과학기술, 의학의 발달과 맞물려 이 죽음을 뒤로 미루는 장수(長壽)가 이루어졌을지언정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전의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 새로운 상황은 과학을 과신하게 한다. 군집 생활을 하며 매머드를 사냥하던 초기 인류나 지금의 인류가 본질적인 생로병사의 고(苦, suffering)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의학의 발달이 가져온 통증(pain)의 제거와 완화를 고의 제거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때 과학은 과신을 넘어 맹신으로까지 나아가며 과학적 잣대만 진리의 척도인 것으로 격상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수학이나 과학에서 필요한 증명(proof)만이 올바른 논리적 판단이 아님에도, 과학에 대한 과신은 다른 비(非)-과학적인 판단자들을 옳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믿음 · 신행 · 기원 등의 생활 척도를 부차적인 문제로 만드는 과학적 판단자에 대한 과신은 곧장 단견론의 끝판왕인 ‘돈이면 다 된다.’라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그리고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이어진다.

이런 시대정신을 배격 · 극복하기를 바라는, 즉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와 업과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적 세계관 사이에는 ‘점선’으로 이어진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

‘1인 2종교 사회’라고 강조할 수 있을 만큼 다종교사회인 한국의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에는 소수의 복음주의자가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를 들고 ‘깃발 페티쉬’를 선보인다. 바로 이들처럼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강조하는 자들이 바로 상주론자들이다. 불교의 교학은 고정불변하는 아뜨만(ātman), 즉 아(我)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브라흐만교를 비판하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는 연기법을 근간으로 탄생하였다. 과장하자면 불교 교학은 이 상견론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의 정교화를 이루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단견론자들과 불교적 중도를 실천하고자 하는 자들 사이에 공통 지점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믿음을 가진 ‘고정불변하는 자아(ego, soul)’ 등이 있다고 믿는 상견론자들 사이에서도 공통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공통 지점’에 대한 논의에 앞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부분은 아(我)를 비판하는 무아(無我) 이론을 강조하는 불교 교학 ‘밖의 풍경’이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인도에서는 전통적인 브라흐만교의 교학에 반기를 든 자유 사상가들인 리쉬(ŗṣi, 仙人)들의 활동기로, 이 일대 변혁기는 업과 윤회에 대한 각자의 견해에서부터 창조주인 브라흐만(brāhmaṇa)과 자아인 아뜨만에 대한 관계까지 자신의 이론을 자유롭게 개진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리쉬들은 전통적인 교리인 ‘진리의 말씀’이라는 《베다(Veda)》의 해석인 《우빠니샤드(Upaniṣad)》를 통해서 《베다》에 대한 자신들의 독특한 해석을 이루었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자신이 지은 것을 자신이 반드시 받느냐?’라는 문제였다. 달리 말해, 인과의 성립을 인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 사이의 격한 대립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 인과의 성립을 부정한 쪽은 인도 사상계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바로 그들이 제대로 된 논의마저도 남기지 못한 채, 오직 비판의 대상으로만 언급되고 있는 업을 부정하는 자인 로가야타(路迦耶陀, Lokāyata, 順世外道), 즉 짜르바까(Cārvāka)다. 전통적인 브라흐만교가 불교와 육사외도라는 외적 충격을 흡수하며 힌두교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불교는 동물 희생제 등을 배격하면서도 불에 대한 숭배를 용인하는 등의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이런 ‘안의 풍경’ 즉 인도 사상사가 아뜨만(ātman), 즉 고정불변한 속성을 가진 영혼 등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사였기 때문에 ‘밖의 풍경’은 논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밖의 풍경’이 아닌 ‘안의 풍경’ 가운데 정중앙에 있다.

이것은 정향적(正向的)인 중도를 ‘향한(toward)’ 실천행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극복의 테제로써 작동할 때, 현대의 단견론을 있게 한 과학적 세계관을 안티 테제로 상정하게 한다. 이 지점, 즉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A’라는 하나의 테제를 상정하고 그것을 부정 · 극복하는 것, 즉 ‘~A’가 오늘날 중도철학의 실천행이다. 그리고 이 실천행 또한 극단을 배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중도의 실천행이어야 마땅하다.

 

시대정신의 공통분모

-공동체의 선과 어머니 지구 가이아(Gaia)의 문제

‘윤회!’ 즉 이번 생의 이전이나 죽음 이후마저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인도 논리학은 증명이 필요한 과학적 세계관과 전제조건 자체가 다르다. 특히 ‘고통에서 벗어남’이라는 실천 테제를 중심으로 직조된 불교의 교학적 체계는 성인의 가르침마저도 진리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성언량(聖言量, āgama 또는 śabda)을 올바른 논리적 판단자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적 세계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함에도 당대의 한생, 즉 이번 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하여 아직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지적(知的) 경로는 같다. 이 지점에서 과학적 세계관의 발전은 전통적 교의인 연기법을 토대로 세계와 나를 해석하고자 하는 불교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자세로 세계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현생인류는 이전 인류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 《사피엔스》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특징을 갖춘 것은 직립보행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우연히 시작한 직립보행 이후, 산도(産道)가 줄어들어 신생아가 좁은 산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미발달한 뇌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공동체의 공동 육아 시스템 속에서 생존 정보를 습득하는 뇌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첫 한 걸음이 고유한 DNA에 따르는 다른 종들과 달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연을 개조할 수 있을 만큼 지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원시인류부터 공동체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을 물려받은 것이 현생인류로, ‘축의 시대(Axial Age)’를 관통하면서 다른 조건 속에서 정형화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공동체를 지향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우리가 어떤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이라는 것은 이미 선행한 여러 조건 속에서 각기 다른 변주를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사회의 양극단은 어디서 비롯된 문제인가?

어떤 사회든 이 세간인 이상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이것을 ‘상수’로 두고 그 해석의 ‘변수’를 통해 살펴볼 때, 즉 어떤 것이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가를 논할 때는 그 단면이 되는 지점을 어떤 자세로 파악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국사회 문제 진단을 위한 전제’는 지난 세기에 쌓인 압축 성장과 민주화에 대한 여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한 역사의 결과인 만큼 결코 퇴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압축의 시대’가 상징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긍정적인 자세로 찾아보면 될 것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의 상실이다. 이것은 ‘두레’라는 농촌의 공동체 정신이 해체된 이후,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이 초가집 지붕 갈기에서 아파트 평수 늘리기 쪽으로 간 이후, 즉 급속도의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된 이후 인간성(humanity)의 고양을 위한 인문학(humanities)이 한쪽으로 밀려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익명성 속에 숨은 자들의 민낯

인류를 인류답게 만든, 즉 자연을 개조할 수 있는 지적 활동의 산물인 ‘뇌의 발달’이 공동 육아라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조건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산업혁명이라는 대량생산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개개인을 공장 벨트 위의 부품처럼 취급하는 경향성은 극도로 강화되었다. 이 현상의 후발주자인 한국의 압축 성장은 세계의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초고속으로 진행된 만큼 그에 따른 개별화 현상도 극도로 심각해졌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터넷 악플이다. 파편화된 개인이 가진 익명성은 세계 최고의 초고속 인터넷망인 5G 시대에 성적 욕망을 비롯해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한다.

불교의 인과론, 즉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라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생각하면 익명성은 애초부터 존재할 틈이 없다. 비록 ‘들키지 않더라도’ 자기가 내뱉은 말이나 인터넷에 쓴 악성 댓글의 업력(業力)은 그것을 지은 자기 자신이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세태는 자신이 지은 일인 업을 죽음 이후까지 밀고 나가기는커녕 자신의 존재 가치마저도 사회적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경향성만 강화하고 있다. 사법적 위법 여부를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즉 법적 판단을 자신의 옳고 그름으로 파악하는 순간, 인간성(humanity)의 마지노선은 이미 임계점을 지나 인간(human) 존재에 대한 회의마저 품게 한다.

세계의 해석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를 가졌음에도 인간성의 고양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즉 익명성 속에 숨은 사회악에 대한 ‘공동의 대항 전선’은 도덕적 가치의 상실에 대항하는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회현상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문제로, ‘싸워야 할 외부의 적’을 찾지 못하면 자기들끼리 다시 편을 나누어 싸우려 한다.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자신의 내부 기준점에 찾으려 하지 않고 ‘밖의 적’을 통해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쟁교육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교육 시스템의 재정립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숙련공을 마련하기 위한 자본주의 교육의 탄생 배경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인류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문학(humanities)의 본래 목적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없어져야 더 편한 어머니 지구 가이아(Gaia)

또한, 자연의 정복자나 착취자인 인간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사는 인간으로서 우리 종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정복과 개발과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어머니 지구, ‘마더 가이아(Mother Gaia)’의 심각한 훼손, 파괴에서 비롯된 문제다.

전통적인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꽃을 피우는 씨앗과도 같은 직접적인 원인은 인(因)이고 땅, 물, 햇빛 등과 같은 간접적인 조건은 연(緣)으로, 이 둘이 모인 인연만이 생멸 등의 변화를 낳는다고 한다.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이 인연을 좀 더 확대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 관계까지 밀고 나가 인간 관계망까지 상호 간의 조건이 되는 ‘내가 곧 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곧 대승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보살 사상의 자비심으로 ‘중생에 대한 자애와 연민(Loving kindness and Compassion)’이다.

비록 이와 같은 조건의 변화를 강조하였을지라도 불교의 세계관은 삼계육도에서 ‘일생일식(一生一識)’, 즉 식(識)을 가진 유정의 전변만을 강조했을 뿐, 이것을 일체의 자연환경까지 확대하지 못했다. 이와 달리 자이나교에서는 식물에도 식이 있다는 주장을 하며 극도의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자이나교의 주장은 뿌리나 가지 나누기, 접목 등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식물들의 특징 때문에 일생일식의 이론에 어긋나는 단점이 있다. 이처럼 조건에 따른 주체의 무한 변화를 강조하는 인도 원류의 사상도 인류 생존의 기본이 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기본적인 물질들의 제한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전 시대가 낳은 모든 사유의 공통분모였다.

그렇지만 환경 재앙이라는 새로운 조건은 상상 그 너머의 것으로,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는 지구 온난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대기 오염, 미세 먼지 등 환경문제를 비롯한 자연재해나 기상 이변 등을 피해갈 수 없는 처지에 맞닥뜨려 있다.

학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한 필자는 교양 필수로 환경생태학을 배운 적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종은 어머니 지구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에 기생하는 충이라는 첫 시간의 충격이 아련하게 남아 있는데, 아직껏 이 ‘숙주와 기생충’이라는, 즉 ‘Host and Parasite’만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잘 설명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기와 물 등 자연이 주었던 무수한 ‘공짜’들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사실 제한된 것이었으며, 그 한계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 결과인 ‘지금 아파하는 어머니 지구’라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조건의 변화는 곧 우리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 변화에 탐욕, 욕망, 갈애 등 그 이름을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인간의 욕망 자체가 번뇌를 일으키는 첫 번째 독(毒)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불교 교학이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함 또한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는 ‘우리’는 소수이지 다수가 아니다.

이것이 이런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아들’들이 전 시대가 남긴 유산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고 ‘공동의 대항 전선’을 펼쳐야 하는 이유이다. 과학적 세계관을 따르는 이들이 직면한 우리 종의 생존 문제에 과학기술의 발달뿐만 아니라 ‘욕망의 절제’까지 밀고 나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은 중도의 실천행이다.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인식 주체에 따라 대상이 달리 해석되는, 즉 인식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일체유심조’의 유식학의 경론 어느 구석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이 인용은 실천하는 의사의 표본으로 유명한 이국종 전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을 롤 모델로 하였다는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 나오는 대사다. 김사부의 전체 대사는 다음과 같다.

“진짜 복수 같은 걸 하고 싶다면, 그들보다 나은 인간이 되거라. 분노 말고 실력으로 대갚음해줘.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복수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인간을 비롯해 어머니 지구를 대하는 자세부터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게 진짜 문제’이니 말이다.

 

나오며

 

유정(들이 추구하는 열반 적정이라는) 목적(을) 성취해 주는 힘은

믿음, 확고함, (정법에 대한) 환희심[喜], 그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捨]입니다.

(이 가운데) 믿음은 고(苦)의 두려움과

그것[선법]의 이익을 사유하는 것으로 생겨납니다.

— 졸역 《입보리행론》 〈제7 정진품〉[458. (7-31)]번 게송

 

요즘 옮기고 있는 책인 《입보리행론》의 이 게송에서는 정진력을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기뻐하는 자세와 이 길이 아닌 것들을 버릴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경론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교학불교, 불교와 뇌과학 · 사회학 · 서양 철학 등과 비교 연구하는 응용불교,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불교 등 불교의 세 가지 층위를 살아 있는 나무에 빗대고는 한다. 즉, 교학불교는 나무의 뿌리와 같고, 응용불교는 줄기와 가지, 그리고 실천불교는 이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와 같다는 식이다.

이와 같은 구분법을 통해 오늘날의 중도철학을 살펴보면, 먼저 그 뿌리의 허약함이 눈에 띈다. 이론적으로 정향적인 중도는커녕 정치적 중앙파와 구분도 못 하는데 올바른 실천행이 나올 리가 없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중도적인 삶은 언제나 지향적이어야 한다. 즉, 중도를 위한 무게 추의 이동, 그것이 곧 중도의 실천인 것이다.

다양한 세계관의 중첩 속에서 불교를 불교답게 하는 연기의 다른 이름인 중도는 곧 삶의 실천 테제이지만 교학불교의 허약한 뿌리는 연기 · 중도 · 공사상을 현실과 한 걸음 떨어진 죽어 있는 나무나 잿빛 이론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학의 과잉’ 시대에 ‘욕망의 절제’는 불교적 교리의 현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환경 대재앙을 앞둔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인류라는 종의 멸절을 위해서 모두가 공감해야 할 공통분모로, 바로 당대를 사는 우리가 지금 갖추어야 할 확고한 믿음이다.

도법 스님과의 중도를 주제로 한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은 항상 깨어 있는 지혜, 즉 공성의 지혜란 얼마나 구체적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대승의 근간인 자애와 연민이 관통되는 것이 곧 중도의 실천행으로, 이것이 곧 ‘게송 하나’에서 언급한 연기실상, 즉 공성을 체화하는 삶이라는 점이다. 각기 다른 조건 속에서 실천이란 진리가 구체적인 만큼 녹녹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지향성마저 잃어버릴 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자 하는 중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담장 너머’의 일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장면 1’의 그 ‘단박에 깨칠 수 있다.’라는 법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장면 2’의 결론은 아무래도 ‘왜 사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냐?’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 정도다. 이미 있는 어떤 문제, 바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실천, 그것이 바로 중도의 실천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

 

신상환
중관학당 대표.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 학사, 인도 비스바바라띠대학의 인도-티베트학과 티베트학 석사, 산스끄리뜨어 준석사 졸업. 콜카타대학의 빠알리어과에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타고르대학의 인도-티베트학과 조교수 역임. 귀국 후 중관학당을 열어 티베트 경전 한글 번역 등을 하고 있음. 주요 저서에 《용수의 사유》 등과, 역서로 용수의 《중론》 《회쟁론》 등 6대 저작 모음집인 《중관이취육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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