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두조의 대립과 갈등

옛날 설산에 공명(共命)이라는 새가 살았다. 머리는 두 개이나 몸뚱이는 하나로 붙은 양두조(兩頭鳥)였다. 흰 머리를 가진 쪽은 항상 몸을 생각해서 맛있고 좋은 과일을 골라먹었다. 그러나 검은 머리 쪽은 흰머리가 항상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못마땅했다.

‘어찌하여 자기만 항상 맛난 과일과 음식을 먹고 나는 먹지 못하는가!’

질투가 난 검은 머리는 독한 열매를 따먹었다. 그랬더니 온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았다.

이 비유는 《잡보장경(雜寶藏經)》 3권에 나오는 머리는 두 개지만 몸뚱이는 하나인 양두조 이야기다. 머리 둘 달린 새가 상징하는 것은 대립하고 갈등하는 중생들의 자화상이다. 사람들은 늘 나와 너를 구분하고, 대립하고 갈등한다. 그렇게 대립, 갈등하다가 같이 죽음의 길로 가는 인식과 태도를 불교에서는 ‘양변(兩邊)’이라고 한다. 양두조처럼 대립하는 극단적 사유 또는 이분법적 사유를 지칭하는 말이다.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담론은 신종 코로나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나타났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감염되었지만, 감염자는 차별의 표적이 되고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서방 언론은 오성홍기에 코로나바이러스를 그려 넣고 중국인들을 바이러스로 표현하거나, 황색경보라며 모든 동양인을 보균자로 취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한에서 철수한 교민을 특정 지역에 일시 격리하려 하자 지역민들은 중장비를 동원해 진입로를 막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불이중도와 존재의 전체성

공명조의 두 머리처럼 대립하고 갈등하는 양변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부자와 빈자, 남한과 북한 등 무수한 요소들이 양변으로 치환되어 대립각을 형성한다. 그러나 다양하게 나타나는 양변의 본질을 파고들면 ‘아상(我相)’, 즉 ‘나’라는 인식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집단과 집단의 양분이 원인 같아 보이지만 그 모든 대립의 근본은 나와 나 밖의 세상이라는 분별에서 출발한다.

나와 세상을 구분하는 인식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거나 타자와 단절된 독자적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용수 보살은 그런 허구적 인식을 ‘희론(戱論)’이라고 했다. 진실이 아닌 웃기는 소리 또는 헛소리라는 뜻이다. 중생은 그런 희론에 근거하여 나와 너를 분별하고 갈등하고 대립하며 살아간다.

부처님은 그런 희론이 만들어낸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중도(中道)’라는 양약을 처방하셨다.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신 초전법륜의 요체가 바로 중도 설법이다. 대승불교와 선종 역시 중도사상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지의와 법장은 불교 사상에서 가장 뛰어난 교학을 원교(圓敎)로 분류하고, 그 원교의 핵심이 중도사상이라고 했다.

중도는 대립하는 두 극단을 뛰어넘어 조화와 공존의 삶을 사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중도라고 하면 두 극단의 물리적 중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도는 대립하는 두 극단을 초월하는 것은 물론, 중간이라는 인식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모든 거짓 ‘상(相)’을 내려놓은 상태, 또는 ‘무심(無心)’의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모든 변견(邊見)의 핵심은 결국 나라는 인식인 아상에서 비롯되므로 그것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변견의 뿌리는 왜곡된 자의식, 허구적 아상이 근간이다. 그리고 아상의 핵심은 타자와 단절된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그런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아상은 희론이 되고 만다. 나는 타자들과 연결된 존재이며, 세계와 연결된 존재이며, 인드라의 그물처럼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은 양두조처럼 나와 너라는 대립하는 양변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개별성을 갖고 있으나 동시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승조(僧肇)는 “하늘과 땅은 한 뿌리이며(天地與我同根), 모든 존재는 나와 한 몸(萬物與我一體)”이라고 했다.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치를 부처님은 ‘연기(緣起)’라고 설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아라는 독자적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 매달린다. 그런 인식으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양변이 생겨나고, 나와 너라는 구별 짓기가 나타난다. 허구적 인식이 만들어낸 양변이라는 울타리가 게토(ghetto)처럼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다.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로 바라보면 공명조의 두 머리처럼 상대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하고, 마침내 어리석음의 독기로 인해 공멸의 길로 가게 된다.

머리로 대변되는 아상이 아니라 몸통으로 대변되는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보면, 오른쪽이 먹어도 사는 길이고 왼쪽이 먹어도 사는 길이다. 모두가 하나라는 안목을 가질 때 비로소 오른쪽도 왼쪽에게 양보할 줄 알고, 왼쪽도 오른쪽의 먹이활동을 존중할 수 있다. 여기서 나 중심의 아상은 해체되고 전체를 조망하는 넓은 안목이 열린다. 따라서 중도는 존재의 연기적 전체성을 깨닫는 지혜이며, 존재의 우주적 관계성을 성찰하는 지혜이다. 그런 지혜에 눈뜰 때 아상이 만들어낸 인식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고, 양변이라는 단절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언덕에 오를 수 있다.

쌍차쌍조와 자아의 울타리 넘기

모든 존재는 분절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에 존재의 실상을 ‘불이중도(不二中道)’라고 한다. 너는 나로 인해 있고,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하는 전체성을 체득하는 안목이 불이중도이다. 불이중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남을 고립시키는 아상이라는 울타리를 부셔야 한다. 아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지만 세상을 나누고 대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너로 구분 짓는 경계를 허물고 전체성을 실현하는 중도의 논리에 대해 지의(智顗)는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제시했다. 나와 너라는 분별적 인식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 ‘쌍차(雙遮)’이다. 나와 너라는 경계가 사라지면 전체성이 드러나므로 너와 내가 오롯하게 긍정된다. 그렇게 전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법장(法藏)은 중도를 ‘쌍민쌍존(雙泯雙存)’으로 설명했다. 너와 나라는 두 극단이 사라지면 너와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너와 내가 아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쌍지쌍관(雙止雙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나라는 생각을 멈추고, 너는 너라는 생각을 멈추는 동시적 멈춤이 ‘쌍지(雙止)’이다. 너와 나를 동시에 멈추면 그때 너는 나를 볼 수 있고, 나는 너를 볼 수 있는 동시적 조망이 ‘쌍관(雙觀)’이다.

이렇게 보면 중도의 시작은 아상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아상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우주와 연결된 전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중도의 길은 나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너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인식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인식의 감옥에서 해방될 때 우리는 우주적 넓이를 가진 존재로 거듭난다. 결국, 중도는 나와 너를 가르는 단절의 강을 넘어 전체성의 언덕에 오르는 것이며, 존재의 실상을 보는 걸림 없는 안목[觀自在]을 갖는 것이다.

중도는 난해하여 실현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모두가 우한을 탈출할 때 환자를 돌보기 위해 우한으로 달려간 의사들이 있었다. 간호사들은 진료에 진력하기 위해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랐다. 교민 철수를 위한 특별기가 편성되자 순번도 아니었던 베테랑 승무원들이 자원하여 날아갔다. 나만 살겠다고 아우성일 때 남을 배려하고, 자비의 마음으로 양보하고, 공존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중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2020년 3월

서재영(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